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호

신경림 시인의 남북정상회담 동행기

자부심, 부끄러움 솔직하게 드러낸 ‘유연한 北’

  • 신경림 시인, 동국대 석좌교수 skyungrim@paran.com

    입력2007-11-12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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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경림(申庚林·72) 시인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10월2일부터 4일까지 열린 남북정상회담에 동행했다. 2년 전 남북작가회담 때 평양을 방문한 바 있어 감회가 더욱 새로웠을 터. 시인의 눈으로 보고 느낀 북한의 속살과 남북정상회담 뒷이야기.
    신경림 시인의 남북정상회담 동행기

    노무현 대통령을 환영하는 평양 시민들(위).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10월2일 방북한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 4·25문화회관 앞 광장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마중 나온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2007남북정상회담에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참가해달라는 제안을 수락하고, 방북에 동행하면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진 대목은 대통령이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이었다. 특별수행원들도 함께 걸었으면 하고 기대했지만,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적어도 구경은 할 수 있겠지’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는 역사적인 그 시간에 먼저 출발한 우리는 이미 개성을 지나 평양-개성간 고속도로에 들어서 있었고, 그 역사적 현장은 그날 밤 평양의 보통강 여관에서 텔레비전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흑백사진처럼 익숙한 풍경

    버스를 타고 개망초꽃이 다닥다닥 피어 있는 군사분계선을 넘는 감회도 작은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육로로 평양을 간다는 일은 생각도 못한 터였다. 대체로 북쪽이 드러내기를 꺼리는 것으로 알고 있던 깊고 외진 마을들을 보게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이미 가슴이 설다. 사회주의 혁명 속에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쪽 문화에 전통을 중시하는 풍조도 없지 않으니 혹 옛 모습이 제대로 보존된 곳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군사분계선을 넘으니 길가에는 남쪽과 조금도 다름없이 코스모스가 한창이었다. 조금 헐벗은 느낌 외에 전혀 다른 것이 없는 우리 땅이었다.

    이내 출입국관리소가 나왔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간단한 검색을 받은 뒤 그곳을 통과했다. 북쪽 안내원 셋을 새로 태우고 출입국관리소를 나오자 바로 개성공단이었다. 많은 환영객이 길에 늘어서서 “우리는 하나” “조국 통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쪽 근로자들이라는 설명이었는데, 문득 이번 회담이 성공적이기를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적 공업도시인 개성공단을 빠져나오니 필름을 되돌린 것처럼 풍경이 바뀌었다. 흑백 사진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개성시내는 마침 출근시간이었다. 많은 사람이 오가며 손을 흔들어 환영했는데, 하얀 저고리 검정 치마 차림의 처녀가 유난히 많았다. 하얀 옷고름이 검정 치마의 아랫단까지 길게 늘어진 아름다운 조선옷이었다.

    두셋씩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가는 처녀가 많았고, 대개는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걷는 처녀도 있어 왠지 연출 냄새가 짙다고 생각했는데,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평양에 와서 확인했다. 보통강 여관에 짐을 풀고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다리에서 길을 걸으면서 책을 읽는 30대 여인과 학생을 보았기 때문이다.

    개성은 너무 오랫동안 손을 안 본 채 버려진 마을 같은 느낌을 주었다. 고도(古都)다운 창연한 맛도 없었다. 하지만 안개 속에서 날카롭게 바위 능선을 세우고 고도를 옹위하고 있는 송악산은 그 명성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개성을 벗어나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간간이 저만치 물러나 앉은 시골 마을들이 나타났다. 대체로 어둡고 활기가 없어 보였으나, 고목으로 둘러싸인 예스러운 마을도 없지 않았다. 밭은 콩밭이 주인데, 작황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지난 수해가 1960년대 이래 가장 큰 수해라고 했지만 다행히도 수해의 흔적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남쪽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둘러 복구 작업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활기찬 평양 거리

    산에는 나무가 적고, 야산은 밭으로 개간된 흔적이 보였는데, 과수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요즈음은 계단식 밭에 과수를 많이 심는다고 안내원이 설명했다. 산도 푸르게 만들고 수해도 방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수들이 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직 제대로 수확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고속도로라고는 하나 노면이 고르지 않은지 차가 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남쪽이나 마찬가지로 코스모스며 쑥부쟁이가 가득 핀 길은 아름다웠고 멀리 보이는 험준한 산들은 낯설지 않았다. 특히 예성강이 있는 남천 일대는 그대로 절경이었다. 다만 산에 나무가 좀더 많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신경림 시인의 남북정상회담 동행기

