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특명, 北 후계자를 찾아라!’ 국정원과 군 정보당국의 10년 첩보전쟁

김정남 거처 잠입해 서류가방 서울 공수…졸업논문 제목으로 ‘김정은 후계수업’ 확인

  •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0-11-18 1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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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년 5월 나리타 공항…“뭔가 다른 일이 벌어졌다”
    • 해킹한 김정남 e메일, ‘아버지에게 상시보고 중’ 언급
    • ‘김정남의 여인’ 확보한 군 정보당국, “손 떼고 넘겨라” 항의한 국정원
    • 김정철·김정은 스위스 학교 동창생 일일이 접촉한 현지 요원
    • 2003년 청와대 정세평가회의에 올라온 ‘김정은 유력’ 보고
    • 국정원이 내부첩보 대신 일본인 요리사 회고 인용한 까닭
    • 2003년 3월 작성됐다는 ‘김정일 비서실 일보(日報)’의 진실
    • 정보당국은 언제 ‘김정운 아닌 김정은’ 확인했나
    9월28일 북한이 노동당 대표자회를 통해 후계자 김정은을 공개하면서 그간 이어져오던 논란은 일순간에 정리됐다. 그동안 남측의 관계기관들이 누가 김정일 후계자가 될 것인지 가늠하기 위해 벌였던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공작과 갈등까지 불사한 경쟁도 함께 마무리됐다. 청와대와 관계기관에서 관련 분야를 담당했던 당시 당국자들 인터뷰를 통해 ‘그때는 절대보안이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된’ 일련의 사건들을 추적했다.


    모든 일의 시작은 2001년 5월1일 일본 나리타 공항이었다. 전세계 언론의 카메라 세례 속에 모습을 드러낸 북한의 황태자 김정남. 그가 위조여권으로 입국하려다 체포됐다는 소식은 이내 ‘북한의 후계’를 국제적인 이슈로 떠오르게 했다. 사상 최초로 공개된 로열패밀리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는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의 절대권력이 육화(肉化)되어 나타난 실체였고, 전문가들과 언론은 갖가지 관측과 소문을 전하며 상당기간 화제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정보당국의 시선은 사뭇 달랐다. 1999년부터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직함을 갖고 IT 분야 대외협력사업을 책임지는 등 후계자 지위를 공고히 한 것으로 파악됐던 그가 갑자기 일본 당국에 의해 체포됐다는 것은,‘뭔가 다른 일’이 벌어졌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사건이었다.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문제의 여권은 위조가 아니라 차명(借名)이었고, 세계 각국의 정보요원들이 우호국 정보기관의 협조를 얻어 외형상 문제가 없는 차명여권을 사용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에 가까웠다. 이전에도 수차 외국을 드나들었던 그가 적발된 것, 더욱이 일본 당국이 사전에 그를 기다리다 입국을 막은 것은 특별한 배경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훗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처제 고영숙이 미국으로 망명한 뒤 진술한 내용을 통해 확인된 것이지만, 이때의 체포는 당시 김 위원장의 부인 역할을 하고 있던 고영희의 작품이라는 게 정설이다. 김 위원장의 2남 정철과 3남 정은의 생모로 알려져 있는 그가 이 시기 스위스 유학에서 막 귀국한 자신의 아들들을 북한의 다음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김정남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 이때의 신분노출을 계기로 김정남의 처지는 하루아침에 180도 변했고, 아버지의 눈 밖에 난 그는 중국 베이징과 마카오, 유럽을 떠돌며 낭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도됐다.

    이 무렵부터 정보당국의 촉각은 두 가지 질문으로 모아졌다. 과연 그는 후계에서 제외됐는가, 제외됐다면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이후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 지목돼 공개되기까지 무려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관계기관들이 벌인 ‘사상 최대 첩보전쟁’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따로따로 파견된 요원

    이후 정보당국에 주어진 핵심임무는 김정남의 동선을 추적하는 일이었다. 평양의 ‘구중궁궐’에 숨어있던 김 위원장 아들들 가운데 유일하게 추적 가능한 인물이 등장한 것. 국가정보원과 군 정보당국은 김정남이 마카오 등지에 고정적인 거처를 마련한 2005년을 전후해 전담 감시요원을 파견해 인근에 상주시켰다.

