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여름 밤 깊은 산중, 나뭇가지 사이로 촘촘히 쏟아지는 별빛에 정신을 잃는지 잠이 드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신 새벽 깊은 계곡 맑은 물소리에 잠을 깨고, 머리맡에 떨어지는 이슬과 은은한 산 내음에 내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나인 듯 착각에 빠진다. 속세는 어디고 미륵은 어딘가.
유서 깊은 고개 하늘재.
해마다 봄이 되면 수만 명의 미국인들이 이 트레일에 도전하기 위해 배낭을 꾸린다고 한다. 완주하려면 눈이 녹기 전 남부에서 시작해 겨울이 되기 전 북부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이 부지런히 걷는다면 6개월 남짓 걸리는 이 코스를 실제로 완주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6개월 연속해 달리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은 일일 뿐 아니라, 수십kg의 장비를 지고 산길을 걷다 보면 생각보다 빨리 피로가 찾아오는 탓이다.
미국의 여행작가이자 언론인인 빌 브라이슨은 자신이 직접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도전한 뒤 산에서 보고 느낀 것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이 바로 1999년 출간돼 ‘뉴욕타임스’에 3년 연속 베스트셀러로 선정된 ‘A Walk in the Woods’이다. 이 책은 2002년 한국에서도 ‘나를 부르는 숲(동아일보사)’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는데 미국에서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단 한번이라도 산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이 던지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가슴 벅차오르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길동무와 함께 걷는 길
5월23일 오전. 충주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조령으로 향했다. 이번 산행엔 베테랑 산꾼 김경수씨가 길동무로 따라나섰다. 강원도 인제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대학시절 산악반 멤버로 활동했던 그는 민박 대신 야영을 제안했다. 덕분에 필자는 아주 오랜만에 산속에서 밤을 지낼 수 있게 됐다.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는 대체로 빨리 걷고 일찍 쉬기 위해 가볍게 짊어지고 당일 산행을 하거나, 연속산행을 하더라도 주로 민박에서 묵었었다.
조령 입구에서 제3관문으로 오르는 길엔 자연휴양림이 잘 가꾸어져 있다. 문경 쪽이 KBS ‘무인시대’ 세트장 등으로 번잡하다면 충주 쪽은 가족끼리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한적한 숲길이다. 조선시대 때 같으면 한양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밟는 길이었을 것이다. 과거에 붙었거나 장사를 잘했으면 콧노래를 부르며 넘었겠지만, 시험에 떨어졌거나 실속 없이 다리품만 팔았다면 눈물과 한숨으로 오를 수밖에 없었을 고개다.
제3관문 약수터에서 목을 축인 뒤 성벽을 따라 대간으로 붙었다. 오른쪽으로 군사들이 머물렀던 군막터를 지나쳐 40분쯤 오르면 마폐봉(927m)이 나온다. 마패봉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를 빛낸 암행어사 박문수가 마패를 걸어놓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3관문에서부터 시작된 산성은 마폐봉을 지나 북문 동문으로 이어진다. 이 성벽을 기점으로 왼쪽 지역이 충북 북부의 명물 월악산 국립공원이다.
오락가락하는 날씨를 걱정하며 서둘러 동문까지 내려서자 중년의 부부가 제3관문으로 빨리 빠질 수 있는 길을 물었다. 우리는 지도를 살펴본 뒤 지름길을 가르쳐주고 산행을 재촉했다. 이곳에서 부봉(916m)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다리에 잔뜩 힘을 모아야 한다. 밧줄을 잡고 암벽에 붙는 것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내고 바위 위로 올라서면 문경새재 능선이 시원하게 들어온다. 며칠째 감기 때문에 온몸이 고달팠지만, 이 순간만은 생생한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길을 잃고 밤에 취하다
부봉과 959m봉을 지나 평천재로 가는 길에서는 표지를 잘 확인해야 한다. 대간이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동쪽으로 꺾어진 뒤 다시 북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보통 백두대간 주능선은 북북동을 기본으로 하면서 뻗다가 이따금씩 서쪽으로 휘어진다. 때문에 이례적으로 남쪽으로 흐르는 이 코스에서는 독도(讀圖)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 결국 필자 일행도 부봉 너머 바위지붕에서 기분 좋게 산세를 감상한 뒤 내려서는 길에서 그만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나침반을 꺼내들고 위치를 확인했으나,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한번 잃어버린 길은 좀처럼 되돌리기가 어렵다. 이렇게 되면 일단 내려섰다가 다시 힘을 모으는 것이 최선이다. 1시간 남짓 걸어내려가자 3시간쯤 전 중년 부부에게 일러주었던 동화원 지름길이 나왔다.
