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호

고려대 명예교수 김용준

“노 대통령에겐 대통령이라는 자각(自覺)이 없다”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 사진·김성남 기자

    입력2005-11-29 1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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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長 노릇 하려면 미운 놈 궁둥이도 두들겨줘야지…
    • 검찰총장 사퇴 보며 ‘이 나라는 살아 있다’ 생각
    • 동생 도올은 정력가, 하지만 럭비공처럼 튀어 불안
    • ‘친일문인’ 이광수? 그의 소설로 눈뜬 나는 그를 욕할 수 없다
    • 평생의 스승 함석헌, 만년에 여자 문제로 후회와 반성
    • 민주세력 정권 잡고 나서 이공계는 더 망했다
    고려대 명예교수 김용준
    김용준(金容駿·78) 고려대 명예교수는 독재정권 시절에 두 차례나 해직된 경력이 있다. 기독교교수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다 유신정권의 눈 밖에 나 1975년 해직돼 4년 동안 백수로 지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와 복직했으나 격동의 세월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신군부 집권에 반대하는 ‘지식인 선언’에 과학계 대표로 참여해달라는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서명했다가 다시 4년 동안 강단에 설 수 없었다.

    김영삼·김대중 정부를 거쳐 노무현 정부에 이르는 동안 민주화운동에 한 발을 걸쳤던 사람들은 대부분 한 자리씩 했다. 결코 그들의 용기와 공헌을 폄훼하자는 게 아니다. 민주화운동 인사 중에는 세 정권에서 대통령 총리 국회의원 장관 총재 총장 사장 등으로 보상을 넉넉히 받은 사람이 많다. 김 교수의 우산 밑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정부의 실세가 됐다. 그러나 그는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다.

    김 교수가 계간 ‘철학과 현실’ 가을호에 ‘나도 황국신민선서를 읽었고 창씨개명을 했으며 춘원(春園) 이광수를 욕할 수 없노라’는 글을 실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강만길)가 출범해 친일파의 행적을 단죄하겠다는 마당에 그는 ‘이광수의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일본식 이름을 가진 충실한 황국신민이 됐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친일진상 규명을 주도하는 세력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를 교과서로 배운 세대다. 그 시절에 태어나 간난(艱難)과 격동의 세월을 산 사람들의 체험 속에는 교과서에선 배울 수 없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서울 힐튼호텔 옆 대우재단빌딩 18층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실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대우그룹은 공중분해됐지만 대우재단은 살아남았다. 김 교수는 1976년 해직됐을 때 대우재단의 과학부문 자문위원을 지낸 인연으로 대우재단 산하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자리에 앉자 팔순을 바라보는 김 교수가 직원을 시키지 않고 손수 차를 내왔다. 속기사는 “공무원은 계장만 돼도 여직원을 시키는데…”라며 황송한 눈빛이었다.

    동생 도올과 장남은 동갑내기

    -대우그룹이 사라져 학술협의회 꾸려나가기가 어렵지 않은가요.

    “대우재단의 주 수익원은 대우재단빌딩(18층)의 임대료입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250억원을 희사해 대우재단을 발족시켰죠. 힐튼호텔과는 지금도 가교(架橋)로 연결돼 있어요. 학술협의회는 대우재단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동생인 도올(김용옥·57)은 자주 만나십니까.

    “요새는 못 만나요. 걔가 어떻든 고려대 철학과를 나와 일본 미국 대만에서 석사, 미국 하버드에서 박사를 했지 않습니까. 동생이 보스턴에 있을 때 만났더니 ‘한국 가면 한의학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되겠나 생각했죠. 그런데 원광대에서 6년 만에 한의사가 됐죠. 내 동생이지만 공부도 할 만큼 했고 머리도 있고 정력이 대단하죠. 신통하게 생각하는데 좀 불안합니다. 그놈이 럭비공 같아서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요. 형만 아니라면 저 럭비공이 이리저리 튀는 모습을 보며 구경을 하겠는데…. 그러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니까 이놈이 안 와요.”

    4남2녀 중에서 김 교수는 맏형이고 도올은 막내다. 김 교수의 장남과 도올은 동갑내기다. 부모 같은 형이라곤 하지만 대한민국의 자타칭 대가(大家)가 된 도올을 ‘걔’ ‘얘’ ‘이놈’이라고 부르는 것이 재밌다. 장형은 도올에게 뭐라고 잔소리를 하는 걸까.

    “너무 그렇게 튀지 말라고 하죠. 학교(고려대)를 그만두는 게 아닌데…. 그만두려고 할 때 주저앉히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됐죠. 걔 성격이 괴짜 같은 구석이 있어요. 말도 악센트를 줘서 하다보니 때때로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도 있어요. 걱정이죠. 그냥 보시는 대로예요. 가라앉아 자기의 길에 천착했으면 좋겠는데. 칭찬하는 사람은 또 칭찬하고… 저도 칭찬합니다. 내 동생이라고 나무랄 생각은 없는데 너무 그러니까 걱정이 돼서.”

    -도올이 만든 EBS 다큐멘터리 10부작 ‘한국독립운동사’는 봤습니까.

    “좌익 계통의 독립운동사라고 하더군요. 나는 보지 않았어요. 걔 책도 별로 읽은 게 없습니다. 이때까지 가려졌던 부분을 파헤쳤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어떤 사람은 김일성이 안창호보다 더 독립투사라고 했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어요. 모르겠어요. 내가 직접 안 봐서. 걔 거는 일단 안 봐요.”

    -도올이 쓴 ‘나의 큰형, 김용준’이라는 글에 경기중학교를 나온 형에 대한 콤플렉스 같은 것을 토로한 대목이 있더군요.

