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지리산 은사(隱士) 시인 이원규

바람이 나인가, 내가 바람인가

  • 글: 조용헌 江湖東洋學연구소 소장,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입력2004-03-30 1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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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도시 직장 생활이 지긋지긋하게 싫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지리산에 파묻힌 시인 이원규씨. 한 달 20만∼30만원의 원고료 외에는 별다른 수입이 없지만 그는 “인생은 원래 대책 없는것”이라며 오히려 백수생활을 즐기고 있다. 조만간 전국 탁발순례를 떠날 예정이라는 시인의 지리산 바람 같은 인생.
    지리산 은사(隱士) 시인 이원규

    지리산 자락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이원규 시인.

    직장을 그만두고 처성자옥(妻城子獄)에서 벗어나, 밥벌이에 대한 근심도 던져버리고 산으로 가고 싶다. 청산에 살고 싶다. 이는 누구나 한번쯤 가보고 싶은 길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벗어나는 데서 오는 불안함과 가족 부양의 책임, ‘뭘 먹고사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길을 걷기는 쉽지 않다. 그저 자신의 소심함을 한탄할 뿐이다.

    시인 이원규(李元圭·42)는 그 3가지 두려움을 한순간에 던져버린 사나이다. 서울에서 잡지기자로 살다가 한순간에 인생을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대책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의 철학에 의하면 인생은 대책이 없는 것이다. 무작정 산에 들어왔지만 그는 아직까지 굶어죽지 않고 생존해 있다. 오히려 건달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는 백수의 즐거움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독거(獨居)

    남들 출근할 때 섬진강 청둥오리뗴와 더불어물수제비를 날린다.남들 머리 싸매고 일할 때 낮잠을 자다 지겨우면선유동 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한다.미안하지만 남들 바삐 출장 갈 때 오토바이를 타고전국 일주를 하고.정말이지 미안하지만 남들 야근할 때 대나무 평상모기장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작설차를 마시고,남들 일 중독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일 없어 심심한 시를 쓴다.가끔 굶거나 조금 외로워하는 것일 뿐, 사실은 하나도미안하지 않지만 내게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는 것이다.일하는 것이 곧 죄일 때 그저 노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가!스스로 위로하며 치하하며 섬진강 산 그림자 위로 다시 물수제를 날린다.이미 젖은 돌은 더 이상 젖지 않는다.(옛 애인의 집’(솔),138쪽)

    삶의 고수가 아니라면 남들 출근할 때 섬진강 청둥오리 떼와 더불어 물수제비뜰 수가 있겠는가? 무림에만 고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계유지의 두려움을 뛰어 넘은 사람은 삶의 고수임에 틀림없다.



    필자는 고수의 경지에 이른 이원규 시인을 만나러 지리산으로 향했다. 지리산은 백두산에서부터 달려온 조선의 종맥(宗脈)이 결국(結局)을 이룬 지점이다. 설악산이 골산(骨山)이라면 지리산은 대표적인 육산(肉山)이다. 푸짐한 육산이라 먹고 살 것이 많다고 한다.

    그는 지리산의 남쪽에 살고 있다. 구례 화엄사 들어가는 길목에서 오른쪽으로 2km 정도 가면 지리산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고택인 운조루(雲鳥樓)가 나온다. 운조루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산길을 15분 정도 올라가면 저수지가 보인다. 그 저수지를 왼쪽으로 감아 돌면서 조금 더 올라가면 언덕 위에 외딴집이 서 있다. 지은 지 얼마 안된 새 집이다. 지세의 흐름으로 보아 풍수를 아는 사람이 지은 집이다. 앞산(案山)이 적당히 눈 높이에 걸리는 지점을 향해 있다. 동남쪽으로 터져 있으면서도 멀리서는 오산(烏山)이 받쳐준다. 오산도 보통산이 아니다. 이 오산 앞의 ‘사도리’라는 곳에서 풍수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이인(異人)으로부터 풍수의 요체를 전수받았다고 전해진다.

