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불을 껴안은 얼음, 소설가 박완서

“인생에 엄살떨지 마라, 비명도 교성도 지르지 말라”

  • 글: 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3-06-25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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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 다섯을 모유로 기른 그는, 마흔 살 되던 해 여름 비로소 작가가 됐다.
    • 하루 20개의 연탄을 갈며, 망령 든 시어머니를 연민하며, 남편과 외아들을 한 해에 잃는 참절에도 마침내 문학으로 다시 섰다.
    불을 껴안은 얼음, 소설가 박완서
    우리는 종종 인생의 한 시기를 어떤 책, 어떤 영화로 기억한다. TV에서 ‘빠삐용’을 방영하던 날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고, 스물세 살 여름은 기형도의 시 ‘빈 집’에 갇혀 있다. 그러고 보면 소설가 박완서(73)는 ‘괴물’이었다. 열다섯, 스물, 스물아홉, 서른 셋. 삶의 도처에 도둑처럼 출몰해 뺨도 올려붙이고 가끔은 등도 쓸어 주었다. 그가 제 주인공을 내려보는 꼭 그만큼의 말끔함으로, 엄살떨지 않고 발 꼭꼭 찍어붙이며 허리 세워 걷고 싶었다.

    구리시 아치울 마을로 달려가는 지금, 머리 속은 내내 그 생각이다. 고즈넉한 전원마을에서 꽃을 벗삼아 물러앉은 노(老)작가.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이련만, 또 진정 그렇더란 증언이 한둘이 아니건만, 어쩐지 배신 같고 연막만 같다.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그 독한 직관의 칼을, 그는 어느 깊이에 숨겨두고 있단 말인가.

    ‘실물’과 ‘박제’, 그 하늘 땅 차이

    “어서 오세요.”

    담 너머로 인사 건네는 그의 미소가 과연 따뜻하다. 대문 열고 들어서니 눈에 확 안겨오는 초여름 뜨락. 잘고 수굿하면서도 깜찍한 오색 들꽃들이 넓은 잔디밭을 빙 둘러 마치 맞게 피어 있다.



    객을 맞고 사진 촬영에 응하는 그의 태도는 능숙하고 단정하다. 활력, 효율, 명민.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이삼십대 신진에게나 어울릴 법한 단어들이 속속 떠오른다. 동선은 정확하고 몸짓에는 낭비가 없다. 목소리는 또 어떤가. 갓 지어 기름 도는 햅쌀밥 같다. 단 한 번 반말투 섞지 않는 공대(恭待)가 오히려 편안한 거리감을 형성한다.

    햇살 밀려드는 거실에 차 한 잔 놓고 마주앉는다. ‘실물’과 ‘박제’의 하늘 땅 차이에 내심 혀를 내두른다. 책 속 그의 사진은 만년 소녀 같지 않던가. 이웃집 아낙처럼 심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가까이서 본 그는 매우 세련된 여성이다. ‘귀족적’이라 해도 넘칠 것이 없어 뵌다. 예의, 겸손, 그 안의 감출 수 없는 연륜과 자신감. 그의 10만 고정독자들에게, 당신들 깜빡 속았다고, 사실 그 소설가 ‘거물’의 자태를 갖췄노라고 호들갑 떨며 일러주고 싶다. 아직도 노인 아닌 여자 냄새가 나더라는 것 또한.

    자주 저고리, 검정 치마, 하얀 줄 세 개

    박완서의 삶은 그가 쓴 여러 자전적 소설들을 통해 일반에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는 1931년 개성시에서 10㎞쯤 떨어진 벽촌 박적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네 살 때 약을 제대로 못 써 유명을 달리했고, 형제라고는 위로 열 살 차이 나는 오빠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부친의 부재는 선생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요.

    “저는 아버지가 없다는 결핍감을 모르고 자랐어요.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조부모 댁에서 함께 살았는데, 작은아버지가 두 분 계시는 데다 꽤 클 때까지 집안의 막내여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지요. 그 분위기를 알려면 당시 행세하는 집안을 이해해야 해요. 형수가 홀로 됐을 때 그 남은 자녀에 대해 시동생들이 갖는 책임의식 같은 거요. 저 대학 들어갈 때도 우리 숙부가 ‘니 등록금은 꼭 내가 줘야 된다’고 하실 정도였으니까요. 워낙 과보호에 응석받이로 자라다 보니, 오히려 어머니가 엄한 훈육으로 아버지 역할을 대신했지요.

    그런데 늘그막에 되레 아버지 생각이 종종 나요. 어떤 분이셨을까…. 아버지가 편찮으실 때 아기인 제가 엉금엉금 기어가 뽀뽀를 하면 환히 웃으셨다, 사랑받았다, 그렇게 어머니가 단편적으로 들려주신 얘기들이 요즘 들어 새삼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자칫 촌색시로 고만고만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그를 대처로 이끈 건 ‘미신이나 팔자를 믿지 않고 과학과 교육과 책의 힘을 믿은’ 어머니 홍기숙 여사였다. 여덟 살에 서울 현저동으로 이사온 그는 매동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일본말을 전혀 몰라 고전했지만, 고학년이 됐을 무렵엔 국어(일본어)를 가장 잘하는 학생으로 뽑혀 벚꽃 문양 배지까지 달고 다녔다. 그렇더라도 창씨 개명을 하지 않아 학교 생활이 꼭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1944년 숙명여고에 입학했다. 일제 말기 소개령이 내리자 개성으로 올라가 잠시 호수돈여고에 적을 뒀으나 다니지는 않았다. 해방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는 1950년 숙명여고를 졸업했다.

    -선생에게 모친은 참 특별한 존재였지요.

