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리더십과 팔로우십
NEC 갔다가 풀만 뽑고 돌아오다
서울서 가까워야 인재가 몰린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기흥반도체 공장 건설 당시 호암 이병철 회장(오른쪽 첫 번째)과 이건희 회장(오른쪽 두 번째).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윤우 전 삼성전자 부회장. [이윤우]
“삼성 해외연수 1호로 미국 플로리다로 유학을 가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따고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더니 실리콘밸리 써니베일 삼성 메모리 연구소(SSI, Samsung Semiconductor Inc)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1984년 1월이었습니다. 그때는 설립 7개월여가 지난 시점이었는데 메모리를 제작할 수 있는 공장(FAB) 설비를 보유하고 있었고 30여 명의 엔지니어가 256KD램, 64KS램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인텔, TI(텍사스 인스투르먼트) 같은 미국의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일본과의 메모리 개발 경쟁이 너무 치열해 아예 사업을 포기하거나 CPU 개발 같은 새로운 분야로 옮기는 과정이었습니다. 유능한 메모리 기술자들이 일자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삼성으로서는 절호의 기회였죠.
미국에 연구소를 세운 건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개발한 것들이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어도 최첨단 반도체 회사가 밀집한 곳에 있다 보니 실시간 유통되는 최신 기술 정보와 시장 상황을 현장에서 바로 습득하는 창구 역할을 했으니까요.
인재를 키우는 산실이기도 했습니다. 매년 삼성에 갓 입사한 엔지니어 30여 명 씩을 뽑아 현지 연수를 시켰는데 이 ‘반도체 꿈나무’들이 훗날 기술 자립에 크게 기여하게 되니까요. 저는 1985년 11월 귀국했는데 다들 ‘서울 가지 말라’고 만류한 기억이 납니다. 삼성이 ‘반도체 때문에 앞이 안 보이는 터널에 갇혔다’는 비관론이 팽배할 정도로 적자의 늪에 빠져 있었고 휴일은커녕 주말도 없이 매일 밤늦게까지 일하는 상황이어서 근무 여건도 형편없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서울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삼성이 반드시 해낼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거든요.”
삼성 샐러리맨 신화의 상징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와 이윤우 전 삼성전자 부회장. [이윤우]
마치 한국 현대사의 성취가 ‘박정희’라는 영웅 한 사람이 이뤄낸 게 아니라 그와 국민들 간의 합작품이듯이, 삼성의 성공도 위대한 리더와 위대한 팔로우십이 결합한 결과다. 물론 이것은 삼성뿐 아니라 성공하는 나라와 기업의 공통점이겠지만 말이다.
이를 고려하면 앞서 소개한 이윤우 전 부회장 이야기도 다시 새겨 들을만한 내용이 많다. 삼성전자 반도체 하면 흔히 진대제, 황창규 전 사장 등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스타 CEO(최고경영자)들이 떠오른다. 이들 모두 이 전 부회장이 닦은 기반에서 빛을 발한 사람들이다. 진 전 사장, 황 전 사장은 삼성전자 반도체라는 비행기에 탑승한 뒤 고공비행을 하며 스타 CEO가 됐다. 이 전 부회장은 해외 유학 한번 다녀오지 않은 순수 국내파로서 강한 의지와 실행력으로 밑바닥부터 커리어를 다지며 최고 자리에 올랐다. 그런 점에서는 명실상부 삼성 샐러리맨 신화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이 전 부회장이 삼성에 입사한 것은 1968년으로 삼성물산 그룹 공채를 통해서다. 호암이 막 전자사업을 해야겠다고 한 때였다. 그는 어떻게 삼성과 인연을 맺게 됐을까.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다녔는데 동급생이 20여 명밖에 안 됐습니다. 어느 날 삼성에서 사람을 뽑는데 관심이 있는 이들은 면접을 하라는 소식을 듣고 저도 지원했습니다. 당시 면접 자리에 호암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저는 호암을 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히 기억에 없고요. 질문은 하지 않으셨던 것 같고 학생들이 말하는 태도나 인상을 본 것 같았습니다. 1969년 졸업이 예정돼 있었는데 이미 그 전해 봄 채용이 결정돼 여름방학 때부터 삼성의 중요 사업장을 돌며 연수한 뒤 졸업 직전인 1968년 11월에 입사했습니다.
