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건희를 얼마나 알고 있나
1993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이건희 신드롬
기업인이 아닌 사상가의 언어
나의 관심은 ‘돈’이 아니다
운 좋은 상속자에서 용감한 도전자로
1987년 12월 1일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발언하는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동아DB]
그가 회장으로 취임한 1987년, 삼성은 국내에서도 3대 재벌그룹의 하나였고 글로벌 무대에서는 더더군다나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말 전자업계 세계 최고 기업 소니를 앞질렀고, 21세기 초 애플과 맞짱 뜨는 초일류 기업이 됐다. 이 회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 회장이 취임한 1987년 매출 17조4000억 원이던 삼성전자는 2019년 매출 314조 원으로 커졌으며 스마트폰, TV, 모니터, D램, 낸드플래시 등 수많은 세계 1등 품목을 만들어냈다. D램 부문에서는 28년 연속, 낸드플래시 부문에서는 17년 연속 세계시장의 독보적 1위를 지키고 있다.
이 회장은 아날로그 제조업이 지배하던 20세기와 디지털과 모바일로 상징되는 첨단산업이 지배하는 21세기를 이으며 삼성전자를 세계 최고 IT기업으로 일구었다. 도시바, NEC, 히타치, 소니, 파나소닉, 필립스, 샤프, 노키아, 에릭슨, 모토로라 같은 수많은 강자가 흥하고 성하고 쇠하고 망해 간 약육강식 정글에서 이 회장처럼 극적 성공을 이룬 기업인은 드물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의 부고를 전하면서 ‘선지자(visionary)’라는 표현을 썼다. 남보다 먼저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기독교 전통이 강한 서양 사회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으로 전해주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회장을 남들이 미리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앞날을 예언한 초인적 존재로 평가한 것이다. 그는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라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던 취임 때 약속을 20여 년 만에 지킨 행동가이자 실천가다.
우리는 그를 얼마나 알고 있나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고 천명한 ‘신경영 선언’ 당시 모습. [동아DB]
기업이나 사람의 운명이 한순간인, 유난히 변화무쌍한 한국 현대사에서 이 회장은 생전 자신의 말대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이뤘다. 변화의 키워드로 대표되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신경영 정신은 한국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 뿌려졌다.
세계 최고 갑부 반열에 오른 이 회장이 6년 넘게 투병한 것과 요즘 같은 고령화 시대에 여든도 안 돼 타계한 것을 보며 인생무상, 허무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결국 삶이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공수래공수거이건만 뭘 그리 안달복달하며 살 일이냐고도 한다. 공수래공수거는 ‘소유’를 기준으로 할 때 이야기다. 이 회장의 육신은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의 영혼, 정신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류, 삼류, 싸구려로 통하던 ‘메이드 인 코리아’를 글로벌 브랜드 반열에 올리는 과정에서 보여준 이 회장의 통찰력과 기업가 정신은 대한민국 국민과 기업인에게 세계 일류 DNA를 심어주었다. 우리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지만 그가 남긴 정신적 에너지는 후대에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한국 사회를 강타한 이건희 신드롬
생전에 그가 가장 많은 말을 쏟아낸 1993년으로 돌아가 그의 말을 다시 들으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제는 기억에도 아득한 먼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박제된 목소리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게 한다. 안개가 자욱한 것처럼 혼돈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지금, 이렇듯 절박하게 위기를 말하는 지도자가 과연 있는가 하는 묵직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이 회장은 기업인이었지만 시대를 앞서 읽은 예언자였으며 이 힘든 세상을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지혜를 말해 준 사상가였다. 이 회장의 일대기를 ‘신동아’에 연재하면서 첫 번째 이야기를 1993년 신경영 선언에서 시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1993년 7월 31일. 토요일이던 이날 밤 11시 25분 MBC는 이례적으로 임시 편성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제목은 ‘李健熙(이건희) 신드롬의 충격파-출근부를 찍지 마라’.
한 달 보름 전인 6월 13일 이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 삼성 유럽 주재원들을 불러 모아놓고 한 강연을 삼성 사내 방송팀으로부터 입수해 90분 분량으로 재편집한 것이었다.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상징하는 구호였던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말이 나온 현장이었다.
심야에 갑자기 편성된 이 프로그램은 앵커의 간단한 설명 외에는 오로지 이 회장의 얼굴만을 클로즈업했다. 당시 기사는 이 프로그램이 1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전한다. 특정 회사 최고경영자 발언을 여과 없이 내보내는 것에 대한 부담감 탓이었는지 앵커는 “삼성이라는 한 기업의 생존 그 자체를 넘어 낡은 것을 깨고 창조하기 위한 대한민국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고 판단돼 프로그램을 편성했다”면서 ”격을 파(破)한 그의 거친 어법을 양해해 달라”고 주문했다.