    “용옥이가 내 큰아이와 6개월 차이죠. 내 아들 셋이 경기를 나왔단 말이에요. 나까지 합하면 넷이 경기를 나왔죠. 경기 나온 셋 중 둘이 서울대를 나오고 한 아이는 외국어대를 나왔죠. 그런데 용옥이는 어떻게 하다 보성에 들어갔거든.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르죠. 어려서부터 걸작 같은 면이 있었어요. 대학교 다닐 때도 방학이면 없어져요. 산속에 들어가 거의 거지 중 꼴이 돼서 돌아와요. 걔 태권도가 몇 단인지 아세요? 걔한테 얻어맞으면 죽어요. 그런 얘예요.”

    -기인(奇人)이군요.

    “네. 동양학을 하버드에서 했지 않습니까. 나는 국학이나 동양학 한 사람들이 메서돌러지(methodology·방법론)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냥 공자왈 맹자왈 암기식으로 나가고, 학문적 방법론이 부족하죠. 용옥이는 어떻든 양쪽을 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영미의 현대 학문 조류와 동양학이 합류해 미지의 세계를 개척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죠. 자기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그러겠죠. 그런데 인기가 너무 올라가니까 거기서 오는 병폐도 있잖아요. 내가 어디 가면 도올의 형으로 소개될 때가 많죠.”

    -동생 김숙희 교수는 김영삼 정부 때 어떤 인연으로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했습니까.

    “걔가 지금도 독신이죠. 집은 앞뒷집이지만 같이 밥 먹고 함께 살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내가 큰오빠니까. 걔가 YWCA에서 일할 때 어느 지방에 가서 ‘이제는 그래도 대학 나온 사람이 대통령을 하는 게 좋겠다’고 몇 번 얘기했더래요. 그 말이 지방 사람들에게 꽤 먹히더래요. YS가 대통령 취임하기 전에 만나자고 해서 입각 교섭을 받았는데 거절했어요. 내가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정무장관이나 여성부 장관은 하지 말라고 했죠. 이회창씨가 국무총리 된 후에 YS가 또 만나자고 하더니 교육부 장관 하라고 하더래요. 이회창씨는 어떻게 여자가 교육부 장관을 하냐고 반대했대요. 장관 하면서 월남 파병을 용병(傭兵)이라고 했다가 재향군인회에서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쫓겨났죠.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지요. 월남 파병이 용병이 아니면 뭐예요.”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자라

    -‘나의 젊은 시절’이라는 글에서 ‘소학교 다닐 때 자정 무렵 역에 나가 지나(支那·중국)로 가는 출정군인(出征軍人)들을 전송하면서 일장기를 손에 들고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었던 추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고 썼더군요. 중학교 5학년을 마칠 무렵엔 가네미쓰 요슝(金光容俊)으로 창씨개명을 했다지요.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을 안 하고 버틸 수는 없었던 겁니까.

    “우리 집은 광산(光山) 김가라 가네미쓰(金光)라고 지은 거죠.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분들도 있죠. 그러나 창씨개명 여부로 친일(親日) 반일(反日)을 가릴 수는 없어요. 항일운동가도 창씨개명을 안 했지만 친일파 중에도 창씨개명을 안 한 사람이 있어요. 한상용(韓相龍)씨 같은 친일 거두도 창씨개명을 안 했어요. 보통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않고는 견디기 어려웠죠. 압박이 너무 심했으니까요. 학교에서도 계속 창씨개명하라고 독촉하고, 사회에서도 불이익이 그대로 쏟아지니까 안 하고 배길 수 있나요. 어떻게 보면 그때 창씨개명을 안 한 것이 애브노멀(abnormal·비정상)이고 창씨개명한 것이 정상적인 거죠. 못 견뎠으니까….”

    한상용은 매국노 이완용의 조카로 중추원칙임참의(中樞院勅任參議)를 15년간 중임하고 1941년 중추원 고문이 됐다. 각종 친일단체에 참가해 1916년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 평의장을 지냈다.

    -‘친일 문인’ 이광수를 옹호한 대목이 흥미롭더군요.

    “경기중학교가 종로구 화동 꼭대기에 있었어요. 학교에서 안국동을 거쳐 종로로 나가면 화신상회(현재 삼성증권 자리) 4층에 서적부가 있었습니다. 집에서 돈이 올라와 서적부를 어슬렁거리다 춘원이 쓴 ‘그의 자서전’이란 소설책을 샀습니다. 친구 부인과 간도(間島)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는 스토리죠. 간도의 한국사회는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의 본거지였죠. 춘원이 나 같은 놈을 생각해 쓴 것은 아니겠지만 어떻든 그 책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발견한 겁니다.

    학교 가면 황국신민(皇國臣民) 선서를 낭송하고 천황이 계신 곳을 향해 동방요배(東方遙拜)했습니다. 일본말로 쓴 일기장을 제출해야 했죠. 그야말로 충실한 황국신민으로 자랐죠. ‘덴노 헤이까(천황 폐하)’라는 말이 나오면 벌떡 일어서서 차려 자세를 취했습니다. 천황 폐하의 적자(嫡子)로서 생명을 새털같이 버리는 게 남아(男兒)의 영광스러운 일생이라고 교육받았으니까요.

    ‘그의 자서전’ 이후 춘원의 역사소설을 모조리 읽었어요. 그때는 일본 역사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정식 학교에서 한국 역사를 못 배운 세대거든요. 춘원의 소설을 읽은 후로 우리글로 일기를 썼죠. 광복이 되고 나서 춘원을 친일파다 뭐다 하지만 어떻든 나는 춘원이라는 사람을 욕할 수 없죠.”

    한때 좌익운동에 심취

    고려대 명예교수 김용준

    김용준 교수는 독재정권 시절 두 차례나 해직되는 수난을 겪었다.

    김 교수도 광복 직후에는 쏟아져 나오는 좌익서적에 심취해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던 시절이 있었다.

