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호

인사동 터줏대감, 공화랑 대표 공창호

“최고 화가는 단원 김홍도, 최고 컬렉터는 삼성 이병철 회장”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7-11-08 18: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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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놀라운 기억력과 날카로운 눈을 가졌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옛날 그림과 글에 묻혀 살았다. 수만점의 고미술품을 만지고 보고 느끼기를 40년. 이제 그는 최고의 고미술품 심미안을 가졌다고 칭송받는다. 그러나 스스로는 “아직 멀었다” 한다.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탐구해도 헷갈리는 게 고미술이란다. 옛 향취에 취해 달려온 지독한 고미술 사랑.
    인사동 터줏대감, 공화랑 대표 공창호
    서울 인사동에 한 표구가게가 있었다. 그때는 서화를 사고파는 화랑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이었다. 생각하면 그리 먼 옛날도 아니다. 광복 후 일본인이 제 나라로 쫓겨가고 전쟁이 터지고 ‘재건’(이제 낯선 명사가 됐지만)이 시작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막 끝나갈 즈음이었다. 그 표구가게 앞에는 날마다 멀쩡한 병풍들이 수북이 버려졌다. 그때까지 병풍은 집집마다 두어 틀씩 간수하던 생필품이었다. 제사를 모시거나 혼인이나 돌, 회갑 잔치 때 병풍을 둘러치는 것은 살 만한 집의 기본이었다.

    병풍들이 슬슬 버려진 건 주택구조가 변하면서다. 그때 막 생겨나던 국민주택은 키 큰 병풍을 감당할 수 없었다. 곧이어 나타난 아파트는 더욱 심했다. 무엇보다 평소 병풍을 사용할 일이 사라져갔다. 덩치 큰 병풍을 버릴 데가 마땅찮고 쓰레기꾼이 치워가질 않으니(아니면 쓰레기꾼이 그걸 모아 와서) 표구사 앞에 ‘무단투기’했던 것이다. 표구사 앞을 택한 건 아마도 “여기라면 쓸모가 아주 없진 않겠지…”라고 위안할 수 있는 데다, 버려지는 병풍에도 덜 미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표구점 주인은 눈 밝은 청년이었다. 나이는 스무 나믄밖에 안 됐지만 손도 맵고 눈도 맵고 천부적 감각을 지닌 데다 스승을 섭렵하며 글씨와 그림과 옛글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는 버려진 병풍들을 표구점 안으로 안고 들어갔다. 내용이 궁금해서라도 그냥 버려둘 수가 없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흥미진진하다.

    “산다 하는 집은 병풍이 하나가 아니라 몇 틀씩 있었거든. 돌, 백일, 회갑, 혼인, 제사 때 쓰는 병풍이 다 달랐다고. 병풍, 그게 더러워지기 일쑤란 말이야. 잔치 때 둘러쳐놓다 보면 막걸리도 튀고 고춧가루도 묻고 그럴 거 아냐. 더러워지면 그 위에 다른 그림을 덧바른단 말이야. 한 50년 쓰다 보면 첨에 무게 10㎏이던 병풍이 나중엔 20㎏ 나가는 것도 흔해. 혼자서는 들지도 못해. 그걸 물에 담가놓으면 그림이 한 켜 한 켜 떨어져 올라오네? 맨 위는 솜씨가 엉망인데, 아래에서 추사(秋史 金正喜) 글씨가 턱 올라오는 경우가 있더라고. 추사 글씨 아래 오원(吾園 張承業) 그림이 따라 나오기도 하고…. 그 안에서 삼원삼재-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오원 장승업·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겸재 정선(謙齋 鄭?)·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두셋이 잇달아 나오는 것도 내가 봤다고!”

    노리개, 비녀, 동전패



    횡재도 그런 횡재가 없었다. 횡재이긴 하되, 귀한 서화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지 비싼 돈으로 거래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림과 글씨가 거액에 거래되기 이전이었다. 다만 서로 필요한 사람끼리 알맞은 선에서 나눠 갖곤 했다.

