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호

환상극장

신선이 되고자 한 살인자, 남궁두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2-05-1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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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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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삶이란 얼마나 따분한가? 안 그런가?”

    느닷없이 나타나 허락도 없이 옆자리에 앉은 사내는 그렇게 속삭였다. 그는 계속 뭐라고 속삭였지만 목소리는 저물녘 바람에 실려 멀리 변산 앞바다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고요히 바닷가 풍경에 몰두하고 싶었던 허균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서해 바다와 하늘을 심홍색으로 물들인 웅혼한 낙조는 어느 순간 두 사람 사이의 침묵만큼이나 무거운 어둠이 되어 가라앉았다.

    “뉘신데 이 늦은 시각 변산 바다를 찾으셨는지?”

    낯선 사내의 나이를 가늠하며 허균이 그제야 물었다.

    “남궁두라 하지. 온 세상 멋대로 떠도는 도사라고나 할까? 그대보단 나이가 많으니 사형이라 불러도 좋고!”



    상대 옆모습만으로는 도대체 연륜을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범상치 않은 인물임엔 분명해 보였기에 허균은 고개 숙여 예의를 갖춘 뒤 물었다.

    “사형이라 함은 같은 스승을 뒀을 때야 가능한 호칭일 터, 혹 우리 사이에 그런 인연이라도 있었습니까?”

    상대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허균을 노려보았다. 힐끗 그의 정면 얼굴을 살핀 허균은 숨이 멎을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희미한 달빛에 드러난 남궁두의 얼굴에선 살아 있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표정 없이 공허한 눈빛은 바로 앞에 앉은 허균의 두개골을 투과해 그 뒤쪽 더 먼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남궁두가 벗은 삿갓을 거꾸로 뒤집어 해변 모래밭에 꽂더니 바람에 펄럭이는 긴 머리카락을 추스르며 속삭였다.

    “봉은사 일을 잊었던가?”

    봉은사에서의 만남

    둘째 형 허봉 손에 이끌려 한양성을 벗어나 처음으로 한강을 건넌 어린 허균은 이름난 대찰인 봉은사를 찾았다. 불교에 심취해 있던 허봉은 유난히 호기심 많고 영특했던 아우에게 친한 승려 한 명을 소개해 주고 싶었다. 바로 사명당이었다. 법당 뜨락 한가운데 우뚝 선 채 물끄러미 허균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사명당이 입을 열었다.

    “아들처럼 아끼는 친동생이라 그랬나? 재주를 타고나기는 했는데, 그 재주가 명줄을 끊는 형국이구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진 허봉이 아우의 등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다시 살펴봐 주시게! 우리 양천 허씨 가문의 보배일세. 재주가 너무 승하다면 조금 줄이면 될 일 아니던가?”

    빙그레 미소 짓던 사명당이 큰 소리로 웃고 나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균아! 날 보아라. 할! 용이 돼 높이 오르려 말고 낮고 낮은 웅덩이의 이무기로 살렷다! 할! 남을 도울 중 팔자도 아니니 붓이나 꺾지 말고 죽을 때까지 쓰고 또 써라!”

    말을 마친 사명당은 가사 자락을 휘날리며 법당 쪽으로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허봉은 허리를 굽혀 동생 귀에 대고 속삭였다.

    “스님 말씀을 너무 깊게 새겨듣지는 마라. 사람의 명은 하늘이 주지만, 하늘이 어디 한군데 머물러 있더냐? 금방 다녀올 터이니 예서 잠시 기다려라.”

    허봉이 급히 사명당 뒤를 따라 법당으로 사라지고 나서 허균은 홀로 절 섬돌에 걸터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형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바닥에 태극 문양을 그리며 놀던 소년의 작은 몸 위로 갑자기 큰 그림자가 다가와 뒤덮었다. 그림자가 말했다.

    “내가 너의 명수를 늘려줄 수 있다.”

    허균이 고개를 들어 그림자를 만든 이를 올려다봤지만, 해를 등지고 선 상대 얼굴은 검게 뭉개져 있었다. 검은 얼굴이 다시 말했다.

    “너의 수명을 내가 더해 줄 수 있다. 그게 내가 잘하는 유일한 일이다.”

    허균은 빨리 고개를 끄덕여 목숨을 연명해 달라 간청하고 싶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그건 너무 비겁하게 느껴져 망설였다. 그사이 저만치에서 다가오는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는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림자 인간

    “그 그림자가 도사님이셨습니까?”

