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호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 대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tgpark@snu.ac.kr

    입력2004-03-02 10: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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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헌법적 3선개헌으로 박정희 장기집권 체제가 본격화하면서 反박정희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남북화해 무드를 조성해도 이반된 민심을 돌이킬 수 없자 박정권은 유신으로 이를 압살, 결국은 제 무덤을 팠다. 하지만 ‘서울의 봄’도 잠시, YS·DJ의 정치적 야심은 12년간의 암흑시대를 자초하고 마는데….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박태균 : 지난호에서는 주로 1960년대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미국대사관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이번호에서는 1970∼1980년대에 초점을 맞췄으면 합니다. 먼저 당시 활동한 정치인 중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젠 점차 잊혀져 가고 있는 인물들에 얽힌 얘기가 궁금합니다. 장준하씨도 그런 경우라고 보는데요.

    강원용 : 장준하씨에 대해서는 뭐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최근 한 방송사에서 두 차례에 걸쳐 장준하씨에 대해 다뤘는데, 제 생각에는 좀 객관성이 떨어지는 듯했어요. 한 방향으로만 간 것 같았습니다. 인물에 대한 프로그램을 만들 때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조명해야 하는데 말이죠.

    박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도 장준하씨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인물을 한쪽 면으로만 다루면 그 사람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거든요.

    강 : 장준하씨의 부친이 목사인 데다 저와 기독청년운동을 같이했기 때문에 사정을 좀 압니다. 제가 보기에 장준하씨는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지만,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던 것 같아요. 부산에 피난 가서 처음 ‘사상’(‘사상계’의 전신)을 만들 때부터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는 대개 민족청년단이나 이범석 장군 계통의 인물들 그리고 평안도 지방에서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과 가까웠습니다. 물론 당시 ‘사상계’가 정치적인 색채를 많이 띠지는 않았지만. 장준하씨는 4·19 이후 국토개발단 단장을 맡기도 했죠.

    박 : 국토개발단장을 하면서 젊은 사람들, 특히 대학 졸업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한 데도 어느 정도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말씀이죠?



    강 : 그렇게 봅니다. 그러다가 5·16 쿠데타가 터지면서 깨진 거죠. 그때부터는 박정희에 반대하는 것으로 정치적 목표를 바꿨습니다. 함석헌옹을 모시고 순회강연을 해서 엄청난 사람들을 끌어모았죠. 그래서 그 무렵부터 투사(鬪士)로서 ‘사상계’를 가지고 나온 게 아닌가 해요.

    언젠가는 장준하씨가 저를 찾아왔어요. 그간 고생을 많이 했지만 도저히 ‘사상계’를 계속 꾸려갈 수가 없으니 저더러 인수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돈도 없고 잡지를 만들 생각도 없어서 거절했죠. 그러다 부완혁씨에게 넘겼는데, 그후에도 부완혁씨와 갈등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장준하씨의 동료가 저를 만나러 왔습니다. 아마 1960년대 후반이었을 거예요. “우리 장 사장이 중병이 들어 입원했는데 한번 찾아뵙지 않겠습니까?” 하더군요. 그래서 파고다공원 옆에 있는 내과엘 갔더니 장준하씨가 링거 주사를 꽂고 누워 있었습니다. 간이 안 좋다고 하는데, 제 아들이 어릴 때 간에 탈이 나서 죽었기 때문에 제가 그 병을 잘 알아요. 우리의 화제는 어떻게 박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정권을 세우는가 였어요.

    윤보선, 유진산과 손잡았다 후회

    박 : 목사님께서도 윤 전 대통령과 가까우셨죠?

    강 : 윤보선씨의 부인 공덕귀 여사가 제 스승인 손창근 목사의 애제자예요. 그래서 제가 공덕귀씨와 잘 아는 사이였는데, 윤보선씨가 공덕귀와 결혼하면서 윤씨와도 인연이 맺어진 겁니다. 그후에 윤보선씨가 상공부 장관과 서울시장을 했죠. 부산 피난 시절에는 제가 어디에 가서 강연을 하면 참석해서 듣곤 했습니다. 윤보선씨 집에 가보면 정말 양반 중의 양반가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집안 출신인 윤보선씨가 공부는 영국에서 했으니(에든버러대에서 고고학 전공) 선비정신과 영국의 젠틀맨십을 겸하고 있었어요. 말이나 행동이 아주 신사적이었습니다.

