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호

상하이 국제 삼각연애 살인사건

폭염의 새벽 3시, 공동조계 거리를 울린 세 발의 총성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7-11-06 16: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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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은 가혹했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가난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 소녀는 아버지의 아편밀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팔았다. 다시 수년이 지나 상하이 최고의 무희(舞姬)가 되어 사교계를 주름잡던 여인은 엘리트 독일인의 아내가 되었지만, 비극의 운명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감미로운 재즈와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배경으로 1930년대 상하이 밤거리에서 벌어진 기괴한 사랑. 질투와 배신, 복수가 뒤엉킨 그 처참한 결말.
    상하이 국제 삼각연애 살인사건

    조선인 이상산을 중심으로 독일인 웨셀, 영국인 바톤의 삼각연애가 초래한 비극을 다룬 ‘동아일보’ 1934년 8월22일자. 배경은 ‘국제도시’로 불리던 당시의 상하이 전경.

    1934년 8월13일 새벽 3시, 상하이 징안스루(靜安寺路·지금의 난징스루)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공동조계 중심지에 위치해 밤늦도록 북적이던 징안스루도 새벽녘이 가까워오자 인적이 뚝 끊겼다. 택시에서 내린 금발의 백인 청년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서양식 주택 뒷문을 향해 걸어갔다. 닫힌 철문을 살포시 밀자, 문은 맥없이 열렸다. 백인 청년은 집안으로 들어가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해서 문을 닫았다.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백인 청년은 익숙한 곳인 듯 단번에 계단을 찾아 2층으로 올라갔다.

    뒷문과는 달리 2층 침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백인 청년은 바지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조용히 문을 열었다. 방안에서 덥고 습한 공기가 밀려왔다. 침대 위에는 온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동양 여자와 파자마 바람의 백인 남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침실 한쪽 귀퉁이 조그마한 침대 위에는 소녀티를 갓 벗은 또 다른 동양 여자가 곤히 자고 있었다.

    “빌어먹을!”

    침착하게 행동하던 백인 청년은 한 침대에서 다정히 자고 있는 남녀를 목도하고 갑자기 흥분했다. 양복 안주머니에 넣어둔 권총을 꺼내 들고 침대 가까이 다가가서 남자의 가슴을 겨눴다.

    “이런 개자식!”



    백인 청년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검지에 모아 방아쇠를 당겼다.

    탕!

    쥐 죽은 듯 고요한 만국조계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알은 정확히 잠든 남자의 심장을 뚫었다. 남자 곁에서 자고 있던 동양 여자가 총성에 놀라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총구가 왼쪽 가슴을 눌렀다.

    “다, 당신은….”

    탕!

    동양 여자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백인 청년은 권총을 쥔 채 동양 여자의 가슴에서 용솟음쳐 흐르는 선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반쯤 풀려 애절한 목소리로 뭐라고 주절댔다. 얼마쯤 지나자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침실 한쪽 귀퉁이 침대에서 자고 있던 동양 여자가 공포에 질려 홑이불로 입을 틀어막고 흐느끼는 소리였다. 백인 청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온몸을 부르르 떨며 권총을 치켜들고 뒷걸음질쳤다.

    탕!

    세 번째 총성과 동시에 백인 청년이 피를 토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총구를 자기 가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살해당한 비극의 주인공은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 출신 스물여섯 살의 젊은 조선 무희 이상산과 공동조계 공부국(工部局·공동조계의 도로건설과 치안을 담당하던 행정기관) 순사부장인 서른한 살의 영국 청년 바톤이었다. 두 사람을 살해하고 자살한 백인 청년은 독일계 대(大)제약회사의 동양선전부장인 서른다섯 살의 독일 청년 웨셀이었다. (‘국제 삼각애의 혈제(血祭)’, ‘개벽’ 1934년 12월호)


    조선인 이상산, 독일인 웨셀, 영국인 바톤. 세 남녀의 국적을 초월한 삼각연애가 빚은 참극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활극에서 살아남은 동양 여자는 이상산의 여동생 이상순이었다.