    놀란 음성으로 허균이 물었다. 검푸르게 창백한 변산 하늘의 궁륭을 수놓은 수많은 별을 배경으로 상대의 얼굴이 위아래로 두 차례 까닥댔다.

    “그렇다. 당시 난 출가한 수행자로서 봉은사에 머물고 있었다. 구족계를 받지 못했으니 정식 비구는 아니었다.”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던 허균이 다시 물었다.

    “저는 그날 형님 손에 이끌려 법당까지 들어갔습니다. 사명당께 제자로서 절을 드리고 나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것도 다 보고 계셨던 겁니까?”

    상대는 가늘게 웃음소리를 냈지만, 그 실체감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도사의 몸은 조금씩 번져 밤하늘 일부가 되는 듯했고, 달빛을 반사해 빛나는 두 눈동자는 별들과 구별하기 힘들었다.

    “난 그림자에 몸을 담는 둔갑술을 할 줄 알았다. 꼬마였던 네게 흥미를 느껴 내내 지켜보고 있었지. 나 역시 사명당 문하에 입문코자 기다리던 불제자였으니 그때 우린 사형과 사제로서 엮이게 된 셈 아니더냐?”

    크게 고개를 끄덕인 허균이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상대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서둘러 물었다.

    “그런데 끝내 구족계는 받지 못하신 겁니까?”

    도사는 오래도록 대답하지 않았다. 허균이 대답을 얻어내기를 포기하려는 찰나, 깊은 우물 아래에서 들려오는 신음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족계가 어디 스승 한 명이 혼자서 내릴 수 있는 것이더냐? 적어도 셋 이상의 비구가 상가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오직 사명당만이 스스로 계를 내리는 스승인 아사리가 돼 날 빨리 비구로 만들고 싶어 했었지.”

    “그런데 왜 불발된 것입니까?”

    “나 같은 놈에게 계를 내리길 누구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상가가 구성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임진년 왜란이 터져버렸지. 그 시절에 구족계는 사치였다.”

    살인마

    남궁두의 고향은 전라도 임피(현 전북 군산시)다. 대단한 부호였던 그의 아비는 막대한 전답을 외아들인 그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고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다. 다행히도 자식 사랑에 유난했던 홀어미 덕분에 남궁두는 아버지의 사랑 외엔 뭐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이 오랜 평화가 깨진 건 어미의 이해할 길 없는 변절 탓이다.

    청상과부로 생을 마치기엔 몸이 너무 뜨거웠는지 어미는 집안의 젊은 가노, 그중에서도 하필 유부남과 정을 통한 뒤 사람이 변해 버렸다. 가사를 작파한 그녀는 가노와 밀회를 즐기려 뜬금없는 외출을 일삼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투기에 눈이 먼 어미는 가노의 아내를 학대하기 시작했고, 이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고 돌다가 마침내 남궁두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막 성년이 되긴 했지만, 남녀 사이의 정염의 불길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리 없던 남궁두는 눈물로 참회하는 어미를 손쉽게 용서했다. 하지만 그건 함정이었다. 재산을 노린 어미와 가노는 남궁두를 독살하고자 치밀한 계획을 수립해 용의주도하게 실행에 옮겼다. 밥에 섞인 독약 성분으로 인해 차츰 쇠약해지던 그는 자주 헛것을 봤고 제대로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동네에는 그가 어미의 악행에 충격받아 실성했다는 풍문이 떠돌았다.

    죽음 직전에 그를 구한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바로 가노의 어린 아내였다. 홍단이라 불린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남편과 주인마님의 소행을 관가에 고발했다. 홍단의 이상한 행동을 의심하던 가노는 관에 체포되기 직전 어미와 줄행랑을 놓았다. 야산을 방황하며 숨어 지내던 남녀는 두 달이 넘은 어느 날 약초꾼들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됐다. 같은 나무에 나란히 목을 맨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하늘 아래 믿을 사람 없는 신세가 된 남궁두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곁에서 지켜봐 준 홍단을 첩으로 맞이했다. 기구한 인연이었지만 둘은 금실이 좋았다. 제법 글공부를 할 줄 알았던 남궁두는 어느 날 과거 공부를 위해 한양행을 결심하며 홍단에게 함께 가자고 권했다. 임피에 친인척이 있던 그녀는 고향을 지키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전답 경영을 먼 집안 조카에게 맡긴 남궁두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겨야 했다.