    노무현 대통령은 10월4일 평안남도 남포시 서해갑문을 방문했다. 북한은 서해갑문을 맨손으로 건설한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개성서 평양은 채 두 시간이 안 되는 거리였다. 소흥군 수곡휴게소에서 잠시 쉰 다음 내달리니 이내 평양이었다. 수곡휴게소에서는 성장(盛裝)한 미녀들이 나와 서서 우리들에게 북쪽에서 ‘단물’이라고 말하는 주스류를 대접했는데, 모두들 평양에서 뽑혀온 처녀라 했다. 평양-개성간 고속도로를 지나면서 한 가지 특기할 대목은 지나는 터널마다 제대로 불이 켜져 있었다는 점이다. 작은 개울물 등을 이용한 소규모 수력발전시설이 많이 건설되어 전기사정이 조금은 나아졌다는 것이 안내원의 설명이었다.

    평양 시내에 다 와서 비로소 대통령 일행과 동행이 되어 시내로 들어갔다. 대동강을 건너는 3대 헌장탑 앞에서부터 환영 인파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중심지로 가까이 다가가면서 인파는 완전히 거리를 뒤덮었다. 모두들 정장을 했고, 손에는 진홍·분홍·자줏빛 조화를 들고 있었다. 그 조화를 흔들면서 “겨레는 하나” “조국 통일” “만세” 등을 소리 높이 외친다. 펄쩍펄쩍 뛰는 사람도 있다.

    뒤에 들으니 이날 나온 인원이 총 40만명이라 한다. 열렬한 환영이 고맙기는 하면서도, 이들이 20리, 30리 밖에서 일부러 모여들었을 것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더러는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왔을 것이다. 교통수단도 마땅치 않으니 대개 걸어왔겠지. 화장실 시설도 충분하지 못하다고 들었는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환영인파 사이를 지나는 시간이 길었던 것은 대통령이 환영 나온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함께 무개차를 타고 환영에 답하면서 행렬 사이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환영회장은 4·25문화회관 앞 광장이었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도착해서 우리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열 등 공식 행사가 다 끝나갈 무렵 김정일 위원장이 우리가 서 있는 자리로 왔다. 특별 수행원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나누는 그의 얼굴은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았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잡는 그의 손에는 힘이 있었고, 카리스마보다는 친근감이 더 많이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소탈하고 활기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행사를 마치고 특별 수행원 숙소로 정해진 보통강 여관으로 가면서 보니, 2년 전 남북작가대회에 왔을 때에 비해 궤도전차도 많아지고 행인도 많아져 거리가 훨씬 활기차 보였다. 고목이 다 된 아름다운 버드나무로 뒤덮인 평양은 곳곳에 호수가 있고 강이 흘러 마치 버드나무 숲과 호수 사이에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건물들은 거대하고 웅장하다. 그 벽에 크고 붉은 글씨로 가장 많이 씌어 있는 구호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와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북쪽의 생활철학이요 삶의 가이드라인이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 생활철학과 가이드라인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대화를 하고 화해를 하자고 온 것이니까.

    이데올로기 예술의 한계

    보통강 여관은 서해갑문으로 해서 호수처럼 되어버린, 버드나무가 줄지어 선 아름다운 보통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짐을 풀고 로비로 내려오니 가까운 호숫가를 산책해도 좋다고 호텔 경비원이 알린다. 이태 전 남북작가대회에 와서 고려호텔에 묵었을 때는 호텔 밖으로 나가는 것이 일절 허용되지 않았던 터라 잠시 어리둥절해 있는데, 다만 다리를 건너 강 건너까지 가서는 안 된다고 단서를 단다.

