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구국의 혁명’ 꿈꾼 5·16, 정권탈취와 민주압살로 귀결

  • 김영명 한림대 교수·정치학 ym789@hanmail.net

    입력2007-01-08 18: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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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년 군부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근대화, 서구화한 집단이었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 주동세력은 군 정화운동이 실패하고 사회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자 이를 단번에 해결할 목적으로 무력 행동을 통한 정권 탈취를 감행했다. 자부심과 소명의식에 가득 찬 이들은 정변을 일으킬 때 이미 통치자로 나설 의도를 갖고 있었다. 비록 한국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고는 하나, 사회정치구조의 근본 변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민주주의 압살로 귀결됐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 혁명이 아닌 쿠데타였다.
    ‘구국의 혁명’ 꿈꾼 5·16, 정권탈취와 민주압살로 귀결
    5·16은 한국사회에 심대한 변화를 예고한 정변이었다. 이로써 고려조의 무신통치가 끝난 뒤 수백년 동안 지속된 민간 우위의 정치·문화 질서가 파괴됐다.

    대한민국 건국의 첫 번째 대안으로 마련된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쿠데타로 인해 일단 종막을 고하고 군부 권위주의에 입각한 개발독재라는 두 번째 대안이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그 대안이 한국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했다.

    쿠데타 이전 국가는 민간사회보다 힘이 우세했으나 정책적으로는 취약했다. 하지만 쿠데타 이후 한국은 강력한 군부 통치자의 등장과 기술관료의 성장으로 자율성과 능력을 함께 갖춘 강성국가로 변모했다. 이 강성국가는 자본주의적 산업 발전을 지배의 물적 토대와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매우 빨리 성장했고 민간사회는 엄청난 변모를 경험했다. 그러한 민간사회의 변모가 거꾸로 군사정권의 토대를 허물고 민간 민주주의의의 바탕을 마련한 것은 역사의 역설이라 할 만하다.

    “군은 국가 구원할 유일한 세력”



    5·16군사정변이 발생한 원인을 알려면 먼저 당시 쿠데타 주도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내세운 명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쿠데타 주역들은 집권 후 펴낸 ‘한국 군사 혁명사’에서 “용공 사상의 대두, 경제적 위기, 고질화된 정치 풍토, 사회적 혼란과 국민 도의의 피폐, 그리고 한국군의 발전”을 ‘군사혁명’의 원인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군부의 정치적 중립과 정치 불관여라는 명제를 충실히 신봉하던 군인들이 드디어 혁명의 전위에 나서게 된 것은, 무엇인가의 (정확히 말하자면 혁명) 근본적 개혁을 절규하던 거족적인 요구라는 외적 요인과 군 자체의 강군 육성을 위한 내부 정화라는 진통으로 나타난 내적 요인과의 결합에서 귀결되는 필연적인 당위의 결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군부가 ‘혁명’을 추진해야만 했던 이유로서, 군부의 정치적 초연성, 군의 민주적 훈련, 군의 행정적· 정치적 역량, 투철한 반공정신, 정의와 양심의 편에 선 군인의 청렴성 및 행동주의를 들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이 내세운 ‘혁명’의 정당성보다는 (그들이 이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혁명’의 요인으로 사회정치적 상황이라는 외적 요인과 군의 성장이라는 내적 요인의 결합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덧붙여, 군인이 국가를 구원할 유일한 세력이라는 일종의 소명의식을 그들의 주장에서 확연히 볼 수 있다.