    한양살이는 녹록지 않았고 과거 공부 역시 생각과는 많이 달랐던지라 그는 무과로 진로를 변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막연한 그리움에 사무쳐 무작정 말에 올라 임피를 향해 내달렸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고향 땅에 이른 건 깊은 밤이었다. 집은 옛 모습 그대로였고 오히려 더 깔끔하게 보수한 듯했다. 안방에 호롱불이 켜져 있어 그는 반가운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홍단을 놀래주려고 방문을 벌컥 연 그는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호흡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벌거벗은 조카는 품에 안은 홍단을 이불로 가리며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혼이 나간 채 집 밖으로 뛰쳐나온 남궁두는 자신이 타고 온 말을 마주하고 우두커니 서서 몸을 떨었다. 긴 시간 동안 차곡차곡 여며왔던 분노가 봇물 터지듯 삽시간에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침착하게 활과 화살을 쥐고 방으로 되돌아갔다. 대충 옷을 걸친 조카는 막 방을 빠져나오다 그와 마주쳤다. 시위에 메겨진 화살을 본 조카가 사색이 되어 뜨락으로 도약했다. 그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화살을 겨눈 남궁두는 힘차게 시위를 당겼다. 첫발을 엉덩이에 꽂은 그는 골목길을 따라 도주하는 상대를 천천히 따라가며 화살을 발사했다. 빨리 죽지 못하도록 급소를 피해가며 상체에 골고루 적중시킨 그는 조카를 돌아서게 해 얼굴을 마주 보았다. 마지막 발은 목을 꿰뚫었다.

    그가 집 안방으로 돌아왔을 때 홍단이 이불로 몸을 감싼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남궁두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나서 속삭였다.

    “살려줄 테니 어서 녀석에게 가봐.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옷을 입으려는 홍단을 제지한 남궁두가 다시 말했다.

    “그냥 알몸으로 어서 달아나. 마음이 바뀌면 둘 다 죽일지도 몰라.”

    홍단은 실낱같은 희망을 붙드는 간절함으로 방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정신없이 내달리던 그녀 앞에 목이 관통된 조카의 시신이 나타났다.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선 그녀 가슴에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앞으로 쓰러진 그녀는 한동안 더 숨이 붙어 있었다. 서서히 다가간 남궁두가 그녀 몸을 뒤집어 죽어가는 눈동자를 천천히 응시했다.

    쫓기는 삶

    “그 뒤에 어찌 됐습니까?”

    상대를 향해 묻는 허균의 음성은 가늘게 떨렸다. 남궁두는 자꾸 얼굴에 달라붙는 해변의 가는 모래를 손으로 털어내며 속삭였다.

    “살인마가 됐다.”

    바람 소리가 휭휭하며 허균의 귓전을 스쳤다.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를 보며 듣는 살인 얘기는 이상하게 비현실적이었지만, 그 말을 하는 자의 존재감은 그것과 반대로 더 농밀해지는 것 같았다. 남궁두가 마치 넋두리처럼 말을 이어갔다.

    “처음엔 한양으로 돌아가 시치미를 떼고 무과 준비에 매진했다.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않으려 했다. 그게 가장 완벽한 복수가 되리라고 믿었지. 그러던 차에 좌포청 포졸들이 날 수배하고 다닌다는 소식을 접했다.”

    “도망가셨습니까?”

    “살인마가 됐다 하지 않았더냐? 죽어가는 사람의 눈빛을 보고 나면 생명이란 것이 덧없다는 걸 절감하게 된다. 가소롭기조차 하다. 찾아오는 포졸들을 차례로 살해해 원통교 아래에 묻어버렸다. 그 후로는 아주 오래도록 쫓기며 살았지. 머리를 깎고 중노릇도 하고, 무주 심심 산중에 들어가 도술도 익혔다.”

    “그림자에 숨는 둔갑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난 신선이 될 억센 팔자를 타고났다. 그런 팔자가 속세에 끼여 살면 살인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산중에서 우연히 만난 장로가 그렇게 말해 주더구나.”

    “어떤 장로를 말씀하십니까? 산신령입니까?”

    “인간과 신선계 중간에 머물러버린 자였다. 자신이 중생의 삶을 탈피하기 위해 먼저 다른 이의 득선을 도와야 할 운명에 빠진 존재였다. 그가 날 신선술로 이끌어주었다.”