    제가 윤보선씨와 가까워진 것은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서였어요. 민주당 정권 시절 구파와 신파가 싸울 때 저는 어느 쪽에도 관여하지 않았거든요. 결국 선거에서 구파가 지고 윤보선씨가 실권 없는 대통령이 되고 말았죠. 그때는 청와대에서 오라고 하면 가서 그저 밥이나 먹고 왔지 별 관계는 없었어요. 5·16이 터지고 나서부터 저와 가깝게 된 겁니다. 윤보선씨는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와 다시 야당을 했지만, 당시 야권의 거물인 유진산과는 아주 미묘한 사이였죠.

    박 : 두 분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윤보선씨는 유진산씨가 진솔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자주 비난했다고 들었는데요.

    강 : 처음에는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 저는 유진산씨를 좋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신문에 유진산씨에 대해 안 좋은 글을 쓰기도 했죠. 그랬더니 유진산씨가 “중앙정보부에서 돈을 얼마나 받아먹고 그런 글을 썼는지 조사해봐야겠다”고 했대요. 윤보선씨가 유진산씨와 같은 당(신민당)을 한다길래 제가 “그 사람하고 같이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듣지 않고 합했어요. 결국 거기에서 윤보선씨가 유진산과 갈라지면서 제 말이 옳았다는 걸 인정한 거죠.

    박 :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윤보선씨가 한일협정에 대해 줄곧 강경한 반대 입장을 밝힌 부분입니다. 국회의원 사퇴를 불사하면서 한일협정에 반대했는데, 윤보선씨의 집안 내력을 보면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집안 어른들 중에 지금도 친일 경력 때문에 논란을 빚는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강 : 그 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윤보선씨와 5·16을 전후한 상황에 대해서입니다. 윤보선씨는 장면의 민주당 정부에 커다란 반감을 갖고 있었어요. 윤보선씨는 학생들의 데모가 끊이지 않고, 학생들이 이북 학생들을 만나러 판문점엘 간다고 나서는 등 혼란이 계속되자 북한이 도발하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저를 만날 때면 “이러다 나라가 무사하겠냐”고 착잡해했죠.

    그러다 보니 5·16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좀 애매했던 겁니다. ‘장면 정부가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박 :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그린 미국 대리대사가 미 정부에 보고한 문서를 보면 5·16 직후 자기들이 쿠데타를 진압하겠으니 허락해달라고 했지만 윤보선 당시 대통령이 이를 만류하며 본인이 거국내각을 만들겠다고 제안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윤보선씨는 3선개헌 직후 박기출씨와 국민당을 만들어 신민당에서 갈라져 나왔거든요. 이를 두고 한 신문은 윤보선씨의 정치적 감각이 번뜩였다는 식으로 썼고, 또 다른 신문은 유진산씨와의 갈등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해석했더군요.

    강 : 그 얘기는 1971년 대통령선거와 관련됩니다. 그때 비로소 3김정치가 들어섰거든요. 야당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 40대 3명이 후보로 나왔는데, 윤보선씨는 세 후보 중에서 김영삼씨와 가장 가까웠죠. 그럼에도 윤보선씨는 이 사람들로는 수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박기출 등과 함께 국민당을 만들고 박기출씨를 대선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김영삼, “미국은 나를 지지”

    박 : 목사님과 김대중씨의 관계도 궁금하군요.

    강 : 그 얘기를 하자면 배경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특히 ‘40대 기수론’과 관련해서요. 그러니까 40대 세 사람이 후보로 부상했는데, 당에서는 이들이 영 미더워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너무 젊다는 거죠. 때문에 양일동, 윤길중, 윤재술 같은 사람들은 저를 끌어내(후보를) 시키려고 했고, 유진산 등은 김상협씨를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윤길중, 양일동씨가 우리집을 몇 번 찾아왔는데 그들의 요청에 대해 저는 “신라, 백제가 싸우는데 고구려 사람이 왜 끼어드느냐”고 퇴짜를 놨어요.

    박 : 목사님이 이북 출신이라서요?