    사회정치적 요인과 군부 내적 요인은 모두 5·16군사정변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다양한 요인이 어떻게 상호작용해 모반 장교 집단에 행동 동기를 부여했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아울러 군부 정치의 동태적 국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쿠데타라는 단기적인 행동과 군부의 사회정치적 지배라는 장기적인 현상을 구별해야 한다. 둘 사이에는 서로 관련되지만 다른 요인들이 작용했다. 전자의 설명에는 구체적이고 단기적인 행동 동기들이 중요하며, 후자의 설명에는 장기적이면서 구조적인 요인들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쿠데타를 주도한 소장 장교들이 품은, 진급 기회 소멸에 따른 불만은 쿠데타라는 정치적 사건을 일으킨 구체적인 행동 동기의 하나로 꼽을 수 있지만, 이 요인이 이후 그들이 장기적인 지배체제를 유지한 데 대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거꾸로 사회구조적인 요인에만 주목하면, 행위자들이 왜 특정한 시점에서 특정한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진급기회 소멸에 따른 직업적 불만

    이렇게 보면, 5·16군사정변과 군부의 정치적 지배는 각각 사회적 요인과 군사 제도적 요인의 결합으로 이뤄지며, 각 수준에서의 요인은 다시 (사회·정치) 구조의 요인과 (행동) 동기의 요인으로 구분된다.

    먼저 군사 제도적 수준을 보면, 쿠데타 당시까지 진행됐던 군부의 양적, 질적 성장이 군부가 5·16 이후 오랫동안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군부는 6·25전쟁의 와중에 급속히 성장해 1950년 10만 병력에서 1956년엔 70만 대군으로 변했다. 1958년 10만이 감축돼 이후 60만 규모가 유지됐는데, 이는 한국사회에서 단일 집단으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이러한 군부의 양적 팽창은 민간집단이 미성숙한 현실에서 자연히 사회적인 역할의 팽창으로 이어졌고, 남북한의 대치 상황에서 더욱 심화됐다.

    그러나 양적 팽창보다도 정치적으로 더 중요했던 것은 6·25전쟁 이후 군부가 이룬 급속한 제도, 기술, 조직의 발전이었다. 미국의 막대한 군사 원조와 훈련 지도로 성장한 군부는 1961년경 한국에서 가장 근대화하고 서구화한 집단이라 할 만했다. 대학과 관료 등 근대화의 길을 가던 민간 집단이 있었으나, 그들은 탄생이 체계적이지 못했고 규모가 작았으며 정치·경제적 참여가 제한돼 있었다.

    군부가 민간사회에 비해 먼저 근대화하고 제도적으로 발전한 것은 당시 많은 신생국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차이는 자연히 군 장교들에게 민간 엘리트에 대한 불신감을 조장했고, 진정한 국가 발전을 담당할 세력은 자신들밖에 없다는 일종의 소명의식, 곧 군 장교의 통치의식을 부추겼다.

    이러한 구조적 요인들은 군 장교들의 구체적인 행동 동기를 통해 정치 개입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군의 정치적 행동 동기는, 실제 당사자가 어떻게 인식하든, 구국의 소명의식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행동의 주체가 품고 있는 개인적, 파당적 또는 군부 전체의 집단적 불만의 소산인 경우가 많다.

    5·16 주역들의 경우, 군 내부의 불만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상급 장교들의 부패와 이들을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대한 불만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급 기회의 소멸을 중심으로 한 직업적인 불만이었다. 둘 다 한국 군부의 뿌리 깊은 파벌주의와 연결돼 있었다.

    이승만은 건국 초기에 군 장성들과 후원-피후원의 관계를 맺고 특정 장성들에게 시혜를 제공하는 대신 군을 부정선거와 야당 탄압에 동원하는 등 개인 권력의 확대에 이용했다. 그 결과 군은 매우 부패했고 정치 개입이 비일비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정치적 통제의 수단으로 삼았다.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필연적 대결

    이런 상황이 군 장교들 사이에 상급자와 하급자 간 갈등을 일으켰고, 군부의 소요는 장면 내각 수립 이후 하급자 주도의 정화운동으로 본격화했다. 이러한 갈등이 같은 교육 경험과 전투 경험을 지닌 청년 장교 집단으로 구성된 소수의 모반 집단을 형성했다. 즉 그들은 군 정화운동이 실패하고 사회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자 이를 한번에 해결할 목적으로 쿠데타라는 직접적인 무력 행동을 통한 정권 탈취를 감행한 것이다.