    이렇게 진행된 추적작업은 상상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대표적인 것이 국정원과 군 정보당국이 각각의 정보자산을 동원해 해킹 등의 방법으로 확인한 김정남의 e메일이었다. 군 정보당국에서는 주로 김정남이 해외에 파견돼 있는 국가안전보위부 등 공작기관원들과 주고받은 e메일 내용을 확인했고, 국정원은 평양 권력기관의 간부들과 나눈 교신에 촉각을 곤두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 확인된 김정남의 영향력이 ‘낭인이 되어 떠돌고 있다’는 외부평가와 거리가 있었다는 사실. 해외주재 기관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하고 그 성과를 확인하는가 하면, 평양의 중간급 간부들이 여전히 김정남의 후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줄을 대는’ 일이 이어지고 있음도 감지됐다. 심지어는 주변국의 한 외교당국자가 김정남과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특히 김정남은 주변인들에게 보낸 e메일을 통해 아버지인 김 위원장에게 자신의 활동상황을 보고하고 있음을 과시하곤 했다. 특정사안에 대해 ‘그에 대해서는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조만간 별도의 지시가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는 식이었다. 김 위원장과 김정남이 직접 주고받은 메시지가 없었으므로 허언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시그널이었다.

    “왜 우리 영역을 침범하나”

    한편 이 무렵 군 정보당국의 경우 2004년부터 김정남과 사실상 내연관계에 있던 한국인 여성의 신병을 확보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한다. 마카오의 한 유흥주점에서 일했던 ‘신디(Cyndy)’라는 예명의 이 여성을 현지에 주재 중이던 요원이 접촉해 한국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데 성공한 것(‘신동아’ 2009년 1월호 관련기사 참조). 이후 정보당국은 이 여성이 김정남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을 통해 그의 신체적 특징이나 성격 등 ‘가장 은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05년 여름에는 김정남이 장기 일정으로 여행에 나섰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의 거처에 직접 잠입하는 대담한 공작도 진행됐다. 거처에 남겨둔 소지품 가운데 정보가치가 높은 서류가방 등을 빼내 하나하나 촬영, 복사하고 고스란히 돌려놓는 방식이었다. 세밀한 분석이 필요한 물건의 경우 서울로 공수해와 정밀분석을 마친 뒤 마카오로 돌려보내기도 했다는 후문. 김정남 본인이 눈치 챌 수 없도록 사전에 물건의 위치나 놓아둔 방식까지 촬영해뒀다가 똑같이 돌려놓는 작업은 필수였다. 이 작업을 통해 김정남이 해외에 머무는 동안 전주의 한 한복 가게에 옷을 주문해 아버지에게 선물하거나 서울의 약국에서 필요한 약품을 구매하는 등 대담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음도 추가로 확인됐다는 전언이다.

    다양한 경로로 수집된 첩보를 바탕으로 군 정보당국은 2005년 초부터 2006년 중반까지 “김정남이 후계에서 완전히 탈락했다는 외부평가는 사실과 다르며, 여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여러 차례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다. 유교사회 특유의 장자 우선 사고방식이나 아직 후계를 거론하기에는 이른 정철·정은의 나이도 고려한 판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군 정보당국의 김정남 ‘밀착 마크’에 대해 국정원 측은 수차례에 걸쳐 항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군사정보에 한정돼 있는 해당기관의 업무범위를 넘어선 월권행위라는 골자였다. 국정원 측은 해당 분야 실무진을 통해 김정남의 e메일 등에 접근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관련 자료를 이첩하라고 요청하는가 하면, 군 정보당국이 확보한 신디의 신병을 공동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했다는 후문이다.

    국정원이 날카로웠던 이유

    ‘특명, 北 후계자를 찾아라!’ 국정원과 군 정보당국의 10년 첩보전쟁

    김정은이 다닌 것으로 알려진 스위스 베른 쾨니츠 구의 힐데스가르트슈트라세의 리베펠트 슈타인횔츨리 공립중학교.

