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 이후 30년간 지배체제를 공고히 했던 김일성 주석은 1970년대 김정일 후계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다시 30년이 흐른 지금 ‘포스트 김정일’ 체제가 가시화하고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김 위원장의 뒤를 이을 인물은 과연 누구이며, 후계작업은 어느 단계에 와 있을까.
‘새 시대’라는 말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사조와 세대교체다. 사조로 따지자면 말 그대로 선군정치, 선군사상 등 북한 사회를 풍미하고 있는 ‘선군’ 담론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세대교체를 살펴보자면 지난해 제11기 1차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단행된 부분적인 당·정·군 엘리트의 교체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라는 말에 눈길이 가는 것은 세대교체의 징후가 보다 높은 차원, 즉 최고지도자의 후계자 문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즉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하는 새로운 시대’인 것이다.
2003년 벽두 공식화된 ‘선군사상’이라는 말은 올해 들어 온 사회에 걸쳐 ‘일색화’되어야 할 이념체계로 독려되고 있다. 북한에서는 현재 군사를 우선시하고 군대를 혁명의 주력군으로 삼는다는 선군정치를 선군사상으로 포장해 주민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키려는 작업이 한창이다. 이는 흡사 1970년대 김일성주의로 전체 사회를 일색화함으로써 ‘수령’ 유일지배체제를 강화하였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를 통해 ‘장군’ 유일지배체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임을 유추해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군시대 개막과 함께 놓쳐서는 안 될 포인트는 지금까지 북한에서 유일지배체제 확립을 정당화하는 논거로 활용되어온 수령론이 퇴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후계자론에 따르면 수령의 후계자는 혁명과 건설에서 수령의 절대적 지위와 결정적 역할을 완전하게 계승하도록 되어있으나, 김정일 위원장 본인은 이미 수령의 완전한 계승자가 되기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김 위원장은 김일성을 영원한 수령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수령이라는 호칭 대신 ‘최고사령관’ ‘위대한 령도자’와 함께 ‘장군님’으로 불리고 있다. 카리스마적 권위 형성에서 호칭이 갖는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김정일 위원장은 수령의 카리스마적 권위를 전수받기보다는 ‘장군님’의 카리스마적 권위를 창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은 ‘수령·당·대중의 일심단결’을 절대불변의 진리인 것처럼 역설해 왔으나 최근 들어 ‘혁명의 수뇌부를 핵으로 하는 당·군대·인민의 일심단결’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수령이라는 호칭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혁명의 수뇌부와 군대가 등장한 것은 간과해서는 안 될 중대한 변화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일성 사망 후 3년상(喪)을 선포한 바 있다. 3년상이 끝난 후 김 위원장은 기존의 수령론을 자신에게 덧입히는 것이 아니라 선군정치라는 독특한 정치방식을 들고 나왔다. 어차피 김일성 주석의 ‘수령’으로서의 카리스마적 권위를 완전히 물려받지 못할 바에야, 아예 김일성을 영원한 수령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후계자’로 남아 혁명위업을 계승해 나간다는 명분을 세우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수십 년 세월 동안 인민들에게 각인돼온 ‘수령’이라는 신성화된 권위 대신 ‘장군님’이라는 세속화된 권위로 대체했던 것이다.
후계구도 가시화, 이미 늦었다
이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포스트 김정일’ 체제의 윤곽이 잡힌다. 김정일 이후체제에 대한 관심이 처음 대두된 것은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직후. 후계자가 최고권력자가 되자마자 다시 그의 후계문제에 관심이 쏠린 것은 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가 조선시대 세자 책봉처럼 세습의 양상을 띠었기 때문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대략 1980년대 후반이나 1990년대 초반무렵 ‘포스트 김정일’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을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물론 자신들의 권력승계 과정을 참고했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잇따른 붕괴와 소련의 해체, 서독의 흡수통일을 지켜보면서 후계문제를 미리 해결했기에 자신들은 건재할 수 있었다는 안도를 느끼는 한편 포스트 김정일 문제에 대한 논의 필요성을 감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마치 1950년대 후반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과 스탈린 우상물에 대한 소련인민들의 훼손 장면을 목격하면서 김일성이 후계문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것과 같은 이치다.