    아버지 손에 끌려 홍등가로

    상하이 국제 삼각연애 살인사건

    오늘날의 블라디보스토크 항.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블라디보스토크는 도망처이자 은신처요, 기회의 땅이었다.

    이상산은 1909년 평안북도 길주군 덕산면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났다. 하나뿐인 여동생 이상순은 아홉 살 연하였다. 아버지는 품을 팔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해서 근근이 연명했다. 이상산 자매는 집안이 가난한 탓에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친구도 사귀지 못한 채 다 쓰러져가는 오막살이에서 서로 의지하며 외롭게 자라났다.

    이상산이 열여덟 살 되던 1926년 봄, 그의 가족은 고향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몰락한 지 10년이 흘렀지만, 농사짓고 고기 잡고 장사하면서 사는 연해주 주민들의 생활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봄은 길주의 봄보다 명랑하고 활기찼다. 툭 터진 도로 위에는 번쩍이는 자동차와 마차가 질주했고, 거리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인적이 드문 시골 오지에서 살아온 이상산은 그 모든 게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조선 사람이 많았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건너온 사람도 있었고,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건너온 사람도 있었지만, 아편 밀매를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유한 조선인들은 거개가 아편 밀매업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에서도 궁벽한 오지에서 살던 이상산의 가족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넓고 화려한 시가지를 보며 희망에 부풀었다. 대도시의 풍요가 마치 자기 것인 양 달콤하고 행복한 꿈에 젖었다. 하지만 변한 것은 환경이지 가족의 처지가 아니었다. 길주에서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나 이상산 가족은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일 뿐이었다. 헐벗고 굶주리기는 고향에서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막일이나 하려고 고향 떠나 로스케 나라까지 건너왔나.’

    이상산의 아버지는 착실하게 살아봐야 뾰족한 수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아편 밀매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경찰에 발각되는 날엔 이역 땅에서 징역살이를 해야 했고 자칫 폭력조직의 이권 다툼에 휘말리는 날에는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길은 그것뿐이었다. 감옥에 갇히는 것, 목숨을 잃는 것쯤은 두렵지 않았다. 문제는 밑천이었다. 하루 세끼 때우기도 어려운 처지에 아편장사 밑천이 있을 리 없었다.

    “아편장사만 하면 틀림없이 큰돈을 모을 수 있다! 보아라.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는 조선 사람들의 풍요로운 생활이 여실히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아편장사다. 무엇을 희생하고라도 꼭 아편장사를 하자!”

    이상산의 아버지는 아편장사를 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사랑하는 자기 딸에게 눈물을 머금고 밀매음을 강요했다. (‘국제 삼각애의 혈제’, ‘개벽’ 1934년 12월호)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이후 이상산은 줄곧 기관지염을 앓았다. 비정한 아버지는 병든 딸을 치료하고 보살피기는커녕 홍등가에 나가 몸을 팔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이상산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열여덟 살이면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 만한 나이였다. 이상산은 이왕에 홍등가로 나갈 거라면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봄이 바야흐로 짙어가고 지지배배 제비들이 맑은 북쪽의 하늘에서 노래할 때 드디어 이상산은 어느 사나이에게 몸을 바쳤다. 풍부한 육체의 판매 개시. 그 얼마나 피 섞인 소리이며 징그러운 말이냐! 그러나 이상산은 도리어 그 그늘진 생활이 여태껏 맛본 생활보다 몇 배나 편하고 재미있는 새 생활이라고 여겼다.

    ‘돈이다! 돈이다! 무엇보다도 돈이 있어야 되겠다!’

