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극기 휘날리며’는 6주 앞서 개봉된 ‘실미도’가 세운 기록을 빠르게 경신중이다. 배급사는 1200만 관객을 예상하고 있다. 순제작비만 149억원이 투입됐다. 관객 550만~600만명이 들어야 본전을 건질 수 있는 투자 규모다.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더라면 제작사인 ‘강제규필름’은 물론이고 한국영화에 재앙이 됐을 것이라고 강 감독은 말한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나면 결코 위험한 도박만은 아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강 감독은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기획단계에서 최종 제작까지 2∼3년씩 공들이는 과작(寡作)의 감독이다. 1996년 ‘은행나무 침대’로 데뷔해 ‘쉬리’(1999) 그리고 이번에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고작 세 편을 연출했다. 그러나 세 영화 모두 작품성을 인정받고 흥행에 성공해 강 감독을 한국영화의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강제규필름은 서울 양재동 3층짜리 아담한 건물에 세들어 있다. 강 감독이 미국에서 ‘태극기 휘날리며’의 배급을 협의하고 귀국한 다음날 오후 2시에 인터뷰 약속이 잡혔다. 강 감독은 약속시간보다 10분 가량 늦게 도착했다. 그때까지 점심을 먹지 못했단다. 그는 필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인근 중국집에서 배달해온 자장면을 먹었다. 허겁지겁 점심을 때우는 강 감독을 보고 동행한 사진기자가 “영화재벌이 자장면을 먹는군” 하고 말했다.
자장면 먹는 ‘영화재벌’
감독실에서 자장면 그릇이 나간 뒤 청바지에 양가죽점퍼 차림의 강 감독과 마주앉았다. 책상 뒤에는 각종 상패와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요즘 TV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에 출연하는 탤런트 박성미(42)씨가 그의 부인이다. 사진 속에는 큰아들 윤원(10)만 보이고 늦둥이 지완(2)은 빠져 있다.
강 감독은 방 주인이 앉는 큰 소파 대신 작은 의자를 골라 앉았다. 인터뷰어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예의를 차리는 것일까.
-‘태극기 휘날리며’의 흥행 비결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사회적·심리적 분석은 단서를 끄집어내는 끈은 될 수 있지만 뿌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관객이 영화관을 찾는 것은 영화에서 만족감을 얻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재미있고, 영화에서 강력한 떨림을 받고, 영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그 무엇이 충족되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것이죠. 그것이 만족지수로 표시됩니다. 맥스무비 조사에 따르면 ‘태극기 휘날리며’의 관객 만족지수는 94%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84%대입니다. 작품명을 거론할 순 없지만 만족지수가 낮은 어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것은 영화외적 요소의 영향 때문이죠. 영화 주변에 조성된 환경이 관객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것을 꼭 나쁘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필자는 ‘만족지수가 낮은 데도 영화외적 요소의 영향으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뭘까 하고 궁리하다 어림짐작으로 때려잡았다. 필자의 추측이 맞았던지 강 감독이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그 영화의 제목을 절대 써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후에 필자의 집으로 전화를 해 같은 부탁을 했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촉발하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강 감독과의 약속을 지킨다.
“과거 ‘쉬리’의 만족지수가 92%였어요. 그때 가장 높은 만족지수를 올린 영화였습니다. 당시 ‘타이타닉’ 만족지수는 87~88%였습니다. 만족지수와 관객 수는 정확히 비례합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6·25라는 매개를 통했기 때문에 크게 어필할 수 있었다는 말이 나오지만 기획할 때는 모두 ‘올드한 소재’라며 말렸습니다. 잘되고 나니까 이렇게저렇게 사후해석을 하는 거죠.
일본에서도 상업성에선 부정적으로 봤어요. 강 감독이 ‘쉬리’하고 나더니 감각이 퇴보했는지, 젊은 세대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한국전쟁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말이 나왔죠. 그래서 일본 쪽 투자를 받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여성들이 영화 선택권을 쥐고 있습니다. 여성의 80~90%가 전쟁영화를 싫어합니다. ‘블랙 호크 다운’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관객의 70%가 남성이었습니다. 여성이 기피하는 영화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한국전쟁이라는 올드 테마에 제작비 148억원을 투입한다고 했을 때 주위의 시각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죠.
우리는 소재 지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소재는 된다, 저러한 소재는 안 된다는 사고가 굳어 있습니다. 감독이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