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세욱 교수가 뒤쫓는 연암의 연행도.
내일이면 조선은 물론 아시아, 나아가서 세계의 관심을 모은 청나라 건륭황제의 이궁(離宮)에 도착한다. 멀리 조선 반도의 한양으로부터 바리바리 싸 온 공품을 올리면서, 우리 정사·부사·서장관 3사가 꾸벅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3배9고두(三拜九叩頭), 그 진하(進賀)의 예식을 준비해야 한다. 그 절을 위해 300명의 수행이 장마를 뚫고 일망무제의 들판을 건너왔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육체만 소진하는 싸움이 아니라 조선의 국력과 자존심을 쏟으면서 의식과 사상 그 모두를 투여하는 싸움이었다. 크게는 조선과 청, 두 나라의 정치·경제·풍속·문화·군사·제도 등의 두드러진 차이로부터, 작게는 현실 외교와 전통 외교, 성리학과 실학, 화이론(華夷論)적 명분론과 유정유일(唯精唯一)의 실세론, 훈척(勳戚)파와 서민파, 권위주의와 실용주의, 고문(古文)정통과 문체자유, 신분주의와 인간주의의 크고 작은 모순과 갈등을 연암은 도강(渡江)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44일 동안 아프도록 삭여온 것이다. 말하자면 신체적 피로 외에도 겹겹의 스트레스와 갈등을 떠안았던 것이다.
연암은 그날 일기에 “눈시울이 구름장처럼 무겁고 하품이 조수 밀리듯 한다”고 했다. 안장에 기대니 포근한 잠이 엉겼고 아롱아롱 꿈속에 둥둥 흔들리면서 취중의 세계, 몽중의 세계를 즐기고 있었다. 얼마나 환상인가. 연암은 그 경지를 종교나 철학에 견주었다. 도가(道家)로는 내관(內觀), 곧 자기의식을 의도적으로 성찰하는 수행에 견주었고, 불가(佛家)로는 팔십일난이나 사백사병(四百四病) 등 중생이 도를 터득하기 위한 온갖 장애와 질병의 극복에 비유했다. 연암이 이러한 고난의 연속, 그 수렁을 차라리 장주(莊周)도 호접(蝴蝶)도 아닌 꿈나라로 여기면서 즐기는 여유는 초극(超克)적인 정열의 향연이랄 수밖에 없다.
청의 영악한 봉공체제
고행의 끄트머리에서 연암은 깔깔거리며 묘안을 꺼내 보인다. 때마침 길가에 뒹구는 돌을 보고 맹세했다.
“내가 어느 날, 연암으로 돌아가면 꼭 천일 하고도 하루를 더 자리라. 그래서 송나라 때 은사였던 희이(希夷) 선생보다 하루를 더 잘 것이며, 자다가 천둥처럼 코를 골아서 음식을 들던 영웅들이 그 젓가락을 떨어뜨리게 하리라.”
기상천외한 발상이다.
연암은 ‘막북행정록’을 마무리하는 노상에서 뜻밖에 반가운 사람을 만나고, 뜻밖에 아니꼬운 장면과도 맞닥뜨렸다. 이틀 전 깊은 밤,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건넜던 백하에서 자기가 모는 말 발굽에 밟혀 뒤처지며 통곡하던 창대를, 천하 만방의 조공이 모여들어 수레바퀴가 마치 비바람 치듯 쏴쏴 쿵쿵거리는 어도(御道)에서 만난 것이다. 하나는 이가 빠질 만큼 반가운 상봉이요, 또 하나는 눈이 비뚤어질 만큼 뒤틀리는 일이었다. 보라! 누구는 나흘 동안 뜬눈으로 죽자 살자 험한 강을 건너는데, 누구는 말, 낙타, 노새들을 총동원해 길을 꽉 메운 채 가고 있었다.
그 시절 청나라의 ‘종번(宗藩)관계’와 ‘봉공체제(封貢體制)’는 갈수록 영악스러웠다. 이웃 나라에 군신관계를 강요하면서 책봉을 비롯해 연호와 인장 등을 관장했다. 청나라의 주요한 경절은 물론 철따라 조공의 빈도를 늘려 딴에는 인방(隣邦·이웃 나라)과의 우의를 돈독히 한다는 미명을 붙였다. 저들의 궁궐이 북경에 있어 누런 기와의 물결을 구름처럼 일으키고 있음에도 새북 땅 먼 먼 700리 밖에 행궁을 떡 벌어지게 지어놓고도 그 궁궐 이름을 굳이 ‘피서산장’이라 붙여 내숭을 떠는 까닭, 더구나 황제가 그 피서산장에서 고희연을 베푼다며 온 천하 사절들을 불러들이는 까닭은 정말 알고도 모를 일이다.
8월9일 사시(巳時)에 마침내 열하에 도착했다. 쌍탑산과 봉추산을 먼발치서 보았다. 황실은 조선 경축사절을 태학(太學)에 배치했다. 겹처마에 누런 기와를 얹은 대성전(大成殿)과 대성문(大成門), 대성전의 우측 담 밖에 명륜당(明倫堂), 당 앞에는 행낭이 늘어서 있었다. 오른편에는 진덕재(進德齋)와 수업(修業)재, 왼편에는 일수(日修)재와 시습(時習)재가 들어섰다. 다시 명륜당 뒤로 벽돌의 대청이 있고, 그 좌우에 작은 재실이 있어, 우재에 정사, 좌재에 부사, 별재에 서장관을 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