    “어머니는 대단히 자존심 강한 분이었어요. 총명하고 호기심도 많았지요. 사실 어린 시절 전 서울로 공부하러 가는 게 싫었어요.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충분히 행복했으니까요. 아마 그대로 눌러 있었다면 소학교조차 나오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과수댁이, 그것도 한 집안의 맏며느리가 자식 공부시키겠다고 서울행을 택하다니요. 그것도 아들만이 아닌 딸까지 끌고서요. 그건 아주 특별한,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밤낮 제게 숙명·진명 얘기를 하셨어요. 어머니의 외사촌들이 숙명여고와 진명여고를 다녔나봐요. 자주저고리에 검정 치마, 치마 밑단에는 하얀 줄이 세 개…, 그렇게 교복 모양까지 설명해가며 그 학교들을 동경하셨죠.”

    학살당한 ‘자홀의 시간’

    -모친의 큰 기대가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전 그냥 너무너무 당연한 걸로 받아들였어요. 하지만 과보호는 싫었죠. 비가 온다 하면 전 당연히 어머니가 우산을 가져오는 걸로 알았어요. 하교했을 때 어머니가 집에 없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요.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시집올 때 필사본 이야기책을 한 짐이나 가져올 만큼 ‘문학애호가’였다. 구전 설화부터 중국 고전까지 무궁무진한 이야기 거리를 갖고 있었고, 그를 풀어내는 솜씨 또한 남달리 훌륭했다. 박완서가 “소설은 이야기”라는 정의를 갖게 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가장 컸다 하겠다.

    1950년 6월 박완서는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빛나는 자홀(自惚)의 시간’도 잠시, 곧 6·25 전쟁이 터졌고 그의 가족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참절의 고통을 경험했다. 혼란의 와중에 숙부와 오빠가 뜻하지 않은 죽음을 당한 것이다. 특히 그의 우상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오빠의 비참한 죽음은 그에게 불치의 상처를 남겼다.

    ‘오빠는 서서히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정신과 육체가 따로따로. 오빠가 완전히 죽기까지는 장장 일 년이 걸렸다. 나는 지금까지도 어느 쪽이 오빠를 죽였는지 확실히 말할 수가 없다. 한쪽에선 오빠를 반동으로 몰아 갖은 악랄한 수단으로 어르고 공갈치고 협박함으로써 나약한 지식인에 지나지 않았던 그를 마침내 폐인으로 만들어놓고 말았고, 다른 한쪽에선 폐인을 데려다 빨갱이라고 족치기가 맥이 빠졌는지 슬슬 가지고 놀고 장난치다 당장 죽지 않을만큼의 총상을 입혀서 내팽개치고 후퇴했다.’ 그가 한 글에서 오빠의 죽음에 대해 묘사한 대목이다.

    -오빠와 우애가 참 좋았던가 봅니다.

    “어제 우연히 ‘남매’라는 제목의 TV 단막극을 보게 됐어요.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 오빠가 희생하는 내용인데, 그걸 보며 저도 몰래 눈물을 뚝 떨궜지요. 우리 오빠도 저랬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저와 오빠는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오빠 덕이었어요. 처음 제게 세계문학전집을 갖춰준 이도 바로 오빠였고요.”

    -선생도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이 있었지요.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저 역시 ‘팜플렛 빨갱이’였습니다. 하지만 서울이 북쪽 손에 넘어간 후 한동안 학교에 계속 나가면서 그만 (사회주의에) 완전히 질려버렸지요. 전시이긴 하지만 대학이란 데서 고작 학생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당사(黨史)며 ‘김일성 교시’뿐이라니요. 아, 이건 정말 안 되겠다, 염증이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당시 젊은이들을 매혹시켰던 부의 분배에 대한 이상,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에 대한 문제제기 등은 아직도 제 마음 속에 살아 있습니다. 부의 편중이란 아무래도 지식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죠. 이제 생각하면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나누게 하는 건 종교뿐인 듯도 합니다.”

    복학 대신 결혼을 택하다

    오빠의 죽음 후 생계가 막막해지자 그는, ‘산송장’과 다름없는 올케, 어머니를 대신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천우신조로 미8군 PX 초상화부에 일자리를 얻었다. 거기서 이루어진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은 그의 데뷔작 ‘나목’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가 뒷날 남편이 된 호영진(작고) 씨를 만난 곳도 PX였다. 호씨는 PX가 들어있는 동화백화점 소속 측량기사였다. 고학으로 겨우 공업학교를 나와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1953년 초, 그의 올케가 드디어 광장시장에 포목점을 내게 됐다. 한시름 놓은 박완서는 어머니에게 PX를 그만두고 결혼하겠다고 했다.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도 있는’ 딸이 복학 대신 결혼을 택하자 어머니는 몹시 실망했다. 무엇보다 그 결혼상대가 양반도 아닌 중인 계급에, ‘세상 듣도 보도 못한 신평 호씨’라는 사실에 역정을 냈다.

    -정말 왜 그렇게 일찍 결혼을 하셨나요.

    “저는 그냥 우리 집을 면하고 싶었어요. 어머니가 ‘그 좋은 학교를 왜 안 다니느냐, 어떻게든 니 공부는 시킨다’고 간절히 말리셨지만 단호하게 뿌리쳤어요. 모르죠, 제가 아들이었다면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다른 선택을 했을지…. 제가 면하고 싶었던 것은 숙부와 오빠, 그렇게 뭔가 세상을 바꿔보려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우리 집안의 분위기였어요. 가족 안 돌보는 남자가 싫었고, 처자식만 아는 성실한 사람이면 일생을 같이해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결혼할 때 숟가락 하나 장만해가지 않았다고 한다.

    “전 쌀 이는 것도 모르고 시집갔어요. 그런 딸인 데도 우리 어머니는 당당하기 이를 데 없었죠. 그저 아깝고,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것처럼. 나중에는 사위를 참 좋아하게 됐는데, 결혼식 당시는 많이 억울해하셨어요.”

    -선생은 모친을 많이 닮지 않았나요.

    “제게 있는 문학적 소질은 전적으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말투도 비슷하지 싶어요. 맺고 끊는 게 분명하면서 뭔가 차갑고 냉정한 듯한 느낌이요.”

