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호

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고구려 동천왕, 위나라를 공격하다

  •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입력2016-12-20 17:3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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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이 삼국시대(위·촉·오)→진→5호16국으로 이어지던 시기, 고구려는 그들과 때로는 통교하고 때로는 전쟁했다. 선공에 나서기도 하고, 수도가 함락당하기도 하는데…
    동한(東漢) 말 흉노와 선비 등 새외(塞外, 만리장성 바깥)민족의 중원 유입은 한층 더 늘어났다. 선비족은 랴오닝에서 내몽골을 거쳐 칭하이까지 동서로 길게 띠를 두르고 거주했다. 남흉노와 갈족(羯族)은 대체로 선비족보다는 남쪽인 산시(山西, 병주), 산시(陝西, 관중), 간쑤 서부(서량) 지역에 흩어져 살았고, 저·강족(氐羌族)은 싼시 서부와 간쑤 동남부(롱)에서 쓰촨(파촉)을 거쳐 윈난(남중)까지 이어지는 서부 벨트에 주로 살았다. 후난, 저장, 푸졘을 비롯한 창장(長江, 양쯔강) 이남 지역에는 산월(山越)과 무릉만(武陵蠻) 등 좡족(壯族)과 투자족(土家族), 먀오족(苗族) 등의 조상이 거주했다.



    조조, 유비, 손권과 고구려

    이런 상황에서 황건군이 봉기하자 동한 왕족을 비롯한 한족의 지배 체제는 약화됐다.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의 건국자는 공히 황건군 토벌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 위나라 창건자 조조(155~220)는 황건군 토벌을 통해 지위와 명성이 높아졌으며, 촉을 세운 유비(161~223)는 한미(寒微)한 가정 출신인 터라 황건군 토벌전에 가담하지 않았더라면 군벌로서의 입지조차 구축할 수 없었다. 오나라 건국자 손권(182~252)의 아버지 손견은 황건군 토벌을 통해 아전(衙前) 신분에서 일약 군벌로 성장했다.

    조조는 원소, 여포, 마초, 장로 등 군벌과 오환(烏桓)족, 저(氐)족을 제압하고 화북을 통일했다. 이 같은 조조의 동정서벌(東征西伐)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분열을 피할 수 없었다. 조조는 죽을 때까지 파촉의 유비와 강남의 손권을 멸망시키지 못했다.

    화북과 파촉은 친링(秦嶺)산맥, 화북과 강남은 화이허(淮河)와 창장 등 대하천으로 분리돼 지역 간 왕래가 무척 어려웠으며 사회·문화적 차이도 매우 컸다. 화북인이 밀을 주식으로 한 데 비해 파촉인(巴蜀人)과 강남인(江南人)은 쌀을 주식으로 삼았다. 당시 창장 유역은 인구밀도가 매우 낮아 화북의 거의 전부를 장악한 위나라가 절대 강자일 수밖에 없었다. 위, 촉, 오는 국력 측면에서 대강 10:2:3의 비율로 차이가 났다.

    위는 촉과 오는 물론이고 선비족, 공손씨(公孫氏)의 연(燕), 그 동쪽의 고구려와도 맞서야 했다. 삼국이 정립하던 3세기 초 몽골고원은 선비족의 땅이었다. 단석괴 사망 이후 분열된 중부선비를 장악한 가비능(軻比能) 선우는 동부선비마저 손아귀에 넣으며, 촉나라 제갈량의 북벌에 호응하기도 했다. 위협을 느낀 위나라는 산시의 남흉노를 통해 북쪽 국경 방어를 강화하고, 234년에는 자객을 보내 가비능을 암살했다. 구심점을 잃은 선비세력은 사분오열되고 만다.



    吳, 동천왕을 선우로 책봉

    공손씨는 황건군 봉기와 뒤이은 삼국 분열 시기 롼허(灤河)-다링허(大凌河) 유역에 나타난 힘의 공백을 이용해 나라를 세운 후 오의 손권 및 촉의 제갈량과 함께 위에 저항하면서 190년경부터 238년까지 약 50년간 나라를 유지했다. 창건자 공손도는 해군을 파견해 산둥반도 둥라이(東萊) 인근을 확보하는 등 연나라를 해상강국으로 만들었다. 숙부 공손공을 타도하고 집권한 공손연은 232년 위나라를 견제하고자 오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오와 연이 손잡는 것을 우려한 위는 234년 연의 배후에 위치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통교(通交)했다. 공손연은 위가 고구려를 끌어들여 배후를 노릴까 염려해 위에 아부코자 오에서 보낸 사신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았다. 오의 사신 일부가 탈출해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이들을 잘 대접해 오로 돌려보냈다. 오는 이에 대한 답례로 사신을 보내 동천왕을 선우(單于)로 책봉했다.

