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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이 본 세종의 통치철학

“즉흥적 발상, 경박한 발언, 무책임한 행정이 수성(守成)의 정도(正道) 가로막는다”

수양대군이 본 세종의 통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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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하를 얻는 데는 사람들을 규합해 설득하고 옛 폐해를 비판하는 능력이 중요했다. 하지만 천하를 얻은 다음엔 사람을 끌어모으기보다는 자신의 일터로 돌려보내 각자의 소임을 다하게 해야 했다. 이러한 수성(守成)의 정치를 실현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된 것은 신진 유신(儒臣)들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었다.
수양대군이 본 세종의 통치철학
어가(御駕)가 멈춰 섰다. 새벽에 흥인문을 출발해 꼬박 한나절을 내달린 셈이다. 2월의 경기도 양주 벌판은 황량하기만 했다. 점심참의 따스한 햇살도 살을 엘 듯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수라를 간단히 마친 부왕께서 말씀하셨다.

“작년의 강무(講武·임금의 주재로 사냥을 하며 무예를 닦는 행사)는 참으로 한심했다.”

꼭 1년 전인 1431년(세종 13년) 포천 매장원에서 일어난 집단 동사(凍死) 사태를 가리키신 것이다.

“총제(摠制·총사령관) 홍약이 아니었다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나는 변명처럼 대답했다.



지난해 이맘때, 마지막 사냥터인 보장산으로 가는 도중 군사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한 매장원의 겨울 들판을 가로질러가는 것은 사실 군마를 탄 나로서도 벅찬 일이었다. 하물며 변변치 못한 옷차림으로 20여 일간 어가를 따라다니며 풍찬노숙(風餐露宿)해야 하는 병사들에게 야간행군은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그런 와중에 26명의 군사가 사망하고 70여 필의 마소가 얼어죽은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평소 신료들의 말을 경청하던 아버지께서도 유독 강무에 대해서만은 완강하셨다. 백성과 군사들의 괴로움을 들어 강무를 폐지하자고 건의하는 신하들에게 “나는 정치의 대체를 돌아보지 않고 몇 가지 폐단을 들어 오활(迂闊·실제와 관련이 먼)한 말만 늘어놓는 것을 매우 잘못된 것으로 본다”(‘세종실록’ 16년 1월15일조, 이하 ‘16/1/15’ 형태로 줄임. 윤달은 #로 표시)고 논박하곤 하셨다.

가을 추수기에 벼농사 형편을 돌아보시던 모습과도 사뭇 달랐다. “일산(日傘)과 부채를 쓰지 않고” 들판을 지나다가 “벼가 잘되지 못한 곳에선 반드시 말을 멈추고 농부에게 까닭을 묻고” 마음이 아파 “점심을 들지 않고 돌아”오시던(01/07/03) 당신이셨다. 하지만 겨울 강무 때는 백성의 온갖 고초를 감내하면서도 군사훈련을 그치지 않으셨다. “강무란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13/1/30)로서 만일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무비(武備)가 쇠퇴할 뿐만 아니라 이미 이루어놓은 왕법에도 위배된다”(7/12/16)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지난해 강무는 내가 생각해도 지나쳤다. “군사는 자주 조련해 한서(寒暑)의 고통을 익히고, 기계의 장비를 정하게 하며, 좌작진퇴(坐作進退)를 익숙하게”(31/3/6)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명(命)에 따라 20여 일간 강행군을 계속한 결과 “추위에 얼고 굶주린 군사들이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지는 자가 속출”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다행히 총제 홍약이 대신들의 침묵을 깨고 행군의 정지를 요청했고, 도진무(都鎭撫) 성달생이 군사들의 상태를 긴급히 보고해 더 이상의 인명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백성 고초 감내하며 군사훈련 강행

강무 반대 여론을 의식하셨던 것일까. 올해 행차에는 양녕 백부 등 종친을 대동치 않으셨다. 최윤덕 장군 등 문무관료, 그리고 당신의 아들들만이 어가를 수행할 따름이었다. 행차의 속도도 다소 늦춰졌다. 포천에 못미친 양주군 사천동 일대에서 점심참을 드신 것이나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에 철원부의 풍천(楓川) 지역에 야숙을 위한 악차(幄次·임금이 거둥할 때 쉬도록 막을 둘러친 곳)를 설치한 것이 그것이다.

어가가 도착하자 갑사, 별패, 시위패를 포함한 2000여 명의 군사와 1만여 필의 말, 그리고 9000여 명의 몰이꾼이 빠르고 익숙한 동작으로 야숙(野宿) 준비를 했다. 그 사이에 상(上)께서는 야간 암호 등 몇 가지 사항을 숙위 사령에게 전지(傳旨)하시고, 때맞춰 함길도 감사가 보내온 해물을 군사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다. 황금 갑옷을 입고 최윤덕 등에게 내일의 행군과 사냥계획을 지시하시는 위용은 태종 임금을 똑 닮아 있었다. 즉위할 때까지 독서에만 몰두해 할아버지 태종의 걱정을 자아내던 문약한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지난해에 이어 강원도 평강(平康)을 목적지로 떠나는 이번 강무의 의미는 나로서도 각별했다. 물론 상께서는 문무 관료들의 진취적인 기상을 높이고, 병사들의 예기(銳氣)를 가다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사병(私兵)이 혁파되고, 체제가 안정되면서 문약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일곱 살 때 왕세자가 된 형님 향(珦·나중의 문종)의 건강도 건강이려니와, 아버지의 열여덟 명이나 되는-역대 최다수인-아들들 중에서 나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세자의 나이도 이제 열여덟 살이 됐으니 대가(大駕)를 수행할 만하다. (세자는) 항상 금내(禁內)에만 있어 밖의 일을 보지 못해 마치 계집아이를 기르는 것 같다. 혹 중국 사신을 접견하게 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머뭇거린다. 또 몸이 날로 비대해지고 있으니 말을 타고 기를 펴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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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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