    떼를 지어 다리까지 200여m를 가니 거기에도 경비원이 서 있다. 다리 위에서 사진 한 장 찍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선선히 그러라고 한다. 북쪽은 그만큼 유연해진 것 같다.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30대 여인이 책을 펴 들고 지나간다. 무슨 책인가 보려 했지만 여인이 재빨리 책을 감추고 지나가는 바람에 보지 못하고 말았다. 얼마 뒤 한 학생이 역시 책을 읽으면서 가기에 무슨 책이냐고 물으니까 표지를 보여준다. 주체사상에 관한 책이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이곳도 날씨가 자주 변해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오고 천둥 번개가 치고 한다는 것이 안내원의 불평이었다. 오전에 인민문화궁전에서 북쪽 인사들과의 좌담회가 있었다. 북쪽에서 나온 인사 가운데는 2005년의 작가회담 때 만난 장혜명 시인이 있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먼저 그때 만들어진 6·15민족문학인협회의 활성화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작품과 작가의 교류를 더 확대하고 더 활발하게 하자면 자주 만나야 하는데, 금강산이나 옌볜 혹은 베이징에서만 만나다 보면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서울이나 평양에서 다 같이 가까운 개성을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자는 의견에 그도 적극 찬동했다. 개성이라면 어느 쪽이나 하루로 일이 마무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경림 시인의 남북정상회담 동행기

    북한의 아리랑 공연 모습. 이 공연은 인간이 어디까지 자기희생적, 집단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개성에 공동 공연장을 만들자는 주장도 우리 쪽에서 나왔고, 남쪽에는 없는 백두산의 소나무 목재를 남쪽의 고궁을 보수하는 데 쓰게끔 해달라는 주장도 나왔다.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이날 좌담회는 상호 의견 제시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정치적 해결이 우선돼야 할 사항이 많았기 때문이다.

    좌담회가 끝난 뒤 김원균 명칭 음악대학을 참관했는데, 젊은이들이 기예를 열심히 닦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600석의 대강당이었는데 마침 교향악단의 연주와 소프라노, 알토의 실연이 있었다. 모두들 기능에서는 떨어지는 데가 없어 보였지만, 아무래도 이데올로기를 지향하는 예술의 한계 같은 것은 극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느낌은 오후에 만수대 창작사를 방문, 여러 공훈 화가들이 직접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면서도 받았는데, 한쪽 벽에 붙은 김정일 위원장의 훈시가 북쪽 예술의 성격과 한계를 잘 말해주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화폭에 등장시킨 모든 사람이 수령님을 우러러보는 것으로 하여야 하며, 군중을 수령님의 영상 뒤에 비치하여야 합니다.”

    易地思之 발상 필요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서 한 점심에는 노무현 대통령도 잠시 참석했다. 그 동안의 경위를 얘기하는 그는 피로한 빛이 역력했다. 아직도 불신의 벽이 너무 높다는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북쪽이 좀체 남쪽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악한 국제환경 속에서 생존하자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 같다면서, 그렇더라도 우리는 화해와 협력의 끈을 놓지 말고 신뢰를 쌓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힘과 대결의 시대를 극복하고 평화와 공존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발상이 필요하다는 말도 했다.

    예컨대 북쪽에서는 남쪽에서 말하는, 남쪽의 자본과 북쪽의 저렴한 임금이 결합되는 경제협력 같은 말을 가장 싫어한다고 한다.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어서다. 또 우리가 예사롭게 말하는 ‘개혁’ ‘개방’이라는 단어에도 반감을 갖는다. 이 말 뒤에는 흡수통일에의 유혹이 있다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경협이나 개혁 개방 같은 문제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김정일 위원장의 평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점심 뒤의 모란봉 산책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점심 먹으러 오는 차 안에서 누군가 평양까지 와서 그 유명한 모란봉을 가보지 못하고 돌아가면 말이 되겠느냐면서 안내원한테 식후 모란봉 산책을 제안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평양에 여러 차례 온 적이 있는 한 수행원이 이런 일은 전에는 있을 수 없었다면서 이것을 북쪽이 많이 유연해진 증거로 들었다. 우산을 쓰고 오른, 늙은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둘러싼 모란봉의 을밀대에서는 대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지만, 그 건너의 아름다운 평양 거리는 안개에 가려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국보 유적 19호로 지정된 을밀대는 6세기경 고구려가 평양성을 축성하면서 내성(內城)의 장대(將臺)로 쌓은 것이라고 안내판에 씌어 있다. 또 을밀대에서는 바로 발 아래로 웅장한 영명사(永明寺)가 내려다보이는데, 31본산의 하나인 이 절은 대동강이 범람만 하면 제일 먼저 물이 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데도 왜 굳이 그곳에다 절을 지었는지에 대한 안내원의 설명이 재미있다. 평양 사람들의 어려움을 제일 먼저 겪는다는 살신(殺身)의 정신이 이곳에다 절을 짓게 했다는 것이다.