    일부 당국자들은 당시 국정원의 요청이 자신들의 업무범위를 군 정보당국이 치고 들어오는 것을 경계한 ‘밥그릇 싸움’ 차원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한다. 공교롭게도 이때는 군 정보당국의 활동이 국정원의 위신을 흔드는 일이 연이어 발생한 시점. 우선 2006년 1월에는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방문 사실을 군 정보당국이 먼저 파악해 청와대에 첫 보고를 날리는 일이 있었다. 김 위원장의 방중(訪中)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던 국정원으로서는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체면을 구기기도 했다.

    같은 해 여름에는 군 정보당국이 북한측의 해킹을 역추적해 그간 우리 측 안보부처 주요 인사들의 e메일 아이디와 패스워드가 상당수 북측에 노출된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를 보고받은 청와대가 사이버보안 매뉴얼 강화와 대대적인 방어시스템 구축에 나서는 등 사안이 크게 불거지자, 북측의 해킹 공격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던 국정원 실무 담당자들이 인사상 책임을 지는 사태가 줄을 이었다. 이 무렵 국정원 관계자들로부터 “군 정보당국이 군사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분야까지 업무를 확장하고 있다”는 비판을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북 간 유화국면 조성에 주의를 기울인 당시 정부의 특성상 로열패밀리 주변에 너무 깊게 접근하는 공작이 평양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러한 종류의 정보활동을 국정원 상층부나 청와대에서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음은 당시 관계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 김정남에 대한 남측 정보기관들의 강도 높은 추적이 만에 하나 평양으로 새나갔다면 후폭풍을 선뜻 가늠하기 어려웠으리라는 것이다.

    제도적으로만 보자면 ‘국가종합정보기관’인 국정원은 ‘부문정보기관’인 군 정보당국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갖는다. 군 정보당국이 수집한 정보도 국정원의 종합분석 과정을 거쳐 청와대에 보고하도록 규정돼 있기 때문. 군 정보당국이 추진하는 주요 공작사업은 국정원장에게 보고해 부호를 발급받아야 하며, 부호를 받지 못한 이른바 ‘비인가공작’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불법이다. 군 정보당국이 공작사업을 위해 사용하는 자금 역시 국정원 예산에서 나오므로 국정원은 해당 기관에 감사권도 갖고 있다. 쉽게 말해 구조적인 종속관계인 셈이다.

    그러나 이론은 이론일 뿐, 역대 정권은 정보의 교차확인이나 권력집중을 방지하기 위해 중앙정보기관과 군 정보기관 사이의 경쟁을 내심 방조해왔던 것이 사실이다.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음은 잘 알려진 일. 이렇듯 장시간 누적돼온 긴장관계 탓인지, 국정원이 여러 차례 이의를 제기한 뒤에도 후계와 관련한 군 정보당국의 정보활동은 계속된 것으로 전한다. 이 시기 군 정보당국이 김정남에 관해 수집한 정보들은 국정원을 거친 다음 청와대에 보고되는 대신 별도의 경로를 통해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된 후에야 공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 가지 단서

    주목할 것은 군 정보당국이 김정남의 후계 승계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었던 반면 국정원은 이와 전혀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는 당시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오히려 당시에는 ‘김정운’으로 알고 있던 셋째 아들의 승계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보고서가 2000년대 초반부터 주류를 이뤘다는 것. 물론 일각에서는 이러한 설명이 김정은으로의 승계가 확실해진 현재 상황을 반영해 윤색된 것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2000년대 중반 무렵에는 김정철이 유력하다는 취지의 국정원 정보도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 핵심 관계자들 역시 국정원이 김정은에게 무게를 두고 있었던 게 맞다고 증언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부분 사실이라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청와대 국가안보회의(NSC) 정세평가회의에 올라온 후계 문제 관련 국정원 보고서는 이미 2003년 시점부터 “3대 세습 가능성이 높으며, 후계자는 3남이 유력해 보인다”는 취지였다는 것. 김정남은 사실상 경쟁에서 배제된 상태로, 정철은 성격적인 문제점이나 여성호르몬 과다 분비 등 신체적 결함을 거론하며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평했다는 설명이다.

