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호

“여자들은 모르는 여자의 행복 매일 느껴요”

트랜스젠더 연예인 최한빛

  • 최호열 기자 | honeypapa@donga.com

    입력2014-04-23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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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 여자였고, 지금은 더 완전한 여성 됐을 뿐
    • 19금 영화 출연 “베드신요? 기대해도 좋을 만큼”
    • 남자무용수에서 잘렸다 수술 후 여주인공 꿰차
    • 아버지 “아들이든 딸이든 너는 내 자식” 성전환 받아들여
    “여자들은 모르는 여자의 행복 매일 느껴요”
    문이 열리고, 최한빛(27)이 들어서는 순간, 숨이 탁 멎었다. 180cm의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가 감탄을 자아냈다. 괜히 ‘슈퍼모델’이 아닌 모양이다. 카메라 앵글을 통해 본 얼굴도 매력적이다. 축복받은 외모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를 건네기 전까지는.

    외모와 달리 중성적인 목소리가 그가 트랜스젠더(성전환자)임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었는데 의학적 힘을 빌려 여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제2의 하리수’인 셈이다. 그동안 취재차 만난 트랜스젠더 대부분은 화장을 짙게 하고 섹시한 의상을 입어도 ‘딱 봐도’ 남자였다. 그런데 그에게선 남성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따지고 보면 이 정도 중성적인 목소리는 여성 중에도 많다.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았다. 틈틈이 손으로 짧은 치마를 끌어내리고,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서 앉고, 상체를 숙일 때면 자연스럽게 한쪽 손을 가슴골 쪽으로 가져가는 게 ‘여성’의 모습 그대로다. 서울 청담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최한빛은 그렇게 시작부터 기자를 혼란스럽게 했다.

    “중국에서 사흘 전 돌아왔어요. 한 달 동안 중국 대도시 클럽을 돌며 공연을 했거든요. 디제잉(DJing)도 하고, 춤과 노래를 곁들인 퍼포먼스도 하고….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 영화도 찍었죠?



    “19금 섹시코미디예요. 트랜스젠더가 아닌 그냥 여자로 나와 제겐 의미가 큰 영화죠. 저도 벗느냐고요? 조금요. 노출은, 기대해도 좋을 만큼.(웃음) 솔직히 전 베드신을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굉장히 어색하고 어렵더라고요.”

    ▼ 새로운 작품이 결정된 게 있나요.

    “이야기 중인 드라마가 있어요. 방송이나 공연이 없어도 늘 바빠요. 대학원 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틈틈이 패션쇼 무대도 서고, 대학 후배들과 무용 공연도 하고, 학생들 레슨도 하고요.”

    ▼ 아무 일정이 없을 때는 뭐하며 지내나요.

    “2, 3일 쉬는 날이 생기면 엄마랑 있고 싶어서 부모님 집에 가요. 그렇지 않을 때는 친구 만나요.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걸 싫어해 늘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해요. 그래서 친구가 많아요. 중고등학교 친구부터 무용하는 친구, 모델 친구, 방송하면서 만난 친구까지.”

    핫팬츠에 핑크색 가방

    그는 “어려서부터 강릉에서 알아주는 예쁜 아이였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노란색, 핑크색 같은 예쁜 물건을 좋아하고, 로봇이나 자동차보다는 바비인형 가지고 노는 걸 좋아했어요. 아양도 잘 떨고요.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면 기분이 좋은데, 잘생겼다고 하면 칭찬이란 느낌이 안 들었어요. 거리감이 들었던 것 같아요.”

    ▼ 언니들 영향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언니들과는 터울이 많이 져서 인형놀이를 하면서 놀아주지는 않았어요.”

    ▼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쯤 되면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걸 알게 마련인데.

