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호

아우라의 파괴

  • 진중권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6-11-06 15:3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아우라의 파괴
    ‘아우라’라는 말은 벌써 일상용어가 됐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의 원작 앞에 선 느낌은 모나리자의 복제사진을 볼 때와는 다를 것이다. 원작을 둘러싼 어떤 분위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을 지금 여기서(hic et nunc) 보는 느낌. ‘아무리 멀리 있어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 이것이 아우라 체험이다. 발터 벤야민은 사진이나 영화 같은 복제기술이 아우라를 파괴한다고 말한다. 복제기술은 원작을 수없이 복제해 언제 어디서라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아우라 체험은 예술이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던 과거의 흔적이다. 복제기술은 아우라를 파괴함으로써 작품을 대하는 엄숙한 종교적 태도를 냉정한 세속적 태도로 바꾸어놓는다. 그래서 그는 아우라의 파괴를 진보적 현상으로 본다. 하지만 그가 모든 아우라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종류의 아우라, 특히 생태적 성격의 아우라만은 그도 깨져서는 안 된다고 믿는 듯하다. 예를 들어 자연의 아우라 같은 것은 보존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전시된 불상의 무릎에 지폐와 동전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한국 사람 중에는 박물관에서까지 종교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벤야민이라면 아마 이런 종류의 아우라는 깨야 한다고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의 기억. 처음 보는 대나무 숲에서 마치 숲 전체가 살아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우라’라는 낱말의 원뜻은 ‘숨결’이다. 이런 자연의 아우라는 마땅히 보존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우라는 파괴됐다. 파괴되지 말아야 할 것까지 사정없이 파괴됐다. 아우라 체험이 꼭 필요한 곳이 있다. 가령 교회와 같은 종교적 장소. 가톨릭교회에는 아직 분위기가 남아 있으나, 한국의 개신교회에서 신(神) 앞에 선 아우라 체험을 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여의도에 있는 대형 교회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열리던 장충체육관을 연상시킨다. 교회 건물이 검투사의 혈투와 순교자의 처형이 이루어지던 아레나, 즉 스펙터클을 제공하던 로마의 콜로세움을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강의하러 가는 길에 청량리에서 해괴한 건물을 보았다. 이마에 ‘XXX강북성전’이라 써붙였다. 그런데 정작 건물 외관은 ‘성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미끈한 비즈니스 빌딩과 다를 바 없다. 차라리 ‘XXX.com’이라고 써붙이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나다를까, 그 건물의 아래 부분은 은행과 기업이 들어서 있어, 성전 앞에서 돈놀이와 장사를 하던 이들을 채찍으로 다스렸다는 예수의 일화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성(聖)과 속(俗)의 구별을 혁파하는 것은 다른 대형 교회들도 마찬가지다. 상가에 세 들어 사는 작은 교회들은 고깔모자를 썼다. 이 알량함에는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다. 고깔모자 쓴 교회들은 낮에 보면 생일잔치하는 유치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위의 시뻘건 네온 십자가 때문에 낮의 유치원은 밤마다 음산한 공동묘지로 변한다. 독일에는 한 동네에 교회가 하나밖에 없으나, 한국에는 교파도 많고 교회도 많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십자가라면 아우라가 있겠지만, 한눈에 열댓 개씩 보이는 십자가의 시뮬라크르에서 아우라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게다.



    대형 교회에서는 예배장면을 TV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서울 본점에서 하는 목사의 설교를 전국에 흩어져 있는 지점들로 생중계하는 것도 흔히 본다. 성전에서 행하는 의식에 직접 참여하여 ‘지금 여기’의 체험을 하는 게 아니라, 미디어로 실현된 유비쿼터스를 통해 ‘언제 어디서라도’ 예배의 복제물을 소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신께 드리는 예배 자체마저 원작이 아니라 복제다. 이 기술 복제된 예배에서 아우라를 기대할 수는 없다.

    사찰건축의 전통 덕분에 불교에는 그래도 아우라가 남아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아우라의 파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어느 사찰에서 스님이 염불 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정작 소리에 끌려 법당에 가보니 스님이 없다. 그의 빈 자리를 대신하여 녹음된 염불의 금속성 소리가 퍼런 새마을 스피커를 통해 반복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염불을 하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침묵과 고요의 시간으로 놔둘 것이지, 돈 들여가며 애써 분위기를 깨는 이유는 뭘까.

    가끔 택시에서 운전사가 틀어놓은 유명한 목사의 설교 테이프를 들을 때가 있다. 자기가 듣는 건지, 아니면 손님 회개하라고 트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복제된 설교는 CD나 테이프에 담겨 상품으로 판매된다. 가끔은 법당에 다니는 운전사를 만나기도 한다. 이때는 민망할 정도로 유치한 음악을 배경으로 기름진 목소리를 가진 성우가 불교의 법어를 읽어주는 테이프를 듣게 된다. 이 복제된 테이프는 불교라는 종교가 가진 신비한 분위기를 키치로 간단히 전락시켜버린다.

    오래 전에 한국에 온 독일 유학생과 인사동의 경인미술관에 간 적이 있다. 지금은 한쪽 건물을 뜯어 남산 한옥촌에 갖다놨지만, 그때만 해도 경인미술관은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한국적인 것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다”고 했다. 사실 서울에서 궁궐 몇 개 보고 나면 더는 볼 게 없다. 워낙 외침(外侵)도 많이 받고, 일제의 손에 훼손도 많이 당하고, 그 후엔 우리 스스로 다 깔아뭉갰기 때문에 유적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사실 많지 않다. 그나마 있는 유적도 돈 들여 아우라를 깨기 일쑤다. 경주의 천마총에 갔을 때의 일이다. 1000년의 역사를 묻고 침묵하는 고분 사이를 산책하고 싶어 들어갔는데, 입구에서부터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가도 가도 음악이 그치질 않기에 보았더니 약 10m 간격으로 산책로 전체를 스피커로 도배해 놨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은 서양의 왈츠 음악과 중국의 경음악. 관광객을 위한 배려란다. 누구의 발상일까. 알 수 없다. 어쨌든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태진아 노래를 듣고 싶어할 그런 사람일 게다.