동화원에서 대간에 다시 붙을 수 있는 길을 묻자 두 명의 여성이 자세히 일러주었다. 다시 “하늘재까지 얼마나 걸리겠느냐”고 묻자 그들은 “1시간도 안 걸린다”고 답했다. 지도상으로만 봐도 3시간 가까이 걸리는 길을 1시간 만에 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대간을 타다 보면 가끔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대개는 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산이 일상이다 보니 산길도 평지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는 우리다. 다들 자신의 그릇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산에서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이 아니던가. 우리는 하늘재까지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부봉 밑 8부 능선쯤에 텐트를 쳤다.
저녁식사는 김치찌개에 카레덮밥. 소주에 과일주를 털어넣자 금세 취기가 돌았다. 중3 때 처음 설악산에 오른 뒤 암벽타기를 즐기게 됐고 대학시절 산악반에서는 거의 군대식으로 훈련했다는 김경수씨의 무용담은 들을수록 흥미로웠다. 그렇게 청춘을 산에서 보냈기에 무려 5년 만에 배낭을 꾸리면서도 조금의 빈틈도 없이 완벽하게 장비를 챙긴 것이리라. 실제로 그의 배낭에는 전투식량과 비상식량, 갖가지 반찬과 밑반찬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선배들에게 줄빠따 맞으면서 배우다 보니 그냥 습관이 돼 버렸어요.”
이 길동무의 얘기를 들으면서 무엇이든 처음 배울 때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만 해도 중학교 때 속리산 근처의 친척집에 놀러간 것이 계기가 돼 산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물병 하나만 들고 다니다 보니 지금까지도 간단한 차림새로 훌쩍 다녀오는 것이 습관처럼 돼 버렸다. 아무튼 필자는 이날 저녁 고수로부터 배낭 꾸리는 법부터 워킹, 산행시 주의할 사항까지 두루 배울 수 있었다.
한밤중 목이 말라서 눈을 떴더니 어디선가 정신을 맑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곡의 물줄기였다. 낮에는 걷느라 느끼지 못했고 저녁에는 술기운 때문에 집중할 수 없었던 물소리가 귓가에 제대로 잡힌 것이다. 텐트를 열고 나가 계곡물에 얼굴을 적신 뒤 고개를 들자 나무숲 사이로 촘촘히 박힌 별들이 보였다. 텐트 앞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는데 나무에서 떨어지는 이슬이 텐트 위를 때리는 소리가 더없이 경쾌했다. 텐트 안에서는 빗방울인가 하겠지만, 밖에서 보면 분명 대자연의 숨결이다. 우리는 과연 자연의 섭리를 얼마나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혹시 일평생 텐트 안에서 단 한번도 나가보지 못한 채 스러져가는 것은 아닐까?
현세에서 미래로 넘어가는 하늘재
24일 아침 일찍 라면을 끓여먹고 산행을 시작했다. 어제의 헛걸음을 만회하기 위해 초반부터 속도를 냈다. 하지만 동화원 아주머니들이 1시간도 안 걸린다고 일러준 하늘재까지는 2시간 이상 걸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하늘재로 가는 도중 평천재에 이르자 하루 전 길을 잃고 헤맸던 부봉의 주능선이 훤히 들어왔다. 평천재에서 하늘재로 급하게 떨어지는 길에서 마주 오는 노인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자 멀리 포암산(布巖山·961.8m)이 보였다. 저 밑이 바로 백두대간의 유서 깊은 고개 하늘재다.
