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 변할 수 없는 사실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모든 것은 변해도 지리는 변하지 않는다(Everything changes but geography)”는 것이다. 이 문장은 군사전략을 가르치는 미국의 전쟁대학(National War College) 현관 벽에도 붙어 있다.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다는 우리 옛말도 있다. 이웃이 밉다고 한반도를 뚝 떼어 태평양 한복판에 갖다 놓을 수는 없는 만큼, 일본과 공존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전제를 깔고 긴 안목으로 한일관계를 설정하고, 어떤 정책이 우리의 국익(國益)이 될지 살펴보자.
지정학자들은 나폴레옹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 나라의 지리를 살피면 그 나라의 대외정책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지정학적 여건이 나라의 운명에 크게 영향을 끼쳐왔음은 역사가 말해준다.
미국 국무성 아·태차관보를 지낸 제임스 켈리가 1992년 평양을 방문한 뒤 도쿄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제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북한을 합친 통일한국은 인구 7000만명, GDP 1조달러로 유럽 기준으로는 대국(大國)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슬프게도 한반도 북쪽에는 세계 2위 군사대국 러시아, 서쪽에는 핵으로 무장한 중국, 남쪽에는 세계 2위 경제대국 일본이 있다.”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의 저자 돈 오버도퍼도 한국은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존재의 제약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한국은 잘못된 곳(wrong place)에 있는 잘못된 사이즈(wrong size)의 나라다. 주변 국가들은 한국을 크기나 지리적 이점에서 실질적인 가치가 있어 책략을 꾀할 만한 나라라고 본다. 그러나 한국은 강대국이 우선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기에는 너무나 작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운명은 자신의 권익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고, 강대국의 긴박한 요청이나 강요된 요구로 결정된 일이 많았다.”
한국 역사의 최고 권위자인 하타다 다케시는 ‘이와나미 신사의 조선사’라는 책에서 “한국은 180회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는데, 이러한 환난 속에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남은 요인은 강인한 인내심, 불요불굴의 독립심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이 생존한 이유가 동아시아 세력 다툼의 본무대였던 중원(中原)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중국 대륙의 중원인 장안, 뤄양, 또는 난징 같은 곳에 있었다면 한민족은 한족(漢族)에 흡수됐을 것이다.
중국은 냉철한 이해타산가
따라서 우리의 생존전략은 자명하다. 주변국가와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우리의 안전보장체제를 확고히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행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과 장제스 정권의 중국 덕분에 해방을 약속(카이로 선언) 받아 독립했다. 1950년 6월 북한이 무력침략했을 때는 미국을 비롯한 유엔 16개국의 도움으로 자유와 독립을 지켰다. 그 뒤 미국과 동맹관계를 바탕으로 오늘의 번영을 누리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 냉전구도에서 한일관계의 미래를 그려보자. 일본은 밉든 곱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자유세계의 일원이다. 미국과 같은 동맹국이므로 협력하는 길밖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환경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됐다. 중국의 경제력이 급부상하자 사회 일각에서 한일, 한미관계를 새롭게 보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중국은 25년 전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는 이름 아래 세계에 문호를 열었다. 그 결과 중국의 경제규모는 1조6000억달러를 상회해 세계 6위의 경제력을 갖추게 됐다.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우리의 제1위 교역대상국이 됐다. 이 같은 중국의 부상과 기존의 국가 정책을 새롭게 보려는 우리 정부의 태도가 맞물려 요즘 우리 사회엔 ‘중국 요소(China Factor)’가 회자되고 있다.
새로운 시각이든 기존의 시각이든 외교관계를 재편할 때 염두에 둬야 할 것은 감성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최근 미국의 ‘포린 어페어즈’(9·10월호)에 실려 화제가 된 중국학자 왕 지시(베이징대 국제학 대학원장이자 중국 공산당 중앙당학교 국제전략연구원장)의 논문 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그는 미중관계가 서로의 이익에 의해 맺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경쟁관계로 때론 상호협력 관계로 나아갈 것임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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