    -모친이 냉정한 분이셨나요.

    “차갑지만 경우 바른 분이었어요. 고향 사람이 들르면 없는 돈에 노자 마련해주고 밥해 먹여 보내고. 6·25 전쟁 때는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식량 넉넉하니 쉬었다 가라’며 피난 가는 개성 사람들을 붙들어 앉히곤 했어요. 그럼 올케랑 저는 부엌에서 우거지 잔뜩 풀어 수제비국 끓이며 어머니 욕을 마구마구 해댔지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나중에도 용돈이 많이 드는 분이셨어요.”

    “이야기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1953년 결혼을 했다.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서울 충신동 18평 한옥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1954년 첫딸 원숙을 낳았다. 이어 원순(55년), 원경(58년), 원균(60년) 등 딸 셋이 더 태어났다. 단산을 할까 하던 중 다섯째 아이를 갖게 됐다. 1963년, 외아들 원태가 태어났다.

    -왜 그렇게 빨리 출산의 길로 접어들었는지요. 결혼 후 공부를 계속할 수도 있었을텐데요.

    “사실 그런 생각도 있었어요. 결혼하면 들어가 살 집이 문리대에서 가깝다는 것도 제겐 (결혼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으니까요. 그런데 운명이라는 게, 그만 금세 임신이 돼버리더라고요. 걔만 길러놓고 보자 했더니 또 애가 들어서고. 첫째, 둘째딸을 낳은 후에는 아들 한번 낳아보자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그래서 다시 둘을 더 낳고 3년 후 막내까지 보고 나니 어느덧 10여 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상실감, 조바심 때문에 괴롭지는 않았나요.

    “여고 동창인 소설가 한말숙이 당시 문리대를 다니고 있었거든요. 우리집에 와 점심 먹고 공부하러 왔다갔다하곤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모습이 조금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아마 애 낳고 키우는 그 과정 속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던가 봐요. 제가 모성적인 면이 좀 강하거든요. 순전히 출연하는 아기가 예뻐 단골로 시청하는 TV연속극이 있을 정도니까요.

    전 다섯 아이를 모두 모유로 키웠습니다. 젖을 물리고 있을 때의 그 충족감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죠. 하지만 아이 다섯 키우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요. 일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해도 정신이 하나 없죠. 제가 마흔에 글 쓰기를 시작한 걸 가지고 왜 하필 그때였나, 그동안은 어떻게 참았냐 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는데, 제겐 막내까지 유치원에 들어간 바로 그 당시가 다시 뭔가를 시작하기에 가장 적합한 때였습니다.”

    -결혼 생활을 충분히 행복했습니까.

    “남편은 같이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절 피곤하게 하지 않았고 최대한 자유를 보장해줬죠. 그런 사람 만나기가 어디 쉬운가요. 성실하고 깔끔했고, 미8군 PX가 물러간 동화백화점 내에서 전기상을 운영했는데, 수입도 제법 괜찮아 생활은 늘 안정돼 있었어요. 남편이 술을 좋아해 되도록 집에서 반주로 즐기도록 요리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아이 키우고 요리 하고, 그런 일들이 대체로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어요. 6·25의 생생한 기억이 어제 일처럼 발목을 잡고 있었으니까요. 당시 삶이 평온해 상처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던 건지도 몰라요. 저는 도덕적으로 하자 없이 사는데도 계 붓고 집 넓히고 하는 것이 굉장히 타락한 생활처럼 여겨졌어요. 사람 나고 이데올로기가 난 게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나고 사람 난 세상은 얼마나 끔찍한지. 아무한테도 발설 못하고 우리 가족만이 비밀로 꼭꼭 숨겨둔 오빠의 죽음은 원귀가 된 것처럼 수시로 절 괴롭혔어요. 굿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어요.”

    불을 껴안은 얼음, 소설가 박완서
    마흔 살 어느 날, 마침내 그는 쓰기로 했다. 시작은 오빠가 아니었다. 미8군 PX에서 만난 화가 박수근, 그의 삶을 증언하리라 했다. 마침 일년에 한번씩 있는 ‘신동아’ 논픽션 공모가 코앞이었다. 그런데 붓이 나가질 않았다. 아니, 쾌속으로 나갈 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잘 써진 부분일수록 다음날 읽어보면 실화가 아니라 제 멋대로 꾸며낸 거짓말이었다. 더하여 그는 ‘자꾸만 내 얘기가 하고 싶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짓눌려 있던 속 이야기들이 ‘돌파구를 만난 것처럼 아우성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논픽션을 포기하고 픽션으로 돌아섰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처녀작 ‘나목’이었다.

    -글 쓰기를 시작한 것을 가족에게 알렸나요.

    “아니요. 남편이나 아이들에게는 일기 쓴다고도 하고 편지 쓴다고도 했습니다. 글 쓸 시간 내기가 어려워 앞치마 주머니에 항상 메모지와 볼펜을 넣고 다녔지요.”

    그 무렵 그의 남편은 집에서 200m쯤 떨어진 일본식 2층집에서 조명기구를 만드는 가내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삼성그룹이 동화백화점을 인수하면서 신세계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꾸고 점포를 모두 직영화한 탓에, 그의 남편 또한 가게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모든 데뷔작은 부엌 식탁에서 씌여진다 했던가. 그는 이전과 달리 험한 일을 하게 된 남편, 그리고 일꾼들의 점심을 나르면서 공장집 2층 다다미방에서 ‘나목’의 초고를 썼다. 외롭고 고달픈 작업이었다.

    “원고를 직접 가져갔으면 좋으련만 부끄러워 그러지도 못하고, 우편으로 보낸 다음 혹시 분실되지는 않았을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또 글씨를 못 쓰는 편이라 심사위원들이 ‘국교생 글씨’라고 아예 읽어보지도 않으면 어쩌나 속으로 조바심도 쳤지요.”