    “그때부터 내가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걸 느꼈죠. 그래서 밤마다 기도했어요. ‘하나님, 오늘 이렇게 착한 일 많이 했으니 제 몸으로 바꿔주세요’ 하고.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거고, 내일 아침이면 다시 여자로 돌아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자신의 성격을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사람이 성격은 바뀔 수 있어도 성향이 바뀌지는 않잖아요. 부모님이 제 성격을 고쳐보려고 태권도장을 보냈어요. 겨루기시합에 나갔는데, 내가 때린 애가 우는 거예요. 그 순간 너무 혼란이 왔어요. 나 때문에 우니까 내가 잘못한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맞기만 했어요. 그러다 울곤 했죠. 엄마가 ‘왜 너는 안 때리고 맞기만 하냐’고 해서 ‘내가 때리면 쟤가 울잖아’ 그랬대요. 누굴 때리거나 하는 성격이 못 돼요. 싸움이 나면 눈물부터 나요.”

    “여자들은 모르는 여자의 행복 매일 느껴요”
    ▼ 중학교 땐 어땠나요.

    “지금도 제일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에요. 남자중학교를 다녔는데, 전교에서 유명했어요. 입학식 날, 핫팬츠에 핑크색 가방을 메고 갔으니까. 게다가 단발머리에 실핀까지 꽂았으니 ‘쟨 뭐야’ 했겠죠. 그래도 다들 절 예뻐했어요.”

    ▼ ‘계집애 같다’고 괴롭히는 아이들도 있었을 텐데.

    “있었죠. 저를 정말 괴롭히는 애도 있었고, 저를 위해 그 애랑 싸워준 친구도 있었어요. 대부분 제 취향을 인정해주고, 잘 대해줬어요.”

    ‘내가 더 예쁘게 잘 출 수 있는데’

    “여자들은 모르는 여자의 행복 매일 느껴요”

    최한빛은 “난 한번도 남자였던 적이 없다. 항상 여자였고, 지금은 더 완전한 여성이 됐을 뿐”이라고 말한다.

    ▼ 덕원예고 무용과를 나왔는데, 강릉에서 서울로 온 이유가 있나요.

    “어릴 때부터 꿈이 무대에 서는 것이었어요. 그렇다고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건 아니었어요. 춤을 추든, 노래를 하든 무대에 서는 게 목표였어요. 지금도 카메라 앞에 서는 것보다는 무대 위에서 뭘 할 때가 더 행복해요.”

    ▼ 무용을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 반응은 어땠나요.

    “아빠는 안 그래도 계집애 같은데 무용까지 하면 더 여성스러워질 것 같다며 반대했죠. 하지만 엄마는 항상 저의 전폭적인 지원군이었어요. 지금까지 엄마아빠 말을 잘 들었고 실망시킨 적이 없으니 금세 승낙을 받았죠.”

    춤이 좋아서 들어간 예고였지만, 그는 무척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주위에 제가 여자처럼 행동하는 걸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게 제 복인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었죠. 그런데 고등학교는 그렇지 않았어요. 난 남자가 아닌데 남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어요. 여자애들이 예쁜 치마 입고 춤추는 걸 보며 ‘내가 쟤들보다 훨씬 더 예쁘게 잘 출 수 있는데 나는 왜 할 수 없는 거지’ 하는 슬픔뿐이었어요. 애들이 다 돌아간 후 무용실에 혼자 남아 울곤 했어요. 그러다 치마를 꺼내 입고 혼자 거울 보며 춤을 췄어요.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그러면서 점점 춤에 의지하게 됐죠.”

    ▼ 선생님에게 ‘나도 여자애들과 같은 춤을 추고 싶다’고 말하면 되지 않았나요.

    “커밍아웃을 할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었죠. 참고 버텨야 한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렇다고 남자 역할을 하며 살 수는 없을 것 같고…. 너무 힘들었죠.”

    ▼ 그때는 성전환을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네요.

    “내가 여자로 살아야 하나, 남자로 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보다는 오직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과에 입학하는 게 목표였어요. 그 학교 공연을 보고 완전 반했거든요. 거기만 들어가면 행복할 줄 알았죠. 춤만 추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 2006년, 그토록 원하던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는데.