    이러한 군 내부의 사정에 덧붙여 당시 한국사회의 혼란 역시 5·16군사정변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이승만 정권 말기에 이르러 군 내부의 불만과 사회정치적 혼란이 어우러지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불만세력이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통치 말기와 장면 시기에 만연한 사회정치적 혼란은 쿠데타 계획에 직접적인 촉매로 작용했다.

    사회정치적 요인을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한마디로 ‘수입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표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수립과 함께 도입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는 들어오자마자 곧 타락했고, 4월 봉기 이후 시도된 장면 정부의 민주주의 부활 노력도 민간사회의 욕구와 국가 능력 간의 괴리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이 자유민주주의의 이상 그 자체를 부인하면서 강력한 국가와 효율적인 행정을 앞세운 군 장교들의 정치 개입과 장기 지배의 구조적 여건을 마련했다. 이런 점에서 5·16군사정변은, 건국 당시 도입된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실험이 여의치 않자 이를 거부하고 강력한 군부-관료적 국가와 효율적인 경제 개발을 전면에 내세운 권위주의 세력이 당시까지의 복잡했던 힘겨루기를 일단락지은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군사정권의 등장과 장기 지배는 수입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사회정치적 상황과 민간집단보다 군부가 먼저 발전한 군부 내적 조건에 근본적인 원인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상황 속에서, 군의 성장 및 파벌 갈등을 통해 청년 모반 집단이 형성됐고 이들에게는 통치의식이 무르익었다. 쿠데타라는 구체적인 행동 동기는 당시 일어났던 군 정화 운동의 실패와 사회정치적 혼란이 유발했다. 이상과 같은 군사 제도적 수준과 사회적 수준에서 존재했던 구조적 및 동기적 원인들이 군사 쿠데타를 촉발하고 군부의 장기적인 지배체제가 존속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구국의 혁명’ 꿈꾼 5·16, 정권탈취와 민주압살로 귀결

    5·16군사정변에 참여한 군인들이 경복궁에 모여 무희들의 위문공연을 즐기고 있다(1961년 5월29일).

    구조적 원인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인 군부 지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동기적 원인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1961년 당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더라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장면 정부가 학생과 군부 등 폭발적인 세력을 통제하고 정치적 안정을 이뤘더라면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장면 정부에 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따라서 군부 쿠데타가 1961년의 시점에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전 혹은 이후의 가까운 시간에 일어났을 개연성은 매우 컸다. 당시의 사회정치적 구조, 특히 군부와 민간집단 사이의 힘 관계를 볼 때 그렇다.

    달리 표현하면, 광복 이후 한국 정치사의 전개에서 민간세력과 군부세력의 대결, 또는 이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지만 민주세력과 권위주의 독재세력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광복 이후의 한국 정치사는 이를 중심으로 한 힘겨룸으로 형성됐다.

    국민의 방관과 침묵

    일단 쿠데타가 시도된 후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들이 필요하다. 이는 쿠데타 세력과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 사이의 힘의 균형과 힘의 행사에 따라 결정된다.

    구체적으로 국민의 대규모 저항이 있거나 현직 정부를 지지하는 군 부대의 쿠데타 진압 작전이 있을 경우, 쿠데타는 실패하거나 성공하더라도 상당한 정치 군사적 대가를 치르게 된다. 또 강대국의 강한 영향 아래에 있는 약소국의 경우, 강대국이 명백하고 단호하게 쿠데타에 반대하면 성공하기 어렵다. 이때 강대국의 의사는 쿠데타가 발생한 지역에서 자신이 가지는 여러 가지 국가 이익에 대한 고려에 따라 결정된다.

