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한미군의 감축과 재조정 일정이 가시화됨에 따라 정부는 ‘협력적 자주국방’을 안보환경 변화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협력적 자주국방’의 명확한 비전과 구체적 방안은 여전히 모호한 상황이다. 이 개념의 입안에 관여한 바 있는 국방대 황병무 교수가 그 배경과 방향, 주요논점을 분석한 글을 ‘신동아’에 보내왔다(편집자).
지난해 10월1일 제55주년 국군의 날을 맞아 서울 세종로에서 펼쳐진 각군 시가행진.
이 문건에서 NSC는 한국의 국가안보 전략기조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평화번영정책 추진, 균형적 실용외교 추진, 협력적 자주국방 추진, 포괄안보 지향이 그것이다. ‘참여정부의 안보정책구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문건은 ‘협력적 자주국방(Cooperative Self-reliant Defense)’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누구’에 대한 자주국방인가
“전통적으로 자주국방은 스스로의 힘으로 국방을 담당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독자적 국방만으로 국가의 생존과 안전을 완전히 보장하기는 불가능하며 동맹국과 우방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 문건은 협력적 자주국방을 “한미동맹과 자주국방의 병행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동맹을 발전시키고 대외 안보협력의 능동적 활용을 통해 북한의 전쟁도발을 억제하고 도발 시 이를 격퇴하는 데 우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능력과 체제를 구비한다”고 덧붙였다. 또 “자주적 정예 군사력 건설의 기본 방향은 당면 위협에 대해서는 전쟁억제 능력을 우선적으로 확충하고 미래의 불특정 위협에 대해서는 잠재적 대응능력을 배양하면서 필수소요를 장기적으로 확보해 나간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 국방의 주요대상은 북한의 위협, 특히 북한의 전쟁도발이다.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전문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문건 또한 북한이 현재 우리 안보에 제1차적 위협임을 명기하고 있다. 국방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북한의 전쟁도발 ‘억제’와 도발 시 ‘격퇴’에 두고 있는 것이다. ‘협력적 자주국방’은 북한을 억제와 격퇴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냉전시기 이후 지속돼온 대북전략의 일관된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남북한간 대화와 교류가 확대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다른 북한은 군사력을 정치적 이유로 사용할 의도와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협력적 자주국방’을 북한의 군사위협에 대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왜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고 금강산 관광사업, 개성공단과 같은 경제교류를 활성화하려 하느냐는 질문이 자연스레 제기된다. 일반 국민이 정부가 추진하는 대북전략에 혼란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협력적 자주국방과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남북한 공동번영을 추구한다는 평화번영 정책은 모순되지 않는가.
이러한 의문은 안보전략의 다면성을 이해하면 쉽게 풀린다. 우리의 안보전략은 현존하는 평화를 지키면서 보다 안정된 평화와 공동번영을 추구할 체제를 만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협력적 자주국방’이 한반도에서 정전(停戰)체제를 지키는 목표를 추구한다면, 평화를 정착시키고 평화통일의 기반을 만드는 일은 이른바 ‘평화번영정책’의 몫이다. 이처럼 평화를 지키는 일과 평화를 만드는 일은 안보유지라는 동일한 목표하에서 추진되지만 전략이 다르기 때문에 이해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협력적 자주국방은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지원하는 배경적 힘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적대관계에 있던 미국과 중국은 상호억제력을 확충하면서 긴장을 완화시키고 정치적 신뢰를 회복하여 관계정상화를 추구했다. 통일 이전 서독의 동독에 대한 교류·협력정책에는 서독의 강력한 군사력과 주독미군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이러한 양면적 안보전략은 국제정치 현실에서 일반화된 것이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면 북한의 위협이 감소하거나 소멸될 것이다. 그 때엔 협력적 자주국방력이 약해도 되는 것일까. 이론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한 국가의 국방력과 타국과의 안보협력은 특정위협이 소멸됐다고 해서 경시할 수 없는 문제다. 그 주된 이유는 국제정치의 무정부적 성격에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위협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를 제도화한 것이 베르사유 체제다. 그러나 이 체제는 20년도 지나지 않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야기된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었다. 2차대전 종결과 함께 1945년 수립된 얄타체제 또한 마찬가지였다. 6·25전쟁은 바로 이 얄타체제 속에서 일어났다. 따라서 한 국가의 안보력 중 무장력은 국가 존재의 필수요소다.