    “영정심상소학교(지금의 천안초등학교) 다닐 때 박성의(朴成義)라는 친구가 급장을 하고 내가 부급장을 했어요. 그 친구는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했어요. 성의의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로 집안이 무척 빈한했죠. 우리 집은 꽤 잘살았어요. 아버지가 개업 의사였으니까. 성의는 경성사범학교에, 나는 경기중학교에 갔어요. 둘 다 좋은 학교였어요. 경성사범은 수업료가 일절 없어 가난한 수재들이 모여들었죠. 성의는 연수과에 진학했다가 광복 후에는 사범대학생이 됐죠. 사범대학은 좌익의 소굴이었고 성의는 거기서 보스였어요.

    성의가 갖다준 야마카와 히도시(山川均)의 ‘자본주의의 계략(資本主義の からくり)’과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또 하나의 가난한 이야기(第二貧乏物話)’라는 책에 사로잡혔어요. 지금 생각해도 잘 쓴 책이에요. 성의에게 이끌려 좌경화된 거죠. 마분지 같은 종이에 인쇄된 모택동·스탈린·레닌 선집이 쏟아져 나올 때였죠.

    성의가 함께 좌익운동을 하자고 해서 사범대학에 진학하려고 했죠. 사범대학 가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사범대학이 교원 양성소지, 그게 어디 대학이냐’며 할아버지 산소 앞으로 끌고 가서 우시는 거예요. 그래서 경성공업대학(서울 공대의 전신)에 진학했죠. 거기서 국대안(國大案) 반대투쟁을 격렬하게 했어요.

    미군정이 경성제국대학과 약학전문학교·의학전문학교·고등공업학교·고등농업학교 같은 고등교육기관을 합쳐 국립서울대를 만든 거죠. 광복이 되고 고등교육기관이 모자라 야단인데 그걸 다 합해서 하나로 만든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잘못된 정책이죠.

    신입생 투쟁위원이 돼서 국대안 반대 삐라를 붙이고 다니다 경찰관에게 붙잡혔어요. 성의는 내가 붙잡히는 걸 보고 달아났어요. 그게 마지막이죠. 그 친구는 전쟁 통에 월북하다 폭격을 맞고 죽었다고 해요.”

    -언제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게 됐습니까.

    “삐라 붙이다가 붙잡혀 형무소살이를 하고 있는데 천안에서 아버지가 올라오셔서 빼내주셨죠. 만 스무 살이 안 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소년감호원으로 이감됐다가 나온 거죠. 나는 소년감호원에서 사식(私食)을 먹고 살이 뽀얗게 쪘는데 집에 내려가보니 어머니는 자식이 형무소에 있는데 편하게 잘 수 없다고 가마니를 깔고 자며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해 무릎에 부황이 나셨더군요.

    천안에 있을 때 김구 선생님이 쉰 듯한 목소리로 방송을 했어요. 국대안 반대투쟁을 거론하며 ‘너희는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나라 걱정은 우리한테 맡기고 너희는 공부해라’고 말씀하셨어요. 남로당은 김구 선생을 반동의 괴수요, 백색 테러의 두목이라고 헐뜯었죠. 그러나 김구 선생의 호소는 내 심금을 울렸습니다.

    서울대 동맹휴교가 많이 허물어지고, 한쪽에서는 이철승씨가 이끄는 우익 전학련이 침투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투쟁본부로 가서 제네스트(general strike·총파업)를 일단 중단하고 등교했다가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했죠. 남로당의 명령이라서 중단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남로당은 그때 전국노동자평의회의 철도 제네스트와 서울대 국대안 반대 제네스트를 연대한 투쟁을 지시해놓고 있었거든요.

    나는 형무소에서 넉 달 동안 위대한 투쟁을 하고 있을 때 국대안 반대 투쟁본부에서 면회 한번 안 오고, 고생하고 나온 뒤에도 위로를 안 해줘 뿔따구가 나 있는 상태였죠. 학생운동은 순수해야 한다며 탈퇴했어요. 적색 테러가 굉장했을 때라 정말 혼났어요. 사범대 교수 두 명이 노상에서 맞아죽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에도 국대안 반대 투쟁위원들이 몰려왔죠. ‘저 악질 반동놈의 새끼, 한민당 놈들 쏘기 전에 너부터 쏘겠다’고 협박했죠. 배신자라는 거죠. 한 달 이상 집 밖으로 못 나갔어요. 어쨌든 그쪽에서 볼 때는 배신자 아닙니까.”

    국보법 폐지엔 찬성

    -강정구 교수가 미군정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지지 77%, 자본주의 지지 14% 로 나왔으니까 당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선택했어야 맞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세분하면 공산주의 지지 7%, 사회주의 지지 70%였죠. 과연 그 여론조사가 정확했던 걸까요. 당시 사회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글쎄요. 요즘도 통계숫자를 믿을 수 없을 때가 있잖아요. 질문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하니까. 6·25전쟁 터지고 나서 피난민이 몰려와서 이북 사람들이 여기에 자리잡은 거 아닙니까. 잘살았으면 여기서 그리로 올라갔지, 젠장.

    강 교수는 도대체 정체가 뭔지,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돼요. 왜 야단스럽게 꼭 그런 발언을 지금 이 단계에서 해야 하는 건가요. 그런 소리를 해야 클로즈업되는 건가요.”

    -김종빈 검찰총장이 강정구 교수에 대해 구속수사를 하려니까 법무부 장관이 지휘권을 발동하는 바람에 결국 사퇴하는 사태로 발전했습니다. 그런 사태를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요.

    “누가 얼마 전에도 묻길래 ‘국가보안법은 없어져야 할 법’이라고 했어요. 법률지식은 없지만 형법으로 다스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국가보안법은 이북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법이죠. 이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거기까지도 잘못됐다고 생각 안 했습니다. 없애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국가보안법은 애브노멀하고 예외적인 법이죠.