김정철과 김정운의 어머니 고영희. 최근 중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주석이 살아있다 보니 본격적으로 제기되지 못했던 후계구도 문제는 1994년 그가 사망하면서 더욱 늦어진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 김정일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과는 달리 정작 북한은 3년간 유훈(遺訓)통치를 실시하고 김정일 시대를 개막하기 위한 준비에 몰두해야 했던 형편이었기에 후계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고난의 행군’이라 불릴 만큼 혹독한 시련을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이후 1997년 김정일의 총비서직 추대, 1998년 헌법개정을 통해 국가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되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다소나마 체제안전의 기틀을 다지게 된 후에 비로소 후계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시기 북한의 후계구도를 관측하는 외부의 시선은 2001년 1월 김정일의 공식 중국방문에 동행한 장남 김정남에게 집중되었다. 그의 동행이 일종의 후계수업이 아니냐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4개월 후인 2001년 5월 김정남이 일본으로 밀입국하다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해 북한의 외교적 위신이 추락하면서, 김정남의 후계 탈락설이 제기됨과 동시에 둘째아들인 김정철의 부상을 예상하는 견해가 등장했다.
이 와중에 북한인민군 출판사가 2002년 8월에 ‘존경하는 어머님은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께 끝없는 충직한 충신 중의 충신이다’는 제목의 강연자료(이하 ‘학습제강’)를 발간했다. 이는 북한의 후계구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북한 정권의 후계구도와 관련한 1차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에서 후계구도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자료였던 까닭이다. 이 자료는 ‘존경하는 어머님’의 김 위원장을 향한 한없는 충성심을 강조하고 있는데,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는 여기서 ‘어머님’이 김정일의 셋째부인인 고영희를 지칭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학계에서도 대체적으로 이견이 없는 분위기다.
‘학습제강’의 이 같은 내용은 후계문제와 관련해 세 가지 시사점을 가진다. 우선 어머님의 위상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모든 일꾼들은 대를 이어 수령복, 어머니복을 누리는’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북한 문헌에서 흔히 목격되는 ‘수령복, 장군복’에 상응하는 것이다. 또한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 동지와 꼭 같으신 분’이라는 표현은 고영희가 김정숙과 같은 반열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둘째, 고영희에 대한 우상화는 그의 아들인 김정철과 김정운이 후계로 낙점받을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의미가 있다. 혁명혈통을 중시하는 북한에서 어머니와 후계자간 혈통 분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셋째, ‘학습제강’의 발표시점과 관련해 후계자 선정시기를 유추해볼 수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친모인 김정숙에 대한 우상화 작업은 1960년대 후반 ‘빨치산 회상기’ 학습 차원에서 시작되었으나 이는 여러 빨치산 참가자들의 일화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사례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개인 우상화로 보기 어렵다. 김정숙의 본격적인 개인 우상화는 1970년대 중반 김정일의 후계지명 이후 시점에 착수됐고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1982년 2월 김정일의 40회 생일 이후 가시화되었다. 즉 후계자가 먼저 정해지고 그 모친에 대한 우상화가 진행된 셈이다. 상식적으로도 후계자를 결정한 다음 그의 어머니를 우상화하는 것이 순서다.
이를 통해 유추해 본다면 ‘학습제강’의 발간은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를 내정한 다음 그 어머니에 대한 우상화작업을 주도하거나 혹은 후계자가 직접 나서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우상화작업을 지휘하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최근 북한의 매체나 문헌들이 눈에 띄게 강조하고 있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계속혁명’이다. 대표적으로 ‘로동신문’ 2004년 1월26일자는 ‘백두산 총대정신에는 백두산 3대장군의 계속혁명의 신념이 담겨져 있다’고 썼다. 북한에서 계속혁명론은 수령론, 후계자론과 함께 포스트 김일성 권력승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념적인 논거로 활용돼 왔다. 이 중 후계자론은 후계체제 수립 이후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거로 만들어졌으나 수령론과 계속혁명론은 후계수립 이전 후계구도 구축을 위한 핵심논리로 이용되어 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수령론은 이미 죽은 수령을 신격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그 용도가 폐기했기 때문에 향후 후계구도에서 계속혁명론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커질 것이다.
계속혁명론은 혁명위업계승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후계자 김정일이 수령의 혁명위업을 계속해서 발전·완수하는 임무를 떠맡아야 했던 것처럼, 김정일의 후계자는 ‘장군님’의 선군혁명위업을 계승·발전시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계속혁명론은 노동계급의 혁명위업이나 수령의 혁명위업을 계속해서 발전·완수해야 한다는 예전의 논지보다는 선군혁명위업을 계속해서 발전·완수해야 한다는 새로운 논지로 전개될 것이며, 이는 점차 ‘대를 이어’라는 담론과 일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북한이 ‘선군사상 일색화’를 독려하고 있는 것 또한 1974년의 현상과 유사하다. 김정일은 1974년 2월12일 당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지명된 후, 일주일 만에 이른바 ‘2월선언’으로 불리는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하기 위한 당사상사업의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정식화하고 김일성주의화를 당의 최고강령으로 선포했다. 이는 김정일이 권력장악과 동시에 이데올로기 해석권마저 독점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심장한 사건이었다.
