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약체 정부로 출발한 참여정부의 객관적 위상은 대통령의 항변이 단순히 엄살이나 정치적 수사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치가 살아있는 생물 같은 존재라는 사실과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이 갖는 엄청난 상징적·실질적 권한, 그리고 대통령이 잘할 것이라고 믿는 취임 초기 대다수 국민들의 선의에 찬 희망과 기대 등을 종합해보면, 탄핵국면까지 밀려온 지금의 상황에 대해 노 대통령은 총체적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참여정부의 출범은 대통령 개인의 성패로 환원될 수 없는 중차대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앞선 두 문민정부의 민주주의 실험과 개발시대 국민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경제발전의 성과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합과 화해의 정치적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취임 직후의 몇 가지 상징적 제스처를 제외하면 노 대통령은 줄곧 분열과 대립의 길을 걸어옴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자신의 입지를 더욱 위태롭게 하는 근본적 잘못을 범했다.
대표적인 예로 탄핵위기의 실질적 발원점이 된 민주당 분당사태를 복기해보자. 물론 대통령과 그 열혈 지지자들은 분당이 불가피했음을 상황논리를 동원해 정당화하고 있다.
민주당 내부에 지역감정에 기댄 지역정치 도매상들이 맹주로 버티면서 당내 개혁을 방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소수약체에 불과한 지지계층을 다시 쪼개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는, 세계정치사에 드문 자충수를 둔 것은 다름아닌 대통령 자신과 그 맹목적 지지세력이었다.
그 구성원이나 지지자들을 보자면 차별점을 찾기 쉽지 않은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의 간극을 인위적으로 벌려 서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만든 것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통령의 정략적 언행 탓이 크다. 민주당을 지역주의 정당으로 규정하고,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돕는 셈’이라는 등의 발언으로 민주당의 위기의식을 자극해 과거의 동지를 불구대천의 적으로 만들고 만 것이다.
노 대통령의 ‘배반’에 대한 분노와 피해의식에 눈이 먼 민주당이 탄핵정국에서 보인 ‘한·민공조’ 같은 각종 ‘오버’ 행위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서로 연대해 동지가 될 수 있는 세력조차 내쳐 적으로 만듦으로써 정국불안을 구조화시키고 심화시킨 노 대통령의 협량(挾量)과 뺄셈의 정치도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고 호시탐탐 권력 탈환의 기회를 노려왔던 거야의 불순한 의도가 현실화될 수 있는 계기를 대통령 자신이 제공한 셈이며, 탄핵에 유보적이던 의원들까지 자극해 오늘의 사태를 불러온 탄핵 전날의 신중치 못했던 대통령 기자회견은 그 압축적 사례에 불과하다.
탄핵정국에서 드러난 한국정치의 폐허 위에서 우리는 직업정치인의 임무와 정체성을 다시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사회학의 거장인 막스 베버(Max Weber)는 국가를 운영하는 프로 정치인의 소명을 ‘열정, 균형감각, 책임의식’에서 찾았다. 특정한 영토 위에서 국민의 안녕과 공동체의 안전을 보장하는 정치조직체인 국가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독점하면서 다중에게 합법화된 물리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좌우하는 정당화된 폭력 위에 입각해 있다는 이 기본적 사실이야말로 정치인과 정치권력에 개인적 도덕차원과는 다른 고유의 윤리적 책임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현실정치는 책략과 권력의지를 필연적으로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직업정치인의 임무는 권모술수라는 그림자와 주관적 도덕성이라는 빛 사이의 이분법적 대립을 뛰어넘는 고차적 책임윤리의 지평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베버는 ‘결과를 문제삼지 않는 궁극적 목적의 윤리’와 ‘자기행위의 예견 가능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책임윤리를 구별한다.
종교의 윤리가 궁극적 목적윤리의 전형이다. 이런 윤리를 설파하는 사람들은 선의의 행위가 초래할 수 있는 결과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러나 제도화된 폭력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일하는 직업정치인은 ‘선은 선에서, 그리고 악은 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일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면서 주관적 도덕성의 차원을 넘어서는 입체적이고 거시적인 책임의 윤리에 봉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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