그렇다면 협력적 자주국방의 실체는 무엇인가. 참여정부가 갑자기 이 개념을 들고나온 까닭은 또 무엇일까. 지난해 자주국방이 처음 언급되었을 때만해도 다소 혼란스러웠던 이 개념은 날이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다. 주한미군의 변화가 가시화되면서 그에 맞물린 협력적 자주국방의 실체 또한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협력적 자주국방의 실체를 이해하려면 우선 미국과 한국이 맺고 있는 군사적 보완관계의 변화부터 살펴봐야 한다. 6·25전쟁을 겪은 후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자체 국방력(KF)+미국의 군사력(AF)=한국의 국가안보(NS)’라는 구도를 유지해왔다. 양국은 한미연합 방위체제를 구축, 군사적 동맹을 제도화했다.
AF는 주한미군(AFK)과 한반도 유사시 증원력(AFA)으로 구성된다. AFK는 한미연합방위의 실효적 군사력이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한국방위에 있어 AFK는 KF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해 왔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이 독자적 전력증강계획(율곡계획 등)을 추진해 KF의 대북단독억제력은 점진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러나 KF만으로는 여전히 단독억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첨단전력을 지닌 AFK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형국이다.
‘평화번영과 국가안보’ 문건은 “우리는 향후 자체 군사력을 기반으로 국가방위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한미동맹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앞으로 한국방위에서 미군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됨을 의미한다.
자주국방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AFK의 변화에 나라가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출발했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자주국방 개념은 ‘닉슨 독트린’에 의한 주한 미7사단 감축 및 후속철군에 따른 대응으로 대두되었으며, 상호 연관된 세 가지 개념에 기초를 두었다. 자주적 의지에 기초해 국가를 방어한다는 국민의 의지, 자립적 방위력 및 자율적 방위행위를 기반으로 국가를 방위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박정희 정부의 이 같은 국방노선은 한동안 한미간 긴장의 수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나 한국의 독자적 방위력 증강과 주한미군의 현대화를 배합하는 방식의 한미연합방위체제 강화 노력 속에 해소되었다. 이 시기 ‘협력적 자주국방’ 태세는 유지되고 있었다.
현 정부에서도 ‘자주’는 주한미군의 재배치를 계기로 강조된 측면이 있다. 미국이 주한미군 정책을 바꾸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내용은 ①용산기지 이전과 미2사단 한강이남 단계적 재배치 ②미군이 맡던 일부 군사임무를 한국군에 단계적 인수 ③주한 미2사단 중 1개 여단(3600여명)의 이라크 차출 ④주한미군의 감축 등이다. ①②③은 한미간에 합의했거나 협의가 진행중이며 ④는 미국이 제의한 감축 규모(1만2500명)와 시기(2005년 말)를 놓고 한미간에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주한미군 정책 변화는 한국에 경제적 부담을 안겨주며 기존 AFK의 역량에 영향을 미친다. 이 부정적 영향을 보강하는 방법은 KF의 강화 혹은 AFK의 질적 개선으로 메우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②의 경우 기존 중기계획의 우선순위를 조정하여 보완하고 ③, 특히 ④의 경우 미군의 감축규모와 대상이 확정되는 대로 기존 사단을 기갑화하는 등 기동력과 화력을 증강해 보완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은 2006년까지 110억달러를 들여 AFK에 150개 항목의 전력증강을 단행한다는 계획이다. 한미양국은 각각 조정계획을 밝히고 연합방위능력의 강화측면에서 감축규모와 시기를 조정해야 할 것이다.
주한미군의 변화는 우리 국방력(KF)의 강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싫든 좋든 KF>AFK를 지향한 가운데 독자적으로 KF>NF(북한군사력)을 확보해 국방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안보정책이 바로 협력적 자주국방의 방향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주한미군 주둔정책의 변화는 왜 발생했는가. 일부에서 주장하듯 현 정부가 동맹관리에 실책을 거듭한 결과인가. 혹은 한국내에서 고조되는 반미감정이나 우리군의 이라크 제2차 파병이 지연돼 일어난 현상인가.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않다.