    그러나 검찰총장이 사퇴하는 걸 보고 ‘아, 이 나라는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법률을 없애기 전에는 그 법에 의해 움직이는 게 검사의 본분입니다. 검찰이 제멋대로 법률을 만들어서 집행합니까.”

    그는 이 대목에서 질문하지 않았는데도 노무현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지금 이 정권을 나무라기 전에 이 정권을 들어서게 만들어준 전(前) 정권을 나무라고 싶어요. 이 정권이 이렇게까지 아마추어인 줄은 몰랐잖아요. 386세대가 휴대전화를 동원해 감성적으로 당선시켜놓았지만 지금 뽑아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후회한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대통령이 대학을 안 다녔다고 하지만 고등학교를 나와서 판사 된 것 보면 머리는 꽤 좋은 편이죠. 어떻든 전 정권에서 장관도 했죠. 그런 사람이 이 정도밖에 못하니까 안타까워요. 글쎄, 대통령 아닙니까. 대통령이 보통 자리입니까. 대통령 한 지가 벌써 2년 반이 넘었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대통령인 걸 몰라요, 내가 볼 때는 대통령이라는 자각(自覺)이 없어. 대통령은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다 끌어안고 가야지요. 미운 놈한테 떡 하나 더 주라는 게 뭐예요. 나라 다스리고 장(長) 노릇 하려면 보기 싫은 놈 궁둥이도 두들겨주고, 승진도 시켜주면서 부려먹어야 해요. 그게 장이지요. 그렇게 제 코드에 맞는 것만 찾고 앉았으면 정치가 됩니까.”

    친일 진상규명은 학자의 몫

    -광복 60년이 지났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로 활동한 사람들은 모두 저세상 사람이 됐죠. 광복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적 목적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해산한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지금 친일파의 아들이나 손자 증손자가 조상의 과오에 대해 무슨 책임이 있습니까. 지금 국가기구를 만들어 친일을 규명하는 것은 연좌제밖에 안 된다고 보는데요.

    “둘째아이(김인중·53)가 숭실대 사학과 교수입니다. 인중이만 해도 책을 읽고 6·25전쟁이 이랬구나 하고 알죠. 인중이한테는 임진왜란이나 6·25전쟁이나 다 옛날 이야기지요.

    정확한 역사를 쓰기 위해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것에는 절대 찬성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의 친일 진상규명은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해서 뭘 하자는 거냐고 이 정부에 물어보고 싶어요. 그건 역사학회 혹은 국사학회에 맡겨서 객관적 관점에서 정리해보라고 해야죠. 그런데 자기편에 서 있는 친일파는 안 넣었다는 얘기도 나오더군요.”

    미군 통역 생활

    그가 6·25전쟁을 맞아 천안 산골짜기에 숨어 있을 때 미군 부대가 올라와 가까운 곳에 주둔했다. 거기 구경나갔다가 짧은 영어로 미군들과 대화를 나눴다. 매코이라는 미군 대위가 낙동강 전투에서 부대가 박살나는 바람에 통역이 모두 전사했다며 그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한 달 동안 으스대며 대대 부관 통역을 했다. 이 부대가 북으로 진격할 때 미군복을 입고 카빈총을 메고 38선을 넘었다.

    철원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인민군 패잔병이 밀려 내려왔다. 미군들은 그에게 인민군과 의용군을 가려내라고 했다. 수많은 패잔병을 정확히 판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몇 마디 물어보고 이북 말을 쓰면 ‘코뮤니스트’, 남쪽 말을 쓰는 사람은 ‘볼런티어’로 분류했다. 모두가 그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속에서 인민군 중좌, 정치보위부원 등 3명이 당당하게 신분을 밝혔다. 미군은 이 3명을 특별호송했다. 그가 통역으로 종군한 미군 부대는 내일이면 압록강 얼음을 깨고 세수를 할 것이라는 지역까지 갔다가 중공군에 밀려 남하하기 시작했다.

    “강정구 교수가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라느니,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라느니 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볼 때는 말도 안 되죠. 내가 돈암동에서 큰길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지대에 살고 있었어요. 1950년 6월25일은 일요일이었죠.

    헌병들이 권총을 양손에 들고 지나가는 차를 모조리 징발해 외출 나온 군인들을 붙잡아 전방으로 보냈어요. 무심코 하룻밤이 지났는데 군인들이 우리 집 대문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더라고요. 그래서 창덕궁 근처 이모 집으로 피신했죠. 다음날(6월27일) 새벽에 인민군이 들어왔습니다.

    벌써 창경원 앞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죠. 그걸 다 겪은 사람 아닙니까. 나중에 서울을 빠져나가 천안 처가 근처 깊은 산골짜기에 숨어 있었습니다. 미군이 일단 올라왔다가 후퇴할 때 남겨두고 간 발전기를 고쳐 라디오에 연결했어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미국의 소리를 들었죠. 9·28 서울 수복 소식을 라디오로 듣고 그때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감격해 울었어요.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우리는 그런 걸 겪은 사람들이니까 강 교수가 암만 그래봐야 코웃음밖에 안 나오죠.”

    그는 함석헌 선생을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화학 빼놓고는 모든 걸 함 선생한테 배웠다고 술회한다. 그의 집 책상 앞에는 함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다. 여동생(김숙희)은 “우리 오빠는 아버지가 두 분”이라고 말한다.

    고려대 명예교수 김용준

    김용준 교수의 평생 스승은 함석헌 선생이다.

    “함석헌 선생에게 모든 걸 배웠다”

    “함 선생님이 일요성서 강좌를 오후 2시에 시작하면 해가 질 때까지 해요. 모든 게 다 나오는 겁니다. 박식하시죠. 내가 쓴 ‘내가 본 함석헌’이란 책이 내년에 나옵니다.”

