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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이 본 세종의 통치철학

“즉흥적 발상, 경박한 발언, 무책임한 행정이 수성(守成)의 정도(正道) 가로막는다”

  •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수양대군이 본 세종의 통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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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를 떠날 때 전하의 말씀이셨다.

그런데 상의 의도와 달리, 일단 강무장에 나오면 형님은 더욱 더 머뭇거렸다. 반면 나와 동생 안평대군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사냥에 몰두했다. 특히 내 활솜씨는 집안 내력 덕분인지 주위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내곤 했다. 9마리의 노루가 동시에 달리는 곳으로 활을 쏘아 한꺼번에 6마리를 잡기도 했으며, 말 위를 뛰어넘어 달려드는 노루를 겨냥해 적중시키기도 했다(‘세조실록’ 총서). 상과 세자가 찬탄하면서 박수를 보낼 정도였다. 안평대군 역시 보통의 활솜씨는 넘었다.

강무 사흘째 되던 날, 아버지는 삼군(三軍)장수 최윤덕을 불렀다.

“강무라는 것은 원래 군사들에게 활 쏘고 말 달리는 기술을 익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강무장 안의 짐승은 종친들만 쏠 수 있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우리의 지나친 경쟁을 의식하신 듯했다. 다른 한편 그것은 상께서 생각하는 현재 강무 방식의 문제점이었다. “짐승들이 포위를 뚫고 빠져나가도 몰이하는 군인(驅軍)이 쏠 수 없다면, 병졸을 훈련하는 뜻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실전에 도움 되는 훈련으로

상께서는 포위망에서 빠져나간 짐승들을 말 탄 병사(騎士)들로 하여금 쫓아가 쏘게 하면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이에 최윤덕, 신상 등은 기사를 세 집단으로 나누어 쫓아가 쏘게 해보자고 했다. 그러나 김종서는 반대했다. “설사 포위망 뒤쪽에서 쫓게 하더라도 다투어 활을 쏘다 보면 필시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상께서는 논의 끝에, 지신사(知申事) 안숭선(安崇善)의 의견에 따라, 그날은 종전의 방식대로 시행하라고 하셨다(14/2/21).

이틀 후, 불행히도 김종서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23일 평강현 북쪽 석교(石橋) 인근의 강무는 상의 뜻에 따라 ‘적극적인 사냥’이 허용됐다. 그런데 어찌나 사냥에 몰두했던지, 별안간 화살이 임금의 막사 안까지 날아들었다. 안숭선은 활을 쏜 환관 유실(兪實)을 법령에 따라 국문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상께서는 “실수로 잘못 쏘아 위내(圍內)까지 들어온 것이니 용서해주라”고 하셨다(14/2/23).

그날 오후 철원부 내문(乃文) 강무에서는 사망사고까지 발생했다. 포위를 뚫고 달아나던 사슴이 시위패 김득부를 들이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죽고 만 것이다. 상은 경기감사에게 장례를 관에서 치러주도록 하고, 그의 집에 세금도 면제해주라고 지시했다(14/2/23).

이 사고로 강무 일정이 예정보다 늦어졌다. 애당초 24일의 의혜왕후(이성계의 모친)의 제사 때까지는 환궁해 당신이 직접 사냥한 짐승으로 제사를 지내려고 했다. 그런데 새로운 강무방식이 도입되고, 몇 가지 예상치 않은 사고가 발생하면서 일정이 예상보다 길어진 것이다.

내문에서 의혜왕후 제사를 지낸 다음 날, 마장면 일대의 강무 또한 치열했다. 이 날은 상께서 친히 사냥에 참여하셨다. 아침 수라를 드신 후, 상께서 삼면이 포위되고 한쪽 방향만 열린 사냥터에 도착하자 북이 울렸다. 병조 당상관의 영(令)에 따라 말 탄 장수와 기사들, 그리고 몰이꾼 병사들이 포위망을 좁혀갔다. 그러는 사이 상께서는 가마에서 내려 말로 갈아탔다. 첫 번째 몰이와 두 번째 몰이까지는 화살을 겨누기만 했지 쏘지는 않으셨다. 마지막 세 번째 몰이에서 상께서 짐승의 왼쪽에서 화살을 날렸다. 노루의 정강이에 적중했다. 병사들은 북소리와 함께 함성을 질렀다. 우리는 여러 장수와 함께 치사를 올렸다.

바로 그때, 산속에서 큰 멧돼지가 나타났다. 종친과 장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그런데 멧돼지는 화살을 맞은 채 포위망을 뚫고 달려나오면서 매어놓은 내구마(內廐馬) 한 마리를 들이받았다. 아버지께서 타실 내구마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다들 황망해하는 사이에 멧돼지는 숲속으로 사라졌다. 당황한 최윤덕이 담당자를 처벌하겠노라고 아뢰었다. 아버지는 “어찌 멧돼지가 꼭 이 말에게 달려와서 부딪칠 줄을 알았겠느냐. 뜻밖에 생긴 일이니 거론하지 말라”고 명했다. 하지만 당신께서도 은근히 겁이 나셨는지 옆에 있는 김종서에게 활과 화살을 주시면서 “항상 차고 있다가 짐승이 나타나면 쏘라”고 말씀하셨다(14/2/25).

이번 행차는 30일 보장산에서의 강무를 끝으로 종료됐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고에서 나타났듯이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몰이꾼은 물론이고 국왕 친위부대까지 훈련이 돼 있지 않아서 우왕좌왕했다. 상께서도 “항오(行伍)가 정제되지 못한” 것이 작금의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셨다(14/2/30). 항오가 정제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상 이 시대 나라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아직까지 건국과 창업기의 어수선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큰 공을 세워보려는 일부 공신들의 기회주의와 몇몇 대신의 경박한 발언과 무책임한 태도, 그리고 상당수 “더벅머리 선비(儒竪)”들의 사대적 근성 탓에 나라 전체가 우왕좌왕했다. 혹독한 겨울의 강무는 바로 이런 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훈련과정이었다.

창업에서 수성으로

창업에서 수성(守成)의 정치로 전환! 부왕께서 생각하는 시대적 과제였다. 하지만 태조께서 세우시고 선대왕 태종께서 만드신 우리 조선왕조의 기틀을 안착시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말 위(馬上)의 정치’에 익숙한 사람들은 ‘좌상(座上)의 행정’에 서툴렀다. 서투를 뿐만 아니라 “도필지임(刀筆之任)”이라 해 무시하기까지 했다.

물론 천하를 얻는 데는 사람들을 규합하고 설득하는 능력, 그리고 기존의 폐해를 비판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이미 천하를 얻은 다음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보다는 자신의 일터로 돌려보내 각자의 소임을 다하게 해야 했다. 비판하기보다는 일의 결과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어주어야 했다.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고(刀之任) 일상의 사무를 원활히 돌아가게 하는(筆之任) 일이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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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전통연구실장 hyunmp@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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