    1970년 늦여름, ‘여성동아’ 기자들이 당선 소식을 갖고 왔다. “당선되실 줄 미리 아셨냐”는 질문에 박완서는 당당하게 답했다.

    “될 줄 알았어요. 여자들끼리 경쟁인데요 뭐.”

    -모친께서 많이 좋아하셨겠네요.

    “그렇지요. 사실 힘든 가운데서도 소설의 끝을 맺을 수 있었던 건 어머니에 대한 부채감이 적지 않게 작용을 한 때문이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친정 일이라면 열 일 제쳐두고 챙긴 저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어요. 어머니가 제게 바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글 쓰기가 힘에 부칠 때마다 기뻐하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그런데 참, 우리 어머니도 대단하시지요. 누가 차갑고 교만한 데가 있는 분 아니랄까봐 한번은 기자 앞에서 절 아주 창피를 주시더라고요. 그때가 1976년인데 ‘동아일보’에 ‘휘청거리는 오후’를 연재하고 있었어요. 기자들이 찾아와 어머니에게 ‘따님 소설을 읽느냐’고 물으니 이러시는 거예요. ‘우리 집이 동아일보를 보니 안 볼 수 있나요? 아, 그것도 소설이라고 썼는지, 원.’ 영웅호걸 이야기를 좋아하는 어머니 눈에는 참말 소설도 아닌 걸로 비쳤을지도 모르지요. 그때 얼마나 약이 오르던지, 일부러 책꽂이에 제 책만 거꾸로 뒤집어놓고 높은 곳에다 올려놓고 그랬어요. 그렇게 한심하면 아예 보지도 마시라구요.”

    그렇더라도 어머니는 그의 가장 좋은 친구였다.

    “아흔을 사셨는데, 그만하면 천수를 누리신 셈인데도 자꾸 아쉬운 맘은 어쩔 수 없어요. 어쩌다 큰돈이 생기면, 아휴 어머니가 계시면 좋을텐데, 무슨 상을 받아도, 어머니가 보셨으면 좋으련만…. 좋은 일이 있어도 어머니가 반기지 않는데 이까짓 것 무슨 소용 있나 싶고. 어린 시절 성적표 잘 나오면 집에 빨리 뛰어가 어머니께 보이고 싶은 바로 그 마음, 그런 어린애 같은 욕망이 지금도 있는 거죠.”

    “나도 쿨한 것이 좋다”

    -자전적 소설을 많이 쓰신 편인데요, ‘내 얘기를 떠벌이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이 천박스럽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나요.

    “자전적이라고 해서 있는 그대로를 쓰는 건 아닙니다. 진정 사적인 부분, 예를 들어 남편과의 연애 같은 것은 지금껏 거의 노출한 적이 없어요. 사회상과 맞닿아 있는 것만 드러내 왔지요. 저는 저속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 노출이 싫어요.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갖고 가고 싶은 전적으로 제 개인의 문제인 것들, 그런 것은 철저하게 가릴 줄 알아야죠.”

    -경험을 소설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어떤 특별한 경험이 있다 해서 그것이 곧 소설이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기억하고 경험은 다르거든요. 뭔가 발효되는 느낌이랄까, 어떤 상상력을 끌어들일 수 있는 특별한 기억이 따로 있어요.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감동케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 그것만이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지요. 훌륭한 소설가란 자기만의 ‘안테나’로 바로 그런 가치 있는 기억과 국면을 끌어올리는 사람일 겁니다. 물론 그를 위해서는 작가 내부에 뭔가 뿌리가 될 만한 것이 있어야겠지요.”

    -선생의 마흔 살 등단이 문학 지망생들에게 끼친 엄청난 영향을 아시는지요.

    “글세 말예요. 주부들에게 헛된 희망을 갖게 한 건 아닌지. 백화점 같은 데 가보면 정말 ‘시간을 죽이러 왔다’고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보다야 열심히 책 읽고 고민하면서 한번쯤 자기 일에 매달려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선생이 쓰는 소설의 본질적 핵심은 무엇입니까.

    “인간존중입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것이 더욱 소중하게 생각돼요. 작은 풀꽃 하나도 가장 정교한 컴퓨터보다 더 깊다는 경이로움. 전 항상 밤과 새벽 사이에 일어나는데, 그때 뜰에 나가 그것들과 눈 맞추다 보면 하루가 그리 새로울 수 없어요. 씨 떨어져 다시 나고 하는 그 순환이 꼭 죽은 사람 살아오는 것처럼 신기하잖아요.

    결국 좋은 소설이란 내 속의 메말라 가는 인간성을 윤택하게 축여주는 것일 겝니다. 아무리 누추하게 그려진 인간이라도 반면교사가 되어주는. 좋은 소설이란 역시 반성의 기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직 저의 생각입니다.

    가끔 책을 읽다 중간에 내팽개쳐버리는 때가 있어요. 읽을수록 더 옥죄고 메마르는 느낌 때문이죠. 뭔가 제가 소설에 대해 갖고 있는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면서 배반당한 듯한 기분마저 들지요. 전 그런 소설은 아무리 문장이 수려해도 도저히 좋은 작품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쿨’한 소설들에 대한 비판인가요.

    “저도 쿨한 거 좋아합니다. 개성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더리적은 거예요. 관계가 깔끔하지 않고 지저분하게 질질 끄는 거요. 하지만 그것이 곧 냉소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에게서 관계를 다 절개해버리고 나면 그건 더 이상 ‘人間’이 아니지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인간이 등장하는, 그렇다 보니 작품 자체도 이 세상의 윤리·도덕으로부터 무책임한…. 비록 저주하더라도 뭔가 정면으로 부딪혀 싸워보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가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은 소설이란 모름지기 고발의 기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저는 정통 리얼리즘 작가입니다. 문학은 궁극적으로 반성과 위안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 소설에서 ‘복수’를 읽는 분들이 많은데, 분노가 애정의 한 모습일 수 있듯 복수 또한 위안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는 거죠.”

