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미친 사랑의 노래 ‘탐닉’

  • 글: 장석주 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입력2004-07-02 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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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친 사랑의 노래 ‘탐닉’

    ‘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조용희 옮김/문학동네

    진화생물학에 따르자면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느냐 마느냐를 선택할 때 그것이 생존이익과 번식이익에 들어맞는가 여부를 판단의 지표로 삼는다고 한다. 사람은 잠재적 짝에게 자신이 생존이익과 번식이익에 적합한 존재라는 걸 선전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오랫동안 인류가 겪은 성(性) 선택의 역사에서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적응의 산물이다. 생물계에서 그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게 수컷공작의 화려한 꼬리다. 오늘날 지구 위에 살아 남은 다양한 생물 종(種)들은 짝 고르기에서 우월적 지위를 부여받은 개체 형질의 ‘적응도 지표’를 진화시켜온 결과물이다. 다시 말해 DNA·염색체·세포핵·뇌와 같은 대혁신, 다리·눈·깃털·알·태반·꽃과 같은 중혁신,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 소혁신, 그리고 구애울음이나 특이한 모양의 페니스와 같은 미세혁신의 결과물들이다.

    우리는 여전히 마음에 드는 짝을 만날 때 마음속에 있는 수컷공작의 꼬리를 활짝 펼치며 성 선택의 심리를 자극하려 든다. 인간의 성적 장식, 혹은 우리 종의 공작 꼬리는 다름 아닌 마음이다. 부연하자면, 성 선택의 관점에서 유행을 따르고 재치 있는 농담을 하고 기부금을 내고 스포츠경기에서 승패를 겨루고 하는 것 따위가 마음의 산물인데, 마음에서 나오는 창의적인 것들과 문화적인 것들은 우리 종의 성적 가치를 선전하는 “문화의 모자에 꽂힌 깃털장식”이다.

    끈적거리는 욕망의 소설

    마르지 않은 정액과 흥건한 음액으로 질척거리는 일기, 혹은 소설. 시작에서 끝까지 온통 끈적거리는 욕망과 그것의 비릿한 냄새로 뒤덮여 있는 책. 혹은 격렬한 욕망의 보고서. ‘탐닉’엔 아니 에르노가 먼저 썼던 ‘단순한 열정’(1992)을 낳았던 바로 그 체험이 날것으로 드러나 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나는 당대의 관습과 도덕으로 이 소설에 나오는 작중 화자의 행위를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작가 자신의 정제되지 않은, 쾌락에 미친, 그것의 탐닉에 하나의 제물로 삶을 바쳐버린, 그 날것 그대로의 체험을 읽는 일은 매우 참혹하다. 이 너무나 은밀하고 사적인 기록물을 작가는 왜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내보였을까? 과잉 노출벽이 아니라면 어떤 내적 필연이 작용한 것일까?



    소설은 아니 에르노와 S라는 이니셜로 지칭되는 파리 주재 소련대사관에 근무하는 한 남자와의 연애 기록이다. 젊은 육체를 가졌다는 걸 빼면 별다른 매력이 없는 남자 S의 교양이나 취향, 그가 품고 있는 생각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 남자가 명품이나 밝히는 속물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분별없이 송두리째 저를 바쳐 탐닉하는 여자에게 그 남자는 완벽한 신이다. 제 위에 군림하는 신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숭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사랑은 타자를 포섭하고 주체의 지배 아래 두려는 하나의 전략이다. 사랑은 그 상대가 ‘지배자의 절대적 권리’를 행사할 때마다 철저하게 피동적이 되는데, 그 피동화는 자발적인 것이다. 연인의 애무란 서로의 손으로 몸에 작용하는 이성(理性)의 무장을 해제하고 몸에 대한 배타적 독점 주장을 약화시키는 전략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타자의 손길이 미쳐서는 안 되는 몸의 저 은밀한 금기의 영역들인 가슴, 샅, 성기까지 무방비로 내어준다.

    사랑은 엄정한 이성의 눈으로만 보자면 아무런 생존이익도 낳지 않는 손실이고 무익한 소비일 뿐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이성의 눈이 잠깐 닫혔을 때 사랑에 빠진다. 사랑은 감정 과잉의 지속이다. 때로는 그를 붙잡아두기 위해 “그의 머리카락들을 내 옷에 꿰매고 싶은 욕망”을 낳기도 한다.

    이별은 사랑의 죽음이다. 자명하게 다가오는 사랑의 죽음 앞에서 사랑의 행위는 격렬해진다. “애널 섹스와 정상 체위의 혼합으로. 완전히 녹초가 됨. 한순간, 그 부분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는 문장에 놀랄 필요는 없다.