    “찾아오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주로 상궁이나 내시 출신들이야. 직접 오질 않고 사람을 보내지. 입원비가 없다거나 등록금 철이거나 혼사가 있다거나 급하게 목돈을 마련할 일이 생기면 집안에 있던 물건을 들고 나오는 거지. 그때는 풍류가 있었어. 얼마 달라고 하질 않아. ‘알아서 금을 한번 쳐봐요’ 하지. 그러면 대개 후하게 쳐드리지. 별의별 게 다 나왔어. 노리개도 있고 비녀도 있고 자수도 동전패도 있어. 편지, 마패, 교지 같은 것도 나오고 활통, 서안, 책장에 심지어 옥새 같은 것도 돌아다녔다니깐.”

    파는 사람도 뻔하고 사들이는 사람도 뻔하던 한 시절이 지났다. 나라살림이 점차 펴지고 먹고살 만한 집이 늘어나자 고서화시장에도 활력이 붙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 공표구사는 주인 공창호(孔暢鎬·60)의 이름 두 자를 따서 공창화랑으로 이름을 바꾼다. 1970년대 초반 막 화랑이란 이름이 생겨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채권 삽니다, 머리카락 삽니다, 헌 시계 삽니다…” 하면서 골목을 누비던 사람들 있었잖아? 인제 그 사람들이 물건을 모아오기 시작했어. 그걸 일본말로 ‘가이바시’라고 했어. 소위 ‘나까마’라는 중간상인이 나온 것은 한참 지나서야. 그때도 우리 가게 앞에 병풍을 버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다니깐. 외국인이 지나가다 보니 그게 희한하거든? 아코디언처럼 접히는 그림이란 말이야. 1000달러 줄 테니 팔라고 해. 그때 1000달러면 크지. 1970년 초반엔 겸재 작품도 한 3만원밖에 안 했거든.

    인사동 터줏대감, 공화랑 대표 공창호
    1980년 들어와서 고미술 바람이 불었어. 그때 심전(心田 安中植), 오원 그림이 인기였는데 병풍 한 틀에 1억씩 했다고. 그런 그림들은 지금도 그 가격밖에 안 가거든. 이 방에 지금 단원·혜원·겸재·추사·관아재 다 걸렸잖아. 이것 전부를 합하고 저기 청자매병까지 한꺼번에 팔아도 박수근 그림 한 점을 못 사. 그게 말이나 돼? 서양화 한 점 팔고 받는 수수료만으로 고서화 열 점을 살 수 있는 시대가 됐어. 그러니 고화랑 영업이 되겠어?

    그래도 나는 고서화만 고집해. 인사동에 나처럼 여유만만하게 옛날책 읽고 그림 보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난 세상 아무도 안 부러워. 역사상 가장 행복한 사람 0.1%에 들어간다고! 왜냐. 세기적 명품 속에서만 살거든. 내게는 천하절색 여자보다 더 좋은 게 그림이고 글씨야. 한 점 구해놓으면 잠이 안 온다니까. 자다 일어나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지.”

    40년 고미술 고집

    역사가 줄줄이 흘러나오고 울분이 있고 자부가 있고 회한이 있고 기개가 있다. 공화랑 주인 공창호, 40년 넘게 인사동 터줏대감으로 고미술업에 종사했지만 아직 환갑이 채 안 됐다. 돈을 왕창 벌어 조자룡 헌 칼 쓰듯 원 없이 써봤고, 구치소에 갇히기도 했고, 공안사범이나 당하는 모진 고문도 당해봤고, 가까운 이들의 배신도 맛봤다.

    10대 후반에 뛰어든 길이었다. 시대를 뛰어넘어 생명을 이어오는 고서화와 도자기, 공예품들 속에서 살아와 그런지 여러 험한 일을 겪어냈다는 그의 낯빛은 거칠기는커녕 아이같이 말갛다. 공 대표가 흥분했듯 현재 우리나라 고미술시장은 상황이 심각하다. 컬렉터들도 화상들도 다 현대미술 쪽으로만 몰려가버렸다. 이유는 물론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두어 평(6.6m2) 남짓한 그의 방엔 아닌 게 아니라 최고 그림들이 뺑뺑 돌아가며 걸려 있다. 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가리키며 그가 하는 말!

    “여기 ‘蕙園’이 아니라 ‘heawon’이라고 씌었다면 누가 사는지 모르게 오늘 당장 팔려 나갔을 거야. 그것도 10배 값으로! 고미술품은 인제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 10년 전 2000만원이던 걸 지금 1000만원이라 해도 비싸다는 말뿐이지. 단원이 3000만원 하는데 박수근은 30억이잖아? 100배 차이 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거꾸로 되지는 못할망정 비슷하게는 가야지. 그림 보는 안목이 짧기 때문이야.