    무림의 고수들은 사람이 살고 있는 터를 보고 그 사람을 대강 짐작한다. 그 사람의 스케일과 취향, 품격이 터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원규 시인이 살고 있는 집터는 지리산 노고단에서 남쪽으로 흘러온 왕시루봉(1200m)의 맥이다. 이 맥이 섬진강과 토지평야 쪽으로 흘러 내려오다가 뭉친 지점이다. 집터 앞으로는 바위들이 보인다. 바위가 있으면 지기(地氣)가 강하다는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집터 앞으로 맥이 약간 더 흘러가 뭉쳐 있다. 풍수에서 말하는 ‘순전(脣前 : 입술 앞)’에 해당한다. 순전이란 지맥이 혈(穴) 자리에서 좀더 앞으로 나간 부분을 일컫는다. 순전이 있어야만 그 터가 힘을 받는다.

    이 정도면 기가 센 자리에 속한다. 집터라기보다는 암자터에 가깝다. 아무나 살 수 없는 터다. 이런 지점에서 아마추어가 살면 얼마 못 가서 쫓겨난다. 정신수련을 했거나, 집착이 없거나, 계율을 잘 지켜야만 터를 누르고 살 수 있다. 나는 이원규 시인이 거주하는 집터를 바라보면서 그가 이 3가지 중에서 적어도 한 가지 관문은 통과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방이 2개에 현관이 있고,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되어 있어 살기에는 괜찮을 듯싶다. 살림살이라고는 책 몇십 권과 간단한 가재도구밖에 없다. 도둑이 와도 훔쳐갈 것이 없는 살림살이이다.

    -기가 센 자리 같습니다. 암자터 같은 분위기인데, 어떻게 여기서 살게 되었는지요.

    “원래 정년 퇴직한 교장선생님이 만년에 시를 읊으면서 살던 곳이었습니다. 몇 년 전 돌아가시고 비어 있었는데, 구례 사람들의 소개로 이곳으로 이사하게 되었죠.”

    -집세가 얼마나 되는가요.

    “1년에 50만원입니다. 그동안 살았던 집 중 가장 비싼 집이에요. 이전에 살던 집들은 대개 공짜였거나 아니면 1년에 20만원 정도 줬습니다.”

    그는 지리산 이곳저곳을 옮겨다녔다. 지리산 산동네에는 빈집이 많기 때문이다.

    이 시인은 7년 전 서울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무작정 지리산자락으로 내려왔다. 서울살이가 징글징글해서다. 계속 있다간 죽을 것만 같았다. 무슨 대책을 세워놓았던 것도 아니다. 용수철 튕기듯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내려왔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물론 지리산에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처음엔 섬진강변의 용두리 민가에서 살았다. 전에 안면이 있던 스님이 쓰던 토굴이었는데 한 번 와본 적이 있었다. 마침 비어 있어서 열쇠를 따고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거기서 한 1년 살다가 피아골 조동마을의 빈집으로 옮겼다. 그 후 실상사에서 1년 반, 칠선계곡 입구에서 1년을 머물렀다. 그러다가 다시 구례 섬진강변의 마고실(麻姑室)에서 살았다. 마고실은 섬진강변에서 강변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동네. 현재 살고 있는 집에는 2004년 초에 들어왔다.

    지리산 둘레는 340km, 대략 850리 정도다. 구례군,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 남원시 등 5개 시군(市郡)이 지리산권에 포함되어 있다. 지리산은 1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국 낭인(浪人)의 해방구이자 자연주의자의 메카였다.

    -지리산에서 사는 낭인과(浪人科) 인물은 대략 몇 명이나 되는가요.

    “5년 전쯤 경찰서 정보과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략 3000명에 달한다고 해요. 지리산 둘레의 5개 시군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옮겨 다니기 때문에 통계를 정확하게 낼 수는 없어요. 남쪽의 화개에 살다가 칠선계곡으로 옮기고, 거기서 다시 실상사 인근의 뱀사골로 옮기는 식이죠.

    70∼80년대만 하더라도 수상한 떠돌이가 산에 들어와 살면 곧바로 경찰이 와서 조사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경찰이 마음대로 ‘족칠’ 수 없습니다. 대신 동네의 이장이 조사합니다. 동네 빈집에 이사온 지 3일쯤 되면 이장이 와서 신원조사를 해요. ‘내가 이 동네 이장인데, 경찰이나 마찬가지야! 신분증 내놔봐? 어디 이씨야?’ 반말로 캐묻기 시작하죠. 제 경우 ‘기자 하다가 왔다’고 했더니 말투가 즉시 달라지더군요. 그리고 나서 내가 지은 책을 한 권 주면 태도는 더욱 달라졌어요. 이장은 이 내용을 경찰서 정보과에 보고하는 것 같습니다.

