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비는 일은 육체노동이면서 정신노동이다. 바늘을 쥔 각도에 따라 겉땀이 비뚤어지기도, 뒤땀이 길어지기도 한다. 단순하기 때문에 더 어렵다. 마음세계를 다스리는 수행자가 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 기계로도 엄두를 못 낼 치밀함으로 탄생한 누비, 사람들은 어느새 비명을 지른고 만다.
매운 솜씨로 하는 일이 아니고 찬찬한 기질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누비는 차라리 단순하기 때문에 어렵다. 벽을 향해 진종일 화두를 들고 앉아 있는 일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듯이 헝겊을 잠자코 누비는 일도 면벽처럼 고요하다. 고요와 단순이 누비의 관건인데, 그 고요와 단순을 아무나 견뎌낼 수 없기에 누비가 어려운 것이다.
누비 작업에 드는 시간은 물론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다르다. 천의 두께, 골의 간격, 땀의 크기에 따라 다르고 경력에 따라 다르니 정확한 통계를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초보자가 서툰 솜씨로, 1cm 너비로 누벼서 명주 저고리 하나를 만든다면 거기 드는 시간은 하루 10시간 작업을 기준으로 꼬박 한 달이 걸린다. 0.3cm로 누빌 때는 10시간씩 작업해서 석 달이 걸린다. 직조와 염색과 마름질을 빼고 바느질에만 꼬박 300시간이나 900시간을 들여 저고리 하나를 지어내는 일, 그게 누비다.
이렇게 비생산적인 노동이 또 있을까. 그런데도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천에 솜을 두고 누벼 옷을 만들어 입었다.
물론 일차적으로야 섬유 사이에 열을 붙잡아두기 위한 보온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비를 실용적인 목적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따뜻하게 입기 위해서 900시간씩 옷을 만들고 앉았다고? 무형문화재 107호 누비명장 김해자(金海子·53) 선생은 누비옷을 입는 일은 몸에 신장(神帳) 하나씩을 지니는 것이라고 말한다.
“옛사람들은 현대인보다 눈이 밝았어요. 누비는 동안 누비는 사람의 정성이 올 속에 스며들어가 입는 사람을 지켜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 민족은 종교성이 아주 강해요. 옷을 누비는 것은 말하자면 입을 사람을 위한 기도였을 거예요. 몇 달씩 밤을 새워 누빈 옷을 자식들에게 입히면 그 자식들을 천지신명이 지켜준다고 믿었어요. 그러니까 몇 달씩 똑바로 앉아 옷을 누빌 수 있는 힘이 나왔던 거지요.”
경주에 가서 김해자 선생을 만났다. 거기서 하룻밤을 자고 두 끼를 얻어먹었다. 그의 얘기를 듣고 그가 특별히 법제(法製)한 온갖 차를 마시고 그가 바느질한 옷을 만져보고 입어보았다. 음식도 태도도 차도 옷도 여염의 것과는 달랐다. 깔끔하고 맑았다. 고요해서 향기롭고 단순해서 겸허했다. 나와 이야기하는 내내 그는 행여 자신이 특별한 사람으로 비칠까봐 경계했다.
고요와 단순의 결정체
종교적인 냄새가 풍길까봐 조심했고 맑은 기운이 지나쳐 결벽으로 비칠까봐 주의했다. 흰 무명으로 지은 웃옷을 입고 앉아 그는 청자 수반에 백련 한 송이를 올려놓고 뜨거운 물을 부어 보였다. 눈앞에서 커다랗게 벙글며 신비한 향을 품어내는 백련 앞에서 나는 속으로 신음했다. 아름답다!
그는 누비뿐 아니라 차에도 달인이었다. 쑥의 잎과 뿌리, 으름꽃, 구기자, 찔레꽃에서 고유의 향을 뽑아내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 그걸 차로 만들 줄 안다. 음식에도 일가견이 있다. 각종 김치 젓갈 장아찌 부각 자반을 제철 놓치지 않고 담가서 갈무리할 줄 안다. 염색도 직접 한다. 홍화 쪽은 물론이고 양파 소목 오배자 옻나무 엄나무 라일락에 애기똥풀까지 자연 속에서 제 빛깔을 발하는 식물은 모조리 그에게 염색을 위한 연구 대상이었다.