당시에는 ‘삼성전자’라는 회사가 아예 없던 시절이어서 물산 전자사업부 기획팀으로 들어갔습니다. 호암이 막 전자산업을 시작한 때였지요. 호암은 거의 매일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호암이 도쿄를 자주 오가면서 일본의 선진 기술을 갖고 오기 위해 애를 많이 썼는데 결국 NEC와 산요 두 회사와 합작 회사를 만들게 됩니다. 그 사업 계획을 짰습니다.”
사업계획이란 게?
“투자는 어떻게 하고, 사람은 어떻게 채용하고, 매출 계획은 어떻고 이런 거죠. 그게 굉장히 복잡합니다. 일일이 원가 계산도 해야 하고 재무제표도 만들어야 하고. 이게 다 숫자 아니겠습니까. 그때는 전자계산기가 없어 주판을 썼습니다. 손으로 돌리는 ‘타이거’라는 기계식 전자계산기가 있긴 했는데 한 대밖에 없어서 먼저 쓴 선배들이 다 퇴근한 밤이 돼서야 신참들 차지가 됐습니다. 프린터도 없었기 때문에 보고서를 전부 손으로 작성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보고할 내용을 손으로 모두 적어 전날 저녁 전담 필경사한테 보냈습니다. 그 분이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아주 얇은 종이인 청사진에 써서 보내온 걸 받아 다음날 아침 일찍 등사기로 밀어 보고서를 만들어 회의를 했습니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었다고나 할까요(웃음). 제가 회의 때 선대 회장님 앞에서 보고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담당자였습니다. 회장님이 죽 다 들으시고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바꿔라’ 지시하면 그걸 토대로 수정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대학 다닐 때부터 반도체 꽂혔다”
현 애플 CEO(최고경영자) 팀 쿡과 만난 이윤우 전 삼성전자 부회장. [이윤우]
“사실 대학 다닐 때부터 반도체에 꽂혔습니다. 1965년인가로 기억하는데 영문 잡지 ‘타임’지를 보는데 커버스토리가 ‘반도체 IC가 개발됐다’는 기사였어요. ‘바로 저거’라는 감이 확 왔습니다. 그때부터 ‘꼭 언젠가는 반도체 개발하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삼성에 들어간 이유도 전자사업을 한다고 했기 때문이고, 결국 반도체 사업을 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였습니다.
삼성NEC가 출범했을 때 ‘나를 보내 달라’고 손을 들었습니다. 당시 NEC에서는 진공관을 만들고 있었는데 진공관 다음으로 반도체로 갈 수 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었죠. 실제로 NEC본사는 막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고요.
그렇게 해서 경기 과천 허허벌판에 합작 공장을 짓게 됩니다. 그때만 해도 ‘반도체’가 뭔지 심지어 삼성NEC 안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저는 기회만 되면 ‘우리도 반도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본 NEC로부터 기술을 배워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 주장이 받아들여져 ‘그럼, 가장 기본이 되는 공정인 웨이퍼를 만드는 기술을 NEC에서 배워 오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절대 핵심 기술을 줄 수 없다는 NEC를 겨우 설득해 연수생들을 데리고 일본 NEC로 직접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일 쇼크가 터진 겁니다. NEC로 몰려오던 주문이 딱 끊기면서 일본 사람들 일거리가 사라졌습니다. 연수생들은 오죽했겠어요. 결국 운동장에서 풀 뽑고 돌 줍기 하다가 귀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래가 참 암울했던 상황이었죠. 내 인생도 이렇게 별 볼 일 없이 끝나나보다 맥이 탁 풀려 있는데 기적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삼성이 한국반도체라는 회사를 인수해서 반도체 사업을 본격적으로 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는 ‘당장 한국반도체로 보내 달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 사표를 쓰겠다고 일주일 무단결근까지 해서 겨우 승낙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다시 그의 말이다.
“바로 부천 공장으로 발령받아 본격적으로 반도체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1976년 일입니다. 다들 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죠. 잘 나갈 수 있는 커리어를 포기하고 남들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반도체에 꽂혀서 스스로 아오지 탄광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반도체와의 끝없는 전쟁을 벌이게 된 거죠.”
반도체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요.
