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호

출산 위한 난자·정자 혈투 “피도 눈물도 없다”

‘오징어 게임’보다 냉혹한 ‘생식 게임’의 세계[난임전문의 조정현의 ‘생식이야기’]

  • 난임전문의 조정현

    입력2021-11-11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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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첫 관문인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 참가자들이 술래에게 다가가는 과정이 사정된 정자가 나팔관 안 난자를 만나러 가는 모습과 닮았다.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첫 관문인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 참가자들이 술래에게 다가가는 과정이 사정된 정자가 나팔관 안 난자를 만나러 가는 모습과 닮았다. [넷플릭스 제공]

    지난 주말, 요즘 가장 핫한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정주행’했다. 도대체 어떤 드라마기에 전 세계 시청자를 사로잡았다고 난리법석인지 궁금했다. 과연, 몰입도가 남달랐다. 월가에서 콘텐츠 경쟁력을 호평하고, 유명 외신들이 ‘엄지척’을 할 만했다.

    이 드라마에서 456명의 참가자는 죽을힘을 다해 게임에 임한다. 상금 때문에 목숨을 걸었고, 살아남아야 상금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비평가들 사이에서 ‘오징어 게임’은 심오한 철학적 메시지가 담긴 작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필자는 여기에 생식학적 관점에서 이색적인 부연 설명을 하고 싶다. 최근 들어 ‘헝거 게임(배고픈 자들의 생존 게임)’과 ‘데스 게임(목숨을 건 생존 게임)’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인기몰이를 하는 이유는 생존 게임 자체가 인간과 동물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생식’ 전쟁과 아주 많이 닮아서다.

    인류가 생존 게임에 열광하는 이유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고 했다. 강하다고 누구나 살아남는 게 아니다. 운(運)이 따라야 하며 이기적이어야 승자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오징어 게임’에 참여한 자들을 떠올려보라. 승자독식(勝者獨食) 경쟁에서 성공하기 위해 경쟁자뿐 아니라 정(情)을 나눈 이도 가차 없이 속이고 짓밟는 짓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생결단 승부는 생식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생존은 인간의 본능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세포(몸)가 기억하는 무의식이라 할 수 있다.

    난자(생식세포)만 해도 그렇다. 매달 단 한 개의 난포(난자)만이 최종 선발돼 배란의 기회를 얻는다. 매달 수십 개의 난자가 생리를 시작으로 성숙되지만 감수분열 과정에서 능력과 자원이 탁월한, 될성부른 으뜸의 난자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고 나머지는 기꺼이 퇴화의 길을 선택한다. 오직 1등에게만 생명 잉태 기회에 참여할 자격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 두 개인 난소에 난자 수십만 개가 있어도 평생 400~500회 배란에 그친다.

    어디 그뿐인가. 난자가 정자를 만나 수정에 이어 자궁 내 착상에 성공한다 해도 배아의 세포분열이 부진하거나 염색체 이상 등으로 건강 상태에 문제가 생기면 자연 유산 시스템(자연적 방어벽·natural selection)이 작동한다. 이것만 봐도 생식의 세계가 얼마나 냉혹한지 알고도 남을 일이다.



    반면, 정자의 운명은 ‘오징어 게임’ 주인공 기훈(이정재 분)이 맞이하는 치열한 분투와 운(運)을 닮았다. 정자가 사정(射精)되고 여성의 나팔관 안에서 기다리는 난자를 만나러 가는 과정이 결코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정자가 여성의 질 속에 사정(射精)되기까지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과 유사한 과정을 겪는다. 술래가 눈을 감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동안 조금씩 술래 가까이 다가가고, 고개를 돌렸을 때는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이 게임의 참가자들처럼 정자는 술래인 아내의 호흡과 흥분에 맞춰 진격해야 한다. 드라마에서 이 게임을 통과한 참가자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듯 정자도 사정되자마자 절반이 죽어버린다.

    사정 후 살아남은 정자는 ‘오징어 게임’ 두 번째 관문인 ‘달고나 뽑기’ 같은 과정을 거친다. 일명 ‘뽑기’로 통하던 추억의 놀이를 떠올려보자. 국자에 설탕을 넣고 연탄불로 녹인 달고나(설탕의 일본어 표현)를 쇠판 위에 엎은 뒤 떡살 무늬를 찍듯 동그라미, 세모, 별, 우산, 곰돌이 모양 틀로 찍어 이 모양대로 온전히 떼어내는 것이 미션이다. ‘달고나’ 뽑기 과정은 쉬워 보여도 결코 쉽지 않다.