자연의 온갖 향기를 보존하는 법, 자연의 빛깔을 뽑아내 섬유 속으로 옮기는 법을 그는 스스로 공부하고 궁리했다. 야생 식물의 뿌리와 잎과 껍질과 열매는 그에게 스승이고 교과서였다. 집 뒤란에는 염색용 가마솥이 대여섯 개 걸려 있는데, 거기는 말하자면 그의 실험실이고 연구실이다. 한창 일에 열중할 때 그는 하루 두세 시간만 잤다.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도 지치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바느질감을 차고 앉으면 그는 곧잘 시공을 잊었다.
바늘에 실을 꿰어 맨 처음 한 땀부터 시작한다. 처음엔 땀도 거칠고 실도 꼬이고 하지만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으면서 굳어 있던 손과 바늘이 친숙해진다. 바늘과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면서 바늘이 정확한 자리를 찾아 저절로 꽂히게 된다. 이렇게 되려면 자세도 반듯해야 하고, 바늘을 쥐고 있는 손과 손목 어깨 모두가 경직되지 말아야 하며, 호흡도 순일(純一)해야 한다. 혹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이나 빨리 하려는 관념이 일어나도 그걸 다 버려야 한다. 바늘 끝의 움직임에 정신을 모으고 차분하게 한 땀씩 정확하게 하는 습관부터 익혀야 한다. 빨리 하겠다는 욕심이 일어나면 온몸에 힘이 들어가 바늘 끝에 기가 맺혀 천에 꿰어지지 않으며 일의 능률도 떨어지고 힘도 훨씬 많이 든다. 누비를 할 때 급한 마음을 내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이 일은 차분함과 섬세함을 기본으로 해서 흔들리는 마음까지도 붙들어 매놓는 끝없는 인욕을 필요로 한다. 누비는 일은 육체노동인 동시에 정신노동이다. 바늘을 쥐고 있는 각도에 따라 겉땀이 비뚤어지기도 하고 뒤땀이 길어지기도 한다. 지나치게 일에 몰두하면 보면 호흡이 멎기도 하는데 호흡이 멈춘 상태에서 일을 계속하다보면 피로가 많이 온다. 그러니 수시로 호흡을 챙기는 습관도 가져야 한다. |
그가 누비에 관해 쓴 글을 읽다보면 자꾸만 누비가 불교의 면벽수행과 흡사하게 여겨진다. 30년 누비를 해온 김해자 선생의 이력과 태도를 봐도 같은 생각이 든다. 그는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단정하게 앉아 누비를 한다. 바느질감 위로 숙인 고개 위로 해가 뜨고 다시 해가 졌다. 그는 오래전에 육식을 끊었다. 비린 것도 누린 것도 취하지 않는다. 약간의 곡기와 맑은 차만을 마신다.
“제자를 길러보면 확연히 알아요. 정신력이 있는 놈은 버티고, 아무리 똑똑해도 정서가 불안정하고 심지가 깊지 않으면 버텨내질 못해요. 누비는 우주의 에너지를 제 뱃속에 모으는 일입니다. 반듯하게 앉아 헝겊을 누비는 중에 절로 인간의 함량이 높아져요.
신비로운 일 아닙니까. 다른 일은 하는 중에 에너지가 소모되지만 누비는 일하면서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 일이에요. 세속적인 잡기운이 다 떨어져 나가는 걸 일하는 중에 느낄 수가 있어요. 맞습니다. 참선과 똑같아요. 그래서 나는 우리 전통문화 중에서 누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누구나 누비를 했거든요. 누비는 정신력을 키우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에요. 들뜨고 흔들리기 쉬운 아이들의 심성을 강하게 단련하려면 성장기에 잠깐씩이라도 누비를 가르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성성적적(惺惺寂寂)에 이르는 길
1996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때 침선장 아닌 누비장으로 새로운 명칭을 붙여달라고 문화재청에 따로 요청했다. 침선과 누비는 격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비록 바느질이지만 누비는 사상적인 깊이가 달라요. 누비는 한국인 고유의 종교성과 인욕하는 정신세계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거든요.”