“섬세한 반도체 생산 과정은 한마디로 예측 불가능의 연속입니다. 미세한 온도차 때문에 품질이 엉망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땐 밤에만 생산이 제대로 되고 낮에는 불량이 쏟아지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속출합니다. 하지만 전자라는 놈들이 규소(실리콘)판 위에 지도를 그리며 돌아다니면서 우리가 원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는 삼성반도체통신 이사와 기흥 공장장 기흥반도체연구소장을 맡게 된다. 오늘날 ‘기흥 밸리’를 만든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사유람단 격으로 미국 실리콘밸리에 파견돼 초기 사업계획서를 썼고 이후 곧바로 기흥에 대규모 집적회로(VLSI) 공장을 세우게 되면서 공장 설립을 총괄하게 됩니다.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돌아가야 하니까 거의 집에도 못 가고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죠. 당시에는 기술이 워낙 없다보니 만들었다 하면 불량품만 나와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제가 기흥을 맡고 부천 공장은 김광호 전 회장이 맡았습니다.”
‘기흥 밸리’ 탄생의 비화
자, 이제 본격적으로 ’기흥 밸리‘ 탄생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제조업에서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공장을 어디에 지을지가 매우 중요하다. 공업용수로 쓸 물도 풍부해야 하고 자재 수입과 제품 수출이 편한 곳에 있어야 한다.그런데 반도체 공장은 여타 제조업과는 유일하게 달라야 하는 점이 있으니 바로 먼지가 없는 청정지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생산은 미세 먼지가 한 톨만 떠다녀도 바로 불량이 나와 버린다. 이에 초고도 정밀성과 청정성이 유지돼야 한다. 공장에 들어가기 30분 전에는 담배도 피워서는 안 되고 여직원들은 화장도 금지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장 주변에 흙먼지가 많다거나 이미 다른 업종의 공장이 돌아가고 있으면 힘들다.
호암이 또 중요하게 고려한 항목은 서울과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인재들을 확보하는 게 가능할 것이었다.
유귀훈 씨가 쓴 책 ‘호암의 마지막 꿈’에는 당시 기흥 부지 선정 작업과 관련한 호암의 고민과 결정 과정이 소개돼 있다. 책에 따르면 공장부지 선정 작업은 ‘도쿄 선언’이 나오기 7개월여 전인 1982년 7월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서울에서 1시간 거리에 공기 맑고 고속도로에서 진입하기 쉬운 평당 1만 원 정도 땅 5만 평을 찾아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부동산 매입팀이 달라붙었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진척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삼성전자 수원공장과 신갈 저수지 사이에 있는 기흥 부지가 추천됐다. 경부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1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겉보기엔 잡목과 잡초만 무성하고 지형이 가팔라 누가 봐도 못 쓰게 생긴 땅이었다. 하지만 호암은 이건희 부회장, 이임성 박사와 함께 헬기를 타고 현장을 둘러보더니 ‘되겠다’면서 ‘여기로 하자’고 했다고 한다.
1차로 한 달 동안 9만2182평을 매입했는데 당시 삼성맨들이 땅을 팔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가시밭 투성이 산을 뒤지며 무연고자 분묘 이장까지 해주어 가며 전쟁 아닌 전쟁을 하는 심정으로 땅을 사들였다는 후문이다.
문제는 용도변경이었다. 땅 대부분이 산림보전지역이거나 논, 상수도 보호지역이어서 공장을 지을 수가 없었다. 자칫 무용지물이 될 판이었다. 용인군과 경기도를 시작으로 건설부, 농수산부, 산림청, 환경청 등 관련 부처를 대상으로 반도체 사업의 필요성과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전방위 설득작업이 시작됐다.
결국 청와대 경제팀 도움으로 1983년 6월말 전두환 대통령의 결재가 이뤄졌고 7월 5일 용도변경에 성공, 9월 12일 착공에 들어갔다. 도쿄선언이 나온 지 불과 7개월 만에 기적적으로 공장 건설이 시작된 것이었다. 땅을 사는 일에서부터 용도변경에 이르기까지 쉬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과정에서 한곳에서라도 어그러졌다면 지금의 삼성반도체도 없었다. 과연 이런 사실을 지금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삼성맨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문제는 공기(工期)였다. 이번에는 공장을 6개월 안에 만들라는 호암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기흥 1라인 공장은 83년 9월 착공해 그해 12월 2일 건물 상량식과 동시에 내부공사가 시작됐다.
설계는 일본 청수건설이 맡았는데 기술진이 그린 내부 설계도는 단지 참고용에 불과했다. 일본과 한국 사이의 큰 인프라 차이로 인해 설계도면대로 시공할 수 없는 상황이 속출했던 것이다. 본사에서 일일이 회의를 주관하면서 공사 진행 상황을 꼼꼼히 체크하던 호암은 예고 없이 불쑥불쑥 현장에 내려왔다. 그 덕에 현장 임직원들은 84년 5월 17일 준공식까지 하루도 발 뻗고 쉬지 못했다.”
