2004년 4월호

바람도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 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입력2004-03-30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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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은 찾아왔건만 백두대간 어귀마다 겨울이 숨어 있다. 눈 녹은 질퍽한 계곡을 어렵사리 뒤돌아서니 한 겨울에나 있을 법한 눈밭과 얼음절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계절이 거꾸로 가나? 100년 만에 3월 폭설이라니. 하얗게 눈 덮인 산중에 소나무가 더욱 푸르다.
    바람도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한국은 산림녹화의 모범국으로 불린다. 6·25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국토 위에 광활한 숲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은 제3세계에 조림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숲은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고 빈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우거진 숲은 있되, 가꿔진 삼림은 적기 때문일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해마다 식목일이면 국가적으로 나무를 심지만 삼림이 자원으로 활용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한국의 숲이 이른바 ‘녹색댐’의 기능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 단적인 예일 것이다.

    녹색댐이란 산림이 빗물을 저장했다가 서서히 흘려보내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숲이 녹색댐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홍수와 가뭄을 예방할 수 있고 나아가 수질까지 개선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혹자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한국은 여름철 집중호우가 잦기 때문에 녹색댐이 발달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는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주장이다. 집중호우가 녹색댐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녹색댐은 강수량보다 조림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즉 잘 가꾼 숲일수록 토양이 빗물을 많이 흡수하고, 나무가 수분을 적게 소비한다는 얘기다.

    백두대간을 걷다 보면 우리의 삼림이 침엽수 일색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생태계의 천이(遷移) 과정을 고려할 때, 시간이 갈수록 침엽수가 증가하는 건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지만 침엽수 일색의 숲이라도 가지치기와 간벌을 해주면 활엽수림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다. 활엽수가 침엽수보다 수분저장량이 많다는 점에서 조림사업이야말로 녹색댐을 만드는 지름길인 셈이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IMF 직후인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노숙자와 실업자 등 연인원 1000만여명을 삼림녹화 공공사업에 투입한 일이 있다. 당시 정부 고위 관계자는 고용문제와 환경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정책이라며 흥분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지속성이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산림은 녹색댐과는 너무나 먼 길을 가고 있다.

    2월21일 아침 6시30분. 촉촉이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수원역에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새벽부터 서두른 탓에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기차는 충북 옥천역에 정차해 있었다. 전라도의 지붕이 무주·진안·장수라면, 충청도의 지붕은 보은·옥천·영동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보은·옥천·영동을 가리켜 ‘충북 남도3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산지가 많고 백두대간이 지난다는 점에서는 전라도의 무진장과 닮았다.

    물한리 가는 길목에서



    오전 10시.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영동역에서 택시를 타고 대간에 붙기로 했다. 영동에서 황간쪽으로 10여분쯤 달리다 보면 도로 왼편으로 낯익은 터널이 하나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노근리 쌍굴다리다. 노근리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미군이 민간인 300여명(추정)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한 현장으로, 이 사건은 1994년 ‘말’지와 1999년 AP통신 보도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AP통신 보도 이후 미국은 2000년 18명의 자문위원단을 파견하기도 했는데, 사건의 전모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쌍굴다리에서 대곡면을 지나 상촌면으로 가는 길목 양옆으로 포도밭이 길게 이어졌다. 평야가 많지 않은 영동지방에서 과수농업은 중요한 생계수단이다. 경작지의 80%가 과수원이고, 이 가운데 포도 재배 농원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 때문에 최근 영동지역의 민심은 흉흉하다. FTA 협정이 타결되면서 포도농가의 미래가 불투명해진 탓이다. FTA 얘기가 나오자 포도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택시기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먹고 살 게 없어요. 영동포도가 품질이 좋다지만 기껏해야 두세 달 먹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칠레산 포도는 저장성이 뛰어나 1년 내내 출하된다는군요. 도시 사람들은 FTA를 찬성한다고 하는데, 농민도 먹고 살 길을 만들어줘야 할 거 아닙니까.”

    농민들이 들으면 속상할 일이지만, 영동의 과수원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특히 복숭아 농장이 일품인데, 초여름 이곳을 지나노라면 마치 꿈속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바람에 복숭아 꽃잎이 날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과수원을 거닐다 보면 자연스럽게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명작 ‘夢(몽)’이 떠오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필자는 이제 그런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 같다. FTA의 상처를 모른다면 모를까, 농민의 멍든 마음을 알고서야 어찌 한가롭게 영동의 복숭아밭을 드나들 수 있을 것인가.