    동천왕은 이후 공손씨가 지배하는 랴오허 유역을 빼앗으려고 했다. 고구려는 위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공손씨와 대립각을 세웠으며,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에 보냈다. 동천왕은 부친인 산상왕 초기 발기(發岐)가 일으킨 고구려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한 공손씨의 연(燕)을 결코 좋게 볼 수 없었다.  

    제갈량은 ‘삼국지연의’에서 남만(南蠻)으로 소개된 남중(윈난) 정벌을 통해 획득한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해 229년 저·강족이 거주하던 룽시(隴西) 일부를 평정했다. 제갈량은 간쑤-쓰촨-윈난, 즉 롱(隴)-촉(蜀)-전(滇)으로 이어지는 저·강 벨트를 장악해 국력을 증강하고 저·강 군단을 활용해 장안과 낙양을 점령할 계획이었다. 그는 위 정벌의 전제조건인 장안을 차지하고자 여러 차례 위에 도전했으나, 사마의와 조진 등 위나라 장수들의 저항으로 실패한 후 234년 오장원에서 병사했다.

    제갈량이 사망하면서 촉이 위에 가해온 군사 압력이 크게 줄었다. 위는 237년 베이징 일대를 관할하는 유주자사 관구검(毌丘儉)으로 하여금 공손씨를 치게 했다. 관구검은 다링허 유역 요수까지 진격했으나, 장마로 인해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이듬해인 238년 위나라 군권을 총괄하던 사마의가 직접 공손씨 토벌에 나섰다.

    사마의는 모용선비와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후 보기(步騎) 4만을 이끌고 연나라 수도 양평을 점령했다. 공손씨가 멸망하고 고구려와 위나라가 직접 국경을 접하면서 고구려-위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했다.



    미천왕은 319년 12월 한족 출신 평주자사 최비로 하여금 모용선비를 적대하던 우문선비와 단(段)선비를 설득해 모용선비를 협격하게 했다. 고구려와 우문선비, 단선비 3개국 연합군은 모용선비의 수도 극성을 3면에서 포위했다. 모용외는 반간계를 썼다. 즉, 우문선비 군대에는 음식과 술을 보내는 한편, 모용외와 밀약을 맺기 위해 최비의 사자가 한밤중 극성에 도착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고구려와 단선비로 하여금 우문선비와 최비를 의심하게 했다. 고구려군은 단독으로 철군했으며, 고립된 최비는 고구려로 망명했다.

    3국 연합군을 계략으로 물리친 모용외는 아들 모용황을 시켜 우문선비를 격파하고, 또 다른 아들 모용인에게는 고구려에 반격을 가하게 했다. 미천왕은 이후에도 랴오허 유역을 계속 공략했으나, 랴오허를 넘지는 못했다. 미천왕은 모용선비를 압박하고자 330년 후조(後趙, 흉노가 세운 한나라) 천왕 석륵에게 우문옥고(宇文屋孤)를 사신으로 보내 건국을 축하하면서 싸리나무 화살 호시(楛矢)를 선물했다.

    유요는 312년, 316년 두 차례에 걸쳐 장안을 점령하고, 산시(山西)와 산시(陝西) 일대를 평정했다. 유요는 산시 일대를 정벌하다가 진군을 지원한 탁발선비 부족장 탁발의로와의 전투에서 패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한나라군의 포로가 된 서진 회제와 민제는 평양(平陽)으로 압송돼 처형됐다.

    강남으로 도피해 있었던 낭야왕 사마예가 317년 명문거족 낭야 왕씨와 강남 토착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건업(난징)에서 진나라(東晉)를 재건했다.



    4분된 중국

    한편 한나라는 318년 유총이 사망한 다음 내분으로 인해 급속히 와해됐다. 유총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지자 각기 군단을 거느리던 유요, 석륵, 왕미 등이 자립할 태세를 취했다. 평양의 조정에서는 한족 출신 외척 근씨(靳氏) 세력이 증대돼 황실을 압박했다. 유총 사망 후 유찬이 즉위했는데, 권력을 장악한 근씨들은 황음(荒淫)하다는 이유로 유찬을 기습해 살해했다.

    평양의 정변 소식을 접한 유요와 석륵 등 일선 장군들은 각기 평양으로 진군했다. 그들이 평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근씨들은 반대파에 의해 축출당하고 난은 진압됐다. 유요는 국명을 조(趙)로 고치고 수도를 장안으로 옮겼다.

    석륵은 한족 출신 전략가 장빈의 갈피대책(葛陂大策)을 받아들여 세력권이 겹치던 왕미를 살해하는 한편, 허베이와 산둥, 산시 일부를 점거하고, 319년 허베이의 양국(襄國)에 도읍해 조(趙)나라를 세웠다. 산시(陝西)에 위치한 유요의 조나라(前趙), 허베이에 자리한 석륵의 조나라(後趙), 강남의 동진(東晉), 파촉의 성나라로 중국이 4분된 것이다.



