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호

“운석은 대한민국 브랜드”

‘한국판 인디아나 존스’ 운석 수집가 천영덕

  • 김진수 기자 │ jockey@donga.com

    입력2014-04-22 16: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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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 운석’ 진정한 가치는 가격 아닌 희소성
    • 사하라 사막에서 남극까지 운석 찾아 종횡무진
    • 30여 년간 200여 개국…운석, 화석, 보석 원석 2만 점 모아
    • 사설 박물관까지 건립한 유별난 수집벽
    “운석은 대한민국 브랜드”

    천영덕 씨가 사하라 사막에서 발굴한 64kg짜리 대형 운석.

    ‘진주 운석(隕石)’이 연일 화제다. 3월 9일 전국적으로 유성 낙하 현상이 목격된 직후, 이튿날 경남 진주시 대곡면의 파프리카 재배 비닐하우스에서 운석으로 추정되는 암석이 처음 발견된 이래 진주에선 같은 달 17일까지 모두 4개가 잇따라 발견돼 속속 석질(石質)운석 파편임이 최종 판명됐다. 특히 네 번째 운석 파편의 질량은 20.9㎏으로, 앞서 발견된 3개 중 가장 큰 파편(9.36㎏)의 두 배가 넘어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국내에서 운석이 발견된 사례가 워낙 희귀한 데다, 진주 운석의 추산 가격이 1g당 5~10달러에 달한다는 언론보도까지 이어지면서 한때 진주엔 국제적인 운석사냥꾼까지 출현하는 등 때아닌 ‘하늘의 로또’ 찾기 열풍마저 번졌다. 운석을 향한 세간의 관심 과열에 문화재청이 해외 무단 반출을 대비해 천연기념물 지정 등을 통한 적극적 보호조치에 착수하기로 하는 등 제동을 걸었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 운석은 그야말로 ‘귀하신 몸’이다. 그동안 국내에서 발견된 운석이라곤 이른바 ‘두원 운석’이 유일하다. 두원 운석은 1943년 11월 23일 전남 고흥군 두원면에서 발견된 질량 2.117kg의 석질운석. 당시 이 운석은 두원공립보통학교 교장(일본인)이 갖고 있다 광복 이후 자국으로 반출해 도쿄 국립과학박물관에 보관됐다.

    그러다 이민성 전 서울대 교수(지구과학)가 1994년 두원 운석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그 존재가 국내에 제대로 알려졌고, 1998년 한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일본 측에 반환을 공식 요청해 56년 만인 이듬해에 영구임대 형식으로 들여와 현재 한국지질자원연구원(대전) 지질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영국 대영박물관이 1985년 발간한 ‘운석연감(Catalogue of Meteorites)’에 따르면, 한반도에 낙하한 운석으로 기록된 건 두원 운석을 포함해 1924년 9월 전남 운곡에 떨어진 석질운석과 1930년 3월 경북 옥계에 떨어진 석질운석, 1938년 함경남도 소백에 낙하한 철질(鐵質)운석까지 총 4개. 하지만 현재까지 실체가 확인된 건 두원 운석 하나뿐이다.



    “운석은 대한민국 브랜드”
    따라서 두원 운석 이후 71년 만에 직접 낙하가 목격된 후 발견된 진주 운석은 그 가치를 한낱 산술적 가격 추산으로만 따져선 안 될 ‘경사(慶事)’로 받아들여진다. 더욱이 사상 초유의 국내 소유 운석이다.

    이 때문에 일약 ‘운석 도시’로 떠오른 진주시는 4월 9일 아예 운석을 관광자원화하는 방안을 본격 추진한다는 야심 찬 계획까지 내놨다. 도시 브랜드 및 이미지를 ‘한국의 로스웰’로 확장시키겠다는 것. 로스웰은 원래 미국 뉴멕시코 주의 작은 시골마을이었지만, 1947년 미확인비행물체(UFO) 잔해 발견 논란을 타고 세계적 관광지가 된 곳이다.