    서양화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과연 단원의 100배 가치가 있느냐는 거지. 다들 서양 귀신에 붙들려 있어. 당장 입에 단 인스턴트 음식에 맛 들여서 묵은 장맛을 모르는 거지. ‘끈질기게 고미술 하면서 인사동을 지켜줘서 고맙다’는 사람이 가끔 있어. 그런 사람 만나면 살맛이 나지. 나는 고미술에 미친 사람이거든. 돈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니야?”

    공 대표의 외아들 상구씨가 곁에서 말을 거든다. 그는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어려서부터 아버지 곁에서 미술품 보는 안목을 기르다가 고미술품 감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요즘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배운다는, 서른 된 청년이다. 놀랍게도 그 또래의, 아니 그보다 한참 윗대 나이라도, 젊은 세대가 고미술 감정을 공부하는 경우는 전무한 지경이라고 한다.

    “뭐 이젠 화낼 단계도 지났죠. 친구들에게 청자매병을 보여주면 다들 좋다고는 해요. 그러나 값이 2억이라면 다들 ‘아욱!’ 하고 넘어가죠. 차는 2억짜리 아우디를 아무렇지도 않게 타면서 그래요. 고미술품 소장자들은 성향상 작품을 시장에 내놓기를 꺼려요. 유통이 활발해야 시장이 형성될 텐데 그게 안 되죠. 소장품을 시장에 파는 것을 아직 자존심 상하는 걸로 알거든요. 이름을 거론해서 안됐지만 만약 김종학이나 이우환 그림을 여기 단원이나 겸재 그림처럼 걸어놨다고 합시다. 이틀도 못 가서 팔려요. 그런데 이건 지금 3년 동안 한자리에 걸려 있어요. 날마다 들여다볼 수 있으니 공부하기야 좋죠. 빨리 팔려버리면 오래 볼 수가 없을 텐데…하하, 참. 인사동에 아버지처럼 고미술을 고집하고 앉아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늘 이렇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10년 이내에 고미술 활황이 돌아올 거예요.”

    공 대표는 고미술 감정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인자다. 단원을 비롯한 열 명의 친구가 그렸다는 ‘고산구곡도’가 국보로 지정됐을 때 그는 일간지에다 대문짝만하게 그건 위작(僞作)이라는 글을 썼다. 자발적으로 그림동네의 투사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미인도 사건

    인사동 터줏대감, 공화랑 대표 공창호

    위작을 가려낼 방법을 독학한 공 대표는 고미술계 일인자로 통한다.

    “경명주사(붉은빛 물감)로 벌겋게 김홍도라고 씌어 있거든. 그렇다고 김홍도 그림이래. 아니 살아 있는 김홍도가 경명주사로 자기 이름을 쓴단 말이야? 나중에 누가 일부러 쓴 거라고! 1745년 봄 단원을 비롯한 열 사람이 모여서 그렸다고 하는데 말이 안 돼. 그만한 숫자의 사람이 왕래할 수 있던 때가 아니었다고. 오고 간 편지의 내용을 보면 노상 인편에 무슨무슨 반찬 보내줘서 고맙다 그런 것 투성이거든.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대인데 멀리 떨어져 살던 열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그림을 그린다는 게 있을 수가 없는 얘기지.

    동시대를 살던 여럿이 함께 그린 작품이 발견된 게 신기하고 놀라워서 국보로 턱 지정해놓고 나니 이건 뭐 무를 수도 없고…. 선배들이 한 일을 후배가 나서서 고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두는 거라고 지금! 일중(一中 金忠顯) 선생 살아 계실 때 내가 물어봤어. ‘고산구곡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했더니 ‘청부(靑阜·공창호 대표의 아호)가 알지 내가 알아? 허허’ 하시데.”

    고미술품의 세계에서는 대립각을 세워야 할 일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위작인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입을 다물거나 그게 아니라면 원수 질 각오를 해야 할 판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대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른말 하는 쪽을 택했다.