    강 : 말은 그렇게 했습니다. “남북통일이 되면 몰라도 지금은 이민 온 고구려 사람이 끼어들 수가 없다”고. 그랬더니 김영삼씨가 이명하(전 진보당 간부)씨를 통해 저를 만나고자 해서 만났는데, 미국의 힘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 김영삼씨가 미국 국무성에 다녀오고 나서 미국대사가 성조기를 단 차를 타고 김영삼씨 집을 찾아간 일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YS는 “미국은 나를 지지한다”고 했습니다. 이철승씨도 절더러 ‘선배님’이라고 부르면서 찾아왔는데, 그 양반한테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그 다음에는 김대중씨도 만나자고 했는데,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그때 저는 김대중씨를 선동 정치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와 친한 목사 한 분이 회현동의 한 식당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그 분은 김영삼씨를 장택상한테 소개한 사람이에요. 김대중씨가 서울에 올라와 노동문제연구소를 차렸을 때 자기가 소장을 하고 그 사람을 부소장에 앉혔습니다. 그래서 제가 식당에 가 앉아 있는데 김대중씨가 쑥 들어오더군요.

    “내 시체를 밟고 가라”

    박 : 그 자리에서 어떤 말씀을 나눴습니까.

    강 : 저더러 그러더군요. “당은 외부에서 명망있는 인사를 영입해 대통령후보로 추천하려 하는데, 목사님과 김상협씨 두 분이 대상으로 떠올랐다. 내가 전라도 사람이니 김상협씨를 지지해야 하지만, 나는 목사님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목사님의 뜻을 들어보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지지운동을 하려 한다”고. 역시 머리가 좋더군요. 제가 “당신, 속으로는 ‘나와 신민당을 도와달라’고 하고 싶으면서 왜 그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느냐”고 했더니 “아, 역시 목사님 앞에서는 꼼짝 못하겠네요” 하더라고.

    그래서 제가 다짜고짜 “저 사람들이 총칼 들고 빼앗은 정권을 투표로 내주리라고 생각하는가. 윤보선씨가 정말 투표에서 졌겠나. 당신이 그걸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을 텐데 어떻게 저들을 이길 수 있다고 보는가” 하고 물었어요. 김대중씨는 “지금은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민중의 힘으로 해야 한다. 총칼 앞에 빼앗긴 정권은 민중의 힘으로 빼앗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민중의 힘으로 어떻게 정권을 빼앗겠다는 거냐고 물었더니 DJ는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선거 때 목포에서 있었던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그때 박정희는 김병삼이라는 사람을 밀었습니다. 박정희는 직접 목포에 내려와 선거를 돕기도 했어요. 너무 탄압이 심해서 도무지 옴쭉달싹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유세장에서 독을 품고 목청을 높였죠. ‘박정희가 목포에 와서 나를 죽이려 하는데, 나는 결국 죽는다. 그래서 여러분께 유언을 하겠는데 내가 죽으면 장례식을 하기 전에 내 시체를 밟고 전주로,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라. 그래서 이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그후로는 탄압의 강도가 좀 약해졌습니다. 덕분에 제가 목포에서 국회의원이 된 겁니다. 제 경험으로 보건대 박정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제가 대통령후보로 나가면 마지막 유세를 서울에서 할 텐데, 적어도 수십만명이 모일 것입니다. 그 군중을 이끌고 청화대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아, 역시 김대중이란 사람이 뭔가 다른 게 있는 인물이구나’ 하고 생각했죠. 다음날 제가 윤보선씨를 찾아가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을 지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윤보선씨는 “강 목사가 사람을 몰라도 그렇게 몰라? 김대중이란 사람은 머리털부터 발톱까지 완전히 정치적인 사람이야”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김대중을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할 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래서 제가 다시 설득했습니다.

    “해위(윤보선의 호) 선생, 그렇게만 볼 게 아닙니다. 내가 세 사람 다 만나봤는데 가능성 있는 사람은 김대중씨밖에 없습디다. 이번에 박기출씨를 내보내면 1963년 선거와 똑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그때 끝까지 출마를 포기하지 않은 변영태씨 때문에 해위 선생이 그 사람이 얻은 표만큼의 차이로 진 것 아닙니까. 이번에 박기출씨가 나오면 김대중은 박기출씨가 얻은 표만큼의 차이로 질 겁니다. 그러면 국민들이 ‘도대체 누가 박기출이를 내세웠냐’고 들고 일어날 겁니다. 해위 선생이 매그루더에게 5·16 쿠데타군을 진압하지 말도록 했다는 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직도 남아 있질 않습니까. 그후에 반(反)박정희 운동을 해서 겨우 상처가 아물었는데, 이번에 그런 결과가 나오면 해위라는 이름은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고 말 겁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나왔어요. 바로 그 다음날 오후에 박기출이 기자회견을 갖고 물러났습니다. 윤보선씨가 김대중씨 지지로 돌아선 겁니다.