    이상산은 사나이들에게 몸을 맡기는 순간 이렇게 속으로 부르짖으며 이를 악물고 머지않아 찾아올 행복한 미래를 그렸다. 자기의 육체를 맛본 사나이들에게서 나오는 몇 푼의 돈을 두 손에 쥐고는 그 싸늘한 촉감을 끝없이 향락해 마지않았다. (‘국제 삼각애의 혈제’, ‘개벽’ 1934년 12월호)


    이상산은 홍등가 생활을 하는 동안 이청해라는 조선 청년을 만났다. 이상산의 단골손님이던 이청해는 조선에 있을 때 사상단체에도 관여한 정열적이고 씩씩한 청년이었다. 처음엔 돈과 육체로 맺어진 인연이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연인으로 발전했다.

    상하이 국제 삼각연애 살인사건

    독일인 웨셀의 조선인 이상산 살해사건을 다룬 ‘개벽’ 1934년 12월호 ‘상하이 이역에서 전개된 국제 삼각애의 혈제(血祭)’ 기사.

    이상산의 홍등가 생활은 길지 않았다. 파란만장했던 열여덟 살 봄이 가고 무더위가 시작될 때쯤 그럭저럭 장사 밑천이 모였다. 아버지가 아편장사를 시작하자 이상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홍등가를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소문대로 아편장사는 이문이 많이 남았다. 살림살이는 날이 갈수록 풍족해졌다. 이상산은 자기 한몸 희생해서 온 가족이 행복해졌다는 생각에 가슴 한켠을 무겁게 짓누르던 죄의식에서 벗어났다. 이상산의 가족에게 블라디보스토크는 진정 기회의 땅이었다.

    홍등가를 나온 후 이청해와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이상산에게 이청해는 세상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저물도록, 두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만나 달콤한 사랑을 속삭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원앙새도 부러워할 만큼 뜨겁고 달콤했다. 열여덟 살 가을, 이상산은 처음으로 세상이 아름답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축복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이상산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상산의 가족과 달리 이청해는 영주할 목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상 관련 사건에 휘말려 고국을 떠나온 망명객이었다. 이상산이 달콤한 사랑의 단꿈에 취해 있을 때, 이청해는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이상산은 어느 날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진 이청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해보았지만 아무도 이청해의 행적을 알지 못했다. 사랑하는 애인을 잃은 이상산은 미친 사람처럼 울며불며 이청해와 단둘이서 사랑을 쏙살거리던 언덕을 헤맸다. 사라진 이청해를 목청껏 불러도 보고, 원망도 해보았지만 말없이 떠난 사랑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사랑 찾아 상하이로

    이청해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라진 지 한 달 만에 이상산 앞으로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이청해가 보낸 엽서였다. 발신자 주소는 없었고, 앞면에 찍힌 소인만이 발신지가 상하이임을 알려주었다. 이상산은 마치 오래전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난 듯 기뻐하며 엽서를 읽어 내려갔다.

    “떠난다는 말도 없이 돌연 이렇게 당신의 곁을 떠나서 참말 무엇이라고 사죄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그러나 이것도 운명이라고 여기고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나는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사람이오. 연애에 도취돼 부질없이 그날그날을 허비할 사람이 아니오니 이제부터는 나를 깨끗이 잊어버리시오. 당신의 행복을 빌며 붓을 놓소!” (‘국제 삼각애의 혈제’, ‘개벽’ 1934년 12월호)


    사내들이란 언제나 그렇듯 야속한 존재였다. 자기가 필요로 할 때는 목숨이라도 바칠 듯 달콤한 말로 꾀다가도, 욕정을 다 채우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랑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상산은 그런 남자의 본성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어리고 순진했다. 무정한 편지를 받아들고도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길 정도로 어리석었다.

    ‘오오, 상하이. 국제도시 상하이. 화려한 상하이. 그립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랑하는 애인의 숨결이 살아 있는 해륙 수천리 저편의 상하이가 그립다.’