    택시가 상촌면 시내로 들어섰다. 5일장이 서는 날이라 그런지 가뜩이나 좁은 길이 북적거렸다. 이곳 상촌면은 이정향 감독의 영화 ‘집으로’가 촬영된 현장으로 유명하다. 2002년 개봉돼 전국적으로 ‘할머니 열풍’을 일으켰던 이 영화에서 상촌면의 5일장 모습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벙어리 할머니가 철부지 손자에게 운동화와 자장면을 사주면서 자신은 물만 마시는 장면, 할머니가 구멍가게의 병든 친구를 찾아가 초코파이를 산 뒤 산나물을 내놓는 장면, 할머니가 손자만 버스에 태워 보내고 먼지 날리는 시골길을 혼자서 걸어오는 장면….

    물한리 계곡에서 아침을 먹으려 했으나 문을 연 식당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구멍가게를 찾아가니 주인장이 콩을 섞은 밥과 김치로 아침을 차려냈다. “산에서 점심을 드셔야 할 것 같구만” 하며 점심도시락까지 챙겨주었다. 두 끼 비용이 고작 2000원. 더 내고 싶었지만 주인은 받지 않겠다고 버텼다. 필자가 고마움을 표하며 “주말인 데도 사람이 없네요?”라고 묻자, 주인 아저씨는 “장사가 안 되는 건 걱정이지만, 우리 동네 산(민주지산)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산도 좀 쉬어가면서 살아야죠”라고 대꾸했다.

    물한리에서 삼도봉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로는 눈이 모두 녹아 질퍽했으나, 계곡은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이 코스는 길이 넓고 경사가 완만해서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얼마 전부터 이곳에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도봉 안부에서 숨을 고르며 3주 전 빼재-삼도봉 구간을 함께 타다가 이곳에서 헤어진 부산아저씨를 떠올렸다. 그는 본래 산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찾아간 지리산 산장에서 산꾼들의 무용담을 듣다가 갑자기 우리나라의 높은 산을 모두 밟아보고 싶은 객기가 발동해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다고 말했었다.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면 무슨 일이든 자신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프 승용차도 새로 장만했다고 했다. 그런 열정이라면, 산속에서 용기 이상의 그 무엇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도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삼도봉에서 1123m봉으로 가는 코스는 아담한 오솔길이다. 갈대와 철쭉, 잡목더미와 싸리나무 덩굴을 차례로 지나야 한다. 눈이 쌓였더라면 꽤나 고생스런 구간이었겠지만, 이미 눈은 녹은 상태라 산악마라톤을 하듯이 가볍게 뛰어갈 수 있었다. 1123m봉 앞에서 하늘이 갑자기 시커멓게 변하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필자는 비구름과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방수용 파카와 배낭 커버로 중무장을 하면 비가 그치고, 옷을 벗고 단출하게 차림을 바꾸면 비가 쏟아졌다.

    밀목재를 지나면서부터는 눈이 녹지 않은 응달이 나타났다. 같은 산속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눈이 많았다. 필자는 앞서 간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발자국에 발을 맞추며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지뢰가 없는 안전지대만 밟으며 적진으로 침투하는 군인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눈길을 통과하자 이번엔 가파른 오르막이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20여분을 씨름하고 나서야 1175m봉에 올라섰다. 흐린 날씨 탓에 조망은 신통치 않았으나, 연신 얼굴을 때리는 상큼한 비바람이 나그네의 피로를 깨끗이 풀어주었다.

    1175m봉에서 화주봉(1207m)으로 가려면 가파른 내리막을 통과해야 한다. 백두대간 안내책자에는 이곳이 ‘위험지대’로 표시돼 있는데, 경사가 워낙 급해 밧줄을 타고 내려서야 한다. 밧줄에 몸을 의지한 채 한 발짝씩 아래로 내딛다가 어딘가 모르게 밧줄이 불안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밧줄을 놓고 팔과 다리를 모두 쓰는 삼지법으로 기어서 바위틈을 빠져나왔다. 눈이 거의 녹았기에 망정이지 한겨울이었다면 빙판 때문에 단단히 고생했을 터였다. 화주봉으로 가는 길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도계로 편안한 능선이다. 화주봉 정상에 이르자 40대 초반의 산꾼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산악회 사람들과 함께 새벽부터 대간을 탔는데, 선두에서 달리다 꼴찌로 처졌다고 했다. 길을 잘못 들어 헛걸음을 한 탓이다. 세상이치가 그렇듯이 헛수고를 하면 기운이 빠지게 마련이다.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산악회의 선두를 이끌었을 그였으나, 지친 산꾼은 천천히 걷는 필자를 따라잡기에 바빴다.