    박 : 그렇게까지 애를 썼는 데도 김대중 후보가 패했으니 상심이 크셨겠군요.

    “조용히 돌아가시오”

    강 : 실망스러운 일도 있었죠. 김대중씨가 1971년 4월18일 장충동에서 마지막 유세를 했는데, 당시 박정희 정권은 공무원들을 죄다 소풍 보내고 버스도 운행하지 않았어요. 그랬는 데도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었습니다. 교통이 두절되자 사람들이 전부 걸어서 왔는데, 장충단공원 남산 꼭대기까지 정말 구름처럼 몰려오더군요. 김대중씨한테 들은 말이 있던 터라 ‘오늘이 바로 그날이구나’ 싶었습니다. 더구나 그 며칠 전에 박정희가 춘천에서 군인들을 모아놓고 “총 한번 쏘아본 적도 없는 국민학교 어린이 같은 작자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기겠냐”고 들쑤셔서 안보론이 제기된 마당이라 저는 그날을 D데이라고 생각했죠. 먼저 이태영 박사가 나와서 지지연설을 했는데 그처럼 기막힌 선동 강연은 처음 들어봤어요. 산이 떠나가도록 사자후를 토하더라고. 그런데 막상 김대중씨가 나와서는 엉뚱한 소리를 했어요.

    “오늘 이렇게 교통까지 통제하는 데도 여러분들이 이처럼 많이 오셨으니 선거는 끝난 겁니다. 내가 대통령이 된 겁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소동을 일으키면 그 자가 기다렸다는 듯 군대를 앞세우고 몰려올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나를 대통령 만들려면 조용히 가 주십시오….”

    듣고 있으려니 저 사람이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건가 싶더군요. 이젠 기대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투표하는 날 저녁에 텔레비전도 안 봤어요. 질 게 뻔하니까.

    ‘원죄’와 반공 사이

    박 : 그후 윤보선씨는 유신체제에 맞서 재야에서 활동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강 : 특별한 이유가 있었죠. 지난호에서도 말했듯이 윤보선씨는 민주당 정부가 나라를 다 망치고 공산화 위기를 초래할 지경에 왔다고 우려했기에 5·16으로 군인들이 반공을 하겠다고 나서니까 그들을 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 후에 박정희가 하는 걸 보니 이게 아니다 싶거든. 그런 사정을 어지간한 국민들도 다 알았기 때문에 윤보선씨에게 원한을 품은 이가 적지 않았어요. 본인도 ‘결국은 내가 박정희를 집권하게 만들었다’며 고통스러워 하다가 꼭두각시 노릇을 그만두고 하야한 거죠.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회의차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오른쪽)과 악수를 나누는 이후락 당시 남북조절위 공동위원장(1972. 11. 3)

    하야할 때만 해도 박정희와 싸울 생각은 없었어요. 나오고 나서부터 맞섰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죠. 하나는 박정희가 하는 짓을 보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됐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자기가 박정희 정권을 성공시킨 장본인이라는 ‘원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박 : 제도권 야당에 몸 담고 국회 차원에서 박 정권에 맞설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재야에서 활동했거든요.

    강 : 눈여겨볼 것은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을 때 윤보선씨가 전두환 정권과 맞서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한때는 오히려 협력하는 방향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죠.

    윤보선씨는 박정희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사상적으로는 대단히 뿌리깊은 반공입니다. 박정희가 무너질 때까지 재야 인사들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며 힘을 합했지만, 내심 이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소위 운동권이 성공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이것이 전두환 정권을 멀리 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예요.

    윤보선씨와 가까웠던 김정례씨도 그랬어요. 김정례씨는 박정희 치하에서 맹렬하게 싸운 사람 아닙니까. 김정례씨는 재야 운동권 인사들과 함께 싸우고 그들이 김정례씨 집에 피신해 있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김정례씨는 그들을 사상적으로 의심하게 된 겁니다. 그들이 박정희에 반대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이거 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사상적인 불안감을 가졌던 거죠. 윤보선씨는 그처럼 위험한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갈 바에는 박정희처럼 장기 집권만 안 한다면 당분간 군인들에게 가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듯해요.