    5·16군사정변의 경우 국민의 저항도 없었고 쿠데타 진압군도 동원되지 못했다. 현직 민간 정부는 쿠데타를 저지할 능력이 없었을뿐더러 그렇게 할 뚜렷한 의지도 지니고 있지 못했다. 또한 처음에는 쿠데타를 반대했던 미국도 군의 권력 장악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굳어지자 현상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민은 적극적인 지지도 적극적인 반대도 없이 침묵하고 방관했다. 적극적인 지지가 없었던 것은 민간 우위의 정치·문화적 전통하에서 군부의 집권이라는 것이 일반 국민에게 생소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반면 민주당 정부하에서의 사회정치적 혼란은 국민이 어떠한 형태로든 변화가 오기를 희망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실제로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 1961년 봄부터 이미 ‘4월 위기설’을 위시해 쿠데타와 관련한 풍문이 나돌고 있었다. 따라서 정작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국민은 체념(또는 안도?)했는지 모른다. 국민은 대체로 군의 개입을 필요한 조치로 받아들였으나, 이를 오직 일시적인 치유로 간주했다.

    쿠데타에 대한 현직 민간 정부의 태도는 또 한번 무능과 무책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장면 총리는 5월16일 새벽 쿠데타 발발 보고를 받고 수녀원으로 피신해 이틀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쿠데타와 반(反)쿠데타의 숨 막히는 순간에 행정수반이 잠적함으로써 쿠데타군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조성됐다. 쿠데타에 강력하게 반대한 유일한 세력인 미국은 한국의 행정수반을 찾지 못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장면의 피신, 윤보선의 체념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의 주역들이 방문했을 때 “올 것이 왔구나!”라는 탄식으로써 이를 인정했다. 실제로 장면과의 파벌 다툼에서 승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윤보선은 쿠데타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은근히 이를 바랐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매그루더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 야전군을 출동시켜 쿠데타군을 진압하자고 강권했을 때도 내전을 피한다는 구실로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군 출동 금지 서한을 야전군 사령관들에게 발송했다.

    야전군, 즉 제1군사령관 이한림은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박정희의 쿠데타에는 반대했으나, 이를 저지할 적극적인 행동 동기나 의지는 갖지 못했다. 또 야전군 부대 안에 뿌리박힌 쿠데타 가담 장교들이 군 출동을 저지하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여기에다 윤보선의 군 출동 금지 친서는 결정적인 힘을 보탰다. 이한림은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다 급기야 쿠데타 세력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장도영 참모총장은 쿠데타 이전부터 모호하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다가 쿠데타 세력의 추대에 응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초대 의장으로 취임했으나 끝내 숙청되고 말았다.

    근거 없는 ‘미국 책임론’

    미국은 처음에는 쿠데타에 반대하고 민간 정부를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다. 특히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강경한 태도를 취해 한미합동군사작전에 의한 무력 진압을 윤보선 대통령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주한 미 대리대사인 그린도 쿠데타에 반대하고 민주당 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주한 미국 관리들의 행동은 워싱턴 당국의 훈령이 없는 상태에서 독자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진압군의 출동이 실패하고 쿠데타 세력이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자, 미국 정부는 쿠데타를 현실로 인정하면서 빠른 시일 안에 민정 이양할 것을 요구하게 됐다.

    최근 미국이 쿠데타에서 어떤 구실을 했는지를 밝히려는 논문이 많이 나왔다. 이 논문들은 세밀한 논의를 펼치지만, 미국의 구실이 무엇이었는지를 뚜렷하게 밝히지 못하고 당시의 전반적인 정황과 한미관계의 구조를 언급하는 데 그치고 있다.