    청계천도 그렇다. 말이 문화복원이고 생태복원이지, 사실 거대한 인공 분수대를 새로 지어넣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수많은 시민이 이 거대한 토목공사의 산물을 보고 찬탄을 보낸다. 유적의 ‘복원’을 이런 식으로 해놓고 심지어 ‘업적’으로 인정받는 나라는 아마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이다. 최소한의 문화적 배려 없이 유적의 아우라를 파괴하는 가장 큰 요인은 물론 관료와 시민의 몸속 깊숙이 각인된 1970년대식 개발주의의 토목공사 마인드다.

    언젠가 강촌에 갔을 때의 일이다. 거기에 있다는 폭포를 향해 숲길을 걷다가 거대한 입간판을 보았다. 거기에는 숲의 효용을 친절히(?) 설명해주는 피자 모양의 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목재 생산 효과 1년에 몇천억원, 산소 생산 효과 몇조원, 레저 산업 효과 몇천억원. 이렇게 숲의 가치도 일일이 돈으로 환산해줘야 이해하는 모양이다. 하긴, 학교에서도 자연을 ‘자원의 보고’로 가르치지 않던가. 행여 잊을세라 입간판이 일깨워주는 이 경제적 마인드는 강촌 숲의 분위기를 단번에 깨버렸다.

    제주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사업가가 성산 일출봉 위로 케이블카를 건설하고 그 인근에 위락단지를 짓는 개발계획을 발표했다고 한다(나중에 사기극으로 끝났다는 말을 들었다). 당연히 환경단체에서는 반대할 수밖에. 그런데 거기서 정말 재미있는 플래카드를 봤다. ‘지역 개발 가로막는 환경단체 각성하라.’ 외국에서라면 외려 주민들이 개발에 반대할 게다. 토지를 무엇보다 재산권으로 이해하는 마인드로 인해 조상 대대로 자신들이 살아온 땅의 분위기마저 인정 못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다른 곳에서 아우라를 ‘눈길의 마주침’으로 정의한 바 있다. 자연의 아우라란 결국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1인칭-3인칭의 관계’가 아니라 ‘1인칭-2인칭의 관계’로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만금에 사는 수억의 생명을 대신하여 말을 한다”는 수경 스님의 얘기는 개발 못 해 못산다고 믿는 주민에겐 배부른 자의 낭만적 헛소리로 여겨질 뿐이다. 개발주의 마인드는 대한민국 전체의 습속이다. 전북 주민들은 그 습속의 보편성에서마저 자신들이 소외됐다고 느낄 뿐이다.

    경제적 여유와 함께 찾아온 단체여행의 문화는 아우라의 파괴를 외국으로까지 연장한다. 보리스 그로이스의 지적대로 기술복제시대에는 여행도 대량으로 복제된 상품이 된다. 수많은 여행객이 똑같은 코스, 늘 똑같은 얘기, 늘 똑같은 숙소, 늘 똑같은 음식을 거친다. 이는 한국만의 얘기가 아니라 전세계에 공통된 현상이다. 기술복제시대에 내가 다녀온 장소란 동시에 다른 많은 사람도 다녀온 장소다. 이로써 장소의 체험이 가진 고유성은 파괴된다.

    얼마 전만 해도 해외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의 관광객들은 어딘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어렵게 찾아와서는 사진만 찍고 서둘러 다른 데로 가버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being)’는 체험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진으로 남기는, ‘언젠가 거기에 있었다(having been)’는 사실의 증거. 그 사진들은 앨범이나 CD, 혹은 하드디스크에 담겨 아우라와 반대되는 체험, 즉 ‘아무리 멀리 있어도 어떤 가까운 것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체험을 매개할 것이다.

    카메라는 입학식이나 결혼식, 혹은 소풍이나 여행 다닐 때에나 들고 다니는 물건이었으나, 오늘날 카메라 폰이든, 디지털 카메라든, 한국인의 주머니 속에는 늘 카메라가 있다. 이로써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언제 어디서라도 시각적으로 인용 가능해졌고, 언제 어디서라도 복제 가능한 상태가 됐다. 이 전면적인 시각적 복제의 문화 속에서 장소와 시간,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물이 갖고 있던 아우라는 총체적으로 파괴된다. 아우라의 파괴는 전면적이며 총체적이다.

    아우라의 파괴
    진중권

    1963년 서울 출생

    서울대 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언어철학)

    現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 칼럼니스트

    저서 :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미학 오디세이’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등


    교회에서 경건함을 느끼고, 자연이 내뿜는 숨결을 느끼고, 유적에서 과거의 영욕을 느끼는 것이 타파해야 할 ‘전근대적’ 태도라면, 세계에서 한국만큼 폭력적으로 근대적인 나라도 없다. 사찰에서 엄숙함을 느끼고, 자연이 지르는 비명을 듣고, 유적에서 보존해야 할 세계를 보는 것이 지향해야 할 ‘탈(脫)근대적’ 가치라면, 이때에도 다시 한번 한국만큼 적나라하게 근대적인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대한민국은 교육부를 동시에 인적자원부로, 문화부를 동시에 관광부로 부르는 나라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