    7·4 공동성명도 민심 못 추슬러

    박 : 야권에서 박정희 정부로 화제를 돌려보죠. 목사님께서 쓰신 책에는 1950년대에 미국에 계실 때 워싱턴에서 이후락씨를 몇 번 만나셨다고 돼 있더군요. 이후락씨는 목사님이 귀국하신 뒤 5·16 군사정부에 공보실장으로 들어갔고, 나중엔 중앙정보부장까지 했습니다. 그 무렵엔 이후락씨와 접촉하신 일이 없습니까.

    강 : 미국에서 돌아온 후로는 접촉이 없었죠. 이후락씨는 제가 미국에 있던 1950년대 후반에 주미대사관 무관으로 있었습니다. 그다지 친했던 것은 아니고, 뉴욕에서 공부하던 제가 주말마다 교회 설교하러 워싱턴엘 오다 보니 그와도 가끔씩 만나게 된 것이죠. 그가 우리 대사들이 다니면서 실수한 얘기를 아주 재미있게 들려주던 기억이 납니다. 그 사람이 군사정부 공보실장이 된 것은 미국 사람들이 시킨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박정희와 좌익세력 사이에 담을 쌓으려고 미국이 쑤셔넣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봐요.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서 박정희한테 충성하고 신임받고 하다가 중앙정보부장을 하고 평양까지 다녀왔죠.

    그런데 정치란 게 참 무서운 거예요. 그때 박정희가 아주 싫어한 사람이 몇 있었는데, 세간에선 장준하 다음으로는 저를 가장 미워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주일 설교중에 김수환 추기경이 하는 것과 내가 하는 것은 꼭 들었다는 얘기도 돌았습니다. 정말인지는 모르지만 저를 무척 미워한 것은 사실이에요. 결국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시켜서 ‘선데이서울’ 사건을 만들어냈잖아요.

    박 : 그게 어떤 사건입니까.

    강 : 강원용이를 때려잡긴 해야겠는데, 그러려면 돈 문제와 여자 문제가 제격 아니겠어요? 그런데 저는 돈을 만지지 않는 데다, 주로 독일 등 외국에서 돈을 갖다 쓰지, 국내 돈은 쓴 게 없거든요. 세무조사를 해도 아무것도 안 나오니 여자 사건을 만든 겁니다. 1971년엔가 서울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인데, 이후락이 몇몇 여기자들을 사주해 기사를 조작한 거죠. 그후로 저는 이후락과 아주 멀어졌죠. 지금도 어디에 살아 있다는데, 만나보고 싶지도 않아요.

    그후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나왔죠. 물론 저도 남북간의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지만, 막상 이후락이 평양에 가서 이렇게 저렇게 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매우 충격적이었어요. 박정희의 친공(親共) 경력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하고 총력안보로 반공을 한다고 하던 사람이 갑자기 남북공동성명을 들고 나오니까 상당히 당황했죠. 그때부터는 온통 통일에 대비한다는 얘기뿐이었어요. 모든 걸 통일에 관한 문제로 봤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묘해요. 1969년에 3선개헌을 해서 1971년에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니 반(反)박정희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전개되면서 민심이반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거든.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내놔도 그런 분위기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 고조되니까 그해 10월 유신체제로 들어섰고, 1974년에는 마침내 긴급조치가 잇따라 발동됐습니다.

    박 : 박정희 체제에선 1967년 민비련(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1974년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1979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과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등 수많은 민주화운동이 불거졌는데, 이들과 관련해 들려주실 말씀이 있습니까.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유신정권은 1974년 반(反)유신데모를 벌인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 8명을 지목, 이듬해 모두 처형했다. 사진은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공판 광경.

