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 한자를 처음으로 가르친 것은 백제이다. 일본의 고대사서 ‘고사기(古事記)’ 오진 천황(應神天皇, 서기 285) 6년조에, 백제 국왕이 왕인(王仁) 박사를 일본에 파견했는데, 이때 ‘논어(論語)’ 10권과 ‘천자문(千字文)’ 1권을 일본에 전해 가르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인을 일본에 파견한 백제왕은 아화왕(阿華王)이며, 왕인의 묘역은 일본 오사카 히라가타에 있다. 여기서 왕인을 지칭하는 ‘박사’는 오늘날 서구 학제에서 규정하는 ‘Doctor’s degree’ 자격과는 다른 것으로, 중국 한대의 오경박사(五經博士)에서 유래한 관직이다. 유교를 국학으로 공인한 한나라는, 유교 경전인 시(詩)·서(書)·역(易)·예기(禮)·춘추(春秋)의 오경에 정통한 유학자를 오경박사로 임명해, 귀족 교육기관이던 국자학(國子學)에서 강의하게 했다. 신라 고구려 백제는 이 제도를 모방해 ‘태학(太學)’ ‘국학(國學)’과 같은 귀족 교육기관을 국립으로 설치하고, 박사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한자를 전한 당시 백제의 문화가 일본을 크게 앞섰던 점을 나타내는 말이 숙어(熟語)로 남아 있다. ‘くたら(百濟)ない(백제 아니다, 고급품이 아니다)’라는 관용적 표현이 그것이다. 이 말은 ‘백제 물건도 아닌데 고급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의미다.
백제는 한자뿐 아니라 불교를 비롯한 다수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했다. 긴메이 천황(欽明天皇, 서기 552) 13년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금동불상과 불경 몇 권을 일본 천황에게 전한 것이 일본 최초의 불교 전래에 관한 공식 기록이다.
‘고사기’에는 “성명왕으로부터 불상과 불경을 전해 받은 긴메이 천황은 처음 접하는 불상의 단엄(端嚴)함에 놀라, 이를 예배의 대상으로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여러 신하에게 물은 바, 소가(蘇我)씨는 수용론을 주장했으나 모노베(物部)씨는 배척론을 주장해 대립했다. 이에 천황은 불상 폐지의 단(斷)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당시 샤머니즘적 주술 종교 단계에 있던 일본이, 백제에서 전래된 선진 불교에 직면해 사상적·종교적으로 당황했음을 알려주는 일화다. 사실 불교 이전의 샤머니즘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다. 개인적인 체험이지만, 나는 메이지(明治) 신궁의 예배소 앞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신목(神木)에 걸린 새끼줄과 거기에 걸린 부속 소품들이, 옛날 우리네 동구(洞口)에 서 있던 느티나무나 성황당의 물건들과 꼭 같은 것을 보고 깊은 생각에 잠긴 적이 있었다.
배경 따라 변형된 한자
고대와 중세를 거치는 동안 한어와 한자를 사용하는 한족(漢族)의 생활공간은 광막한 중국 대륙 전체로 확산됐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 각 지역의 절대적인 영향으로 한어와 한자의 발음은 다양하게 변했다. 또한 오랜 시간을 거치며 단위 지방의 한어와 한자의 발음도 끊임없이 변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