정정완 선생 문하의 침선장이 되는 대신 그는 최초의 누비장 칭호를 얻게 된다. 한때 전국을 떠돌며 절집을 찾아다니던 시절, 그는 수덕사를 내려와 누비 승복 잘 짓기로 소문난 보살을 찾아 창녕으로 갔더랬다. 그 보살에게 3개월을 배웠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보살이 바느질을 배운 스승이 고종황제의 침방 나인이었대요. 승복뿐 아니라 궁중 누비도 배웠어요…. 한국 장인들은 오그리고 펼 줄 모르는 것이 탈이에요. 그게 한이 되어서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깨끗하게 오픈하려고 해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려면 계보가 뚜렷해야 하고, 장인정신이 투철해야 하며 솜씨가 뛰어나고, 공인으로서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데 그는 이 네 조건을 조화롭게 구비한 것 같다. 몇 해 전 일본에서 세계 퀼트 박람회가 개최될 때 거기 김해자의 누비가 한 코너를 차지한 적이 있다. 그 전시회에서 그는 누비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확인했다. 남의 것과 나란히 뒀을 때가 일쑤 내 것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경북 경주에 있는 김해자씨의 누비공방. 김씨가 명주 천을 천연염료에 넣어 색을 입히고 있다.
그러나 너무 어지러워요. 자기 코너에 가면 돌아버릴 것 같고 숨이 막히는데 우리 누비방에 오면 편안하다고, 나중에는 작가들이 자꾸만 우리 방에 몰려들어요. 숨쉴 수 있는 공간이 여기밖에 없다고 하기도 하고요. 누비는 재주도 솜씨도 아니거든요. 다른 바느질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 서양 자수와 퀼트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찾아야 하니까 피곤하고 금세 한계에 부딪혀요. 그런데 누비는 바느질하면서 그 한계와 그 피곤을 다 풀어버리는 작업이거든요. 힘이 잔뜩 들어간 것과 힘이 다 빠진 것은 격이 다르지요.”
그는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경주는 연고지가 아니었으나 이곳의 산천이 좋아 10여 년 전 경주로 왔다. 아버지는 와세다대 음대를 나온 엘리트였으며 부농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 지식인이 일쑤 그렇듯이 가족에겐 소홀했고 집안 살림을 제대로 건사하지도 못했다.
2남3녀의 둘째딸인 김해자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생활현장으로 나서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원망하고 싶지도 않고 학교공부를 더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이제는 없다.
다 인연이고 업장이고 삶의 전 과정이 일종의 수행이라고 여기는 단계에 그는 이미 다다랐다. 바늘과 하나 되어 누비고 있노라면 때로 그는 단전 아래 깊숙한 곳에서 자욱하게 향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깨끗하고 고요한 마음, 그 성성적적(惺惺寂寂)에 도달하는 길이 바로 누비라고 그는 지금 생각한다. 나의 이런 막연한 묘사를 김해자 선생은 질색할 것이다. 그가 얘기한 것이 아니라 내가 느낀 것을 쓸 뿐이라고 항변해도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정한 그의 눈으로는 향기니 성성적적이니 하는 표현을 거북해할는지도 모르겠다.
10대 후반에 집을 떠나 그가 처음 찾은 곳은 복장학원이었다. 선미복장학원, 거기서 한복 짓는 법을 배웠다. 재봉틀 한 대만 있으면 밥 굶을 염려는 없다는 가파른 진실, 그게 어린 김해자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학교 다닐 때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그림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에 무능한 예술가가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일부러 그림 쪽으로부터 천장만장 도망쳤던 것도 같다.