    이상산은 이창해와 사랑을 속삭이던 언덕에 매일같이 올라가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 안타까움과 그리움 속에 가을이 가고, 바닷물도 얼어붙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혹한이 찾아왔다. 그해 겨울 이상산에게 또 하나의 시련이 찾아왔다. 첫눈이 내리던 날 밤, 아버지가 평생 처음 맛본 풍요를 반년도 채 누리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상산은 사랑하는 사람을 연이어 앗아간 운명을 저주하며 서럽게 흐느껴 울었다. 그러나 운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몇 시간을 원 없이 운 후, 이상산은 슬픔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굳은 결심을 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돌이킬 수 없는 일이고, 상하이로 가서 사랑하는 애인을 찾아 그와 정식으로 결혼하자!’

    아버지는 반년 동안 아편장사를 해서 모은 돈 800여 원을 유산으로 남겼다. 고향에 돌아가면 넉넉하진 않아도 험한 꼴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한 후, 이상산은 평생 아버지만 바라보며 살아온 어머니에게 유산 전부를 맡기며 말했다.

    “어머니 이 돈이면 고향에서 그럭저럭 사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상순이를 데리고 상하이로 가겠으니 어머니는 고향에 돌아가 계세요.”

    어머니가 고향으로 함께 돌아가자고 설득했지만, 이상산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12월 어느 눈보라 치는 밤, 어머니는 800원과 남편의 유골이 담긴 조그마한 함 하나를 가슴에 안고 고향으로 떠났고, 이상산은 아홉 살 난 어린 여동생 이상순을 데리고 상하이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독일인의 아내가 되다

    상하이 국제 삼각연애 살인사건

    상하이의 번화가 난징스루의 현재 모습.

    1929년 스산한 겨울 밤, 상하이 라오파쯔루(老?子路)에 있는 러시아 식당 한구석에 금발의 백인 청년과 동양 무희가 다정히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라오파쯔루는 ‘댄스가(街)’라 불리는, 상하이를 대표하는 유흥가였다. 백인 청년은 독일계 대(大)제약회사 동양선전부장 웨셀이었고, 동양 무희는 이상산이었다.

    애인을 찾아 상하이에 온 지도 벌써 3년이 흘렀다. 그동안 이상산은 댄스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무희로 성장했다. 인기를 얻으면 소식을 듣고 찾아올 줄 알았는데 이청해는 여태껏 나타나지 않았다. 조선 사람을 만나면 혹 이청해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날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거리를 헤매도 보았지만 이청해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상하이는 이상산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도시였다.

    무희로서 이상산의 인기는 절정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마음은 늘 초조했고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댄스홀의 요란한 재즈 음악은 소음으로 들렸고 술을 마시지 않고는 단 하루도 잠들 수 없었다. 이상산이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웨셀이 나타났다.

    웨셀은 이제 갓 서른이 된 키 크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웨셀은 이상산을 처음 본 순간부터 호감을 느끼고 매일같이 댄스홀을 찾았다. 매일 밤 이상산과 춤을 추었고, 그때마다 1원씩 팁을 주었다. 이상산은 웨셀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처음엔 친절한 후원자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하이에 온 지 3년이 지나면서 점차 웨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생겼다. 감정은 나날이 강렬해져서 어느 날 밤 웨셀과 함께 살짝 댄스홀을 빠져나와 러시아 식당에서 술을 마셨다. 밤은 깊어 거리를 질주하던 전차 소리도 끊어지고, 가끔씩 정신을 잃은 취객을 태운 택시가 경적을 울리며 왕래할 뿐이었다.

    몇 시간 후에 웨셀과 이상산은 로얄호텔에 나타났다. 그날 밤 그들은 드디어 한 침대에서 달콤하게 포옹을 했다. 그러나 이상산은 그것이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자포자기한 끝에 함부로 몸을 굴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일이 벌어진 바에야 한번 실컷 호화로운 생활이나 해보고 또 ‘그것도’ 한번 마음껏 맛보고 싶은 생각도 났다. (‘국제 삼각애의 혈제’, ‘개벽’ 1934년 12월호)


    이튿날부터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다. 이상산은 댄서 노릇을 집어치우고 독일계 대제약회사 동양선전부장의 아내로 당당히 징안스루에 있는 큰 양옥의 안주인이 되었다.