    낯선 떠돌이가 동네에 들어오면 처음 6개월 간은 동네 사람들이 탐색합니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빈둥빈둥 왔다갔다하니까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죠. 이 탐색기간을 원만하게 보내는 제1의 방법은 인사를 잘하는 겁니다. 동네 사람을 두렁에서 보든, 두엄자리에서 보든, 길바닥에서 보든, 무조건 꾸벅 인사를 하면 합격이죠. ‘저 놈 인간성 괜찮네’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들 낭인과들이 하는 일은 다양해요. 기공(氣功)을 한다, 무속신앙인이다, 그림 그린다, 글 쓴다, 사진 찍는다, 녹차 만든다, 천연염색 한다는 사람에 떠돌이 중 노릇 하는 사람들까지. 그런데 무엇을 하든 밥을 굶지는 않아요.”

    ‘기아’와 ‘자살’이 없는 곳

    지리산에 오면 무엇을 해먹고 사는가? 사람들이 제일 먼저 던지는 질문이다. 한국인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다. 자유로운 삶을 위해 뭔가 하려고 하면 그 다음에 꼭 따라붙는 질문이 ‘뭐해 먹고 살지’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원인을 분석해 보니 우리 부모세대가 6·25때 절대 빈곤을 겪었던 탓이다. 이 세대는 자식들에게 늘상 “너희들은 밥 굶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 자식세대는 저도 모르게 세뇌돼 상대적으로 풍요한 삶을 누리는 데도 항상 굶어 죽는 걱정만 하게 됐다. 그래서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지 못한다.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과 당뇨로 고생하면서도 항상 머릿속에서는 ‘뭐 먹고 살지’로 근심하는 사회가 한국이다.

    이 시인은 “지리산에 와서 굶어 죽은 사람은 없다”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자살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기아’와 ‘자살’이 없는 곳이 지리산이다. 약초만 하더라도 온갖 종류가 다 있다. 약초만 뜯어도 먹고 산다.

    그마저도 하기 싫으면 얻어 먹는 방법도 있다. 등산객들이 많이 올라오는 고갯마루에 진을 치면 된다. 등산객은 대개 올라올 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음식을 충분하게 가져온다. 하지만 하산할 때 이 음식은 짐이 된다. 그래서 고갯마루에서 빈둥빈둥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사람을 보면 등산객들은 사정을 짐작하고 음식을 주고 간다. 이것만 먹어도 충분히 산다.

    탁발 산꾼들이 가장 배고픈 시기가 3∼4월이다. 산불 때문에 입산이 통제되는 곳이 있는 데다가 등산객들이 가장 적은 때이기 때문. 이 ‘보릿고개’가 닥치면 산꾼들은 산을 내려와 화개에서 작설차를 덖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두 달 동안 차 덖는 일을 도와주면 200만원은 벌 수 있다.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다.

    지리산에서는 생존의 단계가 있다. 처음에는 지리산에 기대서 먹고 산다. 그 다음은 도시에 살던 사람들에게 기대서 먹고 산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매실주라도 만들어주면 이들은 그냥 가지 않는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가 하면 돈 봉투를 놓고 가기도 한다. 그 다음은 무엇을 만드는 단계다. 나무공예, 도자기, 작설차, 천연염색 등을 배우는 것이다. 대개 3년 정도 지나면 정착 단계에 들어간다는 게 이 시인의 분석이다.

    현재 지리산에는 알 만한 문인들이나 예술가들이 여럿 내려와 있다. 박남준 시인은 2003년 가을부터 하동군 악양면 매계리에서 살고 있다. 전주 모악산에서 10년 넘게 살다가 이 시인의 소개로 거주지를 옮겼는데, 만족해한다고 한다. 또 악양면에는 ‘오카리나’ 연주로 유명한 한치영·태주 부자가 살고 있다. 평사리에는 사진작가 이창수가, 악양면에는 목공예(청호산방)를 하는 김용회씨가 있다. 구례 문척면 마고실에는 소설 ‘국경’의 작가인 김남일씨가 칩거하고 있다.