    진주시는 이미 운석 발견 지점 4곳에 훼손을 막는 보존조치를 취했고, 운석 보관 및 전시를 위해 문화재청 검토 결과가 나오는 대로 운석 소유자와 임차, 매입, 기증 등 다각적인 방안을 협의할 방침이다.

    박 대통령에게 편지

    지금껏 지구상에서 수집된 운석은 4만6000여 개. 운석은 태양계의 기원과 생성, 변천과정 등 기초적인 우주과학 연구에 소중한 정보를 제공해 학술적 의의가 매우 깊다. 또한 희소성을 지녀 어디서 발견되건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런 운석에 단단히 ‘미친’ 이가 있다. 천영덕(63) 씨. 30여 년간 세계 각지를 돌며 발굴하고 수집한 운석과 화석, 보석 원석 등 광물 2만2000여 점을 모아 한때 경기 용인시 수지구에 원강우주지구박물관이란 명칭의 사설 박물관까지 운영했던 주인공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원강(元江)’은 그의 호다.

    천씨는 ‘신동아’ 인터뷰 요청에 선뜻 응하면서도 취재 당일인 3월 27일에야 비로소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기자에게 알려줬다. 그간의 연락은 그의 휴대전화로 착신 전환이 되는 일반 전화번호로만 해야 했다. 그 전화번호의 지역번호도 그가 현재 거주하는 지역과는 전혀 달랐다. 길 찾기를 위한 내비게이션 검색용 주소 역시 가르쳐주지 않았다. 대신 약속시간에 맞춰 혼자 승합차를 몰고 사전에 지정한 장소로 직접 마중을 나왔다. 그는 다소 겸연쩍어하면서도 “보안 때문에”라고 잘라 말했다.

    충남 천안시 인근(천씨는 자신이 사는 곳의 구체적 위치가 노출되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에 자리한 천씨의 집 또한 그 못지않게 별났다. 2층짜리 별채를 갖춘 3층 건물. 주위에 여기저기 세워둔 외제 승용차, 야마하 상표의 제트보트와 제트스키 등 갖가지 탈것들. 3층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쫙 널브러진 채 시선을 확 잡아채는 임팔라(아프리카에 분포하는 소과의 포유류) 가죽, 한쪽 벽면을 완전히 점령하다시피 한 3대의 커다란 감시카메라용 모니터, 소파 옆에 놓인 알록달록하면서 크고 작은 지구의들….

    “집 내외부에 CCTV 등 보안장치가 30개쯤 돼요. 가끔 차를 타고 그냥 지나치는 척하며 제 집을 슬쩍슬쩍 훔쳐보고 가는 이들이 있거든요. 아까도 한번 그랬어요. 그래서 제 연락처도 가족과 절친한 지인 10여 명밖에 모릅니다.”

    기이한 곳에 사는 기이한 인물과의 낯선 대면. 대뜸 진주 운석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는 운석 발견 소식을 접하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한마디로 안타까웠어요. 언론보도 내용이 지나치게 가격 위주의 흥밋거리로 흘러가서…. 운석의 국제 시세가 g당 5~10달러이니 진주 운석은 얼마 얼마쯤 할 것이다, 이런 걸 기자들이 경쟁적으로 보도했잖아요. 근데, 그건 인터넷 검색해보면 다 나옵니다. 대다수가 러시아 운석 가격과 비교하면서 그보다 귀하니 안 귀하니 떠드는데, 운석 자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니 정말 귀한 존재 아닙니까. 어차피 외국에 팔아 경제적 이득을 취할 것도 아닌 만큼, 큰 틀에서 국가가 나서서 정책적으로 진주 운석을 국가 브랜드 제고 수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가 주목해요. 운석 하면 러시아 하듯이. 이번 소치동계올림픽대회에서도 ‘운석 금메달’ 가치가 화제였잖아요. 언론과 전문가들이 진주 운석의 가치를 국가 차원에서 극대화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고 제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 하면 김연아 선수의 조국, TV와 휴대전화 잘 만드는 나라, 거기에다 하나 더 보태어 운석 떨어진 행운의 나라로 각인되게끔 해야 합니다. 솔직히 g당 5달러, 10달러면 웬만한 관상용 수석(壽石)보다도 못한 거예요. 왜 스스로 값어치를 낮추는지 몰라.”