일을 배우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눈썰미 좋고 치밀하고 침착했으니 남보다 배우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솜씨를 얻었으니 일을 구하러 다녔다. 주단집을 돌아다니며 한복일을 얻어왔다. 취직하면 몸이 훨씬 편할 것 같아 취직을 원했지만 일쑤 거절당했다.
경봉스님 곁으로
“어느 주단집 주인이 사람을 볼 줄 아는지 날더러 남의 밑에서 일할 사람이 아니라고 하대요. 주인이 되어 남을 가르치고 살 팔자라고…. 남의 밑에 있을 자질만 있었어도 세상 살기가 훨씬 수월했을텐데.”
남의 밑에 가서 일할 수 없었으니 일을 얻어 혼자 집에서 바느질을 했다. 결국 재봉틀 하나로 남에게 아쉬운 소리 않고 혼자 밥벌이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열망이 있었다. 밥벌이만이 삶의 목표가 될 수는 없었다. 재봉틀의 달인이 된 이후 그는 재봉틀을 버린다. 그리고 전국을 떠돌기 시작한다. 손으로 하는 일은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다. 꽃꽂이와 지점토와 종이공예와 리본 플라워까지.
그는 천성적으로 손의 감각이 탁월했다. 이십대 후반을 방황하면서 어딜 가나 환영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젊은 여자가 떠돌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산이 좋았고 산에는 어디나 절이 있었다. 머리를 깎지는 않은 채 오랫동안 절 주변에 살았다.
맑게 웃는 그에게서 승려 같은 표정을 본 건 그러고보니 우연이 아니었다. 젊은날의 이야기를 그는 자꾸 생략하고 싶어했다. 연예인도 아닌데 그런 호기심이 가당하냐고 손을 저었지만, 솔직하고 활달한 성품이라 오래 이야기하는 중 절로 지난 삶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게 누비와 무슨 상관있냐겠지만 난 크게 관련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삶의 지침은 결국 다른 사람의 삶이다.
자신이 살아온 내밀한 풍경을 겉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큰 그릇이라는 편견이 내게는 있다. 사생활을 객관화할 수 있는 힘이 성숙의 증거라고 믿는 편이다. 그게 미망이고 어리석음이었을수록 햇볕에 바래 펄럭이게 만들어두면 희한하게도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김해자 선생이 미에 관여하는 사람이고 그의 기량이 무형문화재의 칭호를 얻었으니 그의 사생활을 우리가 조금 엿봐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7세에 바느질을 시작한 그는 27세에 절에 갔다. 절이 그를 이끌었다. 곡절은 꽤 있었다. 삯바느질도 했고 주단집, 승복집, 양장점도 다 해봤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세상이 싫어졌다. 기계처럼 정확하게 살던 사람이 돌연 ‘케세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폐결핵을 앓았던 것이 울증으로 변한 건지도 몰랐다(오행에서 폐는 슬픔을 관장하는 기관이다).
걸핏하면 가위에 눌려 잠을 설치는데, 하루는 이상하게 입에서 절로 관세음보살이란 독송이 흘러나왔다. 이후 몸을 시커멓게 짓누르던 괴물이 사라졌다. 절이 부르는구나 싶었다.
범어사 밑에서 혼자 2년을 살았다. 제주도로 갈 일이 있었는데, 거기 산천이 너무 좋아 한라산 밑에서 다시 1년을 살았다. 과연 바른 길이 뭔가를 고민했다. 정도가 뭔지 정법이 뭔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산 아래라고 도인들만 모여 사는 것은 아니었다. 되레 더 고약한 인간을 만날 수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길을 바꾸기로 했다. 양로원에 들어가서 노인들의 수발을 들었다. 그게 차라리 도를 얻는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몸을 혹사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다 인연이 닿아 다시 통도사 극락암으로 옮겨갔다. 거기는 경봉스님이 주석으로 계신 곳이었다. 경봉스님, 대각을 이뤘다고 알려진 큰스님 곁으로 가고 싶었다. 우연히 고승서화전을 보고 경봉스님 글씨에 반했다.