    당시의 관계자들은 2000년대 초반 국정원이 김 위원장이 측근들과의 비공식 석상에서 남겼다는 후계 관련 발언을 입수해두고 있었다고 전한다. 발언시점을 확인해줄 수는 없지만 10대에 불과하던 3남을 앞에 둔 자리에서 사실상 후계자로 육성할 뜻을 넌지시 내비쳤다는 것.

    해외정보망도 바쁘게 움직였다. 김정은이 스위스 베른에 머물며 현지 학교에 다녔던 1996년 여름부터 2001년 1월까지의 시간 동안, 국정원 현지 주재관에게 주어진 핵심임무 가운데 하나는 그의 동선과 주변 인물들을 체크하는 것이었다. 그의 스위스 생활은 2000년대 중반 들어서야 외부에 알려졌지만 국정원은 훨씬 이전 시점부터 해당 학교 관계자나 동창생들을 접촉하는 작업을 진행했다는 이야기다. 다만 당시의 활동 역시 북측을 자극할 우려가 있어 매우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한다.

    김정은의 귀국 후에는 그의 후계를 확신할 만한 또 다른 정황이 파악됐다. 2002년부터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특설반에서 군사학을 공부하는 등 이른바 ‘제왕학 수업’을 듣고 있다는 첩보였다. 특히 2006년 12월 제출된 그의 졸업논문이 위성항법체계(GPS)를 이용한 작전지도 정확성 향상 시뮬레이션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러한 정황은 더욱 분명해졌다. 당시의 논문 지도에는 최근 북한 군부의 핵심으로 떠오른 리영호 인민군 총참모장의 도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새나가면 남북관계는 끝장난다”

    김정은에 관한 이러한 정보들은 최근 언론이나 북한 내부 교양자료를 통해 속속 공개되고 있지만, 정보당국이 이를 오래전부터 파악해두고 있었다는 당국자들의 이야기를 100% 신뢰하기는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당시 청와대 인사들은 그런 이야기를 관련 보고서에서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 후계 관련 정세평가회의를 자주 열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 국정원의 보고서는 대부분 김 위원장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씨의 회고록 등 공개정보를 원용하는 방식으로 기술됐다는 설명이다. 정철과 정은의 성격 차이 문제나 어린 시절의 일화 등에 관한 그의 설명을 재인용하는 일이 많았을 뿐 비공개 정보는 받아본 기억이 많지 않다는 설명이다.

    다만 당시의 일부 청와대 관계자들은 국정원 측이 우선 관련 첩보를 통해 결론을 내린 후 보안을 위해 공개정보만을 근거로 적시한 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다고 말했다. ‘보는 눈’이 많은 청와대 보고서의 특성상 정보출처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가린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이 무렵 후계 문제와 관련해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에서 취합한 국정원 보고서를 열람할 수 있는 공식권한은 안보수석과 안보실장, 대통령실장과 대통령 본인에게만 주어져 있었지만, 업무연관성이 있는 다른 인사들도 접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당시의 한 청와대 안보라인 당국자는 “이 과정에서 만에 하나 관련첩보가 외부에 유출될 경우 해당 출처와의 접촉은 사실상 ‘끝장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해할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김 위원장의 건강문제와 관련해 정부 고위관계자가 했던 “양치질은 가능한 수준으로 알고 있다”는 발언이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으냐는 반문이었다.

    국정원이 김정은으로의 세습 가능성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는 사실은, 이 무렵 외부에서 김정철 후계자설이 대세였던 것과 비교하면 사뭇 뜻밖이다. 2002년 8월 조선인민군출판사가 만들어 2003~04년 전방부대에 배포한 ‘학습제강’의 내용이 확인되면서 학계와 언론에서는 김정철의 후계자 지명이 기정사실화한 바 있다. ‘존경하는 어머님’의 김 위원장을 향한 한없는 충성심을 강조하는 학습제강의 배포는 사실상 고영희를 우상화하는 내용이었고, 이는 자연스레 고영희가 나은 첫아들인 김정철 후계설을 급부상하게 만드는 계기였다.