    “성공하셨습니까?”

    구도의 길

    무주에서 만난 장로는 가혹하게 남궁두를 몰아붙였다. 도가의 비결서들을 한 해 내내 암송하도록 한 뒤에는 열흘씩 굶는 벽곡을 시행하도록 했고, 벽곡을 마치면 겨우 숨이 붙어 있을 정도로만 먹을 것을 제공했다. 그것조차 잣이나 깨 같은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몸이 말라 앙상한 뼈가 드러났지만 남궁두의 정신은 기이하게 맑아졌고 끝내는 식욕이 소멸하는 경지에 도달했다. 그때부터 그는 물만 마시며 보름을 더 버텼다. 보름째 되던 날 장로가 말했다.

    “이런 강인한 도골(道骨)을 지니고서 인간계에서 어찌 여태 버텼누? 내가 만난 제자들은 태반이 이 단계에서 죽거나 미쳐버렸다. 넌 신선이 될 기반인 선태를 타고났구나. 기특하도다!”

    장로는 자신만의 비법으로 만든 환약을 남궁두에게 복용하도록 했다. 그가 약을 먹기 시작하자 신열로 몸이 달아올랐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기절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궁두는 귀신을 볼 줄 알게 됐고 만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다. 몸을 그림자에 감추거나 허공 위로 부양할 줄도 알게 됐다. 우쭐해진 그를 향해 장로가 차갑게 말했다.

    “그런 건 외단술로 아이들 장난일 뿐이다. 이제야 겨우 네 몸에 황금을 빚을 화로를 놓을 수 있게 됐구나. 단전 아래에 화로를 앉히고 약물을 달여야겠다. 어서 내단술을 준비하거라!”

    남궁두는 가부좌를 틀고 좌선에 들어갔다. 우선 단전 아래 상상의 화로를 놓고 가열을 시작했다. 약물은 호흡으로 공급됐으며 불을 때기 위해 신장의 물의 기운과 심장의 불의 기운을 회전시켜야 했다. 수 기운과 화 기운이 상하로 운기되며 몸이 충전됐고, 마침내 단전에서 빛이 나며 약물이 생성됐다. 장로가 외쳤다.

    “그 상태로 보름을 더 버텨라! 양기와 음기를 조화롭게 통제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면 넌 끝내 황금을 이루어 불사의 신선이 될 수 있다. 알겠느냐? 부디 조급증을 버리고 오르려는 양기는 내리고 가라앉으려는 음기는 올려라.”

    남궁두는 7일 밤낮을 죽음 같은 고통과 싸웠다. 조금만 호흡이 흐트러져도 화로의 기운이 너무 강해지거나 너무 약해지곤 했다. 다시 7일이 흘렀다. 애지중지 간수했던 화로의 약물이 바야흐로 황금이 되려 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아랫배를 내려다보는 실수를 범했다. 안쪽의 장기들이 보일 정도로 투명해진 그의 단전에선 광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성공의 기쁨에 들뜬 그가 마음을 잠시 놓자 둥글게 태극 운동을 하며 회전하던 수기와 화기가 직렬로 서버렸고, 항문의 회음혈에서 머리 꼭대기의 두정혈을 사이에 두고 음극과 양극이 수직으로 충돌하며 열파가 발생했다. 곧이어 남궁두의 정수리가 불이 붙어 타올랐다.

    실패한 지상선

    “그러셨군요. 애초 성공하셨다면 불가에 입문하려 봉은사를 찾을 일도 없으셨겠지요?”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은 허균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남궁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 실패했다. 나도 나지만 장로의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불이 붙은 정수리를 겨우 치료하고 하산하려 할 때, 그가 환약 다섯 알을 주더구나.”

    “무슨 약이었습니까?”

    “비록 신선은 못 됐지만, 약물로라도 단을 이루면 지상선은 될 수 있다더구나. 한 800년은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복용하셨습니까?”

    “당연히 하산하자마자 복용했다. 망설일 이유가 어디 있었겠느냐? 이름 모를 암자에서 꼬박 한 달을 앓아누웠다 깨어나니 몸도 마음도 가벼운 게 마치 신선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지.”

    “둔갑술에다 엄청난 수명까지 얻으셨는데 뭐가 부족하셨습니까?”

    음울한 표정으로 한참을 침묵하던 남궁두가 천천히 입을 뗐다.