당시 김정일은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한다는 것은) 수령님의 위대한 혁명사상, 김일성주의를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하여 우리 혁명을 전진시키며 김일성주의에 기초하여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고 완성해 나간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서 김일성주의 일색화와 선군사상 일색화의 두 가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북한이 현재 선군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김일성주의도 명백히 지도적 지침이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김일성주의에 기초하여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과 ‘선군사상에 기초하여 강성대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은 논리구조가 비슷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사성은 후계구도 구축과 관련하여 역사에서 반복이 갖는 함의를 감안하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한마디로 후계구도 구축기였던 1970년대에 대한 다양한 ‘노스탤지어’가 북한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선전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 당국이 최근 ‘70년대의 사업기풍과 투쟁기풍으로 일해나가자’고 인민을 독려하면서 ‘1970년대의 사업기풍과 투쟁기풍이란 김정일 후계추대에 따른 김일성주의 일색화사업의 성공’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점은, 선군사상 일색화와 후계구도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 신빙성을 더해 준다.
후계자에 대한 충성맹세 끝났을 수도
이러한 징후들을 단순히 후계자 추대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강조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이 2002년 학습제강 발간 이후 가시화되고 있는 후계구도의 여러 징후들과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포스트 김정일 후계과정은 포스트 김일성 후계과정과 비교하여 어느 단계에 와 있을까.
논의를 종합해보면 현재의 과정은 대략 김정일을 후계자로 비공식 지명했던 1974년 2월 전원회의에 해당하는 것으로 관측된다. 고영희 우상화 작업이 시작됐다는 것은 김정일이 후계자를 이미 내정했음을 시사하고, 계속혁명론을 강조하는 것은 대를 이은 혁명위업 계승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며, 선군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이를 일색화할 것을 독려하는 것은 후계자가 이데올로기 해석권을 독점했으리라는 짐작을 가능케 해준다.
이러한 현상들은 1970년대의 현상들과 너무나 흡사하다. 다만 당시에는 김정일에게 ‘친애하는 지도자’라는 경칭을 사용토록 함으로써 그가 후계자로 확정되었음을 시사했지만, 포스트 김정일의 경우는 대내외적 위기상황 속에서 후계자의 신변보호와 수업전념의 필요성 때문에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정도로 진전됐다면 북한 내부의 고위층들은 이미 후계자에 대한 충성맹세를 끝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사족을 달자면, 지금까지 설명한 흐름을 두고 후계구도가 상당히 진척됐다고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필자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싶다.
1970년대 초부터 본격화되어 1974년에 마무리된 김정일의 후계자 지명은 1977년 2월에 이르러서야 재일조총련회의에서 배포된 특별교재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같은 해 2월25일자 일본 교도통신 보도로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1974년 당시에 어떤 연구자가 김정일에게로 권력 승계 가능성을 전망했다면 아마도 시기상조라는 평가에 직면했을 것이다.
결국 모든 관심은 ‘누가 어떤 기준과 절차에 따라 후계자가 될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북한에서 후계구도와 관련한 모든 것은 최고권력자 김정일의 전권 사안이다. ‘김정남은 당이 밀고, 김정철은 군부가 민다’는 주장도 있지만 파벌과 줄서기가 절대 허용되지 않는 북한 정치문화의 특성을 감안하면 적절치 않은 분석이다.