    雨中山行에 大醉하다

    화주봉에서 1시간 정도 걸어가니 우두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두령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먼저 도착한 산악회 대원 1명이 서울아저씨를 찾기 위해 대간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오후 3시30분. 충북 영동군 상촌면과 경북 김천시 구성면의 경계인 우두령 정상에 섰다. 우두령 고개에서 잠시 산행을 계속할 것인가 말것인가 고민하다가 걸음을 멈추기로 했다. 오후 3시에 시작된 한일전 축구경기를 보고 싶어서였다. 산악회 사람들의 배려로 면소재지까지 관광버스를 타고 나와 허름한 다방의 TV 앞에 앉았다. 소주의 유혹도, 서울행 차편도 모두 마다하고 축구경기에 집중했다. 0대2. 한국은 후반에만 두 골을 먹고 완패했다.

    밤새 비가 내렸다. 필자는 상촌면의 하나뿐인 여인숙에 묵었는데 조립식으로 지은 건물이라서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새벽녘엔 천둥까지 치는 바람에 잠을 청하지 못했다. 잠을 자지 못할 바엔 걷는 게 낫겠다 싶어 해가 뜨기도 전에 택시를 타고 우두령으로 향했다. 랜턴을 비추며 절개지를 오르는데 진흙이 자꾸 흘러내려왔다. 스틱을 꺼내 짚어보았지만 빗줄기가 워낙 거세 별 효과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표지마저 드물어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애를 먹었다.

    바람도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화주봉-우두령 능선에서 바라본 운해.

    능선으로 올라서자 비로소 대간의 윤곽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빗줄기는 더 강해졌지만, 몸속은 한결 시원해졌다. 가쁜 숨을 토해내고 고갯마루에 올라 찬바람을 맞는 기분은 뭐라 형언할 길이 없다. 이 맛에 산꾼들이 산을 오르는지도 모른다. 동쪽 하늘로부터 점차 날이 밝아오면서 대간의 좌우로 구름과 안개가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냈다. 디지털카메라에 이 광경을 담아보려 했지만 빛이 부족한 탓인지 시커멓게 찍혀 나왔다. 기계가 아니라면 눈에라도 저장할 수밖에. 필자는 한동안 하늘과 산이 맞닿은 곳을 응시하며 밤과 낮이 뒤바뀌는 순간을 감상했다.

    1030m봉에 올라서기 무섭게 대간은 오른쪽으로 크게 휘돌았다. 여기서부터는 사방에서 새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에 듣는 새 소리만큼 경쾌한 선율이 또 있을까. 그 소리에 맞춰 발걸음을 떼는데 왼편 갈대숲에서 푸드덕 하는 소리와 함께 10여 마리의 꿩이 날아올랐다. 아마도 아침잠을 자다가 필자의 발소리에 놀란 모양이었다. 갈대숲 주변을 맴도는 꿩들을 바라보며 잠시 쉬는데 대간의 좌우에 포진한 구름이 장관을 이루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불과 1~2분 사이에 색다른 풍경화가 펼쳐졌다.

    구름이 걷히면서 대간은 황악산(黃岳山·1111m)길로 접어들었다. 보통 산 이름에 악(岳)자가 들어가면 험난한 코스가 많은데, 황악산은 예외다. 산세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어서 부담없이 오를 수 있다. 이 때문에 산꾼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지만, 천년 고찰 직지사가 있어 불자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다. 황악산에서 한껏 솟구쳐 오른 대간은 백운봉과 운수봉을 지나면서 급격히 고도를 낮춘다. 간밤의 비에 흠뻑 젖은 산길은 진흙범벅이었다. 조심조심 내려가는 데도 몇 미터씩 미끄럼을 타곤 했다. 다소 따분할 수 있는 코스였지만, 이곳에도 필자를 즐겁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바로 빗물을 머금은 소나무가 뿜어내는 진한 향내와 산허리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한껏 멋을 부리는 안개였다. 채마밭과 철조망 지대를 통과해 977번 도로 위로 내려섰다. 이곳이 충북 영동군 매곡면과 경북 김천시 대항면의 경계선인 궤방령이다. 멀리 황악산 쪽을 바라보니 또다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직지사 천불전 앞에서