공장을 6개월 만에 완성하라니
이윤우 전 부회장은 앞서 소개됐듯이 미국 체류 중 호암으로부터 ‘기흥 공장을 총괄하라’는 명을 받고 급히 귀국했다.“공장을 6개월 만에 완성하라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외국에서는 아무리 빨라도 2년, 최소한 1년 반이 걸리는 공사입니다. 이걸 6개월 안에 어떻게 끝냅니까. 집에도 못가고 텐트를 치고 자면서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매일 밤 11시에 회의를 하면서 그날 그날 문제점을 점검하고 내일 할일을 계획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콘크리트 양생이었습니다.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릴 수가 없으니 히터를 켜고 불을 때가면서 말렸어요. 두 번째 난관은 클린 룸이었습니다. 공장에 먼지 한 톨이라도 들어가면 안 되는데 여기저기가 공사판이니 흙이나 먼지가 오죽 많았겠습니까. 룸 내부 청소를 다 하고 나서야 팬을 돌렸는데 그러다 보니 기술자들이 모두 대 걸레를 들고 청소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습니다.
가로 세로 1피트를 큐빅 피트라고 하는데 보통 그 안에 0.1마이크론 이상짜리 먼지가 100만개가 들어 있습니다. 이걸 제로로 만든다는 게 말이 쉽지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먼지 붙은 채로 들어가면 절대 안 되고 여직원들은 화장도 안 됩니다.
지금은 클린 룸이 식품회사나 제약 회사 같은 첨단 공장에 많이 설치돼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걸 만들어본 사람이나 설치해놓은 회사가 없었습니다. 구경해본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결국 선대 회장은 일본의 스미즈라는 건설 회사에 설계와 건설을 맡겼습니다. 아무리 일본 사람들에게 맡겼다고 해도 실제로 현장에서 연결해 가동될 수 있도록 하는 건 또 저희들 몫 아니었겠습니까. 게다가 급한 건 우리지 그 사람들이 아니다 보니 한국의 ‘빨리 빨리’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동기 부여를 해가면서 정해진 시간 내에 공기를 맞추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톨게이트에서 공장 부지까지 이르는 4㎞ 구간
당시 공장장을 맡았던 이가 성평건 씨다. 한국비료와 삼성석유화학 공장을 지은 이로 호암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그가 기흥 공장 건설의 뒷이야기를 담아 펴낸 책 ‘관점을 바꿀 때 미래가 보인다’(1994년)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해본다.“통상 대규모 공사에는 숙소와 식당을 먼저 짓고 본 공사를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공장을 6개월 안에 완성하라는 절대 절명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창고를 사무실로, 가설 막사를 기숙사로 썼다. 하지만 임직원들은 물론 건설관계 요원 여사원들 모두 이런 열악한 환경에 대해 불평 한마디가 없었다.
6개월이라는 짧은 공기(工期) 때문에 설계와 시공이 동시에 진행되는지라 설계가 수정되면 시공도 바뀌어야 하는 위험 부담이 늘 상존했다. 매일 매일을 조마 조마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보내야 했다. 24시간 진행되는 공사를 날마다 감독하고 임직원들을 독려하며 일정을 계획대로 추진해야 하는 관리자들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창고 사무실에서 연탄불을 지피며 새벽 두세 시까지 일하기 일쑤였고 어떤 때는 일이 너무 많아서 불과 200여 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기숙사조차 가지 못해 일하던 자리에서 바로 야전침대를 펴고 새우잠을 자는 날도 많았다. 밤을 새우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기숙사 방도 모자라 한 방에 7, 8명이 함께 잤다.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를 때 바꿔 갖고 나왔다. 간간이 열리는 소주 파티가 심신의 피로를 달래는 유일한 취미이자 환기구였다.”
그의 회고록을 읽다 보면 스물 네 시간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며 산, 그 옛날 산업화 시대를 일군 아버지들의 초상이 겹친다. 또 대한민국 반도체 신화가 거저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에 숙연함마저 든다. 다시 그의 글 일부를 인용한다.
“세계 유례없는 짧은 공사기간, 그러나 실현시켜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과제 앞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정신적 공감대였다. 왜 우리는 반도체 사업을 하며 그것도 6개월 내에 진입해야 하는가를 모든 공사 참여자들에게 인식시켜야 했다.