    상하이에 나타난 웨셀 부인

    1934년, 웨셀과 동거한 지도 어느덧 5년이 흘렀다. 이상산에게는 꿀처럼 달콤한 신혼생활이었다. ‘할 일이 많아 한가하게 연애로 허비할 시간이 없다’며 믿음을 저버린 이청해와 달리 웨셀은 5년을 한결같이 이상산을 사랑해주었다. 웨셀은 늘 다정했고 이상산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이상산은 고단하고 서러웠던 지난 세월을 모두 잊고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귀부인 생활에 익숙해져갔다. 하지만 불행은 또다시 찾아왔다.

    웨셀이 출근한 후 이상산은 그날도 늘 하던 대로 유성기를 틀어놓고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잡지를 훑어보고 있었다. 일상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중국인 하녀가 서양 여자가 찾아왔다며 이상산을 불렀다. 현관으로 나가보니 처음 보는 30대 초반의 서양 귀부인이 서 있었다. 귀부인이 독일어로 물었다.

    “여기가 웨셀 씨 댁인가요?”

    “그런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귀부인은 주인의 승낙도 얻지 않고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그러곤 영문을 몰라 멍하니 바라보는 이상산의 뺨을 후려갈겼다.

    “네깟게 내 남편을 빼앗아?”

    귀부인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이상산은 넋을 놓았다. 눈앞이 캄캄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뺨 맞고 모욕당한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철석같이 믿었던 웨셀에게 속은 게 분하고 억울했다. 웨셀은 동거를 시작하기 전 이상산에게 “나는 벌써 나이가 서른이나 됐는데 아직껏 홀아비로 있답니다” 하며 쓸쓸히 웃어 보인 적이 있었다.

    이상산은 그 말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무려 5년 동안이나 자신이 웨셀 부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진짜 웨셀 부인은 독일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이상산은 냉정을 찾으려고 마음을 다잡아보았지만 뛰는 가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웨셀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웨셀이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와 이상산을 달랬다.

    “한 달만 지나면 저것을 독일으로 돌려보낼 테니 염려 말게.”

    이상산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자신을 속인 것보다 그 말이 더 미웠다. 손바닥에 분노를 모아 웨셀의 뺨을 갈기고 차갑게 뒤돌아섰다. 웨셀은 거듭 용서를 빌었지만, 싸늘하게 식은 이상산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이상산은 곧장 짐을 꾸려 함께 살던 이상순을 데리고 웨셀의 집을 나왔다. 마음은 더없이 홀가분했지만, 눈가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 밤 댄스홀에는 한때 상하이 밤무대를 주름잡던 왕년의 인기 무희가 5년 만에 무대에 올랐다. 이상산의 춤솜씨는 아직 녹슬지 않아서 뜨거운 갈채 속에 복귀공연을 마쳤다. 무대에서 내려온 이상산은 홧김에 술을 마셨다. 독한 보드카를 물 마시듯 목구멍에 털어넣었다. 보드카 한 병을 순식간에 비운 후, 가느다란 소리로 자장가를 불렀다. 이상산은 괴로운 일이 생길 때면 늘 자장가를 불렀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동료 무희들이 왜 하필 자장가를 부르느냐고 묻자 이상산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희들이 유행가를 부를 때 나는 혼자서 쓸쓸히 자장가를 부른단다. 나는 어쩐지 자장가를 부르고 싶은 생각이 자꾸 난단 말이야. 자장가는 어릴 때 어머니의 등에서 듣는 것이지, 나같이 이렇게 나이를 먹은 것이 부를 것은 아니야. 나도 알아. 안다고. 하지만 나는 어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한 번도 자장가를 들어보지 못했단다. 우리 집이 워낙 가난하다 보니까 어머니에게 어디 그럴 여가가 있을 리 있나. 나는 어릴 때 동네 아이들이 자기 어머니 등에 업혀서 어머니가 부르는 자장가를 들어가며 고요히 꿈나라로 들어가는 그 평화스러운 모습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라.