    강 : 물론 전혀 근거없는 사건들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저는 그런 사건들이 100% 조작된 것이라곤 보지 않습니다. 100% 사실이라거나 100% 조작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양쪽 다 똑같은 흑백논리입니다. 꼬투리를 잡힐 만한 게 있으니까 잡혔는데, 박 정권이 그 꼬투리를 침소봉대해서 어마어마한 사건으로 만들어냈다는 게 이런 사건들의 공통점이라고 봐요. 제가 관련된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직원 여섯 사람이 금지된 책을 읽었거든요. 그러니까 금서를 읽었다는 걸 가지고 반공법 위반이네, 국가보안법 위반이네 하며 거창하게 만들어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겁니다. 저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갔는데, 들어갔더니 사진도 간첩들 사진 찍는 식으로 찍어서 내놓더군요. 나중에는 각계에 침투한 조직적인 혁명기도세력으로 엮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유신체제 때였는데 제가 제네바엘 갔다왔더니 4·19 전날인 1960년 4월18일 당시 고려대에서 성명서 읽었던 박상원 군이 잡혀갔다고 해요. 그리고는 며칠 후에 형사 수십명이 우리집에 들이닥쳐선 책상을 뒤지고 난리가 났어요. 연유를 물었더니 “그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려 했는데, 목사님과 고려대 경제학과 박희범 교수 등이 조직을 맡은 것으로 밝혀졌다”는 겁니다. 그렇게 잡혀 들어가서 재판까지 받았는데 결국 무죄가 선고됐죠. 재판정에서 판사가 그러더군요. “강원용 목사가 사건을 주동했다는데, 그때 제네바에 있던 강 목사가 뭘 했단 말이냐”고 합디다. 그렇게 조작된 사건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박정희가 워낙 과민했기에 그 아래서 일한 사람들도 터무니없이 과민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 현대사 연구하는 분들이 살펴봐야 할 것이 있어요.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이 유신 이후에 터져나온 게 아니라는 겁니다. 앞서 설명드린 1947년 부안군 농민사건(‘신동아’ 2003년 12월호 411쪽 참조)의 경우처럼 꼬투리 하나만 있으면 이렇게 부풀려서 수많은 사람을 잡아가고 죽였어요. 이런 게 다 민주화운동이니 민주화운동은 해방 이후로 쭉 이어져 왔다고 봐야 합니다.

    다만 과거의 민주화운동은 그다지 극렬한 방법으로 하지 않았어요. 무슨 투쟁식으로 한 게 아니라 민주적인 방법으로 했어요. 그런데 유신헌법 아래서는 민주적인 방법으로 운동을 할 여지가 없다 보니 극한 투쟁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같은 사람들은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성공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결과적으로 탄압의 빌미만 더 키우게 된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그런 방법론을 확고하게 지지하진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유신체제 이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한, 인권을 위한 운동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졌어요. 오늘날 민주화운동 세력이라고 하면 죄다 강경파인 것처럼 비쳐지는 것은 잘못된 역사 인식이라고 봅니다.

    YS·DJ, 대권 장악 확신

    박 : 여기까지 왔으니 박정희 시대가 종지부를 찍은 이후의 얘기를 여쭤보지 않을 수 없네요. 12·12 사태와 ‘서울의 봄’ 전후의 정황은 어떠했습니까.

    강 : 1979년 12월12일 저녁에 연세대 이기택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지금 자기가 국방부 정보과로부터 계속 정보를 듣고 있는데, 12·12 사태가 진압돼서 정승화를 체포했다는 거예요. 수화기를 놓고 나니 아, 역시 군인이 (정권을) 잡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어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사태를 수습하는 게 아니라 정권을 잡는 것이로구나….

    그 길로 김영삼씨한테 전화를 걸어 다음날인 13일 아침 남산에 있는 식당에서 만났어요. 저는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우선 당신과 김대중, 김종필 세 사람이 힘을 합쳐 계엄부터 해제시켜라. 그리고 계엄이 해제되면 그때는 김종필은 김종필대로 가게 하고, 당신과 김대중 둘이 손을 잡아라. 둘이 손을 잡는데, 대통령은 당신이 먼저 해라. 그 대신 당 총재는 김대중에게 줘라. 그리고 4년 후에 가서 경선을 해라….

    그랬더니 김영삼씨는 “우리는 민주주의 신봉자니까 대통령후보든 당 총재든 전당대회에서 민주적으로 결정해야지, 우리끼리 약속을 하고 말고 하는 게 아니다”고 했어요. 말이야 그럴듯하지만 속셈은 뻔했죠. 그때 당에서는 절대 다수가 김영삼 세력이었으니까. 결국 제 말대로 못 하겠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래도 체념하지 않고 다음날인 14일 아침 김대중씨를 찾아갔어요. 노골적으로 얘기했죠. 당신 이번에 대통령 할 생각 절대로 하지 마라. 박정희가 당신더러 사상까지 공산주의자라고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겠냐. 그러니까 이번에는 김영삼을 대통령에 앉히고 대신 당권을 쥔 다음 4년 후에 나가라. 나이도 젊지 않냐….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1985년 12월 노신영 국무총리(오른쪽)와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서로 앞설 것을 권하며 당정 회의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러자 김대중씨는 “이미 끝났다. 강 목사님이 군(軍)이란 세계를 모르고 하는 말씀인데, 군은 통수권자에게 절대 복종한다. 박정희가 있을 때는 박정희가 통수권자니까 거기에 충성했지만 이제 박정희는 죽었다. 장군들이 그 다음엔 내가 (대통령)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내게 충성하고 들어올 것이다”고 하더군요.