“대각이란 어떤 건지 알고 싶었어요. 그걸 바로 곁에서 지켜볼 욕심이 없었다고는 말 못하겠어요.”
‘바늘 세상’ 못 잊은 불자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는 기량이 큰 사람이 확실하다. 노장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제 할 말을 다하곤 했다. 경봉스님은 그런 그를 편안해했다.
“내 평생 요즘같이 편안해보기는 처음이다.”
햇살 아래 나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나 1년여 만에 결국 경봉스님 곁을 떠난다. 아무도 그를 붙들지 못했다.
“내 성질 때문에 적이 자꾸 생겨요. 사람이 절충할 수 있는 처세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걸 못해요. 다음 생에 오면 오늘과 같은 현실을 만들지 말아야지….”
그는 지금 세상에 나서 가장 해볼 만한 일이 수행 하나뿐이라고 믿는다.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열심히 수행해서 삼생 윤회하는 업장을 끊고 싶다. 그 일을 그는 통도사가 아니라 지금 경주 탑동 누비공방에서 계속하고 있다.
밥만 먹으면 돌아앉아 바늘을 잡았다. 아니 바늘이 거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누비에 매달렸다.
“그게 나한테는 살아갈 힘이었어요. 내 현실도 황무지, 이 분야도 황무지, 누비를 잡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졌어요.”
수덕사에 들어가 3년을 지냈다. 거기서도 누비를 놓지 않았다. 스님들의 겨울옷을 누벼서 지었다. 하루 여섯 시간씩 명상하고 기도했다. 그의 곁엔 언제나 여동생이 있었다.
“그 여동생이 평생 내 곁에서 같이 살아요. 그놈하고 난 최고의 수행도반이에요. 평생 내 곁에서 온갖 궂은일 다 하고 지금도 누비 일을 함께 하고 있어요.”
창녕에서 경주로 이사했다. 경주의 산천과 공기가 다 좋았다. 하루 열다섯 시간씩 바늘을 잡았다. 그러면서 그는 현실을 잊었고 차츰 눈이 밝아졌다. “깨끗한 마음으로 사심없이 마음을 관하되 / 잘하려고 하지도 말고 빨리 하려고 서두르지도 말고 / 그 가운데 오고가는 망념만 놓으면 스스로 밝아서 / 눈을 감고도 바늘을 꿰는구나”라고 누비를 찬(贊)할 줄도 알게 됐다.
김해자씨가 염색이 끝난 천을 말리고 있다. 며칠 뒤 그녀는 다시 누비작업에 몰입할 것이다.
그는 한번 보면 따라할 줄 아는 눈썰미를 지녔다. 한때는 박물관에 가서 출토복 구경하는 일에 매료됐다. 집에 와서 그걸 따라 해봤다. 단국대학교 석주선 박사를 찾아가 지금껏 만든 것을 보여줬다. 철릭(옛 무관이 입던 공복(公服)의 일종)을 만들지 못했는데 김해자 선생이 드디어 해냈다며 반가워했다. 부탁을 받아, 또는 자발적으로 옛 옷을 숱하게 재현했다.
그저 누비를 하는 것이 좋았을 뿐 다른 욕심은 없었다. 그랬는데 어느 해 전승공예대전에서 승복 천에 1cm 누비를 한 이가 대통령상을 받자 곁엣사람들이 훨씬 좋은 솜씨를 가지고선 뭘 하냐고 강권을 했다. 거기 0.3cm로 누빈 철릭을 출품했다. 1991년의 일이었다.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천연염색해서 0.3cm로 곱게 누빈 명주 철릭! 사람들은 그 앞에서 황홀해하고 신기해했다. 그게 손으로 한 바느질임을 믿지 않으려 했다. 작품의 가치는 대통령상을 받고도 남을 만했으나 대통령상을 연이어 누비로 줄 수는 없었다는 후문이었다.