    “한번은 삼일빌딩을 빌려 고미술협회가 대대적인 전시를 했거든. 거기 턱하니 눈깔 박은 물건이 나온 거야. 낙관을 위조해서 나중에 찍는 걸 ‘눈깔 박는다’고 하거든. 허연 노인들이 잔뜩 모인 데 가서 이 그림들 전부 가짜니까 당장 떼어내라고 했지. 난리가 났지. 이미 도록도 나오고 책까지 펴냈는데 그림을 내리면 그런 망신이 없잖아. 안 봤으면 모를까 이미 봤는데 위작을 전시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잖아. 노인들이 입 다물어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걸 그림 안 내리면 매스컴에 다 불어버린다고 했거든. 가만 보니 내가 한다면 할 놈이거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내리더라고.”

    그렇게 미운 털이 박혔다. 덕분에 구치소도 몇 번 들락거렸다. 바른 소리 잘하고 눈썰미 좋고 성미 결곡해 주변에 적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뭐든 가식적인 것은 두드러기가 날만큼 싫어했다. 혼자 들어앉아 위작 가려낼 방법들을 종이가 뚫어지게 연구했다. 그림 위에 이런저런 약품을 발라보기도 하고 불에 태워도 보고 혀를 대어 맛도 보고 칼로 긁어도 봤다. 그는 유난히 오감이 발달한 사람이다. 기억력도 비상해 그림의 족보를 줄줄 꿴다. 그런 공창호의 눈에 가짜는 금방 적발됐다. 왜 가짜인지를 손에 쥐어주듯 설명도 하게 됐다. 그런 공창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좁은 동네인지라 맛 좀 보라고 모함하는 일도 생겼다.

    “내가 이래 뵈도 해외 언론에도 이름이 오르내린 사람이라고. 유명한 윤공재(恭齋 尹斗緖) 미인도 사건에 연루됐거든. 재판을 해봤자 죄가 나와야 말이지. 그러니까 내보내주긴 하는데 무죄라곤 안 하데. 기소유예인지 집행유예인지 그런 딱지를 붙여서 내보내더라고.”

    미인도 사건이란 1980년쯤 언론에 대서특필된 문화재 밀반출 사건이다. 밀반출이 목적이 아니라 보관 상태가 워낙 나빠 일본의 하야시라는 솜씨 좋은 표구상에게 표구를 위해 보낸 것이 탈이 나고 말았다.

    “영화당의 오사섭이라고 있어. 그 친구가 소개를 했어. 미인도가 나왔는데 윤선도 기념관을 보수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그 집에서 나온 물건이래. 나는 물건이 있으면 먼저 족보부터 따지거든. 그 집이 그걸 가질 만한 집인지를 먼저 봐. 족보만 맞춰 올라가면 어김이 없어. 상태는 형편없는데 공재 윤두서 그림이 맞더라고. 1500만원 달라는 걸 1300만원에 사왔지.

    마침 그날 부산서 진화랑을 하던 진의근이 집에 왔네. 이야기를 했더니 제가 사겠다고 졸라. 내가 지금은 안 그렇지만 한때는 아부에 약했어. 그 친구가 술도 사주고 그러니까 그림을 그 값 그대로 넘겨버렸네. 나중 알고 보니 진의근이 그 하야시라는 표구상에게 보냈던 모양이야.”

    꼼짝없는 밀반출로 걸렸다. 고문이 성행할 때였다. 공안사범이 아닌데도 별별 고문을 다 당했다. “나중에 박종철이가 당했던 물고문, 헬리콥터, 한강철교라는 것도 시리즈로 당했어. 미인도를 밀반출했다고 자백하라는 거지. 죽으면 죽었지, 안 한 걸 했다고 할 수야 없지. 버텼어. ‘야, 이 차돌 같은 놈 좀 봐라’ 하면서 악착같이 고문하데. 고문을 당해보니 예전 독립운동하던 투사들 마음을 알겠더라고. 하면 할수록 독해지고 정의감이 불타는 거야. 죽어도 아닌 걸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더라고. 절대 항복을 할 수가 없겠더라고!”

    인사동 터줏대감, 공화랑 대표 공창호

    공 대표는 “오래 봐도 질리지 않고 볼수록 더 좋아져야 명품 고미술”이라고 말한다.

    되레 법정에서 고함을 질렀다. “법치국가에서 힘없는 사람, 억울한 사람들을 공정하게 심판해주려고 법이 있는 거 아니냐? 모함받은 사람을 잡아 가두는 게 법이냐? 지금 거기 앉아 계신 판사님들 젊어서 꿈이 뭐였소? 억울한 사람 편들어주려고 하는 거 아니었소?” 식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했다.