    도올 김용옥이 쓴 ‘나의 큰형 김용준’이란 글에는 ‘아버지가 함 선생에 빠져 있는 큰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대목이 나온다.

    ‘(아버지는) 함석헌의 무교회주의를 마땅치 않게 여겼고 퀘이커 운운 하는 것도 시원찮게 여겼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도 큰형 얘기만 나오면 “쟤는 함석헌 따라다녀서 저 모양 됐어”하고 아주 못마땅하게 쯧쯧 혀를 찼다. 해직당했을 때도, ‘씨의 소리’를 복간한다고 돈을 구하러 다닐 때도, 아버지는 큰형의 함석헌 병을 못마땅하게 여겼다.(중략) 함석헌은 내가 생각하기에 좀 헛폼이 쎈 사람이다.’

    김 교수는 ‘함석헌은 헛폼이 쎈 사람’이라는 도올의 글을 읽어주자 “허” 하며 웃었다. 지하의 함 선생이 도올의 글을 읽었더라면 아마 “도올 이 사람아, 자네도 헛폼이 세기는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함 선생님이 이화여대에 초청 강의를 가셨던 모양이에요. 강의를 하면서 이대생들에게 ‘공부 안 하고 멋만 부린다’고 야단치셨대요. 강연 끝내고 나오는데 여학생들이 뒤따라오면서 ‘자기는 멋 안 부리나. 자기도 흰 두루마기 입고 수염 기르고 고무신 신고…. 자기는 저게 멋이지’라고 쑤군거리더래요. 선생님은 그런 말을 들으시면서 속으로 ‘너희들 말이 옳다’고 생각하셨대요. 나는 함 선생님 생각할 때마다 원효대사를 떠올려요. 함 선생님이 아마 신라시대에 사셨으면 원효처럼 사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죠.”

    -화학과 교수가 민주화 운동의 길로 들어선 것도 함 선생의 영향인가요.

    “함 선생이 가끔 하신 말씀이 있죠. 젊은 놈들 교육한다면서 ‘저 놈 때문에 내 아들 버렸다’는 소리 한번 못 들으면 교육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함 선생을 만나 내 일생이 순조롭지 않았는지도 모르죠. 화학에서 할 일도 많았는데….”

    -거룩한 인물한테도 사사로운 흠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1980년대에 함 선생의 여성 관계를 다룬 ‘거짓 예언자’라는 책이 나왔죠. 국가안전기획부 공작이란 설(說)이 파다했죠. 먼 친척이 썼다고 하는데 그 책의 내용이 어느 정도나 사실인가요.

    “글쎄, 나는 그 책을 안 읽었습니다. 읽을 가치가 없어서. 내가 알고 있는 건 이렇습니다. 함 선생님을 따라다니던 여대생이 꽤 있어요. O씨 같은 분도 그 중에 포함되죠.

    함 선생님이 천안 씨농장에 혼자 계시는데 O씨가 뒷바라지한다고 가 있었죠. 그 여성은 함 선생님을 몹시 흠모했죠. 선생님으로 보지 않고 남자로 본 거죠. 함 선생님 혼자 주무시는 방에 옷을 벗은 채로 들어간 일도 있다고 해요. 두 번 정도 그런 일이 있었던 거 같아요. 함 선생님의 여자관계를 조금도 숨길 마음이 없습니다. 함 선생님이 성자(聖者)는 아니죠. 나는 그분을 철저한 인간으로 보니까요.

    그 양반만큼 자기의 일에 대해 표리(表裏)가 같으신 분은 정말 없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여자 문제가 좀 있었다고 해서, So what?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잘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야말로 그런 상황에서 부득이 그런 일이 벌어진 거죠. 안전기획부가 함 선생님의 먼 조카뻘 되는 아이를 꼬여서 ‘거짓 예언자’를 쓰게 하고 5만부를 찍었죠. 항의가 들어오는 바람에 책방에서 진열을 하지 않았다고 해요. 함 선생님이 그 말을 듣고 감격했어요. 큰 테두리에서 봤을 때 그 일이 함석헌이란 거목에 그렇게 큰 흠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 같아요.

    내가 돈암동 집에 있을 때 함 선생이 대문을 열고 들어오시더군요. 거의 정신이 나가신 모습이었어요.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1890∼1981) 선생이 나무라시더랍니다. 유영모 선생은 끝까지 용서하지 않으셨어요. 함 선생님의 그 일에 대해서. 함 선생님은 오산학교 스승인 다석 선생을 아버님처럼 모셨죠. 선생님한테 애걸하면서 ‘제가 잘못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빌어도 돌아가실 때까지 용서하지 않으셨죠. 주변의 무교회주의자들한테 지탄받고,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 용서를 안 해주시니까 무척 괴로워하셨습니다. 칼릴 지브란 번역 전집 서문에 그 심정이 나죠. 서문을 읽어보면 눈물이 나와요. 당신의 후회하는 모습이 들어 있죠. 함 선생님이 그 사건 가지고 그 정도 반성했으면 됐지.”

    원효가 요석 몇 번 안은 셈

    -한 여자와의 일이었습니까. 그 책에는, 따라다니는 여자는 모두 건드리는 것으로 묘사돼 있는데….

    “함 선생님이 1901년생이니 그때가 55세 때였죠. 남자 나이 55세면 한창 때죠. 시골 농장에 있는데 뒷바라지한다고 여자가 와서 교태를 부리고 그러니까 원효가 요석을 몇 번 안은 식으로 안은 게…. 함 선생님을 접해보면 알지, 어떻게 따라다니는 여자를 전부 건드려요.”

    그는 여기서 함 선생의 부인 이야기도 했다.