하늘재는 충북 충주와 경북 문경을 잇는 고개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의 제8대 왕 아달라이사금이 156년에 계립령을 열었다고 돼 있는데, 이 계립령이 바로 하늘재다. 북진을 내건 신라와 이에 남진으로 맞선 고구려는 6세기 무렵까지도 한강 유역 도처에서 혈투를 벌였다. 특히 하늘재를 사이에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주와 상주에 양측의 야전사령부가 있었다는 기록이 이를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하늘재는 종교적으로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하늘재 남쪽은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고 북쪽은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다. 그래서 예로부터 하늘재는 관음에서 미륵으로, 즉 현세에서 미래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여담 하나 더. 하늘재에서 충주 쪽으로 가다 보면 미륵사지가 나오고 이곳에 세계사라는 절이 있다. 이 곳 미륵불은 국난이 있을 때마다 식은땀을 흘린다고 해서 전국의 불자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 올초 대통령 탄핵사태 직후에도 식은땀을 흘려 언론에서 화제의 뉴스로 보도한 적이 있다.
인간세계의 경계지점인 하늘재에서 잠시 숨을 고른 백두대간이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구친 봉우리가 바로 포암산이다. 포암산은 베바우산으로도 불렸는데, 겨울철 바위에 눈이 달라붙은 모양이 마치 베를 펼쳐놓은 것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회색으로 우뚝 솟은 모습이 마치 삼대 껍질을 벗겨놓은 것과 닮았다고 해서 마골산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아무튼 포암산은 줄곧 오르막이어서 몸속의 진을 다 빼고 나야만 정상에 설 수 있다.
일단 정상에 오르면 왼편으로 장쾌한 월악산 주능선이 시원하게 다가온다. 포암산에서 긴 휴식을 취하며 초콜릿으로 허기를 달래는데 검은색 나비 두 마리가 주변을 맴돌았다. 이때 갑자기 하늘 위로 전투기 한 대가 굉음을 내며 내달리자 그 소리에 놀란 나비는 금세 어디론가 사라졌다.
백두대간은 포암산에서 잠시 북동쪽으로 뻗다가 동쪽으로 대미산(大美山·1115m)까지 길게 흘러간다. 관음재를 지나 938.3m봉으로 가는 길에 맹랑한 입간판이 하나 서 있다. 왼편 화살표에 지리산, 오른편 화살표에 백두산을 표시해놓은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왼편의 경계가 충북 충주에서 제천으로 바뀐다. 여전히 문경땅인 오른편에서는 석가탄신일을 앞둔 사찰에서 ‘석가모니불’ 독경소리가 들려와 발걸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1032m봉으로 가기 전 긴 너덜지대를 지나야 하고 여기에서 1000m 이상 되는 봉우리를 세 개 넘어서면 대미산이다.
남한강 한가운데 솟아 있는 도담삼봉.
마르지 않는 대미산 눈물샘
대간은 대미산에서 왼쪽으로 뻗는데 정상에서 15분쯤 내려가면 눈물샘 안내판이 나온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대미산의 본래 한자명은 ‘黛眉山’이었다고 한다. 글자 그대로 검푸른 눈썹처럼 생긴 산이라는 뜻이다. 눈물샘은 눈썹 밑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셈이다. 눈물샘의 물은 어지간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물맛이 좋기로도 유명한데, 금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나는 법이다. 아직은 이른 새벽이었지만 동쪽 하늘은 벌써부터 붉게 물들고 있었다. 산 뒤편에서는 들짐승이 돌아다니는지 이따금 괴상한 소리와 함께 돌멩이가 구른다. 새삼 그들이 이 산의 주인이고 우리가 불청객임을 느낀다. 눈물샘의 물을 두 컵이나 마시고 텐트로 들어가 잠을 청하는데 텐트 밖으로 붉어지는 모습이 갈수록 장관이다. 본격적인 일출이 시작된 것이다.
눈물샘에서 북으로 향하던 대간은 1051m봉에서 다시 동으로 휘어진다. 여기서부터는 경북 문경땅으로 삼림욕장을 방불케 하는 시원스런 낙엽송지대가 이어졌다. 981m봉을 기분 좋게 내려서면 왼편으로 표지판이 하나 보이는데 백두대간 종주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포항셀파산악회가 실측한 거리 안내판이다. 이들의 계산에 따르면 백두대간 남쪽의 총 길이(천왕봉-진부령)는 734.65km이고, 이 지점이 정확히 그 중간지점인 367.325km가 되는 곳이다.