“어떤 일본인 교수가 그 철릭을 보고 그래요. ‘당신은 인생 자체가 실패다, 이 옷은 기계로 만들면 그만일 옷인데 굳이 그걸 손으로 누비고 있었단 말이냐?’라고요. 그 말이 역설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한 게 아니었어요. 정신적인 것이 늘 중요했지요. 그렇게 손으로 누빈 철릭은 화살이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을 믿습니다. 우리 옛말에 천(千) 집에 가서 천 사람의 손으로 천 땀을 뜬 옷을 입히면 전쟁에 나가도 살아 돌아온다는 말이 있잖아요. 정성이 지극한 옷을 입으면 염라대왕도 못 잡아가는 주술이 생기지요…. 우리말에 ‘의·식·주’라고 순서를 정한 게 괜히 그런 게 아닙니다. 옷은 남보기 좋으라고 입는 게 아니었어요. 그 안에 정성을 가득 담아 기도하듯 입는 것이지….”
기계로 채울 수 없는 정성
전승공예대전 덕분에 김해자란 이름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에도 그의 옷을 사려는 사람들이 있어 생계는 이을 수 있었으나 공예대전 이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한번은 서울에서 의상학과 교수들이 12명이나 무리지어 그를 찾아 경주로 내려왔다. 시장통 안의 17평짜리 재래식 집에 살 때였다.
“초라한 집에 선풍기 한 대밖에 없었어요. 선풍기를 그들에게 밀어줬더니 그 중 한 양반이 ‘너무 주눅들 거 없어요’라고 하더군요. 갑자기 내 안에서 오기가 솟았습니다. ‘이 양반이 착각하네’ 싶기도 하고…. 여러분이 왜 여기까지 오셨는지 모르지만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을 하라고 했죠. 묻는 대로 몇 마디 대답을 했더니 사위가 갑자기 조용해지고 선풍기 소리만 들려요. 다들 가방에서 서둘러 노트들을 꺼내더군요.”
그는 누비라는 장르를 새로 개척했다. 물론 원래 있던 것이지만 누구나 접근하기 쉽도록 방법을 새로 찾아내고 일목요연하게 이론을 정리했다.
줄치는 법과 솜 두는 법과 바늘 크기와 누비골의 관련을 미리 배워두면 누비 과정이 한결 수월해진다. 전통 방법은 막대를 이용해서 막대에 천을 감아 왼손으로 잡고 오른발로 천을 고정시킨 다음 누볐는데, 장시간 앉아서 작업하다보면 건강에 무리가 오기 쉬운 한계가 있었다.
그는 ‘누비대’라는 것을 궁리해 요즘은 누비대를 짜서 그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작업한다. 이전보다 몸이 훨씬 편하고 능률적이 되었다. 명주나 무명 같은 천을 누빌 때 미리 줄을 쳐두면 가지런히 바느질할 수 있어서 편리한데, 이렇게 줄치는 법도 그가 새롭게 고안해낸 것이다.
평직일 때는 올을 튀기는 방법을 쓴다. 씨실 한 가닥을 잡아 조심스럽게 당겨 내면 아무리 약해도 끊기지 않고 당겨나온다. 그 자리를 누비게 되면 초보자도 쉽게 누비에 접근할 수 있다. 이중직일 때는 초크를 사용해서 줄을 그은 다음 선을 따라 다림질을 해 그 자리를 따라 누비게 했다.
누비 일의 첫째 조건은 눈의 건강이다. 눈이 나빠지는 것은 성냄에 있다고 제자들을 경계한다. 살다보면 성낼 일이 왜 없으랴마는 눈을 보호하려면 성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도 좋지 않다. 눈물은 간의 진액이라 간을 상하게 한다. 일출 시간이나 일몰 시간에는 가능한 한 작업을 중단하고 눈을 쉬게 해줘야 한다. 이 시간에 눈을 쓰면 눈이 상하기 쉽다. 아침 저녁 눈을 씻는 것도 눈을 보호하는 방법이다. 눈에 균이 들어갔을 때는 죽염으로 씻고 졸음이 오거나 정신이 혼미할 때는 녹차물로 눈을 씻는다.”