    천씨는 보름 전 박근혜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진주 운석을 국가 브랜드 제고 수단으로 삼아야만 하고, 모든 국민이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제언 성격의 서신이란다.

    소장 운석 중 최대는 64kg

    ▼ 운석의 진정한 가치가 뭐라 생각합니까.

    “당연히 학술적 가치죠. 하지만 그걸 따지는 건 전문가들 몫입니다. 운석을 발굴하고 수집하는 제 처지에서 학술적 가치를 운위하다면 그거야말로 내숭 떠는 게지. 다만 운석은 그 가치를 측정하기 힘들 만큼 희귀한 국가적 자산이란 점엔 동감합니다.”

    굳이 천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운석은 우주과학의 기초와 응용과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다. 진주 운석과 관련, 미래창조과학부도 “운석은 생성 초기 지구의 모습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지표상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백금족 원소 등을 다량 포함해 귀중한 국가 연구 자산이 된다”고 밝힌 바 있다.

    천씨가 소장한 운석은 200여 점. 화석은 1만2000여 점, 보석 원석도 1만여 점에 달한다. 화석 중엔 공룡알, 암모나이트, 삼엽충, 나뭇잎 등도 있고, 보석 원석으론 에메랄드, 자수정, 사파이어 원석도 있다.

    하고많은 소장품 중에서 그가 가장 아끼는 건 대형 운석. 질량이 무려 64kg이나 되는 철질운석으로 성분이 철-니켈 금속으로 이뤄졌다. 무척 무겁다. 기자 혼자선 도저히 들 수 없어 촬영을 위해 사진기자와 둘이 낑낑대며 옮겨야 할 정도다. 이 운석은 이미 20여 년 전 이민성 전 교수로부터 운석임에 틀림없다는 검증을 받았다. 천씨는 “운석 취재 온다니까 특별히 집으로 가져다놓은 것”이라고 귀띔했다. 평소엔 다른 소장품과 함께 항온항습장치를 갖춘 모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보관한다. 그가 직접 건립한 원강우주지구박물관은 2006년 1월 개관해 6년쯤 유지하다 운영상 곤란을 겪어 문을 닫았다.

    천씨에 따르면, 통상적으로 운석의 99%는 크게는 10kg, 작게는 몇 백g 정도. 하지만 엄청나게 큰 것도 없진 않다. 현재까지 지구상에서 발견된 운석 중 가장 큰 것은 1920년 남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발견된 호버 운석으로 약 60t에 달한다. 천씨는 자신이 소장한 이 운석이 국내 최대 크기라고 했다.

    ▼ 어디서 어떤 경위로 발굴, 수집하게 됐나요.

    “사하라 사막에 가서 발견했어요. 보통 걷거나 자동차를 타면 가시각이 아주 좁죠? 그래서 사막용으로 개조한 지프에 줄로 매단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200m 높이의 상공에서 쌍안경을 끼고 사방을 훑어요. 그러면 2~3km쯤까지도 보입니다. 20일쯤 하염없이 찾아 헤매다 흰 모래밭에 까만 점이 딱 보이기에 수색해봤더니 그게 이 물건이더군요. 천운이랄까. 원래 수집가들은 운석 발굴을 그런 방식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 운석을 발견한 나라가 어딘지는 특정해서 말할 수 없어요, 절대로. 운석 이름은 보통 발견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우체국 명칭을 따게 돼 있습니다. 누가 발견하든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원칙이에요. 그러니 말하면 그 나라에서 문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이 운석의 가격이 못 돼도 몇 백억 원은 호가하겠지만, 추호도 팔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운석은 대한민국 브랜드”

    원강우주지구박물관 운영 당시의 천영덕 씨.