    “함 선생님 부인이 문맹(文盲)입니다. 함 선생님 부친이 아들 녀석은 도쿄(東京) 유학까지 했는데 며느리가 글을 몰라 큰일났단 말이죠. 그래서 부인, 딸, 며느리 세 명을 놓고 언문(諺文)을 가르치셨대요. 다른 사람들은 다 깨우치는데 사모님은 끝내 못 깨우치셨다는 겁니다.”

    고려대 명예교수 김용준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밝히는 김용준 교수의 얼굴이 환하다.

    다석의 목요강좌

    -함 선생 따라다닐 때 김동길 교수도 자주 만났겠군요.

    “그럼요. 가깝게 지냈죠. 꽤 유명했던 분 아닙니까. 그런데 그 양반이 어쩌다 정주영씨와 연결돼 정치계로 나가더니 조금 비난을 받고…. 그거 참 모르겠어요. 나는 자연과학을 했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대통령이 돼보겠다는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지요. 김동길 선생은 의외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죠.”

    -함석헌 선생에 비해 다석은 덜 알려져 있어요. 최근에 다석 전집도 나왔더군요. ‘씨’이라는 말도 다석이 만들었다지요.

    “선생님보다 11년 위예요. 유영모 선생이 오산학교에 두 번 부임하셨죠. 한번은 오산학교 선생으로, 한번은 교장으로. 함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촌놈이었는데 유영모 선생을 만나 정신이 크게 도약했다’고 하셨어요.

    저도 함 선생님 따라서 유 선생님을 여러 번 뵈었죠. 기인(奇人)이죠. 간디처럼 하루에 한 끼만 드셨죠. 그 양반은 간디처럼 해혼식(解婚式)을 하셨어요. 결혼을 푸는 것이 해혼이죠. 52세에 부인과 해혼식을 갖고 성관계를 딱 끊으신 거예요. 간디가 말한 금욕(禁慾)생활이죠. 함 선생님은 훤칠한데 유 선생님은 키가 자그마하시죠. 짤막한 분이 마포 장사꾼이 쓰는 어투로 말씀하셨죠. ‘그렇습죠’라는 식으로.”

    그는 1950년대 후반 종로2가 YMCA에서 다석이 하던 목요강좌 이야기를 했다. 다석은 오후 2시에 시작해 3시간 동안 강연을 했다. 삐그덕거리는 목조건물에 청강생은 10명 정도였다. 함 선생이 맨 앞에 앉고, 이화여대 김응호 교수를 비롯해 7, 8명이 안 빠지고 나오는 단골이었다.

    “머리가 기가 막히게 좋으셨죠. 언젠가 선생님을 모시고 가다가 ‘선생님 한문에 이런 말이 있는데 노자, 장자 아니면 사서삼경 어디에 있는 말입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한참 후에 ‘그런 말 없는데’ 하셔요. 머릿속에 다 들어 있는 거죠. 유 선생님은 나무판자 위에 담요 하나 깔고 주무십니다. 평생 이불을 안 덮고 주무셨다고 해요.

    그분이 YMCA 목요강좌에서 인촌(仁村) 김성수에 대해 장장 2시간 동안 강의하신 적이 있어요. 그때 기록했던 노트가 어디 남아 있을 거예요. 일제 강점기 당시 인촌의 여러 가지 행적에 대해 극구 칭찬을 하시더라고요. 독립자금 대준 이야기며 인물의 너그러움에 대한 얘기를 주로 하셨던 거 같아요.”

    김 교수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온 후 모교인 서울대로 가지 않고 고려대로 가게 된 것도 다석의 그 강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 젊은 학생들한테는 미안한 소리지만 그때는 미국서 박사 따오면 제 가고 싶은 대학을 골라 갈 수 있었습니다. 고려대 연세대 서울대 다 오라고 할 때입니다. 서울대는 모교니까 오라고 하고, 연세대는 기독교 계통으로 해서 오라고 했죠.

    저는 인촌을 직접 뵙지는 못했어요. 고려대 선배 교수들은 지금도 그 얘기를 합니다. 6·25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하루는 인촌이 소집을 하더래요. 인촌이 보자기를 들고 와서 교수들에게 월급봉투를 나눠주시더래요. 나라가 풍비박산 난 상황에서 그게 쉬운 일입니까. 그때의 감격을 고대 교수들이 잊지 못하더라고요.”

    민청학련 사건과 지식인 선언

    -왜 두 번씩이나 해직됐습니까.

    “1975년 기독교교수협의회 회장을 맡았다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죠. 기독교교수협의회 회장은 당연직으로 기독학생운동총연맹(KSCF) 이사장이 됩니다. 이철(철도공사 사장), 유인태(국회의원), 나병식(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 황인성(대통령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이 KSCF에서 일했죠.

    1975년엔 주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해직됐어요. 백낙청(서울대), 김윤환(고려대) 교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1980년에 복직했더니 변형윤 교수가 주도하는 지식인 선언에 참여하라고 야단인데 안 나가고 있었죠. 무대가 바뀌면 배우도 갈려야죠. 왜 밤낮 똑같은 배우가 나가서 하는 거냐고요. 그런데 전두환 신군부에 반대하는 지식인 선언 명단에 과학자가 없다는 거예요. 변형윤씨가 ‘김용준이 데려오라’고 했다고 해요. 하루는 부르길래 세실레스토랑에서 모였는데 신군부에 반대하는 열기가 대단하더라고요. 결국 과학자를 대표해 서명했다가 또 해직당했죠.”

    -KSCF 학생들이 몽땅 이 정부의 실세가 됐군요.