그는 이처럼 자상하게 안내한 누비 교과서도 만들어뒀다.
하나뿐인 딸은 병치레를 오래 했다. 딸의 손을 잡고 전국의 좋다는 대각을 다 찾아다녔다.
“내가 부족했다고 생각하고 화살을 내 쪽으로 돌려놓고 보니 문제의 해결점이 보이더군요. 잃는 것 같지만 결국 다 얻는 것이에요. 그놈 때문에 내가 혼비백산했지만 나중 알고보니 그게 다 내가 치러야 할 업보더군요. 그놈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읽을 수 있었겠어요.”
이모와 함께 산사에 가 있는 딸은 제 병을 이겨내고 요즘 부처님 앞에 하루 1000배를 하는 기특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
“난 이제 부럽다, 하고 싶다, 남기고 싶다, 그런 게 없어요. 가질 것도 놓을 것도 없이 이생에서 업장 하나 잘 닦고 가면 그뿐이에요. 그 애가 내게는 스승이고 부처입니다.”
바늘을 들면 기도가 된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지 이제 10년이다. 인간문화재는 제자들을 키워야 하는 것이 임무다. 제자를 받기 시작한 지 10년이나, 꾸준히 공부한 학생 수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그만큼 누비에는 끈기와 공력이 필요한 까닭이다. 경복궁 앞에 전시장을 마련해 수강생을 받고 있지만 찾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그는 활달하고 품이 커 사람을 싸안는 듯하지만 동시에 섬세하고 예민해 낯가림도 심하다. 10년째 제자들을 두고 바느질을 가르치면서도 스스로 스승이라 생각할 수가 없다. 그의 집엔 도제식 교육으로 숙식을 함께하는 제자가 늘 있다. 내가 경주에 간 날도 김해자 누비를 배우는 네다섯의 학생들과 같이 밥을 먹었고 그들이 열중해서 작업대에서 누비를 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들은 낯에 웃음을 가득 띠었지만 입을 함부로 열지는 않았다. 눈을 내리깔고 반듯하게 앉아 침착하게 바늘을 놀렸다. 과연 김해자의 제자들이다 싶었건만 그는 그들의 스승 노릇을 자처할 수 없다고 한다.
“그저 같은 길을 함께 가는 도반이지 제자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요. 남을 가르친다는 일 자체가 내게는 고통스러워요. 무얼 가르친다는 건 죄 많은 인간이 하는 일이거든요. 바늘을 들기 전에 누비를 하는 철학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지만 그것만으로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결국 자기 길을 자기가 가는 거지요.”
그는 사생활 노출을 극도로 꺼렸다. 이 글도 그의 아픈 체험과 각성과 성찰을 담은 부분을 상당부분 줄여야 했다. 그 일 아니면 어찌 인욕을 배웠겠으며 윤회하는 우주의 원리를 살피는 눈을 가질 수 있었겠냐고 말하던 부분을 나는 안타깝게도 과감히 잘라내기로 한다.
그는 아직 노상에 있다. 애련하게 누비대 앞에 앉아 그는 자신이 직접 물들인 명주에다 한 땀씩 바늘을 찔러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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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망상 다 놓아두고 누비고 또 누비다 보면 여덟 폭 치마가 찰라간이구나. 마음을 들고 하면 한 폭이 10년이요, 마음을 놓고 하면 한 폭이 3일이로구나. 한다는 마음 다 버리고 숨소리에 장단 맞춰 실과 바늘 숨쉬는데 나도 한번 놀아보세.”
누비야말로 우리 어머니들이 참되게 수행하고 정진하고 기도하던 모습임을 김해자 선생을 통해 새삼 깨닫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공들여 지은 누비옷을 걸쳐주는 것, 그를 통해 장원급제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것, 너무나 익숙했던 그 기도법을 우리는 지금 잃어버렸다. 누비는 그저 패션이 아니다. 우리가 마땅히 되찾아야 할 정신문화의 한 장르, 그게 바로 누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