기업인이 아닌 사상가의 언어
기자는 최근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작은 충격을 받았다. 만 쉰한 살의 이 회장 얼굴에는 패기와 열정이 가득했고 목소리에는 에너지가 넘쳤다. 경상도 사투리에 시종일관 양손을 들고 제스처를 크게 써가며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있었다. 방영 1시간 반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이날 강연은 그 흔한 칠판이나 PPT 하나 없이 오로지 이 회장 개인의 말이 전부였다. 표정 변화나 입술의 움직임은 별로 크지 않았지만 목소리 톤은 높았다. 얼마나 열중하며 말했는지 왼손가락에 쥔 담배가 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빠져들다 황급히 끄는 모습도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그의 메시지에는 시종일관 ‘변화’를 호소하는 절절함이 가득했다.
강연 서두부터 달랐다. 이른바 ‘금수저’로 태어나 대기업을 물려받은, 운 좋은 재벌 2세가 아닌 현대사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한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으로서의 소회가 담겨 있었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 절대 아니고 실수도 많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51년간 보고 들은 게 많다. 식민지도 겪고 전쟁도 겪고 국내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여기저기 살아봤다. 우리나라 개인소득이 50불에서 7000불이 된 시간을 살았다. 회사도 할아버지가 500마지기, 아버지가 200마지기로 시작해서 오늘날 내 개인 자산이 몇 천억인지, 1조 원인지 모르지만 묘한 시기에 묘한 자리에 앉아 있다. 삼성도 크고 한국도 커졌으니 이제는 이 시점에서 이런 식(변화)으로 가야 일류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그의 통찰과 지식의 깊이는 실로 컸다. 물리학 수학 사회학 심지어 아동심리학까지 넘나들었고 한국과 일본의 문화, 역사에 통달했다. 개성화, 소프트웨어, 디자인의 시대가 될 것이며 로봇이 지배할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땐 그의 예지력에 가벼운 탄성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그는 “미래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고 했다.
“5000년 전부터 1980년까지 이뤄진 변화보다 1980년부터 올해 1993년까지의 변화가 더 컸다. 향후 10~20년 변화는 더 클 것이다. 인간이 바뀐다는 게 아니라 경제제도, 시스템, 판단 속도, 정보 습득 방법이 바뀐다는 거다. 당장 10년 전과만 비교해 봐라. 등허리에 진땀 날 정도의 변화가 있지 않았나. 나는 미래를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나의 관심은 ‘돈’이 아니다
직원들을 질책할 때는 언성이 높아지고 작금의 현실을 개탄할 때는 한숨을 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마치 아버지가 자식들을 앞에 두고 가르치듯 설득하는 모습이었다. 간혹 물을 마시거나 입술에 고인 침을 식탁 위 냅킨을 접어 닦는 정도가 유일한 멈춤이었다.가장 놀라운 사실은 원고가 없었다는 것이다. 뇌 속에서 그대로 발산돼 나오는 폭포수 같은 말 속에는 ‘무슨 책을 읽었더니 이렇게 써 있더라’ ‘누구한테 들었는데 어떻더라’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경험과 외부의 정보를 긴 시간, 혼자만의 사색과 성찰을 통해 깊이 체화한 사람만이 뱉을 수 있는,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언어의 향연이었다.
그의 태도는 명령이나 훈시가 아니었다. 때로는 읍소나 애원에 가까웠다.
“나처럼 3남으로 (태어나) 삼성 같은 대기업의 후계자가 되는 건 몇 백만 내지 몇 천만분의 1의 확률이다. 그런 나도 8시간 일한다지만 실제는 2~3시간, 나머지 21~22시간은 개인 고민이다. ‘나는 따스할 테니 너부터 추워라’는 게 인간 심리다. 그래서 변화는 어렵고 힘들다. 몇 명은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과장급 1만 명을 바꾸는 건 힘들다. 더더구나 15만(삼성 전 직원 수)은 불가능하다. 내 혼자 힘 갖고는 어렵다. 한 사람이 개조시킬 최대 인원은 18명이다. 그래서 (군대) 소대가 18명 아닌가. 내가 18~20명 맡고, 부사장·전무가 또 각자 18명씩 맡고 이렇게 해보자.”
사적 이윤이 궁극의 목적인 대기업 오너가 직원을 대상으로 한 강의라고 한다면 ‘한 푼이라도 더 벌려면 분초를 아껴서 바삐 뛰어야 한다’는 식의, 거칠게 말하면 ‘돈 잘 버는 기계’가 되라고 주문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 회장 입에서 그런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휴가 써라, 골프 쳐라, 출근하지 말라, 회의하지 말라고 했다.
비효율이 비도덕이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왼쪽)이 2012년 1월 10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 가전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부인 홍라희 여사와 김포공항 출국장을 나서고 있다. [변영욱 동아일보 기자]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버리자’ ‘도덕성을 회복하자’ ‘먼저 인간이 되자’ ‘재산 독점, 권력 독점은 안 된다’는 말은 대기업 오너가 아닌 종교 지도자나 철학자에게 어울리는 말들 아닌가.
그가 생각하는 도덕성은 일반의 관념과는 좀 달랐다. 그는 기업 내부에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도덕적인 일이라고 했다. 기업 내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그래서 나쁜 것이라고 했다. 그의 시선은 ‘돈’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는 듯했다.
