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50년 전인 1569년 어느 봄날(음력 3월 4일. 이하 날짜 음력) 그동안 여러 차례 고향으로 내려갈 것을 간청하던 69세의 퇴계는 마침내 임금 선조의 허락을 받았다. 그날 임금은 떠나가는 퇴계에게 호피 요 한 벌과 후추 두 말을 하사하고 연도에 명해 말과 뱃사공을 내려 보호하라 지시했다.
그사이에 어려움이 많았다. 임금도 신하들도 퇴계가 있기를 바랐다. 두 해 전(1567) 명종이 후사 없이 돌아가자 16세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위에 오른 선조는 온 나라의 중망을 받고 있는 퇴계를 곁에 두고자 “어리석고 못난 나를 도와달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에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퇴계는 1568년 여름 상경해 정성을 다해 경연에 임하고 성왕의 이치를 담은 ‘성학십도’를 지어 올렸다. 그러고는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 여겨 떠나려 했다. 그러나 임금은 잇따라 벼슬을 올려주며 계속 곁에 두려 했다. 이러기를 몇 달, 신하들 가운데는 노쇠한 퇴계가 혹시 어떻게라도 되면 큰일이다 싶어 잠시라도 고향에 다녀오게 하자고 건의했고, 임금도 이마저 불허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에 이날 허락한 것이다. 윤허가 내리자 퇴계는 정오에 하직을 하고 서울 집에도 들르지 않은 채 도성을 나와 해 질 무렵 한강변 동호에 자리한 몽뢰정(夢賚亭)에 이르렀다. 정자 주인 임당 정유길(鄭惟吉·1515∼1588)은 일찍이 호당(湖堂·독서당)에서 퇴계와 함께 공부한 가까운 동료이자 후배였다. 퇴계는 집주인을 비롯한 지인들과 함께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모인 사람이 너무 많아 젊은 측은 인근 농가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다음 날(3월 5일) 아침 뒤늦게 소식을 접한 장안의 명사들이 조정을 온통 비우다시피 하고 나와서 백성들과 함께 떠나는 퇴계를 전송했다. 배 위에서 고봉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송별시를 지었다.
한강 물 넘실넘실 밤낮으로 흐르는데
선생님 이번 떠나심 어찌하면 만류할까
백사장에 닻줄 끌며 느릿느릿 배회하는 곳에
이별의 아픔 만 섬의 시름 끝이 없어라
이어서 사암 박순(朴淳·1523~1589)이 시를 짓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읊었다. 떠날 즈음 퇴계도 답시를 지어 아쉬움을 달랬다.
배에 나란히 앉은 이 모두가 명류들
돌아가려는 마음 종일 붙들려 머물렀네
원컨대 한강물 떠서 벼루에 담아 갈아서
끝이 없는 이별의 시름 써내고 싶어라
고봉과 사암은 퇴계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호남 광주 출신인 고봉은 26세 연상인 퇴계와 8년간 그 유명한 ‘사단칠정논변’을 주고받았다. 이 과정을 통해 학문도 크게 발전했지만 두 분의 인간관계 또한 나날이 가까워져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제 사이가 됐다. 이런 인연으로 고봉은 훗날 퇴계의 비석글(묘갈문)도 짓는다.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난 사암은 성리설을 듣고 퇴계의 제자가 됐다. 퇴계는 “그와 상대하면 밝기가 한 줄기 맑은 물이 흐르는 듯해 정신이 문득 맑아짐을 느낀다”고 칭찬했다. 사암은 그전 해(1568) 대제학에 임명되자 스승 퇴계를 천거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황이 대제학이 돼야 합니다. 연세가 높고 학문이 깊습니다. 원컨대 저와 바꾸어주소서”라며 양보했다. 열 정승보다 더 영광스럽다는 대제학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미담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묘소 속에 묻어두는 글(묘지문)을 짓는다.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분위기에서 사흘째 되는 날(3월 6일) 봉은사를 떠나 임금이 내려준 배로 한강을 거슬러 갔다. 반나절 지나 광나루에 이르니 정존재 이담(李湛·1510~1575)이 맞이했다. 나이 육십에 병환 중이었음에도 스승이 떠난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힘들게 일어나 지름길로 온 것이다. 이별을 아쉬워하는 제자에게 퇴계도 소회를 밝혔다.
