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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터줏대감, 공화랑 대표 공창호

“최고 화가는 단원 김홍도, 최고 컬렉터는 삼성 이병철 회장”

인사동 터줏대감, 공화랑 대표 공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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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놀라운 기억력과 날카로운 눈을 가졌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옛날 그림과 글에 묻혀 살았다. 수만점의 고미술품을 만지고 보고 느끼기를 40년. 이제 그는 최고의 고미술품 심미안을 가졌다고 칭송받는다. 그러나 스스로는 “아직 멀었다” 한다.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탐구해도 헷갈리는 게 고미술이란다. 옛 향취에 취해 달려온 지독한 고미술 사랑.
인사동 터줏대감, 공화랑 대표 공창호
서울 인사동에 한 표구가게가 있었다. 그때는 서화를 사고파는 화랑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이었다. 생각하면 그리 먼 옛날도 아니다. 광복 후 일본인이 제 나라로 쫓겨가고 전쟁이 터지고 ‘재건’(이제 낯선 명사가 됐지만)이 시작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막 끝나갈 즈음이었다. 그 표구가게 앞에는 날마다 멀쩡한 병풍들이 수북이 버려졌다. 그때까지 병풍은 집집마다 두어 틀씩 간수하던 생필품이었다. 제사를 모시거나 혼인이나 돌, 회갑 잔치 때 병풍을 둘러치는 것은 살 만한 집의 기본이었다.

병풍들이 슬슬 버려진 건 주택구조가 변하면서다. 그때 막 생겨나던 국민주택은 키 큰 병풍을 감당할 수 없었다. 곧이어 나타난 아파트는 더욱 심했다. 무엇보다 평소 병풍을 사용할 일이 사라져갔다. 덩치 큰 병풍을 버릴 데가 마땅찮고 쓰레기꾼이 치워가질 않으니(아니면 쓰레기꾼이 그걸 모아 와서) 표구사 앞에 ‘무단투기’했던 것이다. 표구사 앞을 택한 건 아마도 “여기라면 쓸모가 아주 없진 않겠지…”라고 위안할 수 있는 데다, 버려지는 병풍에도 덜 미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표구점 주인은 눈 밝은 청년이었다. 나이는 스무 나믄밖에 안 됐지만 손도 맵고 눈도 맵고 천부적 감각을 지닌 데다 스승을 섭렵하며 글씨와 그림과 옛글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는 버려진 병풍들을 표구점 안으로 안고 들어갔다. 내용이 궁금해서라도 그냥 버려둘 수가 없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흥미진진하다.

“산다 하는 집은 병풍이 하나가 아니라 몇 틀씩 있었거든. 돌, 백일, 회갑, 혼인, 제사 때 쓰는 병풍이 다 달랐다고. 병풍, 그게 더러워지기 일쑤란 말이야. 잔치 때 둘러쳐놓다 보면 막걸리도 튀고 고춧가루도 묻고 그럴 거 아냐. 더러워지면 그 위에 다른 그림을 덧바른단 말이야. 한 50년 쓰다 보면 첨에 무게 10㎏이던 병풍이 나중엔 20㎏ 나가는 것도 흔해. 혼자서는 들지도 못해. 그걸 물에 담가놓으면 그림이 한 켜 한 켜 떨어져 올라오네? 맨 위는 솜씨가 엉망인데, 아래에서 추사(秋史 金正喜) 글씨가 턱 올라오는 경우가 있더라고. 추사 글씨 아래 오원(吾園 張承業) 그림이 따라 나오기도 하고…. 그 안에서 삼원삼재-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오원 장승업·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겸재 정선(謙齋 鄭?)·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두셋이 잇달아 나오는 것도 내가 봤다고!”

노리개, 비녀, 동전패



횡재도 그런 횡재가 없었다. 횡재이긴 하되, 귀한 서화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지 비싼 돈으로 거래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림과 글씨가 거액에 거래되기 이전이었다. 다만 서로 필요한 사람끼리 알맞은 선에서 나눠 갖곤 했다.

“찾아오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주로 상궁이나 내시 출신들이야. 직접 오질 않고 사람을 보내지. 입원비가 없다거나 등록금 철이거나 혼사가 있다거나 급하게 목돈을 마련할 일이 생기면 집안에 있던 물건을 들고 나오는 거지. 그때는 풍류가 있었어. 얼마 달라고 하질 않아. ‘알아서 금을 한번 쳐봐요’ 하지. 그러면 대개 후하게 쳐드리지. 별의별 게 다 나왔어. 노리개도 있고 비녀도 있고 자수도 동전패도 있어. 편지, 마패, 교지 같은 것도 나오고 활통, 서안, 책장에 심지어 옥새 같은 것도 돌아다녔다니깐.”

파는 사람도 뻔하고 사들이는 사람도 뻔하던 한 시절이 지났다. 나라살림이 점차 펴지고 먹고살 만한 집이 늘어나자 고서화시장에도 활력이 붙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 공표구사는 주인 공창호(孔暢鎬·60)의 이름 두 자를 따서 공창화랑으로 이름을 바꾼다. 1970년대 초반 막 화랑이란 이름이 생겨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채권 삽니다, 머리카락 삽니다, 헌 시계 삽니다…” 하면서 골목을 누비던 사람들 있었잖아? 인제 그 사람들이 물건을 모아오기 시작했어. 그걸 일본말로 ‘가이바시’라고 했어. 소위 ‘나까마’라는 중간상인이 나온 것은 한참 지나서야. 그때도 우리 가게 앞에 병풍을 버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다니깐. 외국인이 지나가다 보니 그게 희한하거든? 아코디언처럼 접히는 그림이란 말이야. 1000달러 줄 테니 팔라고 해. 그때 1000달러면 크지. 1970년 초반엔 겸재 작품도 한 3만원밖에 안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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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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