    너희들도 어릴 땐 어머니의 등에서 자장가를 들었겠구나. 그러나 나만은 자장가를 듣지 못했어. 우리 어머닌들 오죽이나 나를 업고 자장가 한 마디라도 들려주고 싶었겠느냐만 원수 같은 가난이 자장가를 빼앗아 갔단다. 내가 시방 부르는 자장가는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상처 받은 자장가란다. 피 묻은 자장가란다. 나는 이 피 묻은 자장가를 늘 부르면서 지나간 옛날을 생각하고 남 몰래 눈물 흘린단다.” (‘국제 삼각애의 혈제’, ‘개벽’ 1934년 12월호)


    이상산은 술에 취해 끊임없이 자장가를 불러댔다. 그때 누군가 다가오며 반갑게 알은 체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웨셀 부인 아니신가. 옷은 그게 뭐고, 술은 왜 그렇게 마셨소.”

    웨셀의 영국인 친구인 공동조계 공부국 순사부장 바톤이었다. 춤을 즐기던 웨셀과 바톤은 댄스홀에 다니면서 친해진 사이였다. 이상산과 바톤은 이상산이 댄스홀에서 일할 때부터 알고 지냈고, 춤도 함께 추곤 했다. 한때 바톤도 이상산을 마음에 두었지만, 웨셀과 동거를 시작한 이후로는 친구의 부인으로 깍듯이 대했다. 웨셀과 함께 바톤의 집에 놀러가기도 했고 바톤도 웨셀의 집에 자주 놀러왔다.

    바톤은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고 그날 밤에야 겨우 틈을 타서 댄스홀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뜻밖에도 이상산을 만난 것이었다.

    “흥, 웨셀 부인? 내가 왜 그깟 놈의 아내란 말이오? 눈이 파란 진짜 웨셀 부인은 시퍼렇게 살아 있습디다. 뭐, 홀아비라고? 앞으로 내 앞에서 웨셀 그 인간 이름도 꺼내지 말아요!”

    특이한 복수

    바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웨셀에게 선수를 빼앗겨 간발의 차이로 놓친 이상산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였다. 웨셀이 독일에 본부인이 있다는 것은 바톤도 알고 있었지만 친구의 비밀을 까발리면서까지 이상산을 얻고 싶지는 않았다. 상하이 화류계에서 그것은 반칙이었다. 이제 이상산이 웨셀과 헤어졌으니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바톤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이상산을 위로하는 척 수작을 걸었다.

    “상산씨, 죄 없는 술만 마셔댄다고 기분이 풀리겠소.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춤이나 한 곡조 춥시다.”

    “뭐, 춤? 까짓것 춥시다.”

    이상산은 바톤에게 안기듯이 몸을 기대고 느린 재즈 멜로디에 맞춰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스텝을 밟았다. 흐르는 듯한 오색 샹들리에 불빛을 전신에 받으면서 오랜만에 맛보는 딴 사나이의 따뜻한 체온. 술이 자꾸 취해오며 이상산은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이상산 자신도 모른다. 이상산은 이튿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자기가 호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로 옆에 누워 있는 젊은 바톤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상산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될 대로 돼라. 어디 내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 좀 구경이나 해보자.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바톤을 바라보았다. (‘국제 삼각애의 혈제’, ‘개벽’ 1934년 12월호)


    잠든 바톤을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바톤이 번쩍 눈을 떴다. 눈과 눈이 마주치자 바톤은 미친 사람처럼 벌거벗은 이상산의 몸을 끌어안았다.