    “입학하자마자 남자들은 다 웃옷을 벗으라고 하는데,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공연할 때 남자무용수들은 웃옷을 벗고 할 때가 있거든요. 이게 아닌데 싶었죠. 더 큰 스트레스는 남자무용수 역할이었어요. 제가 키가 큰 편이지만 여자들도 보통 170cm가 넘어요. 몸무게는 별 차이도 없고요. 그런 여자애를 들고 돌리고 앉히는 걸 시키는 거예요. 거기서 완전히 멘붕(멘탈 붕괴)이 온 거죠. 힘이 달려 제대로 못 하니까 공연에서 빼더군요.”

    ‘나 이런데 군대 가도 돼요?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되었다는 좌절감에 방황하던 그는 문득 ‘나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는 이렇게 힘든데 그들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여름, 난생처음 트랜스젠더들을 만나러 이태원을 찾았다.

    “트랜스젠더들이 일하는 유흥주점에 갔어요. 다들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근육이 울퉁불퉁한 사람도, 수염 난 사람도 있는 거예요. 그들을 보며 ‘저런 사람도 자기 삶을 살겠다고 여기 나와 있는데 난 지금까지 한 번도 나를 찾으려고 노력해보지도 않고 원망만 했구나, 현실과 부딪치려 하기보다는 자꾸 다른 것에 기대려고만 했구나’ 하는 걸 깨달았어요.”

    ▼ 그 무렵 성전환을 고민했나봐요.

    “나도 하리수 언니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게 너무 두려웠어요. 그런데 거기서 동갑내기와 이야기하게 됐어요. 성을 전환하는 게 고민이 안 되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한 번도 고민해본 적이 없다고 너무나 확고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부모님이 반대하더라도 하나뿐인 내 인생, 진짜 나로 살아야지 않겠느냐고요. 그때 머릿속이 완전 환해지는 기분이었어요. 바로 그날 결심하고 엄마에게 전화했죠.”

    ▼ 성 정체성이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단순히 여장남자처럼 여성적 취향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여장남자는 어쨌든 성 정체성이 남자잖아요. 그랬다면 20년 동안 그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았겠죠. 성적 취향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예요.”

    ▼ 이태원 갔다 온 이후 치마도 입고 완전 여자처럼 하고 다닌 건가요.

    “전에는 그냥 유니섹스 스타일로 다녔죠. 여자처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했어요. 내가 여자니까요. 이태원을 다녀온 후 처음 치마를 입어봤는데,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아시죠? 왜 그런지.(웃음) 그다음부터는 수술할 때까지 안 입었어요. 아, 한번 있다. 병무청 갈 때.”

    ▼ 병무청은 왜.

    “공연에서 잘린 뒤 좌절감에 입대 신청을 했어요. 제가 진짜 가야 할 길을 찾고는 무작정 병무청을 찾아갔죠. 긴 머리에 치마까지 입은 사람이 입영 영장을 보여주며 ‘나 이런 사람인데 군대 가도 돼요?’ 하니까 직원들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땐 정말 당돌했어요. 그 자리에서 면제처분을 해주더군요.”

    “사랑한다, 내 셋째 딸”

    ▼ 부모에게 처음 ‘커밍아웃’했을 때 반응이 어땠나요.

    “엄마는 제 성향을 알면서도 계속 아닐 거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며 살았대요. 그러다 우려가 현실이 되니 ‘올게 왔구나’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상당히 힘들어하셨죠. 아빠는 처음엔 ‘절대 안 된다, 정신 차려라’고 반대하셨어요.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혼자 가슴앓이를 하면서 참고 살았다. 참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더는 안 되겠다, 진정한 나로 살고 싶다. 행복을 찾고 싶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그냥 살기도 힘든 이 험한 세상을 트랜스젠더로 살 수 있겠느냐’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저를 걱정하시는 게 더 미안했어요.”