    이어 만수대 창작실을 방문해서 화가들이 직접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관람했는데, 모두들 빼어난 솜씨의 화가로 보였다. 하지만 너무 사실에만 충실한 나머지 자신의 관점과 생각은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중공업관을 참관하고, 오늘의 하이라이트라 할 아리랑 공연을 보러 갔다.

    인간 한계에 대한 거대한 도전

    아리랑 공연 관람은 서울서부터 말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체제 선전의 집단체조와 예술을 관람한다는 것은 체제 인정이 아니냐 하는 시비였다. 내가 특별수행원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한 후배 시인이 이런 질문을 해왔을 때 나는 대답했다.

    “손님을 초대한 주인이 자기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을 보여주겠다는데 그 내용이 마음에 안 들어 안 보겠다면 아예 안 가느니만도 못한 일이 아니냐, 또 대화하자고 하는 자체가 상대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새삼스럽게 체제 인정 운운이 어떻게 문제가 되겠는가.”

    아리랑 공연장인 5·1경기장은 수용인원 15만으로, 한마디로 거대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비로 인해 공연이 오후 7시반에서 8시로 연기되어 예정보다 조금 늦게 공연장으로 들어가니 이미 공연장은 우리 자리만 빼놓고 만석이다. 좀 뒤에 대통령 내외가 김영남 위원장과 함께 들어오자 모두 일어나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이어 벌어진 공연은 오직 놀라울 뿐이었다. 개중에는 인민 배우, 공훈 예술인 그리고 인민 체육인 등 프로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 아마추어요 어린 학생들이라 했다. 그런데도 저 많은 출연자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일사불란하게 기량을 뽐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연 인원이 1만명은 돼 보였는데 집단 체조와 춤과 노래가 번갈아 펼쳐지는 어느 한 장면 어느 한 구석 빈 곳이나 빠지는 곳이 없었다.

    저 정도 하기 위해서는 피눈물 나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했을 터이다. 특히 어린 학생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그것을 가지고 이 공연의 비인간성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이 공연은 인간이 어디까지 자기희생적, 집단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읽히며, 인간의 한계에 대한 거대한 도전으로 읽힌다. 또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대목도 있다.

    공연 도중 우리는 두 번 기립 박수를 했다. 주인들이 일어나자 우리도 예의로서 따라서 일어섰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장면이 가까울 무렵 일어섰을 때는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나왔고, 뒤에 이것이 시빗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빗거리가 될 수 없다. 주인이 먼저 일어나면서 함께 박수 좀 치자는데 손님 된 처지로 어찌 그것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무슨 노래가 나올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연은 90분 정도 계속되었다. 끝나고 공연장을 나오니 10시가 가깝다. 평양 시내로 들어오면서 보니 옛날에 비해 불이 켜진 아파트가 꽤 많다. 가로수에 꼬마전구들이 매달려 반짝이는 풍경은 이전에는 짐작도 못했던 일들이다. 대통령이 베푼 만찬 자리에서 대통령은 지금이 화해와 협력을 위한 획기적 기회가 될 것이며 함께 번영을 누린다면 동북아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요지의 얘기를 한다. 자신에 찬 목소리다. 대화에 상당한 진전이 있어 이제 정리하고 서명하는 일만 남았다는 얘기가 들린다.

    맨손으로 일군 역사적 구조물

    마지막 날엔 한 시간을 앞당겨 스케줄이 시작되었다. 먼저 남포에 있는 평화자동차종합공장 참관이다. 공장은 남쪽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생산과정이 뒤떨어져 있는 듯 보였지만, 북쪽은 남의 손을 조금도 빌리지 않고 자기 손으로 자동차를 만드는 데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남포는 서해갑문이 완성된 뒤로 거대하고 아름다운 물의 도시로 바뀌었다 한다. 교외에는 염전도 많고 논에는 볏단이 묶여 있는 것이 영락없는 우리 시골 풍경이다. 시내로는 구석구석 물이 들어와 있어, 배를 젓고 가는 여인네도 심심치 않게 보이면서 평양보다도 더 활기에 차 있었다. 국수집, 양복집, 리발소, 찻집의 간판이 보이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여 서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든다.