    -소설 쓰는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정확한 표현을 찾아냈을 때의 기쁨이 가장 크겠지요. 그것 때문에 자꾸 쓰는 것 같아요. 제가 밤낮 그러거든요. 허구의 세계에는 더 두꺼운 껍질이 있다, 실제 세계에선 문 하나 열고 들어가면 되지만 그 세계에선 컵 하나를 움직이려 해도 온몸을 던져야 한다고요. 스토리니 주된 장치니 다 돼 있는데,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참 잘 안돼요. 절정까지 올라가기가 힘든 거죠. 반면 내리막길에선 달리는 쾌감이 있어요. 단편 하나를 쓰는 데 20일이 걸린다면 그 중 마지막 5일 동안 3분의 2를 쓰니까요.”

    -작품을 쓸 때 독자의 반응을 늘 염두에 두나요.

    “전 일기를 쓴다 해도 결국은 읽는 이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어떻게 누구 손에 들어갈지 모르잖아요. 제 글이 쉽다고들 하는데 그리 읽히도록 나름껏 노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쉽게 다가가는 표현을 찾으려는 고투, 그것 없이 소설 쓰기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시어머니의 치매와 아티반

    1976년, ‘문학사상’에 ‘도시의 흉년’을, ‘동아일보’에는 ‘휘청거리는 오후’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가로 한참 힘차게 비상할 무렵, 그러나 박완서는 개인적으로 남다른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시어머니의 치매 증상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출가한 큰딸을 뺀 네 아이 뒷바라지에,방마다 갈아대야 하는 연탄에, 시어머니의 치매까지 겹쳤으니 보통 힘든 게 아니었겠습니다.

    “그 3~4년은 지옥 같았어요. 그리 단정하시던 분이 부부 잠자리에 불쑥 끼여들어 ‘여기는 뜨끈한데 내 방은 왜 냉골이냐’고 역정을 내시지 않나, ‘연탄 갈아라, 쌀은 씻었냐’ 밤새 닥달하시질 않나. 또 어떻게 된 게 저만 졸졸 따라다니시는 거예요. 연재가 두 개나 되니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로 ‘집필 피난’을 가기도 하고, 나중에는 아티반이라는 신경안정제까지 장복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한 약사의 충고로 그 약에 중독성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 날로 약을 끊었죠. 며칠은 정말 미치겠더군요. 하지만 제가 어딘가에 중독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베개를 안고 이방 저방 헤매면서도 끝까지 입에 대지 않았지요.”

    이런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박완서에게는 독한 구석이 있다. 스스로도 “자기 절제력이 있는 편”이라 한다. 또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기준이 있어 그에 맞지 않는 것은 가볍게 밀쳐버리는 바위 같은 단단함마저 갖춘 듯하다.

    “저도 지병이 있습니다. 먹는 약이 많지요. 하지만 주치의 외에는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일흔 넘도록 이만큼 건강하게 살았으면 됐지요. 제 건강은 제 몸하고 상의합니다. 고기가 몸에 나쁘다지만 제 몸이 원하면 먹는 거예요.”

    이러한 기질은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개성 사람 특유의 생래적 특질이기도 하다.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 ‘앉은자리에 풀도 나지 않는다’는 개성 사람 아닌가. 그는 개성 사람에 대해 이런 글을 적어 내놓은 적이 있다. ‘개성 사람은 셈이 바르다. 셈이 너무 바른 것을 두고 ‘개성 사람들은 무섭다’고들 하는데, 정작 개성사람들은 말한다. ‘셈이 바른 게 왜 무섭냐? 셈이 흐린 게 무섭지’라고. 눈처럼 흰 옷을 즐겨 입고 검소하고 꼿꼿하다. 남의 신세 지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한다. 개성 사람들은 돈을 꿔줄 때, 예를 들면, 쌀이나 장작을 사기 위해서라면 두말 없이 꿔준다. 그러나 고기를 사기 위해서라면, 거절한다.’

    “욕심이라고 해야 하나, 무슨 일을 하든지 하자 없이 깔끔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마음이 배어 있어요. 바느질을 해도 실밥 하나 잘못되면 께름칙해 못 견디는 거지요. 금전적인 것에서부터 감정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명확하지 못한 것, 뒤끝이 흐린 것에 대해서는 혐오감 같은 걸 가지고 있어요.”(‘문학동네’ 1999년 여름호)

    이것이 그의 몸과 마음에 뿌리 박힌 개성 사람 기질, 바로 그것이다.

    뜨악하게 밀어내기, 냉혹하게 다듬기

    그래서 박완서는 엄살을 싫어한다.

    “고통을 과장하는 것이 엄살이지요. 또 조금 좋다고 난리 치는 것도 보기 안 좋구요. 비명도 지르지 말고 교성도 지르지 말아야죠. 저는 그런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박완서는 한 문학상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거리를 소설로 만들기 위해선 주워 올릴 때와는 딴판으로 일단 뜨악하게 밀어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정이 앞서지 않는 냉혹한 마음으로 추리고 다듬고 지켜졌을 때만 비로소 명색이 소설이라 부를 만한 것이 만들어졌지 않나 싶습니다.”

    이는 그의 소설창작론인 동시에 인생독법(人生讀法)인 듯도 하다.

    그렇다고 그를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라 힐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박완서는 우리 문학사에 이름 얹은 그 어떤 작가 못지않게 놀라운 사랑의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생명(혹은 살아 있음)을 지극히 경외하여 그 앞에 조건 없이 무릎 꿇는 모성(母性)의 작가다.

    박완서는 시어머니의 치매에 대해서도 개성 사람다운 대범함과 사랑의 값을 칠 줄 아는 남다른 균형감각으로 대응했다.