    고문에 지레 손들어버리는 유형이 있고 고문할수록 강인해지는 유형이 있다더니 공 대표는 단연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덕분에 법정 소란죄인가로 더 큰 불이익을 당했을 뿐이지만.

    젊어서는 전국을 돌며 그림을 찾아다녔다. 좋은 그림이 있다는 소문을 접하면 당장 달려갔다. 한번은 상주 어디에 신사임당의 초충도가 있다는 말을 듣고 버스 타고 상주로 내려갔다. 자동차는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이었다. 일단 그 집 사랑에 묵으며 밤에 족보를 캐낸다.

    돼지피로 쓰인 충무공 혈서

    “사임당 그림이 왜 거기 있는지를 알아야 하거든. 하회 류씨인데 5대조가 좌의정을 하면서 한양에 올라가 율곡의 후손과 가깝게 지냈다는 거야. 역사책을 들추고 간지를 짚어 연대를 맞춰보면 딱 맞게 나오거든. 그럴 때 참 기분 좋지.”

    그가 만난 컬렉터 중에 최고는 단연 삼성 이병철 회장이란다. 수시로 그 집을 들락거렸다. 길게 묻지도 않았다. “한번 봐줘” 하면 밤중에라도 달려갔다. “거기 고서화는 내가 다 봐드렸어. 처음 간 건 중앙일보사 3층인데 지금 이건희 회장이 평이사로 있더라고. 날 일본 사람한테 소개받았다는데 고미술을 잘 본다니까 머리가 허연 노인인 줄 아셨나봐. 점퍼때기를 입은 20대 청년이 달려가니까 깜짝 놀라시데.

    주로 내 얘기 듣는 걸 좋아하셨어. 몇 마디만 하면 금방 알아들으시지. 내가 그 집에서 발렌타인 30년을 처음 먹어봤다는 거 아냐. 거참 술맛 한번 기막히데. 따로 감정비를 내는 건 아니고 내가 외국 나간다 하면 빳빳한 새돈으로 300만원쯤 봉투에 넣어주시곤 했어.”

    초창기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을 맡았고, 정부관리 부정 축재자의 미술품 감정도 담당했다.

    “‘진품명품’은 내가 담당 PD에게 만들자고 제안한 프로야. 근데 요새는 보고 있기가 영 답답해서 잘 안 봐. 장영자 사건 났을 때 그 집에 가서 미술품을 감정하라는 명을 받았어. 그때 그 집에 이 충무공 혈서라는 글씨가 있었는데 조사해보니 사람 피가 아니라 돼지피더라고. 아니 충무공이 돼지라는 거야? 전부 가짜였어. 합해서 50억원 정도로 추정하는 것 같아. 그러나 내 눈은 못 속여 합해서 5억원도 안 된다고 했지. 그랬더니 검찰이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거야. 실망이 컸겠지. 값을 더 불러줬으면 했지만 때려 죽인대도 그렇게는 못한다고 했지. 그러니 내가 얼마나 미웠겠어?”

    명성 사건이 터졌을 때 김철호씨 소장 미술품도 감정했다. 역시 거의 가짜였다. 그렇다면 가짜 고미술품이 왜 그렇게 흔한가? 그리고 감정위원도 착각할 만큼 구별(감정)이 어려운 이유가 뭔가? 그에게서 듣는 대답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속여서 팔아먹을 목적으로 가짜를 그린 거야 금방 알지. 그런데 아닌 경우도 흔해. 대원군 난초나 추사 글씨 같은 건 독립운동 자금을 얻으려고 만든 게 많지. 그냥 돈을 달라고 하기는 무색하니까 그림 한 점을 맡겨놓겠다고 하면서 내놓는 거지. 삼원삼재 같은 건 워낙 비싸니까 부담스럽잖아. 아직 검증이 덜 된, 연대가 오래지 않은 걸 내놓는 거지. 위작이라기보다는 방작(倣作)을 한 거야. 노촌 방윤명, 목행산인 윤영기, 소호 김응원 같은 분들이 대필을 한 건데 너무 흡사해서 구별을 잘 못해. 본인 도장, 대필 도장 따로 놓고 썼다고. 그런 걸 다 가짜라고 하는 것도 문제 있거든. 이런 경우도 있어. 아들은 다섯인데 집안에 내려오는 병풍은 하나밖에 없다고 쳐봐. 나머지 넷에겐 똑같이 그려서 나눠주거든. 가짜를 만든다기보다는 본떠서 그려준 거지.”