    ▼ 적어도 미친놈 취급은 안 받은 거네요.

    “아빠는 저를 너무 사랑하세요. 그때 아빠에게 약속했어요.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겠다고. 아빠도 ‘음지에 숨어 살지 말고 당당하게 하고 싶은 일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허락을 하시고도 계속 힘들어하셨죠. 밤마다 아빠는 술 드시고, 엄마는 울고, 그걸 보는 내 가슴도 아프고…. 우울증이 심하게 왔어요. 하루 종일 방 안에 처박혀 울기만 했어요. 아빠가 들어오시더니 제 손을 잡으면서 ‘네가 아들이든 딸이든 둘도 없는 내 자식이다’라고 하시고는 꼭 안아주면서 ‘사랑한다. 내 셋째 딸’ 하시더라고요. 제가 세상에 더 당당할 수 있는 건 이런 부모님 덕분일 거예요. 부모님에게 사랑스러운 딸이니까요.”

    그해 12월 수술대에 올랐다. 7시간 넘게 걸린 큰 수술이었다고 한다. 수술 후 4, 5일 동안은 고통이 너무 심해 계속 마취제를 맞아야 했고, 한 달 동안 누워만 있었다고 하니 그 고통이 조금은 상상이 된다.

    ▼ 성기를 바꾸는 수술을 할 때 가슴 수술도 같이 하나요.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요. 가슴 없는 여자도 많잖아요. 다른 트랜스젠더들은 수술 전후로 호르몬치료를 한다는데, 전 별로 안 했어요. 털도 잘 안 나고, 근육도 별로 없고…. 원래 남성호르몬이 적고 여성호르몬이 많았어요.”

    ▼ 수술실에 들어갈 때 두렵지는 않았나요.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수술이고, 실제 죽은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한다고 해도 부모님께 딸로 인정받았으니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 수술 후 나왔을 때의 기분은 어땠나요.

    “울면서 들어갔다 웃으면서 나왔어요. 너무 행복해서. 그 마음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죠. 그런데 솔직히 너무 아팠어요. 진짜 죽을 만큼 아파요. 그 고통을 아는 지금, 수술을 다시 하라고 하면 엄청 끔찍할 거예요. 그래도 할 거예요. 어쨌든 제대로 된 내 삶을 살아야 하니까요.”

    여자라서 모든 게 행복

    ▼ 법적으로도 성별이 바뀌었나요.

    “하리수 언니가 길을 잘 터놔서 비교적 쉽게 변경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까다로워요. 수술자료, 정신과 의사 3명의 진단서, 부모님 동의서를 받아야 하고, 지인 10명으로부터 ‘이 사람은 여성임을 증명한다’는 소견서를 그 사람들 주민등록등본과 함께 제출해야 해요. 초·중·고 생활기록부도 봐요. 신용불량자나 전과기록이 있으면 안 되고요. 마지막으로 판사가 외모를 봐요. 여기서 퇴짜를 맞은 사람도 있어요.”

    ▼ 판사가 외모를 보고 주관적으로 판단한다니 논란이 있을 수 있겠네요.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어요. 예를 들어 누가 봐도 외모가 남자인데 성전환 수술을 했으니 여성으로 인정해달라고 하면 솔직히 전 판단이 안 서요. 실제로 얼마 전에 여탕에 남자가 들어갔다가 붙잡혔다는 기사가 실렸어요. 그 사람은 성전환수술까지 한 트랜스젠더였어요. 그런데 외모가 누가 봐도 남자예요. 법원에서 성별 변경이 기각돼 법적으로 남자여서 처벌을 받았어요. 본인은 억울하겠죠. 외모에 대한 편견이고, 행복추구권을 막는 것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혼란을 줄 수 있고, 특히 다른 여성에게 위협을 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 같아요.”

