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호

이건희 회장이 ‘생선 도미의 열량’이 궁금했던 이유[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 ⑪]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1-04-1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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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이란 말 자체가 무의미한 시대

    • 자동차‧시계 산업으로 본 業의 변화

    • 생선 도미의 수율은 얼마

    • 英 보수당 대표 헤슬타인 부부와의 만남

    • 선물의 목적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

    2012년 10월 13일 베트남 하노이시 북동쪽 박닌성 옌퐁공단에 있는 삼성전자 SEV(Samsung Electronics Vietnam) 법인을 방문한 이건희 당시 삼성전자 회장. [삼성전자 제공]

    2012년 10월 13일 베트남 하노이시 북동쪽 박닌성 옌퐁공단에 있는 삼성전자 SEV(Samsung Electronics Vietnam) 법인을 방문한 이건희 당시 삼성전자 회장. [삼성전자 제공]

    지난 2월 15일자 한국경제신문은 ‘팬데믹 1년, 국가경쟁력을 다시 생각한다’는 기획기사에서 애프터 코로나 시대에 업(業)의 본질이 바뀌고 있다고 했다. 석유회사가 석유 사업을 접고 자동차 회사들은 자동차 회사로 불리는 걸 꺼려하며, 유통 회사는 물건 파는 것보다 사람을 끌어 모으는 데 집중한다는 것이다. 기사 중 일부다.

    “현대중공업 그룹은 ‘중공업’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한 대안을 고민 중이다. 인공지능(AI), 로봇, 수소 등 신사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지만 조선과 기계 업종을 중심으로 수십 년간 고착화된 기업 이미지가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등 주요 정유사도 ‘탈(脫)석유’를 전면에 앞세우고 있다. 기존 석유사업만으론 성장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판단, 대대적인 설비 투자를 통해 올해 대규모 화학공장을 가동할 예정이다. SK이노베이션, 에쓰오일은 정유사업 비중을 줄이고 화학과 전기차 배터리 사업에 중점 투자하기로 했다. 현대자동차‧기아는 사업의 본질을 자동차에서 ‘이동수단’으로 완전히 재정의 했다. 기아자동차가 사명에서 ‘자동차’를 뗀 것도 이 때문이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데 주력하겠다며 테마파크와 야구장이 자신들의 경쟁 상대라고 했다. 신세계는 SK야구단을 인수해 유통업에 대한 정의를 달리하기도 했다…쿠팡은 유통업을 ‘트래픽’ 사업으로 이해했다. 쿠팡에게 쇼핑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수단’에 불과했다. 구글이 검색으로, 카카오가 메신저로 사람들을 온라인에 끌어 모았듯 쿠팡은 쇼핑으로 트래픽을 발생시켰다.”

    산업이란 말 자체가 무의미한 시대

    2013년 10월 28일 신경영 20주년 만찬에 참석한 이건희 당시 삼성전자 회장과 홍라희 여사. [삼성전자 제공]

    2013년 10월 28일 신경영 20주년 만찬에 참석한 이건희 당시 삼성전자 회장과 홍라희 여사. [삼성전자 제공]

    산업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넘어 산업이란 말 자체가 무의미한 시대! 이건희 회장은 생전에 일찌감치 이런 지적을 했었다. 그의 책 중 ‘만들지 않는 제조업’이란 제목의 글은 제조업 시대를 살았던 경영인이다 보니 지금 같은 4차 산업혁명시대 언어와는 다소 시대 차가 있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그의 안목과 통찰이 느껴진다.

    “앞으로는 산업 분류 체계를 새로 설정해야 한다. 다양한 업종이 등장함에 따라 벌써 업종 간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산업간 경계도 모호해지고 있는데 특히 2차 산업인 제조업과 3차 산업인 서비스업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분명한 것은 산업의 주도권이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바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유는 세계 경제가 안정 성장기에 접어들고 제품과 기술의 라이프 사이클이 짧아지면서 제조업이 점차 매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에는 기계, 전자, 화학 같은 제조업보다는 정보, 유통, 문화 같은 서비스업이 성장 산업으로 각광받게 될 것이다. 하드 웨어산업보다 소프트 산업이 더 유망하다는 얘기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는 GE나 IBM의 변화도 일찌감치 예견했다.



    ‘현재의 제조업이 서비스 산업화하는 현상도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21세기 일류 컴퓨터 회사는 컴퓨터를 만드는 게 아니라 고객의 문제와 요구에 따라 컴퓨터 시스템을 설계해서 문제를 해결해주는 서비스만 담당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드웨어는 외주를 통해 조달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제조업체로 알고 있는 주식가치 세계 1위 GE나 컴퓨터의 대명사 IBM도 앞으로는 서비스 기업으로 분류될지 모르는 일이다. 실제로 GE는 단순한 제품 판매에서 벗어나 경영 기술을 판매하는 방향으로 모든 사업의 서비스화를 진행시키고 있다. 발전용 터빈 사업도 유지 보수와 운영 서비스 비중을 늘려 최근에는 서비스 부문 매출이 전체의 50%를 넘어섰으며 이익의 80%가 서비스 분야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GE의 사례는 미래의 경쟁이 제품 만들기가 아니라 서비스 경쟁이라는 점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제조업 위주로 성장해 온 우리나라 기업들에는 앞으로 힘써야 할 분야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해주는 대목이다.'