특히 북한의 고위 엘리트들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벌어진 후계구도 권력투쟁의 결과가 어떤 것이었는지 잘 알고 있다. 김정일 후계체제 확립 이후, 김영주 지지세력은 ‘김영주 여독청산’이란 명분하에 숙청되었고 김평일 지지세력은 ‘곁가지청산’이라는 구실하에 모두 밀려났다. 이런 결과를 직접 목격한 권력 엘리트들은 포스트 김정일 후계구도 확립과정에서 김정일의 의중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김정일 위원장은 무슨 잣대로 후계자를 선정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점은 김 위원장 본인이 그랬듯 전임자에게 전적인 충성을 바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결국 포스트 김정일 후계체제도 혈통계승이 될 것임을 의미한다. 스탈린이 후계자인 흐루시초프에 의해 격하되고 마오쩌둥(毛澤東)이 후계자로 지명된 린뱌오(林彪)에 의해 실각할 운명에 처했던 두 사회주의 형제국의 역사적 경험은 충실성을 중시하는 김일성의 후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결국 혈육인 동생 김영주와 자식들로 후보군이 압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김일성의 후계관은 소련과 중국의 경험을 함께 목격했던 김 위원장에게도 그대로 전이되었을 것이다. 혈통승계가 유력시되는 또 다른 요인은 1대에서 2대로의 승계보다 2대에서 3대로의 승계가 훨씬 쉽다는 사실이다. 우선은 축적된 노하우가 있고 주민들도 권력세습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준에 입각해 살펴보면 후계자 후보군은 김 위원장의 자녀인 김정남, 김정철, 김정운, 김설송으로 압축된다. 이 가운데 김설송은 정실부인 격인 김영숙의 딸이지만 여성이라는 점이 핸디캡으로 작용할 것이다. 사회주의국가이지만 북한은 봉건질서가 지배적이고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엄격한 정치문화를 갖고 있는 만큼 여성이 후계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탈북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둘째로 후계자의 성분, 엄밀히 말하면 생모의 성분이 중요하다. 혈통계승을 혁명위업계승과 결부시키기 위해서는 후계자의 생모를 혁명의 어머니로 우상화해야 한다. 그러나 생모의 불순한 성분이 고위간부나 인민들 사이에 회자되면 우상화작업에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김정남이 가장 불리하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생모인 성혜림은 ‘남조선’ 출신이며 그녀의 언니 성혜랑은 유럽으로 도망친 데다 조카 이한영(북한명 이일남)은 한국으로 망명했다.
이 같은 ‘반동적’ 성분이 김정남에게 큰 장애물이 되리라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에 따르면 북한당국은 1990년대 중반 러시아 유학생들을 개별 면담해 성혜림을 아는 사람은 모두 숙청하는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 때만해도 김정일 위원장은 김정남에게 승계하기 위한 정지작업으로 걸림돌 제거 차원에서 숙청을 벌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 터져 나온 성혜랑 망명사건과 김정남의 불법밀입국사건은 김정일의 결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반면 김정철과 김정운의 생모인 고영희는 재일동포 출신 귀국자의 딸로 알려져 있다. 이는 북한의 성분 분류상 기본군중 중에서도 교양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고영희는 김정일을 보좌하는 데 열성을 다한 덕분에 그의 총애를 받으며 정신적 안식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고영희는 자라면서 독실한 불교집안의 영향을 받아 남편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습관을 체득했으며 김일성 3년상을 제안한 것도 그녀라는 설이 있다. 만약 ‘학습제강’의 ‘존경하는 어머님’이 고영희를 지칭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김정일의 후계자는 그녀의 두 아들 중에서 지명될 가능성이 거의 절대적이다.
셋째로 중요한 요소는 후계자 본인의 적극적인 노력 여부다. 김일성-김정일 후계과정에서 김정일 자신이 벌인 피나는 노력은 널리 알려져 있다. 우선 갑산파와 군부파 숙청과정에서 크게 기여했고 김일성 가계우상화를 전담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으며 김일성을 성심을 다해 받들었다. 그 결과 삼촌 김영주와 실세 계모였던 김성애 슬하의 이복동생들을 제치고 권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이러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노력을 후계자의 중요한 자질로 여길 것이다. 따라서 후계자 후보들에겐 자신의 자질을 김정일에게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기회는 평소 가까이에서 접하는 사람에게 더 많이 제공되기 마련이다. 이 또한 김정남에게는 철저히 불리한 부분이다. 현재 그가 ‘낭인 아닌 낭인생활중’이라는 설이 사실이라면 김 위원장을 가까이에서 보좌할 수 있는 고영희의 두 아들에게 기회가 더 많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최종적으로 후보군은 고영희의 아들인 김정철과 김정운 두 사람으로 압축된다. 이 가운데 김정철의 가능성을 높게 보는 입장은 대개 김정남의 퇴출에 따른 반사이익이 고영희의 장남인 김정철에게 돌아갈 것으로 해석한다. 반면 김정운의 가능성을 높게 보는 입장은 주로 그가 갖고 있는 자질에 관한 긍정적 평가를 근거로 내세운다.