    “지금처럼 치매다 뭐다 그렇게 따지고 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노망이다 하고 편하게 받아들였어요. 몸이 붕 뜨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방문을 열어보니 어머님이 곱게 돌아가신, 뭐 그런 죄 받을 꿈을 꾼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강한 건 연민이고 사랑이었지요. 어머님은 손주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일일이 업어 키우셨고 기저귀도 다 당신 손으로 빨았어요. 퍼부어주신 사랑이 있는데 미움이 갈 리 있나요.”

    그런 마음이 전해진 걸까, 어느 날 시어머니가 그의 원피스 자락을 잡더니 그지없이 말짱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한테 이렇게 못할 짓을 할 줄 누가 알았니.”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시어머니는 운명했다. 망자의 마지막 한마디는 그에게 두고두고 다시없는 위안이 됐다.

    -시어머니를 간병한 경험이 이후 여성 문제와 노인 문제에 천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겠군요.

    “그렇긴 합니다만, 제가 여성의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한 건 그보다 훨씬 전인 신혼 무렵부터였습니다. 시어머님은 좋은 분이셨고 절 많이 아껴주셨지만 전 참 견딜 수 없었던 게, 친정 어머니가 외아들 잃은 것을 두고 자꾸 ‘사돈 마님이 불쌍하다’시는 거였어요. 거기에는 아들 가진 자의 잘남이 한껏 묻어 있었지요. 또 친정에 자주 가야 했는데 그때마다 시어머님의 허락을 받는 일도 내키지가 않았습니다.”

    -촉수가 참 민감하시군요.

    “예를 들면 이런 일도 있었어요. 친정이나 시댁이나 설이 되면 만두를 빚습니다. 만두를 다 빚고 나면 친정에서는 밖에 내다놓은 큰 항아리에 넣어 얼린 후 그때그때 꺼내 끓여 먹었죠. 반면 시댁에서는 ‘얼리면 끓일 때 터진다’며 부득부득 방 안 윗목에 놓아두었습니다. 온도가 높으면 만두끼리 붙게 되니 밀가루를 얼마나 많이 뿌려야겠어요. 자연히 국을 끓여놔도 보기 싫고 시원한 맛도 덜했지요. 그런데 시어머니는 제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시집 왔으면 시댁 법도를 따르라’는 것이었죠. 저는 도저히 그 불합리를 소화해낼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별 생각 없이, 밖에 내놨던 만두를 가져다 국을 끓여 내갔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님께 말씀드렸지요. ‘이거 얼린 만두로 끓인 거예요.’

    결혼을 앞두고 숙명여고 시절 은사께 인사를 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평생을 여성 교육에 몸바치셨다는 분이, 글쎄 ‘소금 섬을 물로 끌어가라면 끌어라’는 당부를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저는 교육을 받았나요?’ 그렇게 항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85년, 박완서는 ‘문학사상’에 장편 역사소설 ‘미망’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미망’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갑신정변부터 6·25 발발까지의 사회상을 씨줄로, 개성 대상(大商) 전처만家의 5대에 걸친 가족사를 날줄로 삼은 이 작품은 개성의 지역성과 상인 정신을 뛰어나게 형상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미망’이 그에게 진정 뼈아픈 자식인 이유는 따로 있다. ‘미망’을 쓰는 몇 년 동안 그는, 남들이 평생에 걸쳐 한두 번 당할까 말까 한 재난을 거푸 세 차례나 겪어내야 했다. 그 첫째가 홍대 미대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막내딸 원균의 교통사고였다.

    ‘미망’, 그리고 세 번의 나락

    “‘1985년 3월이었어요. 택시를 타고 가다 강변도로에서 사고가 난 겁니다. 상처가 너무 참혹했어요. 가족들조차 옷을 보고 알았지, 얼굴로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까요. 안면 성형 수술만 다섯 번을 했습니다.”

    원균은 당시 결혼을 앞둔 상태여서 가족들의 상심은 더욱 컸다. 다행히 막내딸의 약혼자(현 대구대 화학과 교수)는 헌신적인 자세로 예비 신부의 병상을 지켰다.

    “왜 유난히 평온한 집이 있잖아요. 우리가 신설동(지금의 보문동) 한옥에서만 20년을 살았는데, 아이들이 다 잘 큰 데다 집안도 화목해서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어요. 울타리 안에 대문을 따로 쓰는 문간방이 있었거든요. 거기 세 든 이가 우리 살림 도와주던 애한테 그러더래요. 저 안집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냐구요. 그만큼 조용하고 평화로웠어요. 그런데 원균이의 사고가 난 겁니다.”

    박완서는 막내딸의 병실에 앉아 ‘미망’을 썼다. 한번씩 수술을 할 때마다 눈에 띄게 흰머리가 늘어갔다. 그 해 여름 막내딸은 무사히 결혼식을 치렀고 유학을 가는 신랑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한동안 평안한 시간이 흘렀다. 1986년 늦가을, 두 번째 날벼락이 떨어졌다. 남편 호영진씨가 폐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호씨는 조명공장 일이 잘 안 되자 청계천에 전기공사 자재 도매상을 연 지 10년이 다 돼가고 있었다. 가족을 위해 먼지 수북한 일터에서 묵묵히 험한 일을 감당해온 가장의 와병은 그와 자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박완서는 남편의 완쾌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즈음 자녀들은 모두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서울대 사대 국문과를 졸업한 맏딸 원숙은 중학교 교사와 잡지 ‘뿌리 깊은 나무’의 기자를 거쳐 전업주부로 살고 있었다. 딸과 서울대 동문인 큰사위는 경영학자였다(현 신라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수학 교사인 둘째딸 원순과 남편(사업)은 연세대 커플이었고, 셋째딸 원경과 사위는 서울대 의대 동문이었다(현 서울의대 교수, 성균관대 의대 교수). 외아들 원태는 어느새 훌쩍 커 서울대 의대 본과 4학년생이었다.