    찾는 건 ‘1% 가짜’

    그는 털끝 한 올의 차이를 짚어내고 미묘한 먹색의 뉘앙스를 동물적으로 감지할 줄 안다. 그걸 타고난 감각이라고만 말할 것인가. 아니다. 공부다. 그것도 어려서의 공부다. 공부가 감각을 길렀다. 고미술 감정 공부의 첩경은 ‘어찌 됐건 그림을 많이 보는 것, 예민한 젊은 나이에 보는 것, 직접 모사해보는 것’이다. 부지런함, 치밀함, 기억력 같은 건 나중 문제라는 것이다.

    체구가 우람하진 않지만 그에겐 대인의 풍모가 있다. “한때 장안의 술집 스무나믄 곳은 내가 먹여 살렸다”고 호기롭게 자랑하는 배포도 그렇고, 인정 많고 친구 많고 눈물 많고 신명 많은 기질도 그렇다. 특히 고미술 감정에 관한 말이 나오면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할 말이 산더미다. 건드리면 자동으로 쏟아지는 건 감정계의 병폐를 지적하는 탄식이지만 포기하지도 실망하지도 않으려 한다.

    “죄에도 세 종류가 있어. 가짜를 진짜라고 하는 건 죄지만 작은 죄야. 살 사람에게 금전적 손해를 입히는 것뿐이잖아. 진짜를 가짜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큰 죄야. 한번 가짜 판정을 받으면 암만 명품이라도 이 동네에서 죽어버리거든. 지하에 계신 그림 그리신 분이 얼마나 통곡을 하시겠어? 그리고 우리 문화 전체에 손실이잖아? 그보다 더 큰, 제일 큰 죄가 뭔 줄 알아? 안목도 없으면서 양심을 속여가며 진짜 가짜를 판정하는 행위지. 차라리 모르겠다고 하면 좀 좋아? ‘판단 보류’도 감정의 한 방법이거든.”

    실제로 진품을 가품이라고 판정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같은 작가라도 청년시기가 다르고 노년이 다르고 술 취했을 때가 다르고 병후가 다른데 기준에 맞지 않으면 ‘僞’라는 판정을 내릴 수 있다.

    “나야 신난다니깐. 그림장사 20년 넘게 한 사람이 그런 걸 내게 가져와서 하소연할 때가 있어. 얼마 주고 샀는데 가짜라고 판정 나서 속이 상하다 그래. 그럴 때는 아무 말 않고 나한테 넘기라고 하지. 안 팔릴 걸 팔아주니 고맙다 소리 들어 좋고 희귀한 그림 가질 수 있어서 좋고! 저기 걸린 저것도 그런 작품이야.

    상태가 아주 깨끗하면 또 가짜라고 한단 말이야. 책갈피에 끼워져 있거나 하면 수백년 전 것도 손상 없이 색이 바래지도 않고 깨끗한 물건이 나올 수 있거든. 좀 좋아? 그런 작품 만나면 나야 6개월이 기분 좋지. 그러나 진짜를 가짜라고 판정하는 감정위원이 자꾸 나오면 되겠어?

    고미술은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탐구해야 돼. 한눈에 봐서 가짜면 그건 문제도 안 되잖아. 99%는 진짜처럼 보이는데 나머지 1%가 가짜인 거, 그걸 찾아내자니 눈이 밝아야 한다는 거지. 감정위원도 앞으로는 국가 자격시험 쳐야 한다고! 그러나 자격시험이고 뭐고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공화랑 안에 ‘대동문화재연구소’라는 간판을 겸해서 걸어둔 건 감정법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싹수 있는 학생이 거의 없어 지금은 문을 닫은 상태다. 학자들, 특히 미대 교수들을 대상으로 다시 강좌를 열어볼 계획을 잡고 있다.

    공 대표는 어려서부터 그림과 글씨를 좋아했다. 재능도 있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천안으로 피난간 뒤 그곳에서 살아 초등학교는 천안에서 다녔다. 견지동에 살 때 윗집에 임창순(靑溟 任昌淳) 선생이 사셨다. 거기 가서 한문을 배웠다. 검여(劍如 柳熙綱) 선생과 일중 선생 문하에서는 서예를 배웠다.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은 스무 살 무렵 임창순 선생에게 확인받았다.