    그림 테마는 ‘우주의 빛과 생명수’

    천씨는 1990년대 초반에 남극도 세 번 다녀왔다. 40여 점의 운석을 발굴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운석을 어떻게 찾을지 궁금하죠?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점차 녹으면서 그 속에 숨어 있던 운석들이 빙하의 흐름에 의해 움푹 꺼진 얼음계곡으로 굴러 떨어져요. 수천, 수만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지. 그런데 요즘은 거의 없을 겁니다. 미국인과 일본인이 다 가져갔어요. 지금 생각하면 무서워서 못 갈 텐데, 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시엔 사막에 무시로 불어닥치는 토네이도의 위험성조차 모른 채 무턱대고 갔었으니까. 그처럼 운석은 사막이나 남극 같은 장소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운석이 그런 곳에만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땅 색깔이 단일해서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발견하기 쉽거든요.”

    신이 난 듯하다. 대화 내내 천씨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 범인(凡人)의 시선으로 보면 유난한 수집벽인데, 어떻게 운석과 광물 수집에 천착하게 됐나요.

    “지금이야 해외 각국에 한인회가 다 구성돼 있지만, 30여 년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어요. 사정이 그러니 국내 화가들에게 항공료와 체재비를 대주면서 현지로 초청해 전시회를 열어주는 대신 작품 판매 수익의 일부를 받아 한인회관을 건립하는 기금으로 활용하곤 했죠. 덕분에 나도 미국부터 시작해 브라질, 모로코 등 참으로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어요. 그림도 너무 잘 팔렸고.”

    천씨는 충남 부여 태생. 본업은 서양화가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미술 공부를 한다고 프랑스로 건너가 10년쯤 살다 귀국한 뒤론 줄곧 작품 활동을 해왔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우주의 빛과 생명수’라는 단일 테마로 국내 개인전과 해외 초대전, 각종 전시회를 150차례나 열었다. 최근 전시회는 4년 전 원강우주지구박물관 내 원강갤러리에서 연 개인전이다. 박물관을 운영할 때도 별관에 작업실과 전시실을 뒀고, 현재도 집 2층에 작업실이 있다. 그에게 발굴과 수집은 단지 취미일 뿐이다.

    ▼ 요즘도 그림을 그립니까.

    “당연하죠. 작업을 할 땐 오래하고 안 할 땐 며칠 쉬기도 해요. 난 화가라면 응당 그림을 팔아 먹고사는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봐요. 소설가가 소설 써서 책을 팔아 먹고살듯이. 화가든 소설가든 작품이 팔려야 작가지. 가끔 자기 작품을 팔지 않는다는 화가도 있는데, 그건 안 팔리는 거지 안 파는 게 아니에요.”

    공룡알과 미라

    천씨가 수집벽에 빠져든 건 1970년대 후반 칠레에서 초대전을 연 직후부터다. 전시회 기간 중 브라질 현지 주민과 함께 아마존 강 중류의 오지마을을 여행하다 우연히 들른 원주민 가옥에서 문지방으로 사용 중이던 3억 년 전의 고대 물고기 화석을 발견했다. 길이가 1m 넘고 물고기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에 호기심이 동한 그는 이내 차고 있던 손목시계와 바꾼 후 냅다 들고 왔다. 자신의 말마따나 “날강도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후 화가와 수집가 활동을 병행했다.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재산도 적지 않았고, 그림 판 돈도 광물 수집을 위해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투자했다. 운석과 화석, 보석 원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다보니 결국 200여 개국이나 다녔다.

    하도 외국을 돌다보니 에피소드도 많다. 모로코에선 공룡알 화석을 갖고 나오다 경찰에 체포돼 화석을 압수당하고 보름 동안 유치장 신세도 졌다. 위험한 때도 적잖았다. 필리핀의 한 소수부족 마을에선 그곳 우두머리와 공모해 500년 넘은 미라를 갖고 오려다 들켜 한동안 나무 감옥에 갇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미라는 나중에 박물관을 만든 후 그곳에 세워놓으려 했었다고. 모든 발굴과 수집의 초점을 박물관 건립에 맞출 때였다.