    그 무렵 김대중씨 쪽 사람들은 정말 대통령이 다 된 걸로 알았습니다. 그러다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데모가 줄을 이었는데, 그 중에는 뒤에서 조작된 데모도 있었죠.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고 광주 민주화운동이 터지더니 이후 12년 동안 군사정권이 이 나라의 역사를 망친 겁니다. 민족의 미래보다 개인적인 야심을 앞세운 정치인들의 잘못이 큽니다.

    박 : 당시 미국은 신군부와 서울의 봄, 광주 민주화운동 등을 어떻게 봤습니까.

    전두환, 노신영을 후계자로 낙점?

    강 : 미국의 속셈이 정확히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미국대사관 정보 책임자로 있던 사람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저도 ‘광주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그저 ‘광주사태’로만 알고 있었죠. 중동지역을 순방하던 최규하 대통령이 급거 귀국해 광주에 들어가려 했지만 뜻을 못 이뤘을 정도니까. 제가 미국의 시각이 궁금해 정보 책임자 케네디 퍼거슨에게 광주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앞으로도 태극기가 계속 펄럭거릴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당신이 며칠 전에 내게 그 질문을 했다면 ‘I think so’라고 답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I hope so’라는 말밖에 못 하겠다”고 해요. 상당히 위험하게 봤던 겁니다. 미국 사람들이 광주 민주화운동에 어떻게 개입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후 미국이 김대중씨를 살리려고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박 : 어째서 그렇게 믿었습니까.

    강 : 김대중씨가 사형선고 받은 뒤에 퍼거슨이 저를 찾아와서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 미국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당신같은 한국인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간곡히 부탁하라”면서 허화평씨를 통해 저와 전 대통령을 만나게 했어요.

    박 : 전두환 시대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강 : 요즘 전두환씨의 부정축재로 세상이 떠들썩한데, 그와 관련된 제 기억 한 가지를 말씀드리죠.

    전두환씨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 돈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언젠가는 “내 고민 좀 하나 들어주시오” 하더니 “청와대에 들어와 보니 돈이 없으면 도무지 꼼짝을 못하겠다. 내게 돈 줄 사람은 몇 있는데, 그걸 받으면 나도 박정희 대통령처럼 부패해지는 것 아니냐. 그렇게 하지 않고 해낼 방법이 없겠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제가 “방법이 있다. 이승만 박사는 돈 문제로 욕 먹은 적이 없는데, 그렇다고 이 박사가 돈 없이 정치를 한 것은 아니다. 그건 이 박사가 직접 축재하지 않고 이중재와 조성철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성철을 한번 써봐라”고 했죠. 그래서 조성철을 소개해 주기로 하고 허화평과 연락해서 함께 전두환을 만나기로 했는데, 조성철이 알래스카에 갔다가 갑자기 졸도해서 일본 병원에서 사망하고 말았어요.

    전두환씨가 하루는 또 “내가 대통령이 되어 보니 앞으로는 군인이 대통령 되어서는 안 되겠더라. 경상도 사람이 또 대통령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했어요. 그 얼마 후 김상협씨를 국무총리에 앉혔는데, 1983년 미얀마 아웅산 사태 직후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엔 노신영씨를 중용했어요. 제네바대표부 대사로 있던 그 사람을 1980년에 외무부 장관으로 불러들였고, 1982년에는 안기부장을 시켰어요. 그때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노신영씨는 외교관만 해서 안기부하고는 전혀 맞지 않은 사람이거든. 그러더니 1985년 국무총리에 임명하더라고. 그걸 보니 아, 이 사람에게 정치수업을 시켜서 자기 후계자로 삼으려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두환씨는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주변 인사들, 특히 군 출신들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펄펄 뛰니까 결국 뜻을 거둔 것으로 압니다.

    박 : 오늘은 여기까지만 듣기로 하죠.장시간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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