    ‘살아 있는 데이터베이스’

    “연구실에 들렀더니 마침 추사 글씨를 보고 계셔. ‘어떤가?’ 하시기에 보이는 대로 대답했어. 추사가 아닙니다. ‘추사라면 글씨가 종이에 꽉 박혀야 하는데 이건 떠 있습니다. 비백과 골격과 흐름과 속도감이 맞질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 추사는 여러 글자를 보면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한 글자씩 봐야 합니다. 크건 작건 글자마다 경솔하게 넘어가는 분이 아닙니다. 잘못 쓰면 곁에다 다시 고쳐 쓰더라도 힘이 없이 그냥 넘어가질 않습니다’ 했더니 놀라서 날 이렇게 쳐다보셔.”

    단숨에 인정을 받았다. 그렇지만 서예전 같은 곳에 출품하지는 않았다. 입상에 따라다니는 뒷말들이 끔찍하게 싫었고 그런 걸 유독 못 견뎌하는 성미였다. 대신 표구사에서 화랑으로, 화랑주인 겸 감정가로, 평생을 고서화 곁에서 살았다.

    평생을 닦아온 안목이고 감각이었다. 사람은 눈이 열리면 다른 감각도 덩달아 예민해지는가. 아니 거꾸로 원래 타고난 감각이 날카롭기에 심미안이 따라오는 것인가. 아무튼 그는 미각과 후각과 청각뿐 아니라 기억력까지 남달리 발달한 사람이었다.

    “진짜 조선간장을 쓴 건지 아닌지 혀에 대보면 금방 알지. 생선도 양식인지 자연산인지 척 보면 알거든. 수족관에 담아놓은 걸 보면 빛깔부터 달라. 한번은 어떤 섬에 회 먹으러 갔다가 수족관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고 ‘이거 자연산 아니잖아?’ 했더니 주인이’ 서울 사람은 다 속던데 어떻게 알았지?’ 그러잖아.”

    한번 훑고 지나가는 풍경은 죄다 입력된다.

    “그래서 안 봐도 좋을 것을 너무 많이 봤어. ‘너 어제 세검정 어떤 곳에서 나오더라. 그런데 드나들면 되나. 조심해 임마’ 하면 깜짝 놀라지. 남들은 날더러 뒤꼭지에도 눈이 달렸다고 그러지.”

    전화번호 메모도 안 해봤다. 듣는 족족 머릿속 메모리칩에 저장된다. 그래서 휴대전화가 나오기 이전엔 친구들이 그에게 전화해 남의 전화번호를 물어보기 일쑤였다.

    수십년 만에 만나는 사람도 척척 알아본다. 그와 얘기하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이야기가 종횡무진 튀어 다닌다. 그뿐 아니라 세부 묘사가 몹시도 정밀하다. 무슨 옷을 입었고 며칠에 무슨 요일이었으며 만난 사람 이름과 얼굴형과 키가 어떤지가 정확하게 다 나온다. 그건 생각의 속도가 빠르다는 뜻이고 디테일을 사진 찍듯 장면 단위로 입력해 기억한다는 뜻이다.

    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는 인간만큼 예민한 ‘기계’가 없어 안목 감정이 최고라고들 말한다. 공 대표야말로 전형적인 감정가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임이 확실하다. 그러니 인사동에 들어오는 웬만한 물건들은 대개 그의 눈을 거쳐갔다. 국내에서 거래되는 고서화는 그의 손을 거쳐간 게 얼추 70%는 될 거라고 자부한다. 1년에 20점만 잡더라도 30년 역사에 600점은 족히 될 터이니 그를 고서화계의 살아 있는 데이터베이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볼수록 좋아야 명품

    “감정을 배우겠다는 학생이 있으면 자꾸 말을 시켜. ‘자, 단원의 이 그림이 어떠냐?’고 물어. 그러면 대개 ‘좋아요’ 그래. 어떻게 무엇이 좋으냐고 또 물어. 자세히 보게 하는 거지. 대개 눈은 붓 끝으로 한번 툭 건드려서 그리거든. 그런데 그 시선이 묘하다고! 시선의 각도가 어디로 가 있는지 나이가 몇인지 신분이 어떤지 지금 그 사람의 감정이 어떤지가 그 한 번 툭 건드린 먹색 안에 다 들어 있어. 그렇게 그려야 대가거든.