    “상산씨, 당신이 웨셀의 품에 안기기 훨씬 전부터 당신을 사랑해왔소. 내 사랑을 받아주시오. 이제부터 우리 함께 삽시다.”

    삼각연애의 끝

    이상산은 황당한 듯 한참 동안 바톤을 바라보았다. 사내들이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족속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내가 있는 웨셀과도 5년씩이나 살았는데 총각인 바톤과 못 살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바톤도 영국에 숨겨놓은 아내가 있을지도 몰랐지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이상산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오케이.”

    웨셀의 친구인 바톤과의 동거는 웨셀에 대한 작은 복수였다. 이상산은 웨셀의 집을 나온 바로 다음날부터 동생 이상순을 데리고 바톤의 집에 들어가 동거를 시작했다.

    웨셀은 이상산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독일에 아내가 있다는 사실까지 숨겨가며 이상산의 사랑을 갈구했다. 이상산이 집을 나간 다음날부터 웨셀은 독일에서 찾아온 본부인을 내팽개쳐두고 이상산을 찾아 나섰다. 둘 중에 한 사람을 택해야 한다면 이상산을 택할 결심이었다. 이상산이 없는 세상은 살 가치가 없었다. 이상산이 마음을 돌릴 때까지 무릎 꿇고 빌 생각이었다. 하지만 겨우 하루 사이에 이상산은 딴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것도 친구라고 믿었던 바톤의 품에. 웨셀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상산도 미웠지만, 바톤이 더 미웠다.

    ‘친구의 여자를 빼앗아! 이 자식 어디 두고 보자!’

    웨셀은 질투심에 주먹을 불끈 쥐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상산과 바톤이 함께 사는 꼴을 도저히 눈뜨고 쳐다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웨셀은 분노를 참다못해 드디어 바톤과 이상산을 죽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아직도 식지 않은 아름다운 이상산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미련! 어찌 그 아름다운 이상산을 죽인단 말인가! 웨셀은 바톤과 이상산을 남몰래 죽여 버리고 지긋지긋한 번뇌를 깨끗이 청산해 버리려고 마음먹었으나 자기가 아직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이상산까지 죽인다는 것은 암만해도 그에겐 쓰라리고도 또 쓰라린 일이었다. 그러나 최후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국제 삼각애의 혈제’, ‘개벽’ 1934년 12월호)


    8월12일, 무덥고 습한 상하이의 여름이 정점으로 치닫는 일요일이었다. 웨셀은 마음의 번민을 잊으려고 칼톤극장으로 영화구경을 갔다. 적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바톤과 이상산이 웨셀의 바로 앞자리에서 다정히 앉아 웃고 속살거리며 영화를 보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웨셀은 질투심에 얼굴이 시뻘게져서 영화를 보다 말고 부랴부랴 극장에서 뛰쳐나왔다.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저들을 죽이고 자기도 죽으면 그만이었다. 웨셀은 곧장 바톤의 집으로 달려가서 바톤의 중국인 하인을 데리고 집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절대 비밀이네. 알았나? 돈 20원을 줄 테니 바톤의 침실 열쇠를 하루만 빌려줄 수 없겠나? 하루면 되네.”

    웨셀은 즉석에서 중국인 하인의 손에다 10원짜리 지폐 2장을 쥐어주었다. 중국인 하인의 한 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예, 그러지요.”

    중국인 하인은 빳빳한 지폐의 촉감에 기쁨을 금치 못하며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면 내 여기 있을 테니 얼른 가서 열쇠를 가지고 오게.”

    웨셀의 말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중국인 하인은 카페 문을 박차고 나가 열쇠를 가지러 집으로 달려갔다. 10분 후 중국인 하인이 열쇠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또 하나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내일 새벽 3시쯤 뒷문을 열어두게. 새벽 3시일세. 알았지?”

    웨셀은 열쇠를 받아들고 10원짜리 지폐를 중국인 하인에게 또 한 장 쥐어주면서 부탁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중국인 하인은 그것 역시 흔쾌히 승낙했다.