    동편제 판소리로 유명한 김소연씨는 악양면의 폐교된 초등학교 자리에 터를 잡았다. 소리꾼들 사이에는 판소리의 명인 송만갑이 남원, 운봉, 구례를 옮겨다니며 살다가 악양에서 득음(得音)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김소연씨는 이를 듣고 악양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지리산은 남쪽 지역인 구례, 하동, 악양, 화개가 살기 좋다. 따뜻하고 섬진강이 있어 풍광이 좋고 은어도 많다. 그런데 악양은 들판이 넓어서 예로부터 부자가 많이 살았으나 화개는 궁벽진 산골짜기라서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관광지가 된 데다가 80∼90년대 작설차가 붐을 타면서 차 생산지였던 화개는 부자동네로 변했다. 과거에는 화개 사람들이 악양에 가서 품을 팔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악양 사람들이 화개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지만 IMF 사태가 터지면서 화개의 작설차 농장들이 상당수 타격을 받았다. 시설 과잉투자로 인해서 서리를 맞았던 셈. 화개가 주춤하면서 다시 악양이 좋아졌다고 한다.

    7∼8년 전에는 지리산의 기운이 악양 쪽으로 흐른다고 해서 승려들이 악양에서 많이 살았다. 도 닦는 사람들은 산세의 기운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쪽에서 저쪽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산세의 기운을 받기 위해서 유목민처럼 흐름 따라 이동한다. 그래서 한때 악양에는 승려 100여명이 몰려들었다.

    지리산 북쪽은 해발이 높고 경치도 좋지만 춥다. 남쪽에 비해서 기온이 5℃ 정도 낮다. 연중 기온이 강원도 오지마을과 비슷하다. 전답도 부족하고 기온이 낮아서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다. 반면 공부하는 수행자들이 살기에 알맞다고 한다.

    요즘에는 귀농자들이 이쪽에 많이 들어와 산다. 특히 실상사 주변에 젊은 귀농자들이 모여 있다. 대략 30∼40명쯤 된다. 도법스님이 세운 실상사 귀농학교가 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다른 지역은 젊은 사람을 구경하기가 힘들지만 실상사 주변의 산내면(山內面)에는 젊은 사람들로 북적거려 활기가 있다. 귀농자들의 출신성분은 광고기획, 언론사, 출판사, 대기업 종사자 등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도시가 싫어졌다는 점이다.

    1년 생활비 600만∼700만원

    도시 사람들이 산에 와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보통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시골에 와서 뭐 해먹고 사느냐. 둘째, 아이들 교육문제는 어떻게 하느냐. 셋째, 답답하지 않느냐. 넷째, 모기와 같은 벌레 때문에 생활이 불편하지는 않느냐.

    그런데 첫째 문제는 도시와 시골의 ‘환율’이 다르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해결된다. 도시에서 월급을 200만원 받았다면 시골에서는 녹차 만드는 일만 보조해도 월 100만원은 받는다. 섬진강 올갱이를 잡아도 일당 10만원이다. 산나물 채취는 일당 5만∼6만원. 그 대신 소비는 도시의 30%면 충분하다. 의복비, 외식비, 관람비, 차량 운영비가 들지 않는다. 어지간한 반찬거리는 텃밭에서 자급자족한다. 간소하게 살면 한달 생활비는 50만∼60만원, 1년에 600만∼700만원이면 충분하다. 서울에서 3억짜리 아파트 한 채 팔아서 내려오면 10년 이상 놀고 먹을 수 있다.

    지리산 은사(隱士) 시인 이원규

    이원규 시인은 지리산 남쪽에 살고 있다. 웬만한 사람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지기가 센 집터다(위). 섬진강변에서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동네인 마고실 초입에는 아담한 정자가 세워져 있다(좌). 마고실에 살 때 머물던 집(우).

    둘째 문제도 기우에 불과하다. 실상사에 귀농학교가 있어 아이들을 대자연의 품에서 건강하게 키울 수 있다. 지리산 둘레에 산다면 아이들 수업료는 한 달 15만원에 불과하다(도시인 자녀는 30만원). 물론 기숙사비를 포함해서다. 셋째와 넷째 문제는 걱정할 필요도 없다. 공기 좋고 전망도 좋다. 요즘은 교통이 편리해서 맘만 먹으면 서울도 곧바로 갔다 올 수 있다.