백두대간 중간점에서 계속 내리막길을 따라가면 차갓재가 나오고 이곳에서 15분쯤 더 가면 작은 차갓재가 나온다. 황장산(黃腸山·1077.3m) 등산의 기점이 되는 곳이라 등산객이 많이 오간다. 황장산은 천천히 몸을 풀다가 막판에 불끈 큰 바위로 솟은 모양새가 희양산이나 포암산과 닮았다. 황장산의 명물 묏등바위로 오르려면 로프에 의지해야 하고, 정상 문턱에서는 아슬아슬한 바위벼랑을 조심스럽게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정상에 올라 발밑을 바라보면 수십 미터에 달하는 짜릿한 절벽이고, 멀리 굽어보면 문경과 제천의 산골마을이 아기자기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황장산이란 이름은 이곳에서 많이 생산되는 황장목에서 나왔다. 황장목은 춘양목과 더불어 좋은 목재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데, 나무 색깔이 노란색이어서 예로부터 대궐의 건축자재나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쓰였다. 조선 숙종 때는 이 산이 벌목과 개간을 금지하는 봉산(封山)으로 정해지기도 했다. 이를 입증하는 표지석이 지금도 남아 있다. 황장산은 문헌에 따라 황정산 또는 작성산 등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황장산 정상에서 감투봉으로 가는 길은 칼날 같은 바위능선이고, 감투봉에서부터는 밧줄을 잡고 내려서는 가파른 코스가 이어진다. 또한 황장산 아래 황장재부터 1004m봉까지는 1시간 남짓의 시원한 암릉구간이 펼쳐져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황장산은 당일 등산코스로 남다른 사랑을 받고 있다. 1004m봉을 끝으로 대간은 다시 하강을 시작한다. 1시간 남짓 편안하게 즐기면서 내려서면 벌재다. 이곳엔 문경과 단양을 연결하는 33번 도로가 지난다.
고요한 숲속의 아침
벌재에서 황정약수터로 가는 길 양쪽 산허리는 절개지 보수공사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조림은커녕 맨살이 드러난 산 흙조차 막지 않아 큰비라도 오면 토사가 그대로 도로와 배수로에 흘러들 판이었다. 황정약수터 앞에는 트럭을 개조한 포장마차가 서 있고, 그 옆으로 아주머니 다섯 명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소주병만도 5병. 벌써 각 1병씩은 마신 듯했다.
저녁준비를 하다가 술안주 생각이 나서 포장마차 아주머니에게 약간의 부식을 부탁했더니 아주머니는 찌개양념에 김치까지 듬뿍 담아주셨다. 거기에 어묵과 고추장을 풀어넣으니 근사한 소주안주가 만들어졌다. 낙엽송 숲에서 우리는 또 다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이번 산행의 마지막 밤을 즐겼다. 산에서 밤을 보내본 사람은 알겠지만, 밤 9시만 돼도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둡다. 일찍 잠들고 새벽에 깨어 밤하늘을 바라보는 여유가 벌써 사흘째 이어지고 있다.
아침이다. 숲속의 아침은 더욱 고요하다.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는 듯해서 서둘러 아침을 먹고 대간으로 붙었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부을 것만 같다. 낮은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땀은 알맞게 배어났다가 흐르기 전에 식었다. 이런 날씨에 걷는 오솔길은 꽤 매력적이다. 산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나기 때문이다. 때늦은 라일락 향기와 이미 떨어진 철쭉 꽃잎의 잔향도 음미할 만하다. 이 대목에서 함께 걷던 김경수씨는 “산마다 냄새가 다르다”며 고수다운 내공을 보여주었다.
문봉재(1040m)와 옥녀봉(1077m)을 지나 평탄한 능선을 달려가자 오른쪽으로 삼율광산의 돌 캐는 소리가 들려오고 조금 더 나아가자 왼편으로 소백산관광목장이 보였다. 여기서부터 왼편은 충북 단양이고 오른편은 경북 예천이다. 소백산관광목장을 지나 고개를 두 개 넘어서면 927번 지방도가 지나는 저수령(低首嶺)이 나온다. 저수령의 유래는 두 가지다. 너무 험난해서 이 길을 지나는 길손들의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는 설과 이 고개를 넘는 외적들의 머리가 모두 날아갔다는 설이 있다.
대미산에서 왼쪽(서쪽)으로 흘러가는 백두대간.