    더욱 강도 높은 ‘증거’도 레이더망에 걸렸다. “정철 동지를 당 조직부 실무학습기간이 끝나면 6개월간 고급 당학교 과정을 거치도록 하라고 하셨다”는 김 위원장 서기실(비서실)의 일보(日報)가 공개된 것. 2003년 3월 작성된 것으로 전해진 이 일보의 내용은 김정철로의 후계구축 작업이 내부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었고, 이후 이 자료가 일본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전문가들 사이에서 김정철 후계설은 정점을 찍었다.

    관련 첩보들이 쏟아지면서 국정원 내부에서도 김정철 후계 의견이 제기됐지만, 그러나 최종적인 평가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당시 국정원 고위 관계자들은 전한다. 우선 해당 자료의 신빙성도 의심스러웠고, 진본이라 해도 이 문장만으로는 후계체제 구축을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것. 오히려 후계를 둘러싸고 권력층 내부에서 벌어지는 기선잡기나 충성경쟁의 산물일 가능성도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 때문에 국정원은 이 시기 “김 위원장의 아들 가운데 누구도 공식직위에 임명된 바 없으며 후계구축에 대한 공식절차는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평가를 청와대와 국회 정보위원회에 공통적으로 제출한 것으로 확인된다.

    김정남의 ‘마지막 싸움’

    오히려 후계 문제와 관련해 국정원을 가장 당혹하게 했던 것은 2000년대 후반 들어 급격히 활발해진 김정남의 움직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4년 봄 실각했던 장성택 전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2006년 1월 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설부 제1부부장으로 재기에 성공한 것이 첫 번째 신호였다. 앞서 설명한 e메일 해킹을 통해 정보당국은 김정남이 장성택의 실각 기간 그의 가족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음을 확인한 상태였다. 장성택-김경희 부부의 딸로 당시 프랑스에 머물고 있던 장금송이 사촌관계의 김정남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특기할 만한 징후는 김 위원장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 불거졌다. 심혈관 장애가 발생했던 2007년 5월에는 김정남이 이를 치료할 독일 의료진을 섭외해 함께 평양에 들어간 사실이 국정원 레이더망에 포착됐다. 2008년 10월말에는 역시 아버지를 치료할 프랑스의 뇌신경외과 전문의를 만나기 위해 파리를 찾은 김정남이 일본 언론의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건강 이상을 계기로 김정남이 평양을 드나들며 후계자 지명의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 배경이었다. 이를테면 ‘최후의 싸움’이었던 셈. 정부 내부에서는 김정남의 후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던 군 정보당국의 평가가 마지막으로 힘을 얻은 시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장기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김 위원장의 선택은 3남이었고, 2009년 1월에는 김정은으로 후계체제를 구축하라는 교시가 당 조직지도부에 하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남이 중국 베이징에서 언론과 만나 “후계문제는 아버지만이 결정하실 일”이라고 언급하며 ‘금기의 선’을 넘은 것이 바로 이 무렵의 일. 이후 ‘김정은 체제 구축’을 위한 헌법개정과 조직개편, 핵심간부 인사와 내부 선전작업 등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올해 9월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임명으로 공식화됐음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최근 정부 내부에서는 김정은 후계가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정보당국의 ‘실수’가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그간 그의 이름을 ‘김정운’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대북(對北)정보가 부실한 탓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그간 청와대와 국회에 제출된 국정원의 보고가 일관되게 ‘김정운’을 사용해온데다, 심지어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국정원에서 올린 대통령 친견용 회담 준비자료에도 ‘김정운’으로 돼 있었다는 증언이 나온다.