    귀농생활의 커다란 장점은 자기생활을 마음대로 계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출퇴근 시간을 지키거나 회사의 지시에 따라 생활할 필요가 없다. 자연주의자 헬렌 니어링은 육체 노동, 독서와 사색, 타인과의 교류로 일과를 3등분했다.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이러한 3등분이 가능하다는 게 아닐까. 삶이 허무하지 않으려면 이런 생활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편 지리산에 와서 못 견디고 나가는 사람도 있다. 도시의 생활 습관을 못 버린 사람, 산에 와서도 사업을 구상하는 사람, 땅을 많이 산 사람 등은 적응하지 못한다. 반면 도시에서 깡통차고 들어온 사람은 쉽게 적응한다.

    산짐승처럼 살며 생존 모색

    -지리산에 내려오게 된 배경을 이야기해주시죠.

    “서울 생활이 미칠 것 같았습니다. 매일 인사동 술집으로 퇴근을 했어요. 술 먹다가 술집에서 잠을 자고 다시 회사로 출근할 정도였죠. 서울 사람들 지독한 사람들이에요. 지독하다 못해 존경스러워요. 자기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그렇다고 인간 노릇을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요. 그러면서도 악착같이 서울에 눌어붙어 있습니다. 저는 6∼7년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회의를 느끼다가 지리산에 내려왔습니다. 처음 내려올 때 가지고 온 것은 노트북 하나, 옷 2벌뿐이었어요. 책은 없었습니다(웃음). 단 돈 200만원을 들고 혈혈 단신으로 왔어요. 처음 3년은 산짐승처럼 살면서 굶어 죽지 않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이곳에 오자마자 1주일 정도는 방에 처박혀 있다가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기웃거렸어요. 이 마을 저 마을 10만km 정도를 돌아다녔습니다. 성삼재 넘어 다니는 버스운전 기사보다도 내가 더 많이 성삼재를 넘었을 거예요.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 하고 구경하다가, 섬진강에 가서 강물 바라보다가, 칠선계곡에 올라가 바위 위에 앉아 있다가 했죠. 일은 전혀 하지 않고 놀기만 했어요.

    수입은 한 달에 20만∼30만원 정도인데 주로 원고료예요. 서너 달씩 원고 청탁이 없을 때는 ‘내가 서울에서 완전히 잊혀졌나 보다’ 싶어 불안하기도 했어요. 그때마다 ‘이 기회에 침잠하자’고 생각했죠. 돈이 떨어지면 집에서 나가지 않아요. 그러면 어디선가 돈이 들어와요. 지인들이 봉투에 10만∼20만원 넣어주고 가기도 하고, 놀러온 스님들이 냉장고에 라면이나 쌀 등을 넣어주고 가기도 했어요. 가끔 김치를 담가주는 사람도 생겼고요.

    집은 공짜, 휴대전화 요금 2∼3만원, 오토바이 기름값이 10만원, 담배 술값 10만원, 가끔 오토바이 타고 서울에 다녀오면 10만원 정도 들어가죠. 이게 생활비의 전부입니다. 담배 살 돈 5000원 정도면 마음이 든든하고, 통장에 50만원 정도가 있으면 미래가 든든하게 보장된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합니다.

    쌍계골에서 차를 만드는 조성기라는 사람이 있어요. 선대부터 녹차를 만들던 집안이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생긴 녹찻집이죠. 이 사람의 주특기는 주머니에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거예요. 항상 빈손으로 다니죠. 그 대신 생활반경이 화개면 내로 한정됐죠. 밖에 잘 나가지도 않고요. 오토바이 기름도 무조건 외상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부인이 와서 계산해주죠. 담배를 사도, 밥이나 술을 먹어도 계산을 하지 않아요. 이 근방 사람들은 그 사실을 다 알아 가게 주인이 계산하라고 하지도 않죠. 나는 이 사람처럼 되고 싶어요. 주머니에 돈 넣고 다니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이 새로운 발견이 제 삶을 자유롭게 만들었어요.”

    -집을 소유하고 싶지는 않은가요.