    단원 같은 분은 얼마나 훌륭하게 그걸 해냈는지 몰라. 난 연애하는 것보다 그림 보는 게 더 좋아. 그림도 사람하고 똑같다니깐. 처음 볼 땐 그냥 그렇다가 자꾸 보면 예뻐 보이는 사람이 있고, 처음 볼 땐 산뜻하고 예쁘다가 자꾸 보면 질리는 사람이 있지? 그림도 똑같아. 오래 봐도 질리지 않고 볼수록 더 좋아져야 명품이지. 팔등신이 미인이라고 하듯 미술품도 그런 비례가 있지. 그게 딱 맞아떨어져야 명작이라고 하거든.”

    가장 좋아하는 화가를 물었더니 역시 단원이란다. 그는 산수도 인물도 화조도 심지어 춘화까지 미치지 않은 데가 없는 진정한 천재였다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붓을 다 직접 매서 썼거든. 계호는 닭털이고 양호는 양털이고 황모는 족제비 털인데 귓속에 난 털을 그릴 때는 그 털을 빼서 붓을 매서 썼어. 댓잎을 그릴 때는 죽필을 쓰고 음부를 그릴 때는 음모를 모아서 붓을 맸거든! 그러니 춘화첩을 남긴 단원의 붓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자못 궁금하단 말야, 하하.”

    그림을 볼 때는 당시 역사와 화가의 특징과 붓 쓰임뿐 아니라 지질, 안료, 먹, 벼루, 낙관을 다 염두에 둬야 한다. 가짜를 가려내는 방법을 공 대표가 독자적으로 개발하기도 했다. 화학 안료는 지워지고 천연 물감만 남는 특수 약품도 찾아냈고 종이를 구별하는 매뉴얼도 만들었다.

    “가짜가 단순하게 가려진다면 감정이 쉽게? 종이는 300년 묵은 건데 그림만 새로 그린 것도 있고, 옛날 그림에 낙관만 요새 찍은 것도 있지. 그러니 한둘만 알아서는 구분이 안 되는 거라고.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런 지엽적인 게 아니라 무엇보다 그림에 발현되는 작가의 정신이지. 그걸 읽을 줄 알면 세부는 사실 중요치 않거든. 철학과 기개와 인품이 담겨 있나 없나를 보는 거지.

    이우환이란 화가가 점 하나 그어놓고 수억원에 팔잖아. 나는 그게 타당하다고 봐. 거기 정신이 담겨 있거든. 철학과 문학이 다 들어 있다고. 아무나 점 하나 찍는다고 그렇게 될 것 같아? 어림없지. 그 인간의 무게가 담기지 않으면 그 점이 풀풀 날아버리지 그렇게 꽉 박힐 수가 없는 거라고. 그 사람 서예를 아는 사람이야.“

    인사동 터줏대감, 공화랑 대표 공창호
    김서령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 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저서 : ‘김서령의 가’


    이우환에 대한 칭찬인 줄 알았더니 고서와 옛 그림에 대한 에두른 찬미다. 현재의 문화재보호법이 문제 있다고 논리정연하게 얘기한 건 공 대표의 아들 공상구씨였던 것 같다. 100년 이상 된 작품이 해외로 반출되면 무조건 문화재 밀반출로 잡혀가는 건 문제라는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가치 있는 것은 확실히 지정해두고 그 외의 작품들은 해외에 우리 문화를 알릴 목적으로라도 팔 수 있는 길이 뚫려야 고서화의 가치도 높아지고 시장도 성장한다는 주장이다. 이제 국가 장벽은 이전과 다르다. 우리 미술품을 우리끼리만 끼고 앉아 있는 것이 반드시 애국인지를 재검토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인사동 공화랑, 우리 고미술시장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증인, 거기 단원과 겸재의 그림 대신 서양화가 가득 채워지지 않기를 빈다. 고미술 전문 화랑이 이렇게 쓸쓸해서야 진정한 현대일 수 없다. 미술품 옥션의 매출액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지만 근대 동양화는 꽁꽁 얼어붙고, 젊은 현대작가들의 작품들만 수직상승한다. 심각한 불균형 현상이다. 이래서는 미술계에 르네상스가 왔다고 말하기 어렵다. 고서화의 미와 가치에 관심을 두는 이가 더욱 늘어나 고집 세고 외롭고 막무가내인 공창호 회장, 평생을 인사동에서 늙어가는 그가 드디어 신명을 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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