    ▼ 다른 수집품도 한국으로 반입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 당시만 해도 공항 통관 절차가 좀 어수룩했어요. 요즘 같으면 반입, 반출 다 어림없지. 수집품을 수시로 항공화물로 들여왔는데, 어느 나라든지 한인이 있잖아요. 그들을 통해 현지인을 소개받은 뒤 수집품이 아닌 개인적인 물품이라고 둘러대며 암암리에 ‘작업’을 좀 하면 공항에선 대부분 묵인해줬어요. 우리나라 공항에선 들고 나가는 건 안 돼도 들여오는 건 대충 눈감아 줬고.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몇 번은 들통 나서 혼쭐도 났어요. 네팔에서 오팔 원석을 구해 들여오려다 그곳의 깐깐한 공항 직원한테 걸려 압수당했죠. 사실 현재도 미국 친구 집에 보관 중인 수집품이 수천 점 돼요.”

    우여곡절 끝에 손에 넣은 희귀한 물건들인 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은 박물관 건립으로 이어졌다. 1999년 착공해 7년 가까이 걸려 완공한 원강우주지구박물관은 부지 5600㎡에 연면적 1600㎡의 2층 건물. 사설 박물관으로선 큰 규모였다. 설계와 디자인, 소장품 전시까지 일일이 그의 손을 거쳤고, 학생들을 위한 과학놀이 체험관과 ‘우주탐사차량’까지 만들었다.

    당시 전시품은 소장품 중 1000여 점. 64kg짜리 운석은 원래 박물관 본관 1층에 전시했는데, 관람객이 운석을 만져보면서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공사비가 계속 늘어 한 200억 원쯤 들었어요. 승용차와 별장까지 처분했죠. 공교롭게도 박물관 개관 당일 휴대전화 서비스마저 정지됐지. 요금 연체로 먹통이 됐거든. 돈 벌려고 박물관 만든 건 아니지만, 최소한 운영은 돼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돼 결국은 접었어요. 우주탐사차량도 박물관 정리할 때 심통이 나서 다 부숴버렸습니다, 허허.”

    ‘관장 천영덕’에서 ‘화가 천영덕’으로 되돌아온 지금이 마냥 좋다고 했다. 다시 박물관을 열 생각은 전혀 없단다.

    ‘도깨비’의 ‘Let it go’

    “운석은 대한민국 브랜드”

    천씨의 본업은 서양화가다.

    ▼ 소장품을 처분하진 않았나요. 팔라는 제의가 적지 않았을 법한데.

    “단 한 번도 판 적 없어요. 장사꾼이 보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데, 왠지 팔기 싫더라고요. 발굴 및 수집 당시 가졌던 애착 때문인 것 같습니다. 수집가에겐 그런 성정(性情)이 있어요.”

    천씨의 가족은 전업주부인 부인과 고등학생, 대학생인 아들과 딸. 아이들은 호주에서 유학 중이고, 부인은 서울 집과 호주, 천씨의 거처를 오간다.

    ▼ 가족에게 걱정을 많이 끼쳤을 것 같네요.

    “43세에 늦깎이 결혼을 했는데, 그러고도 혼자 외국을 쏘다녔더니 집사람이 포기하더군요. 남들 눈에 내가 화려해보일지 몰라도, 아내 처지에선 그랬겠어요? 그래서 10년 전부터는 해외로 나가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는데, 7년 전엔 기도를 통해 술, 담배도 끊었어요. 예전엔 아내가 잔소리도 많이 했죠. ‘미친 사람’이라고, 도무지 정상이 아니라고.”

    ▼ 그 많은 소장품은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요.

    “일부는 박물관을 운영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빌려줄 수도 있고, 국가나 사회에 기증하는 방안도 궁리 중입니다. 어쩌면 팔아서 우리 사회의 불쌍한 이들을 위해 쓸 수도 있을 거고.”

    천씨의 별명은 ‘도깨비.’ 만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다닌다고 해서다. 비록 그가 고고학자는 아니지만, 발굴과 수집에 대한 열정만큼은 ‘인디아나 존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람은 없을 듯싶다.

    스스로 ‘천영덕 화가 마을’이라고 명명한 곳에서 여전히 야생적 기질대로 살아가는 그의 삶. 참 ‘천영덕’스럽다. 그래선지 문득 떠오르는 문장 하나, 감추지 않는 인생 그대로를 살겠다는. “Let it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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