무모한 목표에 걸맞게 무모한 정신무장으로 노력해줄 것을 부탁하는 내용의 벽보를 제작해 사무실, 식당, 임시 막사에 붙여놓고 외우도록 했다. 협력업체 납품업체에도 일일이 편지를 보냈다. 삼성에서의 경험이 성공하면 국내 사업 기반 확충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책에는 기흥1라인 공장 건설과 관련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대한민국 ‘빨리빨리’ 정신이 빛을 발한 상징적 에피소드도 소개돼 있다.
“반도체 공정 중 가장 핵심적인 공정이라 할 수 있는 게 웨이퍼 위에 사진을 찍는 방식으로 회로를 현상하는 사진 공정이다. 여기에 쓰는 사진기를 미국에서 수입해야 하는데 정밀 광학기계여서 진동에 매우 약했다. 공항에 내려지는 순간부터 생산 라인으로 들여올 때까지 마치 유리그릇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민 끝에 김포공항에서 기흥 공장까지 운반 리허설을 했다. 트럭에 기계와 똑같은 무게의 짐을 싣고 차량 속도를 조절하면서 진동을 측정한 결과, 시속 40km 이상으로 달리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고 실제로 운송할 때는 지휘감독자를 정하고 시속 30km 이하로 운반하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기계를 들여오는 날이 됐다. 김포공항에서부터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기흥 톨게이트까지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해서 진입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마지막 고비는 톨게이트에서 공장 부지까지 이르는 4㎞ 구간이었다. 비포장 도로였던 데다가 트럭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비좁은 길이었다. 이 마지막 4㎞ 구간에서 실패하면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것이었다. 다시 성평건 씨의 육성이다.
“그런데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오전 일찍 공항으로 나설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비포장이었던 도로가 싹 포장이 된 것 아닌가. 게다가 2차선으로 확장까지 되어 있었다. 오후 다섯 시 경이었다. 내 눈 앞에 벌어진 광경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기계의 무사 운반을 위해 전 직원들이 동원되어 불과 몇 시간 만에 도로포장을 마쳐 놓았다는 것이었다.”
호암의 흥분
삼성전자 반도체 성공신화를 담은 ’외발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다‘(한상복 저)에는 물과 전기를 끌어오는 과정의 어려움도 소개돼 있다.“용수는 근처에 신갈 저수지가 있어서 쉽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공급량을 계산해 보니 형편없이 부족했다. 지하수를 다섯 군데나 팠지만 물이 모자라 부득이 삼성전자 수원 공장 물을 파이프로 끌어들여 썼지만 삼성전자가 물 부족을 겪게 됐다. 결국 용인군을 설득해 광역 상수도로부터 직접 물을 끌어옴으로써 해결했다. 양질의 전기를 확보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반도체 공장은 단 한 순간의 정전도 용납되지 않는다. 통풍이 멎기 때문에 먼지가 발생하고 화학 물질 농도가 자동으로 조절되지 않아서 불량이 나오기 때문이다. 정전 한 번에 발생하는 손실은 12억~13억 원에 달한다.
전압도 일정해야 했다. 결국 철탑을 세워 단독 선로를 끌어들임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영하 15도라는 혹심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당 임원부터 시공업체 기능공들까지 전 임직원이 일심동체가 되어 스물네 시간 비상체제로 공사를 강행한 덕분에 드디어 공장은 6개월 만에 완성된다.
불도저와 덤프트럭 등 총 장비 2000여 대가 동원됐고 26만 명이 공휴일은 물론 신정, 구정도 쉬지 않고 밀어붙인 대역사(大役事)였다. 이로써 국내 반도체 산업의 메카 ‘기흥 밸리’가 태어나게 됐다. 그러나 이는 서곡에 불과했다. 10년 만에 세계 정상을 오르는 데 있어 첫 걸음이었을 뿐이었다.”
1983년 9월 12일 착공한 기흥 제1라인 건설공사는 마침내 꼭 6개월 18일 만인 1984년 3월 말일에 완공된다. 호암은 당시 흥분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선진국의 관례로는 18개월 이상이 걸린다고 하는 걸 3분의 1로 단축시켰다. 건설 공정과 시 운전 현장을 지켜본 미국의 인텔, IBM, 일본의 유수 메이커 관계자나 전문가들도 경탄을 감추지 못했다,
불철주야 작업 스케줄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열성을 다했던 작업 인원은 연 20만 명에 이르렀다. 하루도 빠지지 않은 공휴일 출근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한국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장래에 큰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자신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