산나물 캐는 사람들
저수령 팔각정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촛대봉(1081m)으로 향했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 오르막에서 트림소리와 신음소리가 절묘하게 섞여 나왔다. 촛대봉 정상엔 쉬어가기 좋은 공터가 있는데, 이곳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소백산관광목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촛대봉에서 시루봉(1110m)으로 가는 길은 산나물 채취지역으로 유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곳곳에서 나물 캐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나온 나물들은 도매상을 거쳐 도시로도 가지만, 일부 식당과는 직거래도 한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의 산채식당이 그런 경우다. 이 식당에 나물을 대는 사람만도 수십 명에 달한다고 한다.
시루봉에서 배재로 가는 길은 좌우로 대칭을 이룬다. 왼편은 참나무 숲이고 오른편은 잣나무 조림지역이다. 백두대간에서는 이런 지역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기후 탓도 있지만 대개는 산불로 인해 인위적으로 조림된 것이다. 대간의 일부지역에서는 산불 확산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땅을 파헤치고 블록을 쌓기도 했지만 역시 최선의 대책은 홍보와 교육일 것이다. 최근 한반도 곳곳에서 일어난 산불이 사람들의 부주의로 일어났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배재를 지나 1053m봉을 넘어서면 싸리재다. 우리는 이곳에서 단양군 대강면 남조리 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1시간 남짓 꾸불꾸불한 능선을 따라 내려서자 시원한 계곡물이 나타난다. 여기서 자갈길을 따라 10여분 걸어가면 단양유황온천이 있다. 남조리는 바로 이 유황온천 때문에 마을의 형태가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집집마다 민박 또는 식당 간판을 달았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메뉴판만 달랑 걸려 있는 텅 빈 식당과 먼지를 날리며 온천으로 드나드는 자가용. 필자의 눈에 아름다운 마을 남조리는 분명 개발의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 세상에 내 것 어디 있나
6월5일 가족들과 함께 단양으로 갔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구인사. 영춘면 백자리에 자리잡은 구인사는 한국불교 천태종의 총본산으로 사찰 규모에 있어서 전국 최대를 자랑한다. 일종의 기업화된 사찰이다 보니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 많다. 5층으로 지어진 법당 건물에 층마다 가득 들어찬 기도자라든가 마이크로 연신 불자들을 호명하는 사내방송, 신도들로 북적거리는 우체국 등이 그렇다. 가람 배치도 여느 사찰과 달라서 주요건물이 계단과 다리로 이어져 있는가 하면 곳곳에 진열된 인공화분이 이채롭다.
흔히 사람들은 기도를 하려면 조용한 곳으로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불자들의 경우 그런 의식은 더욱 강하다. 그런 면에서 구인사는 적절한 기도처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구인사로 몰려드는 기도자의 수는 더욱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그렇다면 거기엔 보통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법하다. 필자에게는 구인사 경내 곳곳에 붙어 있는 대조사님의 설법 문구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이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나. 사용하다 버리고 갈 뿐이다.’
구인사에서 2km 정도만 밖으로 나오면 고구려의 전쟁영웅 온달장군 유적지가 있다. 온달이 무술을 익혔다는 온달동굴은 고수동물 천동동물 등과 함께 석회암 동굴로 유명한데, 한국전쟁 때는 피난민들의 은신처로 쓰였다고 한다. 온달관에서는 평강공주와의 신분을 뛰어넘은 러브스토리와 고구려 사람들의 소박한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도담삼봉은 단양팔경 중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명소다.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물 속에 절반쯤 몸을 담그고 있는 도담삼봉은 가운데가 남봉, 왼쪽이 처봉, 오른쪽이 첩봉이라 불린다. 여기에는 첩봉이 남봉의 아이를 갖자 불룩해진 배를 남봉 쪽으로 내밀었고, 처봉은 질투에 불타 남봉에게서 등을 돌려 앉았는데, 하느님이 이들의 싸움을 보고 영영 움직이지 못하도록 벌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 봉우리를 바라보면 바위의 생김새가 더욱 절묘하게 느껴진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그(이론가)였던 정도전이 도담삼봉과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단양에서 태어난 정도전은 도담삼봉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급기야 자신의 호를 삼봉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한편 도담삼봉 인근 장군봉에는 ‘삼도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퇴계 이황이 이곳에 올라 읊었다는 한시가 전해오고 있다.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 신선의 뗏목을 취벽에 기대고 잘 적에, 별빛 달빛 아래 금빛파도 너울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