    남편 호영진씨는 의사인 자식들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했다. ‘아버지는 정말 감동적으로 투병을 하셨다. 의사인 자식들도 감탄을 했고, 서울대학병원 안에서도 모범적인 암환자로 소문이 났다. 병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떤 종교인 못지않다고 모두들 존경했다.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항복하는 것 같았고,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떤 모범을 보여주시는 것 같았다.’ 호씨의 투병생활에 대한 맏딸 원숙의 회상기다.

    “여보, 나 좀 데려가”

    박완서는 막내딸의 사고 때와 마찬가지로 남편의 병상을 지키며 ‘미망’을 썼다.

    -어찌 글이 써지던가요.

    “글쎄 말이에요. 실생활에 그런 고난이 있는데도 소설을 써야 하는, 또 쓰고 있는 제 자신이 싫었어요. 하지만 사회와 독자를 향해 한 약속이니 지켜야 했지요. 한편으로는 쓰는 것만이 나를 구원하리라는 절박한 심정도 있었습니다. 어떤 쪽이든 결국은 자존심의 문제였지요.”

    1988년 5월, 남편 호씨가 숨을 거뒀다.

    “너무 금슬이 좋은 부부였기에 따라 죽고만 싶었어요. 방 한켠에 남편 사진과 꽃을 놓고 ‘여보, 나 좀 데려가’ 하며 넋을 놓고 지냈죠. 그때는 정말 ‘아들 결혼시킬 때까지는 살아야지’ 그런 생각이, 아, 왜 요만큼도 들지 않았을까요. 레지던트인 원태가 피곤에 절어 귀가해도 그냥 무심히 지나치고….”

    1988년 8월31일. 외아들 원태가 사망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돌연한 죽음이었다. 박완서는 펄펄 뛰었다. 고통으로 몸이 타들어갔다. 그는 지금도 ‘1988년’ 소리만 들으면 등골에 소름이 돋는다고 한다.

    불을 껴안은 얼음, 소설가 박완서
    “아들에게 그런 일이 생기고 나니 남편 생각은 조금도 안 났어요. 외려 남편이 그 아이를 데려간 것 같아 너무나도 미웠어요. 한편으로는 그이가 자식의 죽음을 보지 않게 돼 다행이란 생각도 했지요. 남편은 워낙 가정적이고 다정다감한 사람이라 그 상황을 도저히 견뎌내지 못했을 겁니다. 저야 독한 여자라 산 거지요. 일이라도 있으니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던 거구요.”

    -흔히 자식을 잃으면 근거 없는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선생은 어땠습니까.

    “부끄러웠어요. 하늘 땅에 다 부끄러워 집 밖으로 못 나갔어요.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이렇게 큰 죄 받을 짓은 분명 하지 않았는데…. 우리 집은 도덕적 규율이 유난히 엄했어요. 소송 벌일 일 있더라도 그냥 지고 마라, 그렇게 가르칠 정도였는데. 그런 평생의 노력과 자부심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남들이 ‘저 집은 뭘 잘못해 저 지경이냐’ 그렇게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았어요.”

    -결국 선생을 일으킨 건 문학이었지요.

    “처음 아들을 잃었을 땐,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글 쓰기를 멈추지 않은 벌이구나, 그런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결국 쓰는 것으로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었어요. 애증이지요, 지독한 애증. 아, 정말 치사한 얘기지만, 내가 자식도 잃고 쓰지도 못하면 남들에게 얼마나 초라하게 보일까, 그런 마지막 자존심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문학동네’ 1999년 여름호에는 당시 그가 하나님과 벌인 ‘대결’의 전모가 이렇게 기술돼 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큰딸이 사는 부산으로 갔어요. 밥은 안 먹고 보름 내내 술만 마셨지요. 그때 술을 많이 배웠어요. 세상을 피하고 싶어 이해인 수녀 소개로 부산 분도수녀원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혼자서 대결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어요. 신이라는 개념이 왜 있겠어요? 있으니 부정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정말이지 내가 그렇게까지 해답을 구한 적이 없어요.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몸은 매우 안 좋아 구토와 변비가 반복됐고 커피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미사를 보는데 된장국 냄새가 휙 나는 거예요. 뱃속에서 꾸루룩 소리가 나면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식당에 갔더니 정말 된장국에 비빔밥이 나와 있데요. 비빔밥 반 그릇과 된장국 한 그릇을 다 먹었는데도 토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해서 조금씩 밥을 먹게 됐지요.

    서울로 돌아와 아들 장례 때 수고해주신 신부님께 인사차 갔는데 거기 도자기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글씨로 ‘밥이 되어라’라는 내용이 적혀 있더군요. 내가 그때 그렇게 매달렸어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는데, 그 도자기 앞에서 생각이 난 거예요. 주님이 밥으로 오셨다. 내가 밥을 먹고 살아났으니까요. 나는 그때 밥을 그렇게 맛있게 먹고 나서 너무 슬펐어요. 삶의 의욕이 없으면 죽겠거니 했는데, 사람이란 것이 식욕만 갖고도 살 수 있더라구요. 먹고 살아라. 그것 이상 가는 해답은 없는 것 같아요. 그때 내가 끊임없이 부정할 대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그때로서는 구원이 아니었던가 싶구요. 나는 그전에도 날라리 신자였고 지금도 교회에 잘 나가지 않지만, 그래도 죽고 사는 것은 어떤 큰 뜻에 달렸다는 것을 믿어요.”

    -아들을 잃고 중단했던 ‘미망’의 연재를 재개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서울로 돌아온 얼마 후 미국의 넷째 딸네 집에 갔습니다. 물론 그때까지도 글로 일어서려는 생각 같은 건 없었어요. 딸아이 손에 목석처럼 끌려 여기저기 구경을 다녔지요. 하루는 디즈니랜드에 갔는데, 글쎄 그냥 별안간 (한국으로) 오고 싶더라고요. 주변에 흐르는 소리가 한마디도 들리지 않는 거예요. 그야 당연하지요, 모두 영어인데. 그런데 그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어요. 빨리 내 나라 말이 흐르는 곳으로 돌아가고만 싶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왔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지요.”

