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올드 머니 스타일의 유행과 함께 ‘귀족 스포츠’ 이미지가 강한 테니스 패션도 자연스럽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의 테니스를 주제로 한 영화 ‘챌린저스(Challengers)’와 여주인공이자 스파이더맨의 연인인 젠데이아(Zendaya)의 프레스 투어 룩이 공개되면서 런웨이에서 스트리트에 이르기까지 코트에 어울리는 테니스 패션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스포티함과 동시에 럭셔리한 테니스 패션은 과거부터 꾸준히 디자이너들이 소재로 삼아온 아이템이기도 하다. 1921년 윔블던 경기에서 테니스 챔피언인 수잔 렝글렌(Suzanne Lenglen)이 장 파투(Jean Patou)가 디자인한 흰색 스트레이트 슬리브리스 카디건과 무릎 길이의 흰색 실크 플리츠스커트에 매듭 달린 스타킹, 선명한 오렌지색 헤어밴드를 착용해 선풍적 인기를 얻은 것이 그 시작이다.
반달 모양의 르 파투 시그니처 가방. [Patou]
1920년대 스포츠 라인(왼쪽)과 1921년 윔블던 테니스 코트에서 장 파투의 혁신적 패션을 처음 선보인 수잔 렝글렌. [Patou, Gettyimage]
시대를 초월한 혁명의 상징
장 파투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당시 우리가 잘 아는 디자이너 샤넬과 어깨를 나란히 한 디자이너다. 그는 기성복의 선구자이자 디자이너웨어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인물이다. 당시 그는 혁신적으로 코르셋이 없는 드레스와 짧은 스커트를 만들어 판매했다. 또한 장 파투는 도시에서 착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스포츠 라인과 그의 이니셜인 ‘JP’가 새겨진 모노그램을 출시했다. 그가 옷에 ‘JP’ 모노그램을 사용함으로써 의류에 모노그램 사용이 대중화되기도 했다. 1925년 그는 프랑스의 해변 휴양지인 도빌, 칸, 비아리츠에서 ‘JP’ 모노그램이 새겨진 비치가운과 수영복을 판매했다. 영화배우 루이스 브룩스(Louise Brooks), 가수 조지핀 베이커(Josephine Baker), 가수 미스탱게트(Mistinguett) 등 당대 유명 인사들도 장 파투의 드레스를 입었다.
1920년대 대중은 스포츠에 열광했다. 선탠(suntan)으로 그을린 피부색과 스포츠 활동은 부자의 상징으로 통했다. 그을린 피부는 새로운 시크한 매력을 자아냈다. 1927년 장 파투는 이전에 볼 수 없던 최초의 선크림 제품인 ‘칼데아 오일(Chaldea oil)’을 만들었다. 오일의 명칭은 호박색 피부의 아름다움으로 전설적이던 바빌로니아의 고대도시 ‘칼데아’에서 따온 것이다. 장 파투는 스킨케어 제품에 자외선차단제를 최초로 통합한 디자이너로 패션과 뷰티에 대한 미래 지향적 접근 방식을 보여줬다.
테니스웨어에서 패션으로 승격
1920년대 부자들의 상징적 스포츠로 테니스, 승마, 요트 등이 유행한다. 이에 따라 스포츠웨어가 발달한다. 장 파투는 당시의 제한적 의복보다 한층 자유롭고 우아한 스타일의 스포츠웨어를 선보여 여성 패션에 혁명을 일으킨다. 당시로서는 파격에 가까운 고급스러운 여성 수영복과 테니스복이 그것. 테니스 챔피언인 수잔 렝글렌이 장 파투의 뮤즈였다.
수잔 렝글렌은 1919년부터 1926년까지 여자 아마추어 론 테니스(lawn tennis)계를 석권하고 윔블던 대회 6회, 프랑스 오픈 2회 우승을 차지했다. 당대 가장 뛰어난 여자 테니스 선수로 평가받는다. 프랑스 테니스협회는 롤랑 가로스(Roland-Garros·프랑스 비행사인 롤랑 가로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프랑스 오픈을 개최하는 복합 테니스 경기장 단지) 코트 중 두 번째로 큰 코트를 수잔 렝글렌으로 명명했을 정도다.
