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세대 의대 김현원(金?沅·49) 박사를 만난 것은 이런 관심의 결과였다. 그는 한국판 ‘로렌조 오일’로 알려진 사람이다. 로렌조 오일은 1993년 개봉작으로 닉 놀테와 수전 서랜든이 주연한 영화다. 부신백질이영양증(副腎白質異營養症, Adrenoleukodystrophy·ALD)이란 불치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직접 치료약을 개발한 부부의 실화를 감동적으로 그렸는데, 숲 속에서 뜯은 귀한 약초의 즙을 아들 입에 흘려 넣는 절박한 장면들이 아직도 내 눈 앞에 선하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국비유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생화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카네기 멜론 대학의 연구교수로 단백질의 구조에 관해 연구하던 김현원 박사는 세상 부러울 게 아무것도 없었다. 두뇌 명석하고 성격 활달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있었다. 1992년 일시 귀국한 그에게 인생을 뒤바꾸는 사건이 생긴다. 일곱 살 난 딸 우리가 난데없이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즉시 우리를 데리고 미국으로 날아갔어요.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뇌하수체에 종양이 있다는 겁니다. 종양이 뇌하수체를 자극해 가슴에 2차 성징이 나타났던 거죠. 다행히 초기라서 종양 크기는 아주 작았지만 뇌하수체 전부를 떼어낼 수밖에 없었어요.”
뇌하수체는 척추동물의 뇌에서 볼 수 있는 내분비기관으로 호르몬 분비를 책임진다. 인체에 필요한 호르몬의 50% 이상이 이 손톱만한 기관에서 분비된다. 우리는 병에 전문지식을 가진 부모를 만난 덕에 다른 신체 부위의 손상 없이 빠르게 종양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생 뇌하수체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매일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고, 갑상선 호르몬, 스테로이드 호르몬이 든 알약을 먹고, 바소프레신이라는 호르몬을 코의 비강에 뿌려줘야 했다. 사춘기가 시작될 나이에는 여성 호르몬을 투여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니 힘든 일이 한둘이 아닐 건 불 보듯 뻔했다.
바소프레신은 콩팥에서 물을 재흡수하는 데 필요한 호르몬으로 하루에 두 번씩 비강 내부에 뿌려줘야 한다. 호르몬이 떨어지면 콩팥에서 물을 재흡수할 수 없기에 즉시 소변량이 많아진다. 바소프레신이 부족하면 목이 마르고 소변이 마려울 뿐 아니라 침에 거품이 많아지고, 가슴이 답답하고, 기운이 빠지고, 손발이 떨리는 증세까지 나타났다.
나중엔 바소프레신 분사량을 점점 늘려도 우리는 30분마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괴로워했다. 그럴 때 현대의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탈수 때문에 소풍 한 번 못 가본 딸. 바싹 말라 갈라진 우리의 혀를 지켜보며 김 교수 부부는 허탈과 무력함을 느꼈다. 부인 김영희씨는 간호학과 출신으로 김 교수와 스무 살에 만난 캠퍼스 커플이었다. 유전자를 연구하는 생화학자로, 간호사로, 뇌하수체 없는 딸의 고통을 지켜봐야 하는 심정은 참담하고 비통했다.
‘물의 기억력’
귀국하면서 그는 연세대에 자리잡았다.
“화학과가 아니라 의과대학 생화학 교실을 택했어요. 우리 때문에 친한 의사를 여럿 만들어놔야 할 것 같아서….”
의과대학 실험실에서 그는 적극적으로 딸의 아픔을 해소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건 부정(父情)이기도 하고 연구자로서의 소명이기도 했다.
“서양에는 17세기부터 물질의 정보를 물에 기억시켜 자연치유력을 증강시키는 방법이 있었어요. 독일 의사 하네만이 시작한 동종요법이라는 것이죠. 하네만이 키니네를 직접 먹어본 뒤 말라리아와 흡사한 증세가 나타나는 것을 경험했답니다. 그는 키니네가 말라리아와 유사한 증세를 유발하기 때문에 말라리아를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