    그날 밤 12시, 웨셀은 유대인이 경영하는 댄스홀 ‘비너스’에 나타났다. 한 시간가량 춤을 춘 후 댄스홀을 나와서 택시를 잡아타고 양수푸(楊樹浦)에 사는 조선인 친구 장진유의 집으로 향했다. 조선인 장진유는 바톤과 함께 공동조계 공부국에서 일하는 순사였다. 웨셀은 오전 1시를 훌쩍 넘긴 시각 장진유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장진유는 자다가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약속도 하지 않고 찾아온 독일인 친구를 맞았다.

    “아니 이 사람, 대체 오밤중에 웬일인가.”

    상하이 국제 삼각연애 살인사건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럭키 경성’ 등


    “미안하이.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밤도 깊고 해서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하고 찾아왔네.”

    웨셀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고는 장진유의 말도 기다리지 않은 채 양복 저고리를 벗고 넥타이를 풀며 잘 차비를 했다. 장진유는 웨셀의 태도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서 다시 자고 싶은 마음에 더는 캐묻지 않았다. 웨셀을 침대에 눕히고 자기도 그 옆에 드러누웠다. 자다가 일어난 장진유는 금방 곯아떨어졌다. 그러나 웨셀은 침대에 누워 자지 않고 시간을 기다렸다. 괘종시계가 3시를 알리자 웨셀은 살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웨셀이 한밤중에 장진유의 집을 찾은 이유는 권총을 얻기 위해서였다. 웨셀은 장진유가 벽에 걸어둔 권총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은 후 조용히 방문을 열고 거리로 나갔다. 웨셀은 택시를 잡아타고 징안스루에 있는 바톤의 집으로 향했다. 중국인 하인은 약속대로 뒷문을 잠그지 않고 열어두었다. 얼마 후 쥐 죽은 듯 조용한 공동조계에 세 발의 총성과 여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상하이 특파원 강성구는 사건 당일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유혈의 참극이 일어난 8월13일 새벽, 나는 방문을 요란히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방문을 두드린 사람은 상하이 모 신문사 사회부 기자 다카하시였다. 다카하시에게 참극이 발생한 것을 듣고 그와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엔 선혈이 흥건해 차마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었다.

    나는 이번 사건의 여주인공 이상산과 생전에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지마는 좌우간 알고 지냈고, 댄스홀에서 함께 춤도 몇 번 춰보았다. 이상산은 퍽 다정한 여자였으며 아름다운 얼굴과 풍부한 육체미에는 한 줄기 애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 미모와 그 풍부한 육체미로 여러 남성들을 뇌살한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어느 날 밤, 무슨 소설 재료나 될까 하고 그를 한번 미행해 본 일까지 있다. 이러한 관계로 나는 그날 새벽 각 신문사 사진반 기자들이 마그네슘을 태우는 소리(당시에는 카메라 플래시에 마그네슘을 사용했음-편집자)를 들어가며 한동안 멍하니 서서 그의 명복을 빌었다.

    사진반의 현장촬영이 끝난 뒤 나는 한편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이상순을 붙잡고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으나, 이상순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벌벌 떨고만 있었지 나의 질문에 이렇다 할 대답은 못했다. 하지만 이상산이 그날 밤 잠자리에 드러눕기 전까지 쓸쓸히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는 것과 웨셀이 이상산을 권총으로 쏘고 나서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오 오 마이 달링! 오오 마이 달링!” 하고 영어로 두어 번 소리친 것만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국제 삼각애의 혈제’, ‘개벽’ 1934년 12월호)


    사건이 발생한 이후 중국인 하인은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춰버렸고, 바톤의 침실에서는 이상산의 구두 32켤레와 핸드백 28개가 발견되었다. 이상산의 시신은 화장돼 한 줌의 재로 돌아갔고 이상순은 비보를 받고 고향에서 달려온 어머니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청해의 행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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