아녀자처럼 이별의 눈물 줄줄 흘리지 마시게
웅덩이가 차면 물 흘러가듯 가고 또 오는 것
오늘 정이 이리도 깊구나 구성 사람이여
두 노인 이제야 알겠네 이별의 어려움을
‘구성’은 용인을 말한다. 그는 용인 이씨로 서울에서 살았다. 훗날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서른의 젊은 나이에 좌천돼 실의에 잠겨 있을 때 퇴계가 정존재에게 준 편지를 보고 크게 감동했다. 당시 퇴계는 “사람들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도 이런 탄식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포부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고 나는 내가 허술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탄식합니다”라고 글을 써 정존재에게 보냈다. 이 글을 읽은 다산은 “퇴계 선생은 참으로 훌륭하시다.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내가 선생을 따라 배우지 않고 누구를 따르겠는가?”라는 소감을 남겼다.
나흘째 되는 날(3월 7일) 남양주 마재를 지났다. 200년 후 걸출한 학자 다산이 이곳에서 태어나리라고 생각하며 여정을 재촉했을까. 이윽고 두 갈래로 흐르는 한강이 모이는 두물머리(양수리)에서 오른쪽 물길(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한여울(大灘)에서 묵었다. 남한강에 접어들어 첫 번째 만나는 큰 여울이다. 이곳까지 제자 한 명이 따라왔다. 잠재 김취려(金就礪·1539~?)다. 그는 경기도 안산에 살았으나 책 상자를 지고 도산까지 천 리 길을 왕래했다. 퇴계가 급하게 서울을 떠나느라 서울 건천동 집에서 가꾸던 매화 분재를 두고 왔는데 뒤에 이를 배에 실어 보내기도 했다. 퇴계가 임종하던 날 아침 물을 주라고 한 분매가 바로 이 분매다. 퇴계는 그때의 기쁜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일만 겹의 붉은 먼지를 깨끗이 벗어나
세상 밖으로 찾아와 늙은이와 짝 되었네
일 좋아하는 그대가 나를 생각지 않았다면
해마다 빙설 같은 이 모습을 어찌 보리오
잠재는 그다음 해에 스승의 상을 당하자 임금의 명을 받고 장례 일을 감독하는 직책을 수행했는데, 상복을 입고 묘소 옆에 종일토록 앉아서 한 달을 넘겼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이틀 후인 3월 9일 여주를 지날 때는 비바람이 심해 고통스러웠다는 기록이 보인다. 배를 타고 돌아오는 중에 고인이 된 옛 제자 홍인우(洪仁祐·1515~1554)가 금강산을 유람할 때 인도해준 스님을 만났다. 당시 일을 자세히 듣고는 감격의 눈물을 한참 동안 흘렸다. 훗날 인근에 기천서원이 건립되고 홍인우와 함께 퇴계가 존경한 모재 김안국(金安國·1478~1543) 등이 모셔졌다.
3월 10일 드디어 배가 충주 관내에 이르렀다. 가흥창을 거쳐 달천에서 배에서 내리니 여러 날 습기로 생긴 부종도 사라졌다. 충청감사 송당 유홍(兪泓·1524~1594)의 영접을 받고 그가 읊은 시에 감사의 답을 했다.
가흥관에서 술잔 주고받고
달천담 거슬러 배 저어가네 (중략)
답글 적고 고개 다시 돌리니
어느 날 다시 가까이 만날까
나중에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송당은 승지가 돼 왕명을 받들고 와서 제사를 지냈다. 인연은 묘한 것, 이렇게 생과 사를 잇는다.