유사시 미군투입능력은 강화
그러나 이러한 목소리는 상당부분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근 현 정부의 안보분야 고위관계자가 털어놓은 ‘주한미군 감축’논의 뒷얘기에 의하면, 주한미군 감축사안은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 11월 페이스 미 국방차관이 이준 국방부 장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주한미군 재조정을 위한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회의(FOTA)’를 제안했을 때 이미 시사되었다. 이 회의에서 미래 주한미군의 구조조정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당시는 노무현 후보의 당선가능성도 희박한 때였다. 이어 12월에는 워싱턴 한미 국방장관회담(SCM)에서 FOTA 발족서명이 있었다(‘중앙일보’ 2004년 5월29일자).
2003년 6월 무렵 미측의 감축의사가 우리측에 처음 전달되었다. 이에 정부는 대처방안을 강구했다. 2003년 10월 아태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협의하기 위해 다음 네 가지 대처방안을 마련했다. ①경제 불안 및 정치·사회 동요 방지 ②안보상황 악화 및 대북억제력 약화 방지 ③자주국방 및 주한미군 재배치·감축의 연계 프로그램 완성 ④협의개시 공개였다. 8·15 경축사 중 노무현 대통령의 뜬금 없는 발언으로 비쳐진 ‘자주국방’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노대통령은 10월1일 국군의 날에도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미동맹은 미국의 일방적 시혜나 공짜가 아니었다. 사진은 1965년 여의도광장에서 벌어진 맹호부대의 파월 환송 퍼레이드.
2003년 11월 미 국방부는 이러한 요소들을 감안해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검토(GPR)를 마쳤다. 전세계 주둔 미군의 재조정에 발맞추어 주한미군 또한 신속하고 정밀한, 숫자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전력으로 발전할 것이다. GPR이 완료될 경우 주한미군이 타 지역에 출동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이와 함께 한반도 유사시 여타지역으로부터의 미군 투입능력도 크게 향상된다. 주한미군의 변화를 안보공백으로 연결짓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임승차’ 불가능한 한미동맹
역사적으로 한국은 한미동맹에 무임승차할 수 없었다.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은 아시아가 차례로 공산주의화되는 도미노 현상을 방지하려는 미국의 전략에 공공재를 제공한 고전적 사례다. 우리 국군 2개 전투사단이 월남전선에서 싸우고 있었지만 미국은 ‘닉슨 독트린’의 일환으로 휴전선에 배치돼있던 미7사단을 철수시켰다. 당시 한국정부는 7사단 주둔경비의 절반을 한국이 부담하는 조건을 내걸었지만 미국을 설득하지 못했다.
한국은 1990년 이후 주한미군의 주둔비용 일부를 지원하고 있으며 현재 주한미군의 안정적 주둔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새로운 기지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9·11테러 이후에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전에 해·공군 수송지원단과 의료지원단을, 이라크전에 건설공병지원단과 의료지원단을 파병했고 3000명 규모의 추가파병을 서두르고 있다.
한미간 신뢰의 강화는 협력적 자주국방의 기초를 다질 뿐 아니라 진행중인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서 미국을 설득하는 기제로 활용될 수 있다. 9·11테러를 겪은 미국 행정부는 한동안 북한을 ‘악의 축’ 국가로 지목한 가운데 의도적으로 ‘핵선제’ 공격설을 퍼뜨리고 “모든 옵션을 고려할 수 있다”며 대북 강경책을 공공연히 표명했다. 한미정상과 미일정상의 공동성명에는 한반도에서 위협이 증대될 경우 ‘추가적’ 또는 ‘강력한 조치’를 실시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었다.
그러나 2003년 6월5일 당시 고건 국무총리는 국회 정치분야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현재 한미연합방위체제상 미국이 우리의 동의 없이 단독으로 대북군사행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고 총리는 “한미연합방위체제는 양국군 사전협의와 합의를 전제로 유지되고 있고, 특히 전시작전통제권은 양국의 국가통수 및 군사지휘기구의 협의에 따른 전략지시를 받아 한미연합군사령관이 행사하게 돼있어 한미간 공동지휘체제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라며 그 근거를 밝혔다. 이렇듯 연합방위체제의 가치는 단순한 대북억제력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동맹과 다자협력의 조화
한미동맹이 한국 안보의 초석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미동맹만을 중시해 주변국과의 안보협력을 경시해서는 안 되는 것 또한 분명하다. 한미동맹이 주변국에 부담이 되거나 지역안정을 불안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서도 안 된다.