    자동차‧시계 산업으로 본 業의 변화

    이 회장이 업의 개념을 말할 때, 특유의 입체적인 사고를 동원했던 기준을 우리가 지금 각자 하고 있는 일에 적용해보면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이 회장은 하나의 업을 생각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세 가지를 이렇게 말했다.

    첫째, 사업을 영위하는 기본정신과 목적은 무엇인지 둘째,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핵심기술· 제품특성· 유통 구조상 특성은 무엇인지 셋째, 관련 법규와 제도, 기술개발, 소비자의 의식변화 등 외부 여건의 변화는 어떤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약 사업이라고 할 때 ①기본 정신면에서는 ‘인류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사업’이고 ②기술적인 특성은 ‘화학·미생물학 등 기초 과학은 물론 유전공학과 같은 첨단기술이 필요한 사업’이며 ③사회 제도 면에서는 ‘정부 규제가 많은 사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규제’를 업의 본질에 넣고 있는 점이다. 제약 사업은 생명을 다루는 사업이다 보니 규제가 당연히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어떤 규제가 얼마나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사전에 파악하지 않고 무조건 기술 개발에만 기댄다면 업 자체를 진척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나올 수 있다. 규제 자체를 탓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업의 본질에 넣고 일을 진행하라는 상상력은 시사하는 바가 큰 것으로 보여 진다.

    생전에 자동차 산업에 관심이 많았던 고인은 자동차 업을 설명할 때도 앞의 세 가지 기준을 적용했다.

    “자동차를 만드는 일과 자동차 업은 다르다. 흔히 ‘자동차 업이 뭐냐’고 할 때 ‘네 바퀴를 축으로 하고 구동 장치를 얹은 탈것(수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업’이라고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자동차 업은 이보다 더 큰 개념이다. 자동화된 대형 일관 체제를 갖추고 연구개발 시스템과 판매 네트워크를 기본으로 하며 ‘할부 금융과도 유관한 산업 또는 비즈니스’라고 정의 내려야 한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놓치지 않았다.

    “앞으로는 가솔린 연료가 없어지고 수소연료나 전기로 움직이게 될 것이므로 수송업이 아니라 전자 전기 업으로 바뀔 수 있다.”

    업의 개념을 생각할 때 이처럼‘업의 변화’에 집중하면 에너지를 쏟아야할 승부처가 어디인지 보는 눈이 길러진다. 회장이 남긴 어록 중에서 많이 회자되는 것 중 하나가‘시계 산업’에 대한 언급이다.

    “시계 산업은 처음에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정밀사업이었지만 디지털화 되면서 양산 조립업으로 변했다. 그러다 패션산업으로, 최근에는 보석 산업으로 변했다.

    시계가 정밀산업일 때는 고도로 정밀화된 부품 조합기술이 필요하고 양산조립업일 때는 빨리, 싸게 만드는 제조 노하우가 중요하다. 패션산업일 때는 당연히 디자인이, 보석 산업일 때는 가공기술과 브랜드 파워가 승부처가 된다. 시계산업 주도권이 스위스에서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 프랑스로, 지금 스위스로 다시 오게 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회장은 계열사 사장들이 업의 개념에 맞지 않게 일할 때는 수익이 나도 야단을 쳤다고 한다. 손욱 전 삼성기술원장 회고다.

    “호텔신라가 계속 적자를 내다가 한해 조금 이익이 났습니다. 임원이 자랑스럽게 보고를 했더니 오히려 그건 업의 본질이 아니라고 꾸짖어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회장은 ‘삼성 그룹에서 호텔 업의 본질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세계 최고 수준으로 서비스를 끌어올려 삼성의 브랜드 이미지를 올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호텔에서 돈을 번다고 해도 삼성전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수익을 내겠다고 하면서 오히려 호텔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이야말로 손실’이라고 했습니다.

    회장의 이런 꾸짖음의 의미는 계열사 사장들이 회장에게 보고할 정도가 되려면 수익이 얼마 났다는 차원에 머물 것이 아니라 그룹 전체의 생산성 차원에서 업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라는 주문이었습니다. 이러니 사장들이 얼마나 진땀을 뺐겠습니까.”

    생선 도미의 수율은 얼마

    회장은 업종별로 세세하게 ‘업의 개념’을 설파했다.