    “이사장이 돼서 KSCF를 들여다보니까 1년 예산의 90%가 외국에서 오는 돈이더군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의 유일한 학생단체가 한국 교회의 지원을 못 받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해 간사 4명을 지역별로 할당해 교회에서 돈을 얻어오게 했죠. 그런데 그 돈이 모두 민청학련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도 중앙정보부가 김 교수님을 민청학련으로 엮어 넣지 않은 것은 이상하네요.

    “실질적으로 엮이지가 않았죠. 민청학련 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서경석 목사가 찾아와 100만인 구국서명에 참여해달라고 했죠. 내가 서 목사 보고 ‘이거 봐, 내가 마땅히 여기 서명해야지. 그런데 내가 지금 KSCF 이사장이야. 학생들이 매일 붙들려 들어가면 용서해달라고 빌면서 끄집어내야 할 판인데 내가 거기다 서명하면 나부터 들어갈 판인 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고 했어요. 내 서명을 조금 미루자고 하고 안 했어요.”

    -민청학련과 관련해 조사 받으며 맞지는 않았습니까.

    “맞지 않았어요. 그럴 이유가 있죠. 한국화약 기술고문이었거든요. 한국화약 오너 집안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하고 사돈간 아닙니까. 거기서 어떤 시그널이 갔는지 때리지 않더라고요.”

    -유신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데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평가해보시죠.

    “4년씩이나 해직당했는데 내가 그 사람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죠. 그러나 그건 그거죠. 경제 부흥시켜놓은 건 인정해야죠. 사적 감정과 공적 평가는 분리해야죠.

    1975년 박정희 정권하에서 해직당했을 때도 이목을 피하려고 반체제 인사들이 천주교 수녀원 같은 데로 돌면서 대화를 나눴어요. 그때 당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는 강경파가 있고, 온건파가 있었죠. 강경파는 덮어놓고 이쪽을 때려죽일 놈이라고 하면서도 저쪽에 대해서는 괜찮다고 했죠. 나는 그 자리에서 ‘남북을 같은 자로 재라’고 했죠. 박정희를 재는 자로 김일성이도 재야 한다고 했어요. 내가 ‘독재로 치자면 김일성 독재가 박정희 독재보다 더 지독하다’는 말을 하면 H목사 같은 분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죠.

    김정일이 적어도 남한하고 어떤 걸 하려면 공식 사과부터 해야지요. 그 사람 때문에 죽은 사람이 얼마입니까. 아웅산 사건이며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며, 그건 다 괜찮은 겁니까.”

    치기에 사로잡힌 386

    -이 정부 사람들은 툭하면 ‘독재시대에 침묵한 당신은 말할 자격이 없다’는 태도로 나와요. 자기들이 감옥 가서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거죠. 그런데 김 교수님은 두 번씩이나 해직당했으니 그 사람들 기준으로 봐도 말할 자격이 있는 것 아닙니까.

    “인류 역사가 모순의 덩어리입니다. 정말 죄도 안 졌는데 사형당하는 이도 있죠. 밤낮 정정당당하고 의롭게 산 놈만 있고, 나쁜 놈은 다 죽고 그러는 게 역사가 아닙니다. 박정희씨도 애국충정에서, 그야말로 제 딴에는 나라 세워보겠다고 애를 써서, 독재가 됐든 뭐가 됐든 경제를 이만큼 성장시켜놓은 건 인정해야죠.

    386세대가 저러는 것은 치기(稚氣)로 봐요. 그들이 아직도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자꾸 선거에 지잖아요. 코드 안 맞는 사람을 갖다 써야 정치가 되지,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만 해서 정치가 됩니까. 내 편도 있고 네 편도 있고, 여당도 있고 야당도 있어야 정치가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교수님 글 중에 ‘자주니 외세 배격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마치 한 맺힌 대원군을 보는 것 같다’는 표현이 나오던데요.

    “경제규모가 세계 11위까지 올랐지 않습니까. 이제 와서 다 때려치우고 6·25전쟁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닐 거고…. 조선 조정이 김대건 신부를 잡아 죽이기 1년 전에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막부는 학자 15명을 네덜란드로 유학 보내요. 우리나라에서는 쇄국정치하면서 김대건 신부 죽이고 남강 이승훈을 처형할 때라고요.”

    여기서 화제를 종교와 과학의 관계로 돌렸다. 그는 최근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라는 저서를 펴냈다. 화제가 이쪽으로 돌아오자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과학-기독교 싸움은 과학의 승리

    -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학교에서 진화론을 못 가르치게 하거든요. 성경의 창조론에 배치된다는 거죠. 요새는 지적 설계론(intelectual design)이라고 변형 창조론을 가르치는 교사도 있죠. 진화를 부정하기 어려우니까 하나님이 진화하도록 설계했다는 이론이죠.

    “미국의 창조론자들은 정치와 연관돼 있습니다. 보수 성향의 인물이 대통령이 되면 자꾸 고개가 올라와요. 이제는 분자생물학까지 나왔으니까 진화에 이론의 여지가 없잖아요. 구더기를 구성하는 DNA와 사람을 구성하는 DNA는 같은 유전자입니다. 진화론을 무시하고 어떻게 설명합니까.

    인간에게서 신(神)의 개념은 영원히 안 없어지겠죠. 또 신의 개념을 부인하는 과학적 추구도 영원히 계속될 겁니다. 종교와 과학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인류 문화 속에 녹아든 하나의 요소입니다. 종교는 신의 관점에서 보고 과학은 물질의 관점에서 보니까 마치 나눠진 것 같지만. 그걸 나눠놓고 한쪽만 얘기하면 밤낮 싸움이 나는 거예요.”

    김 교수는 모태신앙으로 기독교 장로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보수 기독교계는 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하지 않습니까. 줄기세포 연구는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는 것인가요.

