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쿡 일행이 2,3차 항해 때 통과한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바다를 대상으로 한 탐험은 15∼16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를 세계사에선 ‘대항해 시대’라고 부른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1498년 인도 항로를 발견한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 세계일주 항해에 나섰다가 1522년 필리핀에서 목숨을 잃은 마젤란이 그 주역들이다.
이들의 대항해 성공은 베네치아·제노아 공화국 중심의 지중해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동시에 새로운 대서양 시대를 열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지구 표면의 70%를 차지하는 바다를 주된 활동무대로 삼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였으며, 나아가 인류의 세계 인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중세의 선각자들이 목숨을 바쳐 외친 ‘지구는 둥글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이 움직일 수 없는 ‘진실’로 밝혀지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15∼16세기에 들어 대서양과 인도양의 세계가 열렸다면 18세기는 태평양의 실체가 드러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주도한 국가는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동인도회사를 설립하는 등 아시아로 재빨리 눈길을 돌린 영국이었다.
바로 그 시절 영국왕실협회는 ‘미지의 남방대륙(Terra Australis Incognita)’을 찾을 목적으로 해군본부와 공동으로 태평양 탐사계획을 수립했다. 그 일은 캐나다 동부의 뉴펀들랜드 해안선을 측량하고 해도(海圖)를 작성한 뛰어난 선원이자 수로(水路) 측량가이며 관측가인 제임스 쿡(James Cook·1728~79)에게 맡겨졌다.
탐사대장 쿡은 요크셔 지방의 가난한 농장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쿡은 투지와 인내심이 강한 요크셔인답게 웬만한 역경에는 쉽게 굴하지 않았다. 어린시절 잡화점 점원으로 세상과 마주선 그는 열여덟 살 때 ‘휘트비’란 곳으로 가 퀘이커 교도인 마음씨 좋은 선주 존 워커 아래서 뱃일을 시작했다.
그의 일터는 워커 소유의 300t급 석탄 운반선. 바다가 얼어붙는 겨울, 비교적 한가한 틈을 이용해 낮엔 배를 정비하고 밤엔 수학을 공부했다. 근무태도가 남달라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젊은 나이에 석탄선 선장까지 오른 그는 그때부터 대수와 삼각측량, 항해술, 천문학, 선원 통솔법 등 항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것이 후일 그의 행동반경을 태평양과 남극해로 넓힐 수 있게 만들 줄은 당시 그를 아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출항일, 순풍이 불다
그는 27세 되던 해인 1755년, 장래가 보장된 선장을 그만두고 런던으로 가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그것도 가장 지위가 낮은 수병으로. 하지만 그곳에서도 승진을 거듭했고, 후원자도 생겼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캐나다 동부지역을 두고 관할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이른바 ‘7년 전쟁’ 중이었다. 그는 캐나다 현지로 파견돼 퀘벡 봉쇄작전에 참여했다. 그때 그의 측량술과 그가 작성한 해도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762년 12월, 그는 퀘이커 교도인 엘리자베스 배츠와 결혼해 이스트런던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달콤한 신혼 기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국 해군본부는 1768년 5월, 40세의 쿡에게 막중한 임무를 부여했다. 사람들은 출신이 비천하고 대형 선박을 지휘한 경험이 없는 데다 계급도 낮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그에게 태평양 탐사라는 큰일이 맡겨진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한 제독이 “쿡은 많은 이를 올바른 길로 이끌 것이며, 잘못 이끌 일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할 만큼 그는 천재성과 능력을 인정받았고, 또 당시 영국 해군에 그 일을 맡을 만한 적임자가 달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