    “미국 군부와 정부가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에 불만을 가져 이들의 하야를 적극 권했고 소수 모반 장교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또 쿠데타를 결국 인정한 것을 두고 미국의 역할 운운하는데, 이는 쿠데타 성공의 한 요인으로 볼 수는 있으나 미국이 쿠데타에서 적극적인 구실을 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이런 면에서 미국의 역할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쿠데타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초점이 맞지 않는다. 오히려 ‘구조적 배경’의 하나이며, ‘성공 요인’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쿠데타 발발에 개입했다고 주장하려면 미국측이 쿠데타를 사주했거나 주동자들과 사전에 의논했다는 것을 밝혀야 할 텐데, 그런 증거는 없다. 미국이 한국군에 대한 교육과 원조를 통해 남미에서와 같이 일종의 ‘신직업주의(정치 개입주의)’를 부추겼다고 주장하거나, 미국 원조로 한국군이 과대 성장한 것이 필연적으로 쿠데타로 나타났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런 주장들은 쿠데타와 군부 지배의 거시적, 구조적인 배경으로 제시될 수 있는데, 그런 연구는 오히려 없는 것 같다.

    어쨌든 국민과 현직 정부, 군부 내 반대세력, 그리고 미국 정부의 효과적인 반대나 저항이 없는 상태에서 쿠데타가 성공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5·16은 전 세계적으로 드물게 피를 적게 흘린 쿠데타였다. 그만큼 쿠데타에 대한 명시적인 반대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광복 후 13년 동안 이어진 국가 건설 시도가 실패했음을 상징한다.

    5·16군사정변은 한 해 전에 일어난 4월 봉기보다 장기적으로 더 큰 영향을 한국사회에 끼쳤다. 무엇보다도 쿠데타의 주역들이 압도적인 물리력과 조직력으로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한국의 국가와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치 기반을 바탕으로 그들은 자신이 인식한 대로 국가 건설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한국사회는 엄청난 물질 성장과 개발을 경험했다. 반면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압살됐다.

    이러한 변모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과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변화를 쿠데타의 주역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혁명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큰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이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전에 형성된 사회경제적 구조, 즉 주변부 자본주의적인 구조와 (준)권위주의적인 정치구조에 바탕을 뒀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현존하는 질서의 변형과 심화이지 사회·정치구조의 근본적인 변혁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통치자 의식

    5·16은 4·19의 부정으로만 인식되기에는 미묘한 구석이 있다. 쿠데타는 민주당 정부만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쿠데타 계획은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1960년 2월부터 박정희를 중심으로 이미 추진된 바 있다.

    따라서 민주당 정부의 혼란에서 쿠데타의 기원을 찾는 것은 잘못이다. 쿠데타의 기원은 이승만 정권에서 찾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쿠데타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를 바탕으로 한 국가 건설의 시도가 개인 권력자의 전횡과 미숙한 정부의 무능으로 파탄 상태에 이르자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성장의 단일 목표를 추구한 군부세력이라는 새로운 국가 건설 대안이 전면에 나섰음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4·19와 5·16은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동일한 사회경제적 조건하에서, 또 근본적으로 같은 정치 구조에서 나타난 두 개의 정치적 대응을 의미한다. 그 두 대응은 당시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힘을 대변한 두 세력, 곧 학생과 군인에게서 나왔다. 학생의 대안은 무력과 조직력이 없어 실현될 수 없었던 반면, 군인의 대안은 이 둘을 보유해 실현될 수 있었다. 동시에 학생의 행동이 즉흥적이고 비체계적이었으며 자연발생적이었던 반면 군인의 행동은 계획적이고 체계적이었다.

    주도세력 내 파벌 다툼

    그러나 군부의 대안이 처음부터 뚜렷한 이념과 정책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통치의식도 처음부터 일관된 게 아니었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면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당시 군부가 한국에서 가장 근대화한 집단이었다고는 하나 군 장교들은 투철한 반공의식을 빼면 뚜렷한 이념 정향이나 국가 건설의 대안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군 교육기관이 발전하고 미국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고 많은 장교가 유학을 했으나, 이들이 군사적 부문이 아닌 사회, 정치, 경제 분야에서 체계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국가 발전 전략을 개발했다는 증거는 없다. 다시 말해, 남미에서 1960년대 이후 나타났던 군부의 ‘신직업주의’의 개발은 찾아볼 수 없었다.