    배동만 전 제일기획 사장은 생전의 이 회장을 가장 많이 대면한 인물 중에 한명으로 꼽힌다. 호텔신라 관리이사 시절부터 제일기획 대표이사까지 20여 년간 회장과 자주 대면하며 경영철학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1993년 신경영 선언이 끝난 직후 일본 후쿠오카에서 일주일간 삼성그룹 각 계열사 관리본부장 회의가 열렸을 때에도 주제는 ‘업의 개념’이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당시 제주 호텔신라 투자 건을 갖고 회장께 보고할 때였습니다. 회장은 제게 반복적으로 ‘호텔업의 본질, 호텔업의 개념은 무엇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제주 투자 결정을 했는가?’ 등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매우 세세한 부분까지 짚어가며 설명을 했는데 심지어 초밥 선반으로 사용되는 히노키(편백나무)를 예로 들며 나무 특성은 무엇인지 부가가치는 얼마나 되는지 파고 들어가며 묻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회장과 신라호텔 일식당과 관련해 생전에 나눴던 대화를 기록해 보관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회장이 생전에 항상 강조하던 ‘업의 본질’에 대한 생각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배동만의 기억이다.

    “일식당 운영과 관련된 일로 댁으로 불려간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는데 특히 도미에 대한 말씀이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다음은 그가 기억하는 문답이다.

    -어디서 나오는 도미가 제일 맛있나?

    “남해입니다.”

    -왜 그런가.

    “수압, 수온, 플랑크톤이 좋고 청정지역이라 그렇습니다.”

    -몇 kg짜리가 먹기 좋고 스시로 만들기 좋은가?

    “1.5kg 내외가 육질이 좋다고 합니다."

    -한 마리를 회로 만들면 수율(收率·불량률과는 반대개념으로 높은 게 좋다. 반도체 공장에서 쓰는 단어를 회에도 쓴 게 재미있다)이 얼마나 나오나.

    “30% 내외가 될 겁니다.”

    회장이 묻는 말에 척척 답하던 배동만은 “칭찬을 잘 안하는 회장이 ‘많이 아네’하면서 칭찬해주니까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기자가 “제3자 입장에서는 도미라는 생선하나 갖고 그렇게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했더니 그는 “사실 주말마다 직원들하고 식재료 공부를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회장이 말했던 호텔업에 대한 개념이 장착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호텔업을 깊게 고민해보니 식당 근무자들도 단순 노동직이 아니라 지식과 노동력이 결합한 인적 서비스업 종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식재료를 사오려면 공부가 필수라는 생각에 재료공부 모임을 따로 만들고 토론도 하고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아뿔싸 막힘없이 답을 이어가던 그가 회장의 다음 질문에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고 한다.

    “회장이 갑자기 ‘열량은 얼마나 되나’하고 물은 것입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결국 ‘아…열량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떨궈야 했지요.”

    -회장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혀를 끌끌 차더니 ‘자네는 일반 사람이 아는 정도의 상식만 있지, 호텔 책임자로서의 전문 지식은 없는 것 같네. 열량이 왜 중요한고 하니, 사람마다 건강 상태와 컨디션이 다르기 때문이야. 손님들에게 일일이 맞춤 서비스를 하려면 제일 중요한 걸 알고 있어야지’ 하시는데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한마디로 손님들 개인별 취향을 다 알아두라는 거였습니다. 짠 걸 좋아하는지, 매운 걸 좋아하는지, 싱거운 걸 좋아하는 지를 파악하는 것은 기본이요,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은 언제인지, 심지어 비만인지 당뇨병 같은 지병을 앓고 있지는 않은 지까지 담겨 있는 ‘고객 히스토리’를 만들어두고 거기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회장은 호텔 요식업이라는 업의 본질을 그렇게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겁니다.”

    선물의 목적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

    회장은 생전에 “고객을 중시한다고 말들은 많이 하지만 레이더가 고객을 향해 있어야 하는데 나를 향해 있다. 이걸 고객을 향해 돌려놓는 것이 바로 고객 중시(1993년 7월 19일 오사카 회의)”라고 했다.

    나로 향한 레이더를 남을 향해 돌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나(ego)라는 것이 비워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생전에 회장이 선물 하나를 고를 때에도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상대방을 감동시키기 위해 세심하게 챙겼는지를 보여주는 증언이 있어 소개한다. 전 KB금융지주 황영기 회장의 기억이다.

    “회장은 어떤 사안이든 무심한 듯 말해 길게 얘기하거나 지시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고객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1994년 영국에서 마이클 헤슬타인 부부를 만났던 때가 기억납니다. 마이클 헤슬타인은 당시 보수당 대표였는데 상당히 부자여서 교외 수목원이 있는 10만 평 정도 되는 대저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회장은 그 부부를 만나기에 앞서 무슨 선물을 하면 좋을지 비서팀이 연구해보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결국 남편 헤슬타인에게는 제일모직에서 만든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양복 한 벌과 양복지, 부인에게는 와인을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와인 선물이 신의 한수였지요. 마침 회장이 방문하기로 한 달이 부인 생일이었는데, 태어난 해인 1935년 산 빈티지 와인 2병을 드린 거 같아요. 부인이 ‘오 마이 갓’하면서 거의 기절을 할 정도로 놀라더군요. 자기 출생년도의 거의 60년 된 와인을 한국의 삼성 회장이 일부러 찾아서 들고 왔으니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요. 우리 일행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때 황영기는 이건희 회장에게서 ‘아…선물의 목적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데 있구나'라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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