    2월28일 새벽. 수원에서 경부선 열차를 타고 달리다 김천에서 내렸다. 이번 산행에는 필자의 대학후배 한 명이 동참했다. 우리는 산을 타기에 앞서 직지사로 향했다. 지난번 산행 때 황악산을 지나면서 직지사를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다. 직지사는 전통적으로 불교세가 강한 경북지역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찰이다. ‘직지’라는 이름은 일찍이 고구려 선교사 아도화상이 절을 창건하면서 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고려 태조 때 능여대사가 절을 확장하면서 손으로 측량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직지사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비로전이다. 직지사의 여러 암자 가운데 임진왜란의 봉변을 피한 유일한 건물로 1000개의 불상이 조성돼 있다고 해서 천불전으로도 불린다. 1000개의 불상은 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데, 고려 초기 경잠대사가 경주 남산의 옥돌로 16년간 빚었다고 한다. 불상 중에는 알몸인 불상이 하나 있는데, 불자들 사이에서는 ‘법당에 들어서자마자 이 불상을 발견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퍼져 있다. 비로전 건물 뒤편의 대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소리와 비로전 옆쪽에서 지붕을 걸치고 바라보는 황악산 전경은 직지사의 숨은 매력이다.

    직지사에 들른다면 사명각도 한번 둘러볼 것을 권한다. 이곳에는 사명당의 영탱(영정으로 된 탱화)이 봉안돼 있는데, 그림 속의 동자승이 칼을 들고 있는 모습에서 사명당의 독특한 행적을 엿볼 수 있다. 사명당은 154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5세 때 황악산 아래에서 수학한 뒤 직지사로 출가했는데,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해 싸운 일 외에도 일본으로 건너가 포로 300여명을 데리고 귀국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 사건을 두고 백성들은 사명당이 일본 땅에서 도술을 선보였다고 믿었는데, 사명각의 외벽 그림 또한 사명당의 일본행차를 신비롭게 묘사하고 있다. 이밖에 보물로 지정돼 있는 대웅전의 석가모니 후불탱화 등 3폭의 불화와 비로전 앞 3층 석탑도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직지사에서 곧바로 궤방령을 오를 생각이었지만, 차편이 없어서 30여분을 걸어 내려와서 택시를 탔다. 택시로 이동하는 동안 날씨가 심상치 않더니 급기야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또 다시 우중산행이다. 비를 의식해 빨리 걷다 보니 어느새 주능선에 올랐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크게 꺾어들자 넓은 공터가 보였다. 여기가 바로 가성산이다. 좌우로 점처럼 촘촘히 박혀 있는 김천과 영동의 산골마을을 내려다보며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가성산에서 장군봉까지는 깊숙이 내려갔다가 급하게 올라서는 코스인데, 내리막 능선으로는 옛날 지게꾼들이 걸었을 법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장군봉에서 눌의산으로 가는 길도 시원한 솔바람 덕분에 편하게 내칠 수 있었다. 다만 비가 내린 탓에 기온이 크게 떨어져 움직이지 않고 조금만 서 있어도 몸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눌의산 정상에 도착하자 북쪽으로 경부선 철도와 경부고속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 바로 추풍령이다. 눌의산에서 추풍령으로 가는 내리막길에서는 수차례나 미끄럼을 탔다. 이 때문에 애꿎은 나뭇가지들이 수난을 겪었다.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전진했지만, 눈과 비가 뒤섞인 터라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바람도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직지사 천불전 처마 사이로 바라본 황악산.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이 커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앞에 경부고속도로가 나타났다. 1970년 건설된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이자 국토의 대동맥으로 불리는 경부고속도로. 백두대간은 88올림픽고속도로를 우회하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터널) 위를 건넌 데 이어 세 번째로 경부고속도로의 땅 밑을 지난다. 고속도로 다음은 경부선 철도. 1905년 일제가 건설한 이 철도는 지난 100년간 한민족의 한많은 사연을 실어 날랐다. 징용과 학병 그리고 이촌향도와 귀성인파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람치고 경부선 열차에 얽힌 추억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철도 건널목을 지나 4번 국도에서 오른쪽 김천 방면으로 200여m를 걸어가면 추풍령 표석이 나온다. 88서울올림픽 성화봉송을 기념해 만든 돌 위에는 가수 남상규의 그 유명한 노랫가락이 새겨져 있다.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는/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구름이 정말 쉬어가는 모양인지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3월4일과 5일. 충청권에는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많은 눈이었다. 이 바람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처음으로 고립되는가 하면 경부선에서는 새마을호 탈선사고가 발생했다. 필자는 ‘경칩(5일)에 눈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는 농가의 속설을 위안 삼으며, 7일 아침 눈폭풍의 현장으로 갔다. 1주일 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추풍령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았다. 봄이 코앞까지 왔다가 동장군에게 한 방 크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한겨울을 방불케 할 만큼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추풍령에서 금산(384m)으로 가기 위해서는 추풍령 건너편 포도밭마을을 지나야 한다. 필자는 식당주인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한참 따라갔다가 되돌아 나왔다. 30분이나 허비하고 올라선 금산의 몰골은 형언할 수 없는 슬픔 그 자체였다. 채석장 때문에 산의 반쪽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는데 어찌나 흉측한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토사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물과 밧줄로 얽어놓은 모양은 팔다리가 잘려나간 부상병보다도 더 참혹해 보였다.