이 회장은 “나는 삼성에 빚이 없다. 도덕적, 인간적으로 약점도 없다. 앞으로 5년간 안 바뀌면 (회장직을) 그만두겠다”고까지 했다. 그만두겠다는 말이 직원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들렸을지는 몰라도 그의 말을 듣다 보면 그가 돈이나 자리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람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존경을 받는 것을 더 추구한 듯 보인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앞서 1993년 2월 미국 LA에서 열린 전자 관련 사장단 회의 발언에서 이런 심경의 일단이 읽힌다.
“내가 내 재산 늘리려고 이렇게 밤잠 안 자고 떠드는 것 절대 아니다. 재산 10배 늘어봐야 나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내가 갖고 있는 재산의 ‘이자의 이자의 이자’로도 몇 대(代)는 살 수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 자신이 부귀영화를 하자는 것 아니다. 명예 때문이다. 성취감 때문이다. 성취감은 여러분, 삼성그룹, 우리나라가 잘되게 하는 것이다. 내 개인 양심을 지키고 책임을 다하고 싶다.”
그러면서 그는 “내 청춘, 재산, 명성은 물론 목숨을 걸었다”는 말까지 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리 들으면서 하고 싶은 게 많다. 삼성그룹 회장 자리가 물론 크고 중요한 자리이지만 내 성격, 스타일에는 반도 안 찬다. 15만 삼성인에게 평생 직장을 주고 세계 초일류 기업, 일류 군(群)에 들어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책임감 때문에 하루 4시간밖에 안 자면서 일하고 있다. 내 청춘과 재산과 목숨과 명성을 걸었다.”
운 좋은 상속자에서 용감한 도전자로
1993년은 김영삼(YS) 대통령이 문민정부를 간판으로 내걸고 신(新)경제를 외치던 해다. 경제 분야에서는 금융실명제 실시 등 굵직한 개혁 조치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 회장은 그해 프랑크푸르트 강연에서 “사회 전반에 일고 있는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우리도 편승하자”며 이렇게 말한다.“과거 정치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였기 때문에 사회와 기업에 악영향을 많이 끼쳤다. 특히 기업은 정치제도, 정치권력의 영향을 직접 받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책임이 아닌 다른 엉뚱한 책임, 우리 선배들이 저질러놓은 무책임까지 뒤집어쓴 느낌이다. 최근에는 삼성이 대표적인 기업이라는 것이 더 표가 나고 있어 책임감이 상대적으로 더 커져 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고 있다. 과거의 고생은 보람 없는 고생이었으나 이제는 고생하면 그 대가나 결과가 나오는 고생이어서 과거보다 나은 여건이다. 희망이 있는 고생이다. 그룹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고생해 보자.”
한켠에서는 이 회장이 정권에 잘 보이기 위한 ‘쇼’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 여론은 이 회장 편이었다.
‘이건희, 초일류만이 살아남는다’(1993) 저자 김상헌의 기록이다.
“문민 시대를 맞아 한동안 이 시대의 히어로는 김영삼 대통령이었다. (…) 최근 들어 ‘뉴 페이스’가 등장했으니 바로 삼성그룹 총수 이건희 회장이다. 한국 제일의 기업으로 자타가 공언하는 삼성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한 지 올해로 6년째를 맞는 이 회장, 지금까지 그를 바라보는 일반인의 시각은 돈 많은 아버지를 둔 운 좋은 사나이, 베일 속의 황태자 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베일을 세차게 걷어버리고 일반인들 앞에 나섰다. 그것도 이 시대의 총아인 텔레비전에 장장 90분간 ‘주연’으로 출연한 것이다. (…) 제일주의로 유명한 삼성을 이류 기업이라 단언하며 이대로 가면 기업의 존립마저 위태롭다고 강조하는 그는 권위적인 재벌총수의 모습에서 확실히 벗어나 있었다.”
조정환 경북대 교수는 1993년 8월 17일자 조선일보에 ‘재계의 신사고(新思考)’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에서 이 회장의 선언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했다.
“(이 회장은) 일반에 투영된 소심하고 대중을 두려워하는 운 좋은 상속자로부터 자기표현에 거침없는 용감한 시대의 도전자로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 자신의 기업을 최고로 만들겠다는 기업인의 몸부림이 이렇게 절실하게 많은 사람들 가슴에 와닿은 적은 일찍이 없었다. (…) 이전에 재벌기업이 무엇을 기도한다는 것은 그 배후에 정권과 특별한 연계가 있다는 선입관을 우리는 가져왔다. 요즈음 삼성의 이 회장이 눈치 안 보고 독자적인 어투로 자신의 퍼스낼러티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을 보면 이제 정치권력이 모든 분야를 주무르던 시대는 가고 재계도 자기논리로 구르는 시대가 온 모양이다.”
급기야 정치권도 화답했다. 1994년 3월 YS의 오랜 정치적 동지이자 당시 내무부 장관을 맡고 있던 최형우는 공무원 300명을 이끌고 아예 경기 용인시 삼성연수원에 들어가 이 회장의 특별강연을 들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