    스러진 천하통일의 꿈

     유요는 323년 전량왕 장무의 항복을 받았다. 유연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흉노 출신 유요와 흉노 별부(別部) 갈족 출신 석륵 간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유요는 328년 낙양 전투에서 석륵의 조카 석호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329년 태자 유희도 석호에게 생포당해 죽었다. 이로써 전조(前趙)는 멸망했다. 유요는 고구려에 망명한 적도 있으며, 독서인이자 빼어난 용장으로 유연으로부터 ‘우리 집안의 천리구(千里駒)’라는 말을 들은 준걸이었으나, 장안이 융성하게 된 이후 타락했다.

    석륵의 아들 석홍을 죽이고 자립한 석호는 전량의 수도 고장(姑藏), 모용선비의 수도 극성을 포위하고 탁발선비가 산시 북부에 세운 대(代)를 내몽골로 축출하는 등 한때 화북을 통일하는 기세를 보였다. 338년 5월 후조는 고구려와 단선비의 지원을 받아 10만 대군을 인솔해 모용선비의 수도 극성을 포위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롼허-다링허 유역 성읍들이 후조의 석호에게 항복했다.

    모용선비의 수장 모용황은 모여근과 아들 모용각 등의 도움을 받아 화공을 써서 후조군을 가까스로 물리쳤다. 이후 모용황은 석호에게 항복한 장수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는데 송황과 유홍 등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석호는 다시 한 번 모용선비를 치기 위해 도료장군(渡遼將軍) 조복으로 하여금 산둥반도에서 랴오둥반도 사이에 위치한 묘도열도를 경유해 고구려 고국원왕에게 양곡 30만석을 실어다주게 했다. 그러나 석호와 석수의 부자간 내분과 모용선비의 저항으로 인해 후조(後趙)의 천하통일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349년 석호가 죽자 석호의 자식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다. 석호 사후 10세에 불과한 태자 석세가 등극했지만 즉위 33일 만에 석호의 양자로 군권을 장악한 한족 염민(冉閔)의 사주를 받은 석준에게 살해당했다. 석준을 죽인 석감은 염민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염민은 나라 이름을 위(魏)로 바꾸었다. 염위(冉魏)는 흉노·갈족을 대거 학살하는 등 극단적 정치로 세력을 모두 잃고 수도 업 주변 극히 일부분만 확보할 수 있었다.

    한나라와 전조를 세운 남흉노의  인적 구성은 피정복 부족을 포함해 매우 복잡했다. 흉노의 언어는 알타이어의 일종으로 볼가강 유역 사마라와 카잔 사이에 거주하는 추바쉬인의 말과 유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연이 세운 한(漢)나라 장군 기홍은 빨간 머리에 파란 눈을 지녔다.



    ‘빨간 머리, 파란 눈’ 인종

    중국 사서들은 각기 한과 전조를 세운 유연과 유요 모두 장신이며, 털이 많고 머리카락이 붉은 것으로 기술한다. 이로 미루어 남흉노 왕족인 도각부는 인도-유럽계 인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갈족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일대에 거주하던 조로아스터교도인 소그드인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외민족이 세운 나라들은 부락 제도를 유지하면서 점령지 한족을 통치해야 했다. 흉노의 한(漢)은 황제가 한족을 직접 다스리고, 황태자에게 대선우(大單于) 직책을 줘 새외민족을 통치하게 했다. 새외민족은 한족만큼 정교한 행정체계를 갖고 있지 못했다. 지방에 대한 지배는 불철저했으며, 국가권력의 중핵을 이룬 것은 군대였다.

    이들 군대는 부락 전통에 따라 종실에 분배됐다. 이를 종실적 군사봉건제라고 한다. 군대는 부락제의 전통을 충실히 유지했으며 자급자족했다. 이러한 군사적 봉건체제는 건국 당시에는 위력을 발휘하지만, 지배권이 확립된 뒤에는 권력을 둘러싼 내분이 발생할 소지가 크다.

    전조(前趙), 후조(後趙), 전연(前燕), 전진(前秦)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새외민족 왕조는 대부분 단명했다. 석호가 죽고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모용선비가 유주(베이징 일대) 지역으로 밀고 들어왔다. 석호가 강제로 이주시킨 저족과 강족은 폐허가 된 허베이 지역을 탈출해 고향인 관중으로 돌아가는 장거리 행군에 나섰다.

    남부 시베리아 지역을 원거주지로 하는 투르크계 정령족도 행동을 개시했다. 383년 비수전투 이후 저족이 세운 전진(前秦)이 붕괴되자 우두머리 적빈(翟斌)은 허베이 일부를 근거로 세력을 형성했다. 그의 뒤를 이은 적요(翟遼)는 386년 여양(黎陽) 태수 등념지를 죽이고 여양을 점거했다. 적요는 후연(後燕) 모용수에게 항복했다가 산둥의 노(魯)를 근거로 자립해 388년 2월 위(魏)를 세우는데, 이것이 적위(翟魏)다.




    백범흠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총영사관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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