    금산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왼편으로 내려다보이는 추풍령은 마을 전체가 눈 속에 잠긴 듯 고요했다.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추풍령 저수지도 흰 눈과 대비돼 푸른 빛깔을 더욱 곱게 드러냈다. 채석장만 아니었다면 풍류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명소였겠지만, 발밑의 낭떠러지는 산꾼의 여흥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바로 그 순간에도 화물차는 드나들었고, 돌 캐는 소리도 멈추지 않았다. 그제야 덕유산에서 만난 대전아저씨가 “추풍령쯤 가면 이 땅이 슬퍼질 것”이라고 말한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착잡한 심정을 달래며 금산을 떠나 502m봉으로 가는 길에 백두대간을 역으로 종주하는 10여명의 일행을 만났다. 설악산에서 출발한 그들은 올 여름쯤 지리산에 도착할 거라고 했다. 눈이 많은 산길에서 마주보며 걷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서로 갈 길을 가면서 상대방에게 ‘러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눈구덩이에 발을 담그며 편안하게 502m봉을 지나 435m봉으로 내칠 수 있었다.

    겨울산에서 자주 느끼는 점이지만 눈과 소나무는 정말 궁합이 잘 맞는다. 서로가 있기에 더욱 빛이 난다고 할까. 소나무가 아니었다면 눈덩이가 어찌 그리 눈부실 것이며, 눈이 아니었다면 소나무가 무슨 수로 겨울산에서 위엄을 뽐낼 수 있을 것인가. 묘함산 중계소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시멘트 포장길을 내려서면 작점고개가 나온다. 원래 이곳은 충북 사람들이 경상도 땅에 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여덟마지기고개라고 불렀는데, 최근엔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인근 작점마을의 이름을 따서 ‘작점고개’라 부른다고 한다. 작점고개 위로는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의 4번 국도와 경북 상주의 3번 국도를 연결하는 지방도가 지난다.

    변해버린 산촌 마을 사람들

    고갯마루에서 지도를 펴놓고 다음 산행코스를 살피는데 추풍령 쪽으로 넘어가던 2t 트럭이 차를 세우고는 필자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추풍령에서 태어나 추풍령에서 살아왔다는 아저씨의 짧은 설명에서 변해가는 산촌 마을의 세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에 골프장이 들어설 예정인데, 몇 년 전 같으면 반대도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IMF 사태 터지고 온 동네가 빚더미에 앉고 나니까 보상금을 조금만 얹어줘도 다 팔겠다고 합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이 통과돼, 추풍령 골프장도 백두대간의 200m 바깥에 건설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법률이 조금만 더 일찍 생겼더라면 금산도 반쪽으로 쪼개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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