    ▼ 수술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자신감이 백배로 붙었죠. 수술 전엔 공연에서 잘렸는데 수술 후에는 오디션을 통해 제가 여자주인공이 됐어요. 기가 막힌 반전 아닌가요? 그때 ‘내가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 주위 반응은 어땠나요.

    “똑같았어요. 성격도, 스타일도 달라진 게 없으니까요. 춤 연습을 할 때 남자 줄에서 여자 줄로 옮겨간 것 외에는.”

    ▼ 수술 후 연애도 해봤나요.

    “당연히 했죠. 연애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고.”

    “부담스러워 옷 입힐 수 없다”

    “여자들은 모르는 여자의 행복 매일 느껴요”

    최한빛은 지난 겨울 메디컬 뮤지컬 ‘루나틱’에 출연했다.

    ▼ ‘여자가 돼서 이런 게 제일 좋다’ 하는 게 있다면.

    “남자의 보호를 받을 때?(웃음) 다른 여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여자라서 지금 제가 느끼는 행복을 못 느낄 거예요. 저와는 행복의 기준점이 다른 거죠. 전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느껴요. 지금 여자라서 모든 게 행복해요.”

    그는 2009년 슈퍼모델 선발대회에 출전하며 세상에 얼굴을 알린다.

    “원래는 미스코리아대회에 나가려 했어요. 어릴 때부터 엄마가 ‘네가 여자라면 미스코리아감인데’ 하는 말을 많이 했거든요. 이제 완전한 여자가 됐으니까 출전만 하면 입상할 자신이 있었어요. 그런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더라고요. 그때 마침 슈퍼모델 공고가 났어요. 테스트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순탄하게 여자의 삶을 산 친구들과 제가 어떻게 다른지를. 시험 삼아 신청했는데, 덜컥 본선까지 붙은 거예요. 솔직히 한예종 무용과라는 ‘학교빨’도 있었다고 봐야죠.”

    ▼ 본선 대회를 앞두고 합숙 기간 중에 굳이 커밍아웃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밝힌 게 아니에요.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실시간 검색 1위인 거예요. ‘트랜스젠더 슈퍼모델 출전 논란’이란 기사가 떴더라고요. 인터넷이 3일 내내 난리가 났죠.”

    ▼ 어떻게 알려진 건가요.

    “제가 성전환을 한 걸 한예종 무용과 학생들은 다 알아요. 떨어진 지원자 중에 우리 과 학생의 친구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제 이야기를 듣고는 언론사에 제보했다고 하더라고요. 인위적으로 성을 바꾼 사람이 여자들만 나가는 미인대회에 나갈 자격이 있느냐고.”

    그게 사실이라면 언론에 의해 일방적으로 사회적 커밍아웃을 당한 셈이다.

    “기자들이 숙소로 들이닥치고, 심지어 강릉 부모님 집에까지 찾아가 하루 종일 문을 두드렸어요. 무서웠지만 한편으론 편한 마음도 있었어요.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냥 이런 사람인데 어떡해요. 난 당당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어요.”

    비록 수상엔 실패했지만 본선 진출만으로도 프로모델 자격이 생겼다. 그런데 좀처럼 무대에 설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무대에 서기 위해 오디션이란 오디션은 다 쫓아다녔는데, 정말 많이 떨어졌어요. 대놓고 말하는 선생님도 있었어요. 부담스러워 옷을 입힐 수 없다고.”

    ▼ 그래서 2012년 ‘도전슈퍼모델코리아(도수코) 시즌3’에 다시 나간 건가요.

    “인정받을 때까지 도전하고 또 도전하려고요. 기존 모델도 많이 나가는 프로그램이었어요. 경험을 쌓고 싶었고, 뭔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 그 뒤로는 모델 일이 늘었나요.

    “꼭 도수코 때문은 아니었지만, 10번 오디션을 보면 2, 3번은 설 정도가 됐어요. 적어도 지금은 트랜스젠더여서 안 된다는 말은 안 들어요. 다방면으로 활동하다보니까 일부러 저를 부르는 경우도 생겼어요.”