대표적인 사례로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을 쓴 후지모토 겐지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은 김정철보다 김정운을 더 좋아하며 김정철을 가리켜 “그 애는 안 돼, 여자아이 같아”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후지모토 자신도 김정철보다 김정운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는 입장이다. 특히 그는 김정운과의 첫 만남에서 “이 녀석은 증오스러운 일본사람”이라며 자신을 노려보던 김정운의 날카로운 눈매를 잊을 수 없다고 회고하고 있다. 또한 김정운은 대외활동이 많고 리더십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즉 자질만 놓고 본다면 김정운의 후계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봉건사회 또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체제에서 동일 부모 밑에서 출생한 형제간의 서열은 매우 중요하다. 형제간의 서열을 파괴한 후계구도의 결과가 어떤 사태를 초래했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선례가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부족한 리더십은 자신의 후견하에 보완할 수 있지만 형제간의 서열은 보완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김 위원장은 자신이 죽은 다음 후계시대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리더십보다는 형제의 서열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김정철은 후계수업의 핵심코스이자 최고 조직인 당 조직지도부에서 군사, 외교, 정치, 사상 등 전 분야에 걸쳐 제왕학을 수련중이며, 당 간부들 사이에서 ‘총회장’으로 통한다고 한다. 또한 다른 사람의 눈에 김정일이 김정철보다 김정운을 더 아끼는 것으로 비치는 것은 엄밀히 말해 후계자 선정과 밀접한 관련이 없다. 김일성 주석은 김정일보다 김평일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김평일은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국방위원 백세봉의 정체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김정일은 김정철을 후계자로 내정한 상태이며 그 진척상황은 대략 1974년 2월 전원회의를 전후한 시점, 즉 비공식 후계지명의 단계에 도달해 있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일까. 앞으로 후계구도와 관련해 북한의 최고권력층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권력엘리트의 부침(浮沈) 현상이다. 부상은 향후 포스트 김정일 시대를 이끌어나갈 일꾼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며, 침몰은 일부 인사들이 후계구도의 후폭풍을 맞아 청산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서 지난 최고인민회의 제11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승진한 연형묵의 향후 역할이 주목된다.
같은 시기 국방위원에 임명된 백세봉 또한 관심대상이다. 백세봉은 군수공업을 전담하는 제2경제위원회의 당 책임비서로 활동하며 김철만 위원장을 대신해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는 보도(연합뉴스, 2003년 12월14일)가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백세봉은 당과 군의 요직을 겸직하고 있는 셈이지만, 그는 2003년 8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기 전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 미지의 인물이 리을설, 김철만 등 쟁쟁한 군부의 원로들을 대신해 국방위원직을 차지했다는 ‘특이사항’은 이러한 징후가 후계구도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필자는 특히 ‘백세봉’이라는 범상치 않은 이름에 주목한다. 백세봉은 ‘백두산 세 봉우리’의 약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 세 봉우리는 백두산 3대장군(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을 가리키는 것이고 백세봉은 백두의 혁명전통을 이어받은 인물, 즉 후계자 자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둘째, 후계자가 어떤 호칭, 무슨 직책을 갖고 등장할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추대되기 몇 개월 전인 1973년 9월 당의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 비서에 임명되고 후계자로 지명되면서 ‘당중앙’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후계자가 과연 당의 직책을 가질 것인지 아니면 군의 직책을 가질 것인지는 북한의 미래와 관련해 매우 흥미로운 포인트다.
셋째, 향후 후계자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우상화작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고영희는 유방암 재발로 와병 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미 시작된 우상화작업은 그녀가 사망할 경우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이와 함께 후계자를 어떤 방식으로 ‘백두 혈통’과 연결시킬 것인지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 1970년대 김일성-김정일 후계과정에 등장했던 3대혁명소조처럼 후계구도가 안정될 때까지 후계자의 수족 역할을 할 조직이 새로 나타날 것인지도 관심거리다. 김정일은 후계자에 지명된 직후 3대혁명소조를 장악해 자신의 지시와 지침을 전달, 수행하고 주요 동향과 정보를 수집해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한 선례가 있다.
마지막 포인트는 1970년대 일명 ‘70일 전투’로 알려진 속도전과 같은 획기적인 경제 회생책을 내놓을지 여부다. 김정일은 속도전 방식의 경제사업을 통해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을 뿐 아니라, 후계자로서 사상과 조직능력 및 경제관리 능력이 있음을 과시했다. 이번 후계과정에서도 이 같은 ‘이벤트’를 통해 후계자의 능력을 과시하는 순서는 반드시 마련될 것이고, 이는 북한의 경제와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