    “과학과 기독교의 싸움에서 현재까지는 과학이 항상 이겼습니다. 과학이 매번 옳았고 종교가 늘 졌거든요.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봅니다. 나중에 복제인간도 나오겠죠. 나오면 어떻습니까. 김용준의 체세포에서 또 하나의 김용준이 나왔다고 해서 걔가 납니까. 내 부모님 밑에서 자라 내가 산 80세는 복제 김용준의 역사와는 다르잖아요. 나와 모양은 똑같지만 그건 다른 인격체지요. 그게 무슨 큰 문제가 될 것이며, 금방 뭐가 뒤집힐 것 같이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암만 반대해도 과학은 과학대로 갈 거예요. 복제인간도 나오겠지요. 그렇게 쉽게 나오지는 않겠지만. 자연과학의 발달 역사를 보면 옛날에 꿈도 못 꾸던 일들이 일어나는 거 아닙니까.”

    고려대 명예교수 김용준

    인터뷰 중인 김용준 교수.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엿새 만에 창조했다고 돼 있습니다. 그러나 빅뱅(big bang)에 의해 우주가 생성됐다는 것과는 맞지 않지요.

    “성경은 3000년 전에 씌어졌죠. 하나님이 엿새 만에 만드셨다는 말을 그대로 믿으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엿새 만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영적인 묘사(inspirational description)죠. 그런 걸 신화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 신화를 해석해야 내 것이 되는 거지요. 그걸 착각하니 답답해요.”

    기독교는 비판받아야

    -‘우리나라 기독교는 종파의 생존을 위한 폭력집단 같다’고 혹독하게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던데요.

    “전국의 기독교 교회에서 거둬들이는 헌금이 얼마이겠습니까. 그 많은 돈을 거둬들여 지금 기독교인들 뭘 하는 거냐고요. 그래도 미국 기독교인들은 예일·프린스턴·하버드를 세웠잖아요.

    교회당 지어놓고, 수양원이라고 해서 땅 사놓고, 해외에 선교사 파송하죠. 좀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내가 요전에 숭실대에서 강의를 하다가 ‘나는 이 학교만 오면 울화통이 터진다’고 했어요. 숭실대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교파인 예수교 장로회 통합이 세운 학교입니다.

    기독교가 무슨 짓들이에요. 교회당을 크게 짓고 수만명을 모아놓고 목사가 하루에 일곱 번 똑같은 설교를 한다고 해요.”

    -이공계 기피현상이 심한데요. 요즘 의대 한의대 약대 못 간 학생들이 공대를 갑니다. 서울대 공대 들어가서 사법시험 공부하는 학생도 있고. 의학전문대학원이 생기면 그런 현상이 더 심해지겠지요.

    “일제 강점기 때 내가 왜 화학을 했느냐 하면 군대 안 가려고 한 겁니다. 일본 사람들이 선견지명이 있는 겁니다. 전쟁 말기에도 이공계 학생들은 징병 안 데려갔어요. 문과는 다 데려가면서도.

    단적으로 얘기한다면 소위 민주세력이 정권을 잡고 나서 이공계는 더 망했어요. 그래도 박 정권 때는 탄압을 했지만 학교 자체를 흔들지는 않았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언제쯤 과학분야 노벨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또 노벨상 타령이야. 글쎄요. 단적으로 얘기해서 50년 내로 한두 명 나오겠죠. 그런데 지금 국가 차원에서 전체적인 플랜이 없습니다. 과학은 놔둬야 됩니다. 놔둬야 거기서 씨도 나고 뿌리도 내리고 그러는 거지. 극단적인 얘기지만 아인슈타인이 지금 한국에 오면 취직 안 됩니다. 아인슈타인이 평생 쓴 논문 17편밖에 안 돼요. 그 사람이 대한민국에 오면 아마 전임강사도 될 수 없을 거예요. 대학을 시장경제의 원리로만 몰아세우면 나라의 장래가 없어요.”

    김 교수의 집안은 명문거족(名門巨族)에 만석꾼 살림이었다. 증조부는 전라병사(全羅兵使)를 지냈다. 지금으로 치면 군사령관쯤 되는 벼슬이다. 조부는 구한말 문과에 급제해 충청도 부여와 전라도 동복(지금의 전남 화순군)의 원(員·수령)을 지냈다. 필자가 조상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웃으며 “탐관오리셨죠”라고 말했다. 부친은 세브란스 의전과 일본 교토(京都)대 의학부를 졸업했다.

    평생 사람다운 삶 살려 노력

    뛰어난 학자와 문화인은 명문거족에서 많이 나온다. 괴테도 그렇고 찰스 다윈도 그렇다. 집에 있는 책과 분위기, 그리고 부(富)가 학문과 문화예술의 거장을 길러내는 토양이 되는 것이다. 몇 대에 걸친 부가 인류문화의 진보에 기여하는 학문과 문화를 길러내는 것이라면 ‘학벌의 세습’ 운운하며 흥분할 일만도 아니다.

    -혹시 과학부 장관 제의를 받아본 적은 없습니까.

    “그런 거 없었어요. 장관을 했으면 DJ정권 때 했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DJ를 싫어했고, 김영삼 정권 때는 동생이 장관됐으니 내가 장관 될 리도 없었죠.”

    -일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을 몇 권 꼽아 보시죠.

    “함석헌 선생님이 쓰신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제이콥 브르노프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정도예요.”

    두 살 아래인 부인과 사이에 4남1녀를 뒀다.

    -혹 안 여쭤봐서 못한 말씀이 없는가요.

    “함석헌과 같은 인격체를 만나서 평생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전쟁 직후 함 선생을 모시고 천안 봉원사에서 여름 수양회를 했어요. 거기서 장자(莊子) 소요유편(逍遙遊篇)을 배웠어요. ‘온 세계가 너를 칭찬해도 조금도 더할 것도 없고, 온 세상이 너를 비난해도 조금도 주저할 것도 없도다.’ 거기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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