    서해갑문은 1981년에 시작하여 1985년에 완성된 남포와 은율 사이 8km의 대동강을 막아 만든 갑문이다. 공사 기간 중에 이곳을 방문했던 재미학자 선우학원은 ‘대동강의 기적’(북한 방문기 ‘분단을 뛰어넘어’)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갑문 공사가 끝나면 갑문에서 순천군까지 대동강이 운하의 형식으로 커지고 점차로 원산까지 운하로 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동해와 서해가 운하로 연결된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몇 십년 후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실지로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보는 사람은 누구나 동감할 수 있는 것은 남포 갑문이 끝나면 서해안 일대의 지도는 바뀐다는 것이다. 대동강물을 이용해서 개간 도중에 있는 30만 정보가 논이 되고 그 지방의 음료수는 물론 공업용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 부근의 경치는 말할 것도 없고 수상교통에 일대 변동이 생기고 제방을 이용해서 철도가 건설되어 남포와 황해도 은율이 연결되어 황해도 일대가 개발될 것이라 한다. 남포와 직결된 것이 30만 정보의 간척지 개간사업이다. 30만 정보가 준공되면 그것은 전라북도의 경작지 면적과 맞먹는 큰 땅이 생긴다. 거기에 대동강 물을 이용하고 또 태천발전소의 전력을 이용하여 알곡 400만t 생산을 계획하고 있다.”

    우리에게 보여주는 서해갑문 관련 영상물은 이 계획이 거의 성공했음을 말해 준다. 한편 재미있는 것은 영상물 속의 갑문 완공 축하식에서 군중이 손에 들고 흔들던 조화가 우리가 평양 들어오면서 본 환영 군중의 손에 들린 조화와 조금도 다름없다는 점이었다.

    과연 전망대에 올라가 바라보는 갑문 일대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그러나 이 갑문으로 해서 물이 쉽게 빠지지 않으면서 올해의 수해를 배로 키웠다는 소리도 들리는데, 확인할 길은 없었다. 여하간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이와 같은 역사적인 구조물을 세웠다는 것을 북쪽은 자기들 체제만이 해낼 수 있는 일로, 크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내년 여름 다시 한번 오십시오”

    김정일 위원장의 송별 오찬은 1시에 백화원 초대소에서 있었다. 대통령과 헤드테이블에 앉아 연신 웃으며 큰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는 그의 표정은 환영식 때보다 훨씬 밝았다. 우리는 위원장과 두 번 잔을 부딪쳤는데, 한 번은 우리가 그의 테이블로 갔고 한번은 그가 포도주잔을 들고 모든 테이블을 돌았다. “시인입니다” 혹은 “대학 교수입니다”라고 소개를 받으면 그는 악수를 하면서 그냥 지나치지 않고 “불편하신 데는 없었습니까” 혹은 “내년 여름 다시 한번 오십시오” 하고 한마디씩을 덧붙였다. 그의 표정에서 건강이 나쁘다던지 7년 전에 비해 대접이 소홀했다는 등의 서울에서 나오는 신문의 기사를 읽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신경림 시인의 남북정상회담 동행기
    신경림

    1935년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 영문학과 졸업

    ‘문학예술’에 시(詩) ‘갈대’로 등단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現 동국대 석좌교수, 만해마을 대표

    저서 : 시집 ‘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산문집 ‘민요기행’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등


    백화원 초대소를 빠져나오자 다시 거리는 조화를 든 환송 인파로 넘쳤다. 환송행사를 마치고 조국통일 3대 헌장탑 앞을 통과해서 평양을 나오니 이미 5시가 넘었다. 이때 문득 까맣게 놓치고 있던 일이 생각났다. 2박3일 동안 그렇게 여러 군데를 다니면서도 어린이를 거의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아리랑에 출연한 어린이들은 빼고서 말이다. 공교롭게도 그들의 등하교와 시간대가 어긋나서였을까. 되든 안 되든 학교 방문을 한번 요청해볼 걸 그랬다 하는 후회도 했다.

    개성 공단을 거쳐 파주에 이르러 환영행사장으로 들어가니 수행원석 옆에 밝고 환한 얼굴의 어린이들이 한 떼 모여 서서 웃고 떠들고 장난질을 치고 있다.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나는 가까스로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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