    “본디 죽지 않는 신선이 내 목표가 아니었더냐? 처음엔 800년이 어디냐 싶었지만, 생각할수록 그건 정도의 차이일 뿐, 결국엔 필부처럼 죽을 운명이 아니더냐? 남보다 여덟 배의 삶을 산다 한들 그게 전부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건 오히려 여덟 배의 고통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둔갑술 같은 잔재주나 부리며 견디기엔 지나치게 긴 세월이었다. 그렇게 방황을 거듭하다 사명당을 만났던 것이다. 그로부터 계를 받고 구원받고 싶었던 것이다.”

    “끝내 계는 받지 못하셨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오신 겁니까?”

    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긴 남궁두가 허균 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이번엔 달빛이 밝아져서인지 얼굴의 세부가 훤히 드러났다. 크고 작은 상처투성이였다. 남궁두가 노랫가락을 뽑듯 구성진 음성으로 말했다.

    “봉은사에서 널 만났을 무렵, 사명당은 한 가지 해결책을 제안해 왔다. 나 같은 살인범에게 계를 줄 다른 승려를 당장 구하지 못할 바엔, 너무 많이 얻은 수명을 남들에게 나눠주는 것부터 시작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보시라면 훌륭한 보시가 아니겠느냐?”

    “그래서 제게 명수를 늘려주겠다 말씀하셨던 거로군요?”

    “그렇다! 실제로 난 많은 사람에게 조금씩 수명을 나눠주고 있었다. 임진년의 왜란만 아니었다면 벌써 다 나눠주고 불계를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란 때 무얼 하셨습니까?”

    한참을 목이 메 발성을 못 하던 남궁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속세로 되돌아온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사명당을 따라 승병 부대에 들어갔다. 명수를 나눠주기는커녕 무수한 살생을 일삼으며 남의 명수를 빼앗아야 했다. 우리는 정녕 악귀처럼 싸웠다. 죽이고 또 죽이고 다시 죽였다. 그토록 장렬하게 싸워야 할 이유를 사명당은 알고 있었을까? 과연 입적한 그는 극락정토에 갈 수 있었을까? 나는 아직도 풀지 못한 의문에 휩싸여 이렇게 방황하고 있다.”

    이별

    새벽 바닷가는 몽롱한 안개에 잠겨 마치 하늘 위 구름 속 같았다. 마침내 사방에 흐릿한 여명이 감돌자 세상은 새로 기지개를 켜며 부산한 소음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허균이 조용히 물었다.

    “저를 어떻게 찾아내셨습니까? 아니, 왜 찾아오신 겁니까?”

    삿갓에 묻은 모래를 털고 단정히 머리에 쓰며 남궁두가 대답했다.

    “왜란이 끝나고 임금도 바뀌지 않았더냐? 세상도 나의 삶도 따라서 바뀔 줄 알았건만 그대로더구나! 그저 나른하고 무의미했다. 당당히 살육을 저지를 수 있었던 왜란 때가 그리워지다가도, 사람을 죽인다는 것, 그 역시 지루한 일이었다! 그래서 결심했지.”

    “뭘 결심하셨습니까?”

    “죽어버리기로! 대신 나의 수명을 마음껏 나눠주고 죽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고 사명당이 걸었던 길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수명을 나눠주되 어떤 기준도 없이, 무차별하게, 그냥 인연이 오는 대로 그렇게 나눠줬다. 부처와 신선이 어디 따로 있더냐? 운명과 잘 놀다 가면 그게 부처고 신선 아니겠느냐?”

    한동안 말을 멈췄던 남궁두가 다시 속삭였다.

    “대신 내 삶을 누군가 기억해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구나. 사명당이 글 쓸 팔자로 태어났다고 했던 네가 때마침 떠올랐다. 이번에 네가 이곳 전라도 함열(현 전북 익산시)로 유배 올 때 멀리서 관상을 한번 봤지. 네놈 얼마 못 산다.”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허균을 향해 남궁두가 씩 웃으며 덧붙였다.

    “내게 남은 수명이 몇 년은 된다. 네게 주마. 쓰고 싶은 것 마저 다 쓰거라.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다 저질러보고. 그저 내 얘기나 한 자락 써준다면 그럴 수 있는 시간을 너에게 주겠다.”

    * 이 작품은 허균의 ‘남궁선생전’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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