    -다시 글을 찾았다 해 혈육 잃은 슬픔이 가신 건 아니겠지요.

    “그러믄요.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인간성이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남들은 위선이라고 할텐데, 그래서 이런 말 잘 하지도 않지만, 정말 물질적인 게 하나도 중요치 않아요. 욕심도 없어지고 계산도 따지지 않게 됩니다. 상 받는 것도 귀찮고 싫어요. 상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그 어떤 상처나 공격도 이제는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은 탓도 있겠지만 어찌 보면 단련이 된 거겠지요.”

    -언젠가 한 글에서 ‘어떤 불행 속에서도 그렇게 불행하지는 않았다’는 표현을 쓰신 적이 있는데요.

    “그 역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걸 겁니다. 어머니는 과부였지요. 하지만 우리 집은 늘 명랑했고 그늘이 없었어요. 어머니의 풍부한 유머감각이 큰 힘이 됐죠. 조부모님도 억압적인 분들이 아니었어요. 뭐랄까, 인간성 속에 본질적으로 밝고 명랑한 기운이 서려 있달까. 가끔 애들이 묻곤 하죠. ‘엄마는 그 힘든 시절을 어떻게 살았어요?’ 그럼 전 그래요. ‘그때도 재미있었어. 지금보다 더 재미있었다.’ 예를 들어 6·25 전쟁 때 조카애가 많이 아프잖아요. 그럼 주전자에 물을 끓여 그 수증기로 습도를 맞추곤 했어요. 따스하게 뿜어져 나오는 증기, 신기하게 내려가던 조카의 열. 당시는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지나고 나면 다 훈훈한 얘기들이지요. 뭐랄까, 어떤 경우에도 서로 사랑하고 최선을 다했다는 거. 그건 불행한 경험하고는 또 다른 무엇입니다.”

    -선생께서는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의 종신 심사위원이십니다. 그로 인해 2001년 벌어진 소설가 황석영 씨의 ‘동인문학상 후보작 심사 거부’ 파동에 휩쓸린 적이 있는데요. 또 ‘이문열 책장례식’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펼쳤다가 ‘안티조선’ 진영의 공격을 받기도 했고요. 선생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 어떤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전에는 제가 ‘반체제’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 와 가만 따져보면 무정부주의자 같아요. 제가 가장 기뻤던 순간이 4·19 때거든요. 이승만 정권이 너무 싫었던 거죠. 이후로도 정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항상 ‘진보’였던 거죠. 아니, 뿌리 깊은 반골 기질이라 할까요. 물론 요새쯤에 저를 밖에서 보면 보수라고 생각하겠지만요.

    저는 보수·진보와 상관없이 어떤 권력에든 비판과 견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맞장구만 치는 것이 진정한 지지는 아니지요. 제게는 날카로운 비판적 안목이 있으니 기회가 되면 그 기준에 맞춰 애정 어린 질타를 할 생각입니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 게 마뜩지 않으십니까.

    “아니요. 바뀌었다는 데도 하나도 안 바뀐 것이 속상합니다.”

    -한 방향으로 가기를 요구받는 것이 싫으신가요.

    “싫습니다. 저는 결혼이건 정치건 무엇이건 서로 섞여 더 나은 것으로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 옳으니 복종하라, 그런 식의 강요는 누구의 것이든 싫습니다.”

    -선생에게 가족이란 이중적 의미를 갖는 듯합니다. 울타리이자 영원한 안식처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처럼 격렬한 비판의 되기도 하고요.

    “인간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신뢰를 주는 곳이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가족이죠. 문제는 그 결속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폐혜입니다. 제가 작품들 속에서 줄곧 공격해온 것도 바로 그 두 가지이고요.”

    “죽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십니까.

    “요즘은 소설 작법 같은 걸 가르쳐주는 곳도 많이 생겼지요. 하지만 가장 좋은 공부는 역시 남의 작품을 읽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중에 흉내내야지’ 하고 억지로 읽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빠져 읽는 거지요. 재미와 감동을 느끼면서요.

    ‘배우는 것’은 빠른 길입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은 암중모색입니다. 경험이든 여행이든 ‘써먹어야지’ 하고 챙겨둔 것은 결국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문학이 기댈 곳은 오직 자신에게 각인된 기억입니다.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사람마다 기억은 다 다르지요. 어쩌면 바로 그것이 ‘소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랑하면 많이 기억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아이들 다니던 학교 앞을 지날 때면 유별난 감정이 느껴집니다. 사랑의 감수성이라고나 할까요. 제게 어떤 재능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일 것입니다.”

    -관능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죠. 선생의 작품에는 옛 것이건 최근 것이건 묘한 관능이 물결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노년의 관능이요.

    “관능은 성욕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타입의 남자애가 있다, 하지만 그건 만지고 싶다, 갖고 싶다는 욕구하고는 다른 것이지요. 뭐랄까, 저런 애를 데려다 전구도 갈게 하고 육체 노동도 시키며 가만히 관찰하고 싶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건 좋은 겁니다. 친구도 이성친구가 더 좋잖아요.”

    그에게 마지막으로 바보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봤느냐고. 그가 빙그레 웃으며 답한다. 이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 쪽에 더 많다고.

    “죽는 순간에는 남편이나 아들이 나타나 이승과 저승의 그 두터운 경계를 손 꼭 잡고 넘겨줄 것 같아요. 그걸 생각하면 어떤 환희가 느껴집니다. 전 호기심이 많아요. 죽는 순간에도 그럴 테구요. 아, 벌써부터 가슴이 뛰네요.”

    ‘죽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는 이 앞에서 잠시 말을 잃는다. 노인의 정신에 청년의 마음인가, 청년의 정신에 노인의 마음인가.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박완서는 박완서다. 그는 자신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차가워서 더 뜨거운, 불을 품은 얼음산이다. 눈 깊고 가슴 붉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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