    1970~80년대 아이들이 즐기던 ‘뽑기’가 어째서 정자의 여정과 비슷한지 궁금할 것이다. 정자들은 질(膣)을 무사히 통과했더라도 자궁 입구(자궁 아랫부분 경부)까지 달려가는 과정에서 대부분 탈락한다. 정자는 산성에 매우 약해 질강 내의 유산균이 만들어내는 유산의 산성 환경을 신속하게 통과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주인공이 달고나 뽑기를 할 때 우산 모양을 오롯이 떼어내기 위해 혓바닥으로 핥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설탕판을 녹이는 장면은, 마치 산성 환경을 피해 자궁으로 진입하려는 정자의 잔꾀를 보는 듯하다. 정자는 알칼리성을 띠는 정액 덕에 질 속의 산성과 위태로운 평형을 유지하며 자궁으로 무사히 진입할 수 있다.

    흥미진진하게도 ‘줄다리기’ 게임과 ‘징검다리’ 게임은 정자의 세 번째 관문을 보는 듯했다. 정자가 자궁 안까지 무사히 진입했다 해도 좌측 혹은 우측으로 뻗어 있는 길 중 한 곳을 선택해야 한다. 나팔관 내 팽대부(ampulla)라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난자를 만나야 수정에 도전장이라도 던질 수 있다. 문제는 정자 입장에서 난자가 어느 쪽 나팔관 내 팽대부에서 기다리고 있는지 알 턱이 없다는 사실이다.

    운(運)은 생식의 세계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정자가 온갖 장애물을 뚫고 난자 옆까지 무사히 도착해도 난자 벽을 뚫고 들어가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 마치 ‘오징어 게임’에서 유리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과 비슷하다. 징검다리 게임은 16분 안에 18칸의 유리 징검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게임이다. 어느 징검다리가 강화유리인지, 일반 유리인지 알 길이 없다. 오직 앞서간 자의 불행(실수)으로 무사 여부를 확인할 수 있기에 뒤따라가는 자가 더 유리하다.

    난자 벽을 뚫는 정자. 한 난자에는 하나의 정자만 들어갈 수 있다. [GettyImage]

    난자 벽을 뚫는 정자. 한 난자에는 하나의 정자만 들어갈 수 있다. [GettyImage]

    깐부가 있어 다행인 현실

    정자 역시 후발주자가 유리하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간신히 난자 근처에 도달한 정자들 가운데 선두 정자는 난자의 벽을 녹이기 위해 머리에 있는 첨체를 터트려 효소를 분비한다. 그러다 지치면 다음에 도착한 정자가 이어서 효소를 분비해 난자 벽을 녹이는 식으로 미션을 수행한다. 난자 벽 녹이기에 헌신한 정자들의 희생 덕에 뒤늦게 도착한 정자는 벽 안으로 잽싸게 들어가 버린다. 힘 좋고 빠른 녀석(정자)은 남 좋은 일만 시키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셈이다.

    돌이켜 보면 강이나 개천의 징검다리는 정말이지 우리 세대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일정 간격으로 놓인 큰 돌을 헛딛거나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양말, 신발, 바지가 다 젖고 만다. 이런 낭패를 보지 않으려면 앞에 가는 친구가 밟는 돌을 유심히 쳐다보며 뒤따르는 것이 상책이다.

    마지막으로 생식의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생존 게임은 ‘동물의 짝짓기’다. 동물 수컷들은 암컷과 짝짓기를 하기 위해 온갖 혈투를 벌이는 건 물론이고 암컷에게 선택되기 위해 화려함을 한껏 뽐내야만 한다. 동물 암컷은 앞으로 태어날 새끼에게 생존 가능성이 높은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해 오직 힘센 수컷만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동물적 생식 본능에 입각해 남편감을 고른다면 얼마나 참혹할까. 여성에게 선택될 남성이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싶다. 솔직히 필자는 많은 여성이 남편감을 고를 때 하나부터 백까지 따지는 것을 생식학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다행히 인간 세계에는 상대의 능력만 보고 남편감을 고르는 여성도 있지만 상당수는 심리적인 이끌림(feeling)을 더 중시하며 ‘사랑’과 ‘정’이라는 감정을 바탕으로 배우자를 선택한다.

    인간의 생존 게임과 생식의 세계에서 확연히 다른 점은 ‘깐부’라는 관계 형성 여부다. 추억 속 ‘깐부’는 놀이기구인 구슬이나 딱지를 공유하는 관계로 ‘깐부’끼리는 네 것, 내 것을 따지지 않는다. 반면 생식의 세계에는 깐부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난자를 뚫고 들어간 정자는 다른 정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다정자 침입’을 원천 봉쇄한다. 한 난자에 오직 한 정자만 진입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인간 세상에 깐부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힘든 고난이 닥쳐도 혼자가 아니기에 서로 돕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조정현난임 #오징어게임 #생존게임 #신동아


    조 정 현
    ● 연세대 의대 졸업
    ● 영동제일병원 부원장. 미즈메디 강남 원장.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교수
    ● 現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
    ● 前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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