    “소유할 마음은 없습니다. 지리산에 계곡이 30개쯤 있습니다. 계곡 1곳에서 1년씩만 살아도 30년이 걸리죠. 특히 지리산 칠선계곡은 설악산 천불동 계곡, 가야산 홍류동 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입니다. 나는 이중 칠선계곡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태어나서 칠선계곡에 한번 살아보려면 전생 쌓아놓은 복이 있어야 합니다. 30개 계곡에서 모두 살다보면 저절로 성불(成佛)할 것 같습니다. 나는 복 받은 사람임에 분명해요.”

    -손님들이 자주 찾아오는데 접대는 어떻게 하는가요.

    “접대할 게 별로 없어요. 손님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오거나 아니면 구례, 하동에 나가서 먹습니다. 섬진강변의 마고실에 살 때는 투망을 했어요. 그물을 던지면 한번에 10∼15마리의 은어가 잡혀요. 섬진강은 오염이 덜돼 고기가 많습니다. 은어 외에도 쏘가리가 많이 나오죠. 투망질 2∼3번이면 3∼4명 먹을 매운탕거리는 충분합니다. 소주 2병에다 초장과 은어회만 있으면 그야말로 천국이죠. 섬진강 은어가 가장 맛좋은 시기는 5월경 보리이삭이 필 때입니다. 이때 나오는 은어를 ‘보리은어’라고 부르는데, 비린내가 나지 않아요. 비늘도 거의 없고요. 5월에 손님이 오면 섬진강변으로 투망을 들고 나갑니다.”

    그러나 그는 서울 사람들이 보리은어를 맛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시간이 나지 않기 때문. 처음 산에 들어와 살 때는 지인들이 방문한다고 하면 보름 전부터 기다렸다. 녹차, 매화차도 준비해놓고 은어 잡을 투망도 손을 보아놓았다. 그렇게 정성껏 준비하면 약속날짜 하루, 이틀 전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취소하기 일쑤라고. 여러 번 속다보니 지금은 서울 사람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 지리산에서 서울 가기는 쉽지만, 서울에서 지리산에 오기는 어렵다. 서울과 지리산 사이에는 시간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이 존재한다. 지리산 시간이 고무줄이지만 서울시간은 그물코처럼 촘촘하다.

    이 시인이 궁극적인 가치로 생각하는 것은 자유로운 삶이다. 하지만 그도 집착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오토바이다. 처음 80만원을 주고 산 125cc 오토바이에서 계속 업그레이드를 했다. 다음해 500만원을 투자해서 750cc 오토바이로 바꿨다. 2002년 8월 드디어 1450cc 중고 할리데이비슨을 구입했다. 11년 된 중고지만 금액이 1500만원이나 한다.

    그는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현대판 말이라고 부른다. 엔진소리가 말발굽소리와 비슷해 마치 말에 올라탄 느낌이라고. 그 소리와 심장의 박동소리가 교감하기 시작한다. 봄에 매화가 필 때 할리를 타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변인 섬진강가를 달리면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다. 시속 150km 이상 달리며 입을 벌리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강하다.

    40대의 오토바이는 자유에 대한 갈망

    “섬진강을 달리면 ‘바람이 나인가, 내가 바람인가’라는 화두가 저절로 잡혀요. 내가 바람이기도 하고, 바람이 곧 나이기도 하죠. 가장 큰 쾌감은 오르가슴이에요. 오르가슴은 에고의 소멸에서 발생하는데, 바람을 통해서도 에고의 소멸이 올 수 있습니다. 바람을 실감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오토바이 아닐까요. 오르가슴을 느낄 정도가 되면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이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옵니다. 옛사람들이 말을 탔던 느낌이 이런 것이었을까.”

    옛사람들은 인간의 취미를 6단계로 분류했다. 응(鷹)-마(馬)-주(酒)-색(色)-난(蘭)-석(石)이 그것이다. 10대에는 응이다. 응이란 솔개를 키워서 꿩을 잡는 놀이다. 20대는 말이다. 20대의 넘치는 혈기는 말을 타야 해소된다는 것. 30대는 술이고, 40대는 색이다. 50대는 고요한 난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연륜이고 60대가 되면 수석을 좋아한다. 수석은 돌로 무정물(無情物)이다. 무정물은 배신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배신당한 경험이 축적되는데, 배신하지 않는 대상이 바로 수석이다.