    왜 사랑의 행위는 이별의 자명함 앞에서 격렬해질까?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허무 때문이다. 그가 없는 하루란 “살아야 할 또 다른 백지 같은 하루”이고 아무 보람 없는 고문이다. 작중 화자가 애써 분별하려는 마음을 몸과 마음의 탐닉으로 뒤덮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탐닉하는 마음의 틈으로 분별이 내비칠 때마다 “이제 나는 사랑 속에서 진실을 찾지 않는다. 관계의 완벽성, 아름다움, 쾌락을 찾을 뿐이다”는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아니 에르노의 소설을 꽤나 읽어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내에 번역된 아니 에르노의 소설은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여전히 에르노의 소설을 지지하지만 ‘탐닉’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만남은 격렬한 섹스로 이어지고, 휴지기의 긴 시간에 몸과 마음은 다음의 섹스를 기다리며 기다림과 고통, 나른함과 욕정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한다. 그리고 작가는 틈틈이 일기를 적는다. 섹스에의 탐닉은 염색체와 뇌를 푹 삶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나날의 삶은 소름끼칠 만큼 명확한 욕망, 섹스 뒤에 젖어드는 육체의 노곤함,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결별의 두려움, 혹시 그가 다른 젊은 애인에게 빠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채워진다.

    탐닉하는 영혼에게는 사랑이 모호하지 않다. 그것은 명쾌하게 정의될 수 있다. “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거기 있는 것, 그리고 섹스하고, 꿈을 꾸고, 그가 또 오고, 섹스하고. 모든 것은 기다림일 뿐이다.” 사랑은 “멋 부리고 싶은 욕망”과 “끝없는 구매욕”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폐경기를 앞둔 여자가 오로지 젊은 애인을 어떻게 하면 더 성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갸륵한 마음을 갖는 것, 즉 “새로운 키스 방법과 욕망을 해소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끝없이 고안해야겠다”는 결심, “사랑의 몸짓과 체위에 대한 끝없는 발명” 그리고 구체적 행동으로 프랭탕백화점 섹스코너에서 ‘애무에 관하여’ ‘부부와 사랑’ ‘육체적 사랑의 테크닉’을 들고 계산대로 향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완벽한 육욕과 승화”를 위한 도구들이지만, 작중 화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지 못하도록 현금으로 지불하는데 그 대목에서 왠지 눈물이 솟구칠 지경이다.

    그런 분별을 잃은 마음은 끝간데 없이, 방향 없이 움직이는데, 그 무분별한 극단의 하나가 “처음으로 내 베개 밑에 그의 것으로 젖은 팬티를 하나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 맹목과 광기의 에너지에 푹 젖은 의식이 간혹 분별을 찾아 도덕과 교양의 눈으로 자신의 탐닉하는 생을 차갑게 관조할 때가 있다. “정말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 혹은 “이것이 삶인가?”하는 회의에 빠지고, 쾌락의 한계를 더 넓혀가려는 끝없는 욕망에 허덕이면서도 남자의 생일선물로 “그가 태어난 날에 발행된 신문을 선물”할 때다.

    탐닉의 대상을 상실할 때 그 공허는 탐닉의 깊이와 비례한다. 형언할 수 없는 공허의 공포는 “살아남는다는 것은 참혹하다”는 말을 낳는다. 탐닉의 대상을 잃은 작중 화자는 남자의 형편에 따라 유예와 지체를 거듭하지만 매번 질펀하게 이루어지던 쾌락의 향연을 잃어버린 뒤 고통 속에서 “죽음과 사랑의 욕망, ‘적어도 내게 에이즈는 남겨놨을 거야’”라는 헛된 확신만 움켜쥘 뿐이다.

    끝없는 욕망 때문에 성적 탐닉에 빠지고 거침없이 파멸까지 나아가려는 이 미친 사랑의 이야기를 읽는 게 나는 두렵다. 사랑에 덧씌워진 온갖 환상을 다 지워버리고 난 뒤에도 나는 사랑을 욕망할 수 있을까? 이토록 무익하고 소비적인 사랑 때문에 존재의 에너지와 귀중한 시간을 기꺼이 바칠 수 있을까? 내 두려움은 사랑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잃고 고작 고갈과 환멸의 상상력으로 그것을 대체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문득 기적 같은 사랑이 다가올 때 그 앞에서 비겁하게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사랑이 온다면 소모적이고 어리석은 짓일지라도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고 싶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은 자전과 허구의 경계가 희미하다. 더구나 ‘탐닉’은 처음부터 작가 스스로 제 일기라고 밝히고 있다. 작중 화자의 목소리는 한 남자에게 미쳐버린 작가의 육성으로 뒤바뀐다. 나는 그것을 다시 작중 화자의 목소리로 되돌린다. 아니 에르노는 말한다. “글을 쓰지 않는 인생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걸 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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