    쿠데타 주역들이 가졌던 것은 반공의식과 사회적, 군 내부적 상황에 대한 막연한 울분과 불만이었다. 다시 말해 한 해 앞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무엇을 부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비교적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 위에 무엇을 세워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비전을 갖고 있지 못했다.

    쿠데타 성공 후 정책 방향, 특히 민정이양의 시기와 방법을 두고 쿠데타 주역들 사이에 혼란과 알력이 발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실제로 쿠데타를 주도한 젊은 장교들은 비교적 명확한 통치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처음부터 스스로 ‘통치자’이기를 의도했다.

    그러나 쿠데타 모의 과정이나 성공 후 이에 가담한 상급 장교들이 인식한 군의 역할은 ‘중재자’였다. 자신의 위상에 대한 이러한 견해 차이는 군 안에서 일어난 치열한 파벌 투쟁의 한 원인이 됐고, 이를 통해 이후의 정치구조는 결국 유사 민간 형태의 군사정권으로 귀착됐다.

    이렇게 출발한 제3공화국의 정치체제는 군사정권도 아니고 민간정권으로도 볼 수 없는 모호한 성격을 띠었다. 그것은 군 출신 정치인이 대규모 민간인 충원을 통해 통치 기반을 다진 일종의 유사 민간정권이었다.

    권위주의 독재와 본격 자본주의의 결합

    정치과정은 반대당을 허용하고 지배적인 정당이 존재하는 정당정치로 출발했다. 헌법은 상당히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가진 대통령제의 정부 형태를 마련했다. 정치적 반대도 반공의 이념적 테두리 안에서 비교적 허용되는 편이었다. 이런 점에서 박 정권은 민주주의 정권도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뚜렷하게 권위주의 정권의 증상을 보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건국 당시 도입한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를 계승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누렸던 정치적 명분은 여전히 굳건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 정권은 시간이 지나면서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개인을 숭배하는 일인 지배 권위주의 체제였다. 정당 정치는 쇠퇴하고 정치권력은 개인의 손에 집중됐으며, 그의 수족인 청와대 측근들과 기술관료, 그리고 폭력기구, 보안기구들이 하위 권력자로 행세했다. 이런 상황이 점점 더 심화돼 결국 1972년 한국 현대사상 가장 억압적인 유신체제 선포로 이어졌다.

    ‘구국의 혁명’ 꿈꾼 5·16, 정권탈취와 민주압살로 귀결
    김영명

    1954년 경남 마산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정치학)

    現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한글문화연대 대표

    저서 : ‘한국의 정치변동’ ‘우리 정치학 어떻게 하나’ ‘신한국론’ ‘우리 눈으로 본 세계화와 민족주의’


    18년에 걸친 박정희의 장기 집권은 이전에 지속돼온 한국 정치의 파행이 심화된 결과이면서 그 뒤에 나타난 숱한 정치·사회적 모순의 근원이었다. 박정희 통치를 통해 한국 정치는 권위주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투쟁으로 얼룩졌고, 한국 사회는 본격적인 자본주의 발전과 그에 따른 다양한 문제를 겪게 됐다. 이전의 정치 변동이 권위주의 독재와 자유민주주의적 이상 사이에 발생한 명백히 정치적인 갈등의 결과였다면, 이제 그 정치적 갈등에 자본주의 산업화의 모순이 중첩돼 정치변동이 더 복잡하고 격렬한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갈등의 단서를 제공한 것이 5·16이라는 군사정변이다. 그 결과 탄생한 군사정권은 장기간에 걸쳐 한국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으나, 정변 자체는 혁명에 미치지 못하는 쿠데타라고 규정하는 것이 올바른 사회과학적 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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