3월 12일 청풍에 도착했고, 13일에는 단양팔경의 하나인 구담을 지나면서 오랜 친구인 청풍군수 이지번(李之蕃·?~1575)과 시를 주고받았다. 바로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의 형이요, 영의정 아계 이산해의 아버지다. 일찍이 윤원형의 미움을 받아 이곳 구담에 피신하고 있다가 퇴계와 벗하게 되었다. 청풍군수 자리도 퇴계의 강력한 천거에 의한 것이기에 두 사람의 소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휴퇴 빌어 돌아가는 길 장애가 많아
구름 사이 들어가 노닐지 못하네
구담을 거치니 바로 단양이다. 단양은 퇴계가 48세 되던 1548년 10개월간 군수로 있던 곳이다. 당연히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3월 14일 단양을 출발해 험준한 죽령을 넘어 영주에 도착했다. 죽령은 퇴계가 한양을 오고 갈 때 주로 다니던 길이다. 험준하지만 남한강 뱃길을 이용하기 수월했다. 죽령 넘어 첫 고을 풍기와 영주에서 이틀을 묵었다. 풍기는 퇴계가 49세 때 단양에 이어 군수를 지낸 곳이고, 영주는 퇴계 초취 부인의 친정이 있는 곳이다. 3월 17일, 서울을 떠난 지 14일 만에 퇴계는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이 있는 계상(溪上)은 돌림병이 돌아 산 넘어 도산서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퇴계가 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매화가 있었다. 퇴계는 매화와 시를 주고받는다.
매화가 주인에게(梅贈主)
부귀와 명예가 어찌 님에게 맞으리
흰머리로 속세에 있는 님 해를 넘겨 생각했네
오늘 다행히도 물러감을 허락받았는데
하물며 이 좋은 나의 꽃피는 시절에 오시다니
매화가 보기에도 퇴계에게 부귀와 명성과 이익은 맞지 않으니,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다행히 물러날 것을 윤허받고 돌아왔는데, 마침 매화가 꽃필 때여서 더욱 반갑다는 뜻이다.
주인이 답하다(主答)
국솥에 간 맞추려 그대 얻으려고 함 아니라
맑은 향내 너무 사랑하며 스스로 생각하며 읊조리네
이제 내가 다시 올 약속 지켜 돌아왔으니
밝은 세월을 저버렸다고 허물일랑 마시오
[지호영 기자]
마지막 귀향길에서 퇴계는 많은 사람과 조우했다. 이별을 아쉬워하며 전송하는 사람도 있었고 반갑게 맞이하는 이도 있었다. 이들 모두에게 퇴계는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존재였다.
퇴계는 늘 세상에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소원했다. 당대뿐 아니라 후대까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여겼으나 독서와 사색, 연구와 저술, 제자 양성을 병행하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집중할 수 있는 곳은 안온하고 그윽한 고향 도산이 제격이었다. 쇠약해지는 육체를 생각할 때 마음이 급했다. 물러난 퇴계는 배우러 오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질문하는 후학들에게 답을 하고 그 답이 옳았는지 늘 되짚어보며 자성했다. 할 일을 피하지 않았고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최대한 부응하려 했다.
퇴계는 도산에 돌아와 1년 9개월 후 세상을 떠난다. 사직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으나 임금은 허락지 않았다. 병이 낫는 대로 곁으로 오라는 전갈이 빗발쳤다. 개인(퇴계)은 병들고 나라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벼슬을 사양하고, 나라(임금)는 그대가 필요하니 빨리 치료하고 나와서 도움을 달라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정말 보기 드문 아름다운 광경이다.
물질적으로 크게 풍족해졌으나 삶은 불행해지고 반목과 갈등이 점점 심해지는 오늘, 퇴계의 마지막 귀향길과 귀향 후 삶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다.
퇴계 선생의 마지막 귀향 450주년을 맞이해 이를 조명하는 재현 행사가 도산서원이 주체가 돼 올봄에 조촐하게 추진된다. 당시 음력 날짜를 환산해 양력 4월 9일 오후 선생이 묵었던 그 봉은사에서 귀향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강연회를 연다. 이후 퇴계가 갔던 그 길 330㎞를 그다음 날 4월 10일부터 21일까지 11박 12일 동안 하루 평균 30㎞씩 걷는다. 그러면서 퇴계가 남긴 시도 되새기고 강연회도 열며 지역민을 비롯한 많은 분에게 다가가려 한다.
이번 귀향길 재현 행사는 퇴계의 삶과 정신적 가치를 널리 공유하고 이를 통해 국민의 심신 건강과 삶의 질 제고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나아가 걷기 문화와 도덕부흥운동으로 발전시켜 국가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귀향길 연도 지역의 새로운 문화자산으로 자리 잡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분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
김병일
● 1945년 경북 상주 출생
● 중앙고, 서울대 졸업
● 제10회 행정고시 합격
● 통계청장
● 조달철창
● 기획예산처 장관
● 現 도산서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