    ‘공주의 남자’ 무영 역

    그는 2011년 KBS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조선시대 트랜스젠더라 할 수 있는 여장남자 기생 무영으로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다른 종편 드라마에서도 트랜스젠더로 출연했다.

    “‘공주의 남자’는 작가가 먼저 연락을 했어요. 처음부터 저를 염두에 두고 만든 캐릭터라고 하더군요. 새로운 걸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제가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 드라마 두 편 모두 트랜스젠더 역할이었는데.

    “아쉽긴 하지만 트랜스젠더 역할이라고 해서 안 할 이유는 없잖아요. 무조건 트랜스젠더 역할만 들어오는 것은 아니에요. 뮤지컬 ‘루나틱’이나 영화 ‘지금은 공사중(가제)’에선 그냥 여자로 출연했어요.”

    ▼ 무용은 그만둔 건가요.

    “춤에 대한 열정을 버린 적 없어요. 상명대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에서 뮤지컬 연출 등을 공부하면서 무용과 후배들과 춤 공연도 해요. 언론에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틈틈이 소극장에서 공연해요.”

    ▼ ‘최한빛은 이것저것 다 하는데 도대체 진짜 하고 싶은 게 뭐냐’는 반응도 있던데요.

    “제 꿈이 무대에 서는 것이라 장르를 따로 생각해본 적 없어요. 처음에 빠져든 게 춤이었고, 기회가 주어진 게 모델이었고, 운 좋게 연기를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무대에 설 기회가 있으면 잡고 싶었고, 그런 기회를 앉아서 기다린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트랜스젠더란 존재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2001년 하리수가 등장하면서다. 그동안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사회적 편견은 여전하다.

    ▼ 다른 트랜스젠더들과는 자주 만나나요.

    “만날 기회가 없었어요. 제가 갑자기 찾아가 ‘너 나랑 친구하자’고 해서 친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편견도 자기가 만드는 것

    ▼ 트랜스젠더의 상징처럼 됐는데, 그들의 권익을 위해 뭘 하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전 그냥 여자예요. 지금까지 주위 사람들도 다 그렇게 인식했고, 저도 일반인 속에 섞여 살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트랜스젠더라고 의식한 적도 없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한 적도 없어요. 저를 트랜스젠더로 가두는 건 언론이고 사람들이지, 저는 거기에 갇혀 살지 않아요. 왜 그렇게 분류하는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고민한 적이 없어요. 그런 제가 감히 뭐라고 대변할 수 있겠어요.”

    ▼ 트랜스젠더로서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편견을 갖지 말아달라고 입으로 백번 말하는 것보다 열심히 당당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의미 있지 않을까요. 제가 더 좋은 일을 하면서 잘 산다면 그 자체가 트랜스젠더 이미지를 더 좋게 하지 않을까요. 이런 말은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난 이런 아픔이 있지만 이렇게 열심히 하고 싶은 걸 하며 산다, 당신도 열심히 살 수 있다’고.”

    그는 “남자에서 여자가 됐다고 하는데 난 한 번도 남자였던 적이 없다. 항상 여자였고, 지금은 더 완전한 여성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서 그늘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말에선 당당함마저 느껴졌다. 부모님이 사랑으로 키웠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의 이야기에서 세상의 편견과 내면적 고뇌를 이겨내는 강한 의지와 용기를 읽을 수 있었다.

    “행복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세상 편견도 자기가 만드는 거예요. 남 탓, 사회 탓을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런 대접을 받으면 그냥 ‘이 사람은 나를 잘 모르는구나’ 하고 넘겨야 해요. 저도 편견 때문에 모델선발대회에서 떨어졌지만, 그런 편견을 인정하면 다시 거기에 도전할 이유가 없죠. 내가 부족해서 생긴 것이라 생각하고 자꾸 도전하다보면 언젠가 인정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가 정말 아름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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