    여기서 오토바이는 20대의 말이다. 20대가 오토바이를 타야만 이 공식에 맞지만, 필자가 이 시인을 보면서 느낀 바는 40대에 들어서야만 오토바이를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40대는 인생의 반환점을 이미 넘어섰다. 나머지 거리는 뻔하다. 몸이 굳기 시작하고 어느덧 흰머리가 솟아나는 나이가 됐다는 서글픔이 밀려온다. 삶이 별것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하는 연령이다. 하지만 육체는 아직 완전히 시들지 않았다. 이때 시도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가 오토바이다. 20대의 오토바이는 혈기의 방출이지만 40대의 오토바이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한쪽은 넘쳐서 타지만 한쪽은 허기져서 탄다. 어영부영 하다가 인생 종치는 것 아닌가 하는 절박감이 오토바이를 끌어당기게 한다.

    이 시인이 타는 할리는 얼른 보기에 경찰 오토바이와 비슷하다. 헬멧과 오토바이 복장도 가죽으로 되어 있어 경찰복 같다. 검문소를 휙 지나가면 의경들이 엉겁결에 경례를 붙이기도 한다. 마고실에 살 때는 할리 덕을 상당히 보았다. 시골에서는 가을이 되면 동네 앞 도로에 고추와 나락을 널어놓고 햇볕에 말린다. 이때 ‘밤손님’들이 고추와 나락을 훔쳐가는 수가 종종 있는데, 이 시인이 살고 있는 마고실에서는 도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가 할리를 동네 앞 도로변에다 정차해 놓았는데, 어수룩한 도둑이 이것을 경찰 오토바이로 본 것. 이를 안 동네 노인들이 매일 저녁 할리를 도로변에 세워놓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조만간 탁발순례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실상사의 도법(道法), 수경(收耕) 스님과 함께 3명이 한 조를 이뤄 전국을 돌아다닐 예정이다. 이름하여 ‘생명평화탁발순례’다. 전국을 걸어다니며 얻어먹는 순례길이다. 밥을 주면 밥을 먹고, 술을 주면 술도 먹고, 돈도 주면 돈도 받는다. 잠은 마을회관 같은데서 잔다. 전국을 다니면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모든 사람을 선생으로 생각하고 듣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

    먼저 지리산 일대의 45개 면을 걸어다닌다. 600km로 한달 반이 걸린다. 그 다음은 제주도로 50일 일정이다. 그리고 백두대간의 동쪽인 부산에서 민통선까지 지그재그로 올라간다. 다시 백두대간 서쪽으로 지그재그로 내려온다. 그 후 남해안 일대를 돌아다닌다. 만약 북한이 열리면 그곳까지 갈 생각이다.

    -지금은 이렇게 즐겁지만 자칫 베짱이가 되는 건 아닐까요. 몸이 늙어버린 후에는 어떻게 살려고 합니까.

    “지리산에 우천(宇天) 허만수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해요. 진주의 부잣집 아들이었는데, 일제 때 일본유학도 갔다온 인텔리였어요. 그는 지리산을 사랑해 산청. 중산리 쪽에서 30년을 살았습니다. 산꾼들에 의하면 지리산의 초기 등산로는 거의 허만수가 개척해 놓은 것이라고 해요. 그는 지리산을 애인처럼 아끼고 하느님처럼 따랐어요. 죽을 때도 지리산에서 죽고 싶어했습니다. 신라의 최치원이 죽을 때 화개 골짜기로 들어가 사라져버렸다는 말처럼 자신도 최치원처럼 사라지겠다는 염원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는 70대가 되어 죽을 때가 가까워 오자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들어갔죠. 평소에 봐두었던 어느 이름 모를 동굴로 숨어 들어간 것입니다. 지인들이 칠선계곡으로 가서 샅샅이 찾았지만 끝내 그를 찾아내지 못했어요. 지리산의 바람이 된 거죠. 나도 나이 들면 허만수처럼 최후를 마치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는 이원규 시인의 표정은 심각하지 않았다. 3일간 이 시인과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헤어질 때가 됐다. 지난밤에 마신 술기운이 남아서인지 그의 눈이 약간 충혈돼 있었다. 눈이 맑다고 도인인 것은 아니다. 불그레한 눈에 꾀죄죄한 얼굴이지만 그 안에는 내공이 축적되어 있었다. 그는 프로급 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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