수잔 렝글렌이 활동할 당시만 해도 여자 테니스 선수들은 코르셋과 버슬 스커트, 페티코트와 화려한 장식의 모자를 쓰고 테니스를 즐겼다. 그런데 그는 1921년 장 파투가 디자인한 소매 없는 카디건과 짧은 실크 스커트, 화려한 헤어밴드를 하고 경기에 나섰다. 여자 테니스를 지배하던 수잔 렝글렌의 변신이 테니스웨어를 테니스 패션으로 승격시키는 순간이었다.
LVMH가 다시 론칭한 ‘파투’
브랜드 파투 창립자인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장 파투. [Patou]
브랜드 장 파투는 다양한 소유권 변경을 거쳤다. 2001년 프록터 앤드 갬블(Procter & Gamble)이 인수했고, 2011년에는 영국 그룹 디자이너 퍼퓸스(Designer Parfums Ltd)가 인수했다. 2018년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가 장 파투를 인수해 디자이너 퍼퓸스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LVMH는 브랜드 니나리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한 기욤 앙리(Guillaume Henry)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해 2019년 9월 파리 패션 위크에서 첫 컬렉션을 선보였다. 그리고 브랜드명을 ‘장 파투(Jean Patou)’에서 ‘파투(Patou)’로 바꾸고 재론칭했다. 재론칭한 파투는 브랜드의 풍부한 헤리티지와 현대적 스타일이 조화를 이루는 여성 기성복 컬렉션을 만드는 데 중점을 뒀다.
향수 joy(위)와 1000. [Patou]
당시 ‘조이’는 럭셔리의 상징이 됐다. 재클린 케네디와 비비언 리가 사랑한 향수이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도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샤넬 넘버5(Chanel No. 5)’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리는 향수로 꼽힌다. 그럼에도 2000년 향수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FiFi 어워즈(Fragrance Foundation Awards)’에서 ‘샤넬 넘버 5’를 제치고 ‘세기의 향기’로 선정됐다. 1972년 파투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1000번의 시도 끝에 완성한 향수라는 의미를 담은 향수 ‘1000’을 출시했다. ‘1000’은 오스만투스 향을 처음으로 서양에서 대중화한 향수이기도 하다.
완판녀 이부진이 선택한 윤리적 가방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르 파투 가방을 착용하고 있다. [뉴스1]
반달 모양의 ‘르 파투’ 가방은 파투 브랜드의 상징적 제품이다. 웃는 얼굴모습으로 디자인된 이 반원형 가방 두 개를 맞대면 파투 로고인 JP 모노그램이 드러난다. 파투는 7개의 가죽 조각으로 제작된 ‘르 파투’ 가방 개발 과정에서 지속가능성이라는 정신을 고수하기 위해 고품질의 업사이클 재고 가죽을 사용한다. 이는 이미 존재하는 고품질 원자재를 사용해 낭비를 최소화하고 윤리적으로 제작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가죽 재고량이 한정돼 있기에 각 색상은 한정판이며 번호가 매겨져 있다.
럭셔리 제품의 진품 여부를 가려주는 기술인 오턴티크 검증. [Authentique 공식 홈페이지]
파투는 유통 파트너 그루포 다나카(Gruppo Tanaka) 및 이토추(Itochu)와 함께 일본에 4개 매장, 파트너 엘에프(LF Corp)와 함께 한국에 1개 매장 등 전 세계적으로 약 200개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에는 더 많은 매장 오픈이 계획돼 있다. 이제 파투는 현대적 스타일과 브랜드의 풍부한 유산을 결합한 기성복 컬렉션으로 역사적 뿌리를 존중하는 동시에 컨템퍼러리 패션 하우스로 자리매김했다. 과거 ‘장 파투’의 명성을 ‘파투’가 되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