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미군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에 항의하는 촛불시위.
최근 한미관계도 당시 못지않게 불편해진 듯하다. 물론 이런 상황이 예전에 없었던 것도 아니고 한미관계 또한 시기와 분위기에 따라 변화할 수 있으므로, 공연히 ‘위기’라고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자주를 강조하는 목소리, 약속했던 이라크 파병을 재검토하자는 주장이 계속되는 걸 보면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국민들은 더 이상 미국을 ‘혈맹’이라 말하지 않고, 미국으로부터는 한국을 ‘신뢰할 수 없는 동맹’이라고 생각한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이유와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철하게 살펴보아야 할 시기가 온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우리가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나라인가, 아니면 이제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나라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세대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이 2004년 한국이 처한 현실이다. 특히 6·25를 겪은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는 미국을 보는 눈이 판이하게 달라져버렸다.
실리와 신의
46년 전 필자가 처음 주미 대사관에 부임했을 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 시절 대미외교는 밀가루나 보리 같은 미국의 원조물자를 얼마나 많이 받아오는가가 교섭의 핵심이었다. 받아온 물자를 팔아서 마련한 예산이 없으면 나라를 지탱할 수 없었다. 그 해 미국의 군사원조 규모에 따라 외교의 성패가 평가되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러한 원조에는 공산권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는 미국의 안보전략이 담겨 있었다. 한국이 제대로 돌아가야만 미국에게 이익이 되므로 도와준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동맹국에 대한 신뢰, 6·25전쟁에서 숨진 자국 병사 5만 여명의 목숨값과 의리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 요즈음의 우리 사회, 특히 젊은 세대는 철저한 실리주의에 입각해 국제관계를 바라본다. 그들에게 국가간의 신뢰와 원칙은 무가치한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물론 실리추구를 안할 수는 없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 조건 없이 남을 도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쪽의 실리만 강조한다면 외교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외교란 자국의 이익과 함께 상대방의 입장까지 고려하는 것이다. 모든 나라가 자국의 실리만 추구한다면 세계는 갈등과 반목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고 국제질서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실리추구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리만 추구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단기 실리를 추구하다 장기적인 이익을 놓칠 가능성도 높다.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이 30년 전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국제적 사안에 참여하라는 기대도 그만큼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이러한 요구에는 무감각하면서 변화된 지위만 누리려고 하는 것, 약삭빠르게 우리 이익만 챙기겠다는 자세는 국제적인 신뢰를 잃는 지름길이다. 신뢰와 원칙에도 실리 못지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우방이라 해도 모든 문제에 있어 항상 의견이 같을 수는 없고 또 이해(利害)가 일치할 수도 없다. 개인 사이에도 아주 친한 친구가 서운한 행동을 하면 그 섭섭함이 증폭되듯, 미국이 사소한 일일망정 우리 비위를 건드리는 행동을 하면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격렬해지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양측이 다같이 상대방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모든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한미동맹을 통해 우리가 얻는 이익이 한미동맹이 깨졌을 때 감수해야 하는 비용보다 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장의 서운함, 당장의 감정에 이끌려 동맹을 훼손하는 일은 현명치 못한 일이다. 과거를 돌아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더라도 미국과 호혜적인 우호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당장 북한 핵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미국의 협력을 기대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현실적으로 국제관계를 볼 때 어느 나라든 완전히 자주적일 수는 없다. 모두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만큼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주와 동맹 가운데 택일한다는 것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자주의 정신은 견지하되, 실제에 있어서는 동맹을 존중하는 슬기로운 처신이 요구되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