    정보당국이 그의 실명을 확인한 것은 북한 외무성이 올해 5월28일 해외공관에 보낸 e메일을 감청하는 데 성공하면서인 것으로 전한다. ‘김정은 후계 지명’을 명시한 문제의 공문을 확인한 직후 국정원은 청와대와 국회 정보위에 관련 사실을 보고하고 그간의 ‘판단’을 ‘사실’로 확정하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10년 가까이 이어져온 정보전쟁이 사실상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정상회담 준비자료 속 ‘김정운’

    길고 긴 싸움은 끝났다. 남은 것은 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그 과정에서 확인된 문제점은 무엇인지 점검하는 일일 터. 결론적으로 놓고 보자면 ‘누가 북한의 후계자가 될 것이냐’를 둘러싸고 국정원과 군 정보당국이 벌인 경쟁은 결국 국정원 측의 판정승으로 마무리됐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일관되게 유지해왔다는 ‘3대 세습이 이뤄질 것이고, 3남이 가능성 높다’는 분석이 현실화됐기 때문. 그렇다면 한때 김정남에 무게를 뒀던 군 정보당국의 평가는 국가정보학에서 말하는 ‘정보실패’의 사례로 봐야 하는 것일까. 한 전직 국정원 고위관계자의 평가다.

    “그렇다고 군 정보당국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당시에 북한 권력층 핵심에서 실제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아직 알 수 없고, 정말 김정남이 내정자였거나 두 사람이 엎치락뒤치락하길 반복하다 최후에 결정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훗날 내부정보가 낱낱이 공개된 뒤에야 확인할 수 있는 사안일 것이다.

    다만 군 정보당국의 판단을 휴민트(HUMINT·인적정보)의 한계가 낳은 결과로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정보수집을 담당하는 이들은 자신의 소스가 가장 가치가 높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해외 체류 중이었던 김정남 관련 정보가 쏟아지면서 접근이 불가능한 다른 아들들보다그의 위상을 높게 평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메일 등을 통해 시사된 김정남의 후계 가능성은 그 자신이나 주변 인물들의 희망사항에 불과했을 수 있다. 어느 국가든 정보기관을 수집파트와 분석파트로 분리해 운영하는 것은 그러한 경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다.”

    시스템이 필요한 이유

    흥미로운 대목은 소속과 지위를 막론하고 ‘신동아’가 접촉한 대부분의 전·현직 정보당국자들이 “누가 후계자인지 가늠하는 것은 ‘정보판단’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 위원장이 쓰러진 2008년 여름 이전까지 평양에서도 이 문제를 논의하는 일 자체가 금지돼 있었으므로 관련 정보가 극히 제한돼 있었고, 따라서 이에 대한 판단은 사실상 ‘눈먼 점치기’나 다름없었다는 것. 청와대와 정치권, 여론은 끊임없이 ‘예, 아니오로 딱 부러지게 답하라’고 요구하지만 가능한 과제가 아니었다는 토로다.

    관계당국의 정보 수집·판단 능력을 꾸준히 점검하는 미국 등에서는, 안보와 관련해 비중이 큰 사안이 마무리되면 상하원 정보위원회 같은 별도기관에서 그간의 활동을 평가하고 정리하는 시스템을 마련해두고 있다. 판단이 맞았나 틀렸나만을 따지는 게 아니라, 과연 예측이 가능한 문제였는지, 기관 간의 불필요한 경쟁으로 인한 낭비는 없었는지, 상부기관의 선입관 때문에 활동이 왜곡된 일은 없는지 포괄적으로 점검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보기관의 역할이나 정보판단이 가능한 영역에 대해 종합적인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 안보연구기관 관계자의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정보활동을 꼼꼼히 점검하는 독립적인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후계문제에 관해서도 그간 관계당국이 수행한 역할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불거진 몇몇 사안에 대해 국회 정보위원들이 질책성 질의를 던지는 것이 전부다. 이전 시기 남북관계 경색에 대한 우려가 정보활동을 위축시키지는 않았는지 평가하는 작업은 훨씬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겠나. 이러한 장기적 모니터링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지난 10년간 벌어진 갖가지 추측과 경쟁의 해프닝도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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