전력증강이라는 요소를 포함하는 자주국방의 개념 또한 자칫 주변의 지역국가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역으로 생각하면 이러한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이 자주국방의 또 다른 관건이다. 오히려 지역국가의 협력을 통해 자주국방이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동맹과 다자협력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기동군화는 한반도 국지(局地)방어동맹이라는 한미동맹의 성격이 전환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변화는 한미군사관계의 변화뿐 아니라 동북아 안보질서에도 파급효과가 클 것이다. 지난 5월말 찰스 캠벨 한미연합사 참모장 겸 주한미8군사령관의 “한미연합군을 평화유지작전에 투입할 수 있다”는 발언이 몰고온 파장은 명확한 사례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 동맹을 지역화하는 작업을 이미 상당기간 추진해왔다. 1996년 4월 발표된 미일 신안보선언은 ‘아태지역에서 보다 평화롭고 안정된 안보환경을 달성하기 위해 공동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선언은 1997년 9월 발표된 미일 방위협력지침의 작성근거가 되었다. 이 지침에 따르면, 일본은 평화와 안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주변사태(‘지역’이 아닌 ‘상황’의 의미)가 벌어졌을 때 미군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내 시설이용과 후방지원을 약속했다.
지난해 8월15일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행사. 이날 노무현 대통령은 “10년 내에 자주국방의 역량을 구축하겠다”고 처음 언급했다.
이와 유사한 문제가 주한미군을 둘러싸고도 발생할 수 있다. 주한미군의 지역역할 수행 및 한미동맹의 다자 및 포괄적 접근은 협력적 자주국방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제시한다. 첫째, 주한미군의 방위력 약화 초래. 둘째, 한국과 무관한 해외분쟁에 연루될 가능성. 셋째, 사전협의 없는 주한미군의 해외이동이 한미동맹 내부 혹은 주변국과의 갈등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 등이다. 정부는 이러한 우려를 극복하기 위해 한미동맹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미국과 협의해 동맹의 비전을 공유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자주국방과 국방개혁
협력적 자주국방 개념이 주한미군 변화라는 외부상황과 관계가 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외부상황의 변동은 우리군의 개혁이라는 내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국방개혁은 우선 한미동맹의 발전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국방비전’이라는 큰 그림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방비전은 크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첫째, 한국적 군사전략개념이다. 현재 한국의 군사교리는 북한에 대한 방어에 치우쳐 있으며 한미연합방위체제의 작전개념에 안주하고 있다. 한국방위의 한국화는 독자적 방위계획으로부터 시작된다. 대북억제와 방위전략에 덧붙여 통일한국에 대비한, 주변국의 불특정위협에 대응하는 방위전략과 교리개발이 필수적이다.
방어력 기획은 ‘선(先)전략 후(後)전력’ 순으로 하되 두 개념을 조화시켜야 한다. 또 북한군사력에 대한 우리 전력의 순평가를 시도해야 한다. 대북 열세전력을 따라잡거나 감축되는 주한미군의 대체전력을 확보하는 식의 전력 증강은 지양하는 것이 옳다.
둘째, 미래전에 부응해 통합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미래전은 무기체계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인해 전통적인 지·해·공군의 전장공간이 서로 중첩된다. 군별 고유영역과 정체성이 모호해지기 때문에 합동성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가 된다. 따라서 통합전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전력의 기능별 균형발전을 추구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합동참모본부의 작전기획과 운영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제도적 개편을 추진해야 한다. 또한 다단계의 지휘계선을 간소화하여 신속한 작전반응을 보장하고, 국지적인 도발이나 분쟁이 발발할 경우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부대구조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정예강군으로 변해야만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위한 준비다. 이것이야말로 자주국방의 핵심요건이다. 주한미군의 재편과 감축 동향으로 미루어 볼 때 한미연합지휘체제의 변화는 우리에게 현안문제이다. 이 준비는 독자적인 작전수행능력의 확충 및 군 구조 개선 작업과 병행 추진해야 한다.
전시 작전통제권의 환수에 대한 조건, 시기, 절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신중론이 지배적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정부가 보다 전향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바라고 있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작전통제권 환수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점으로는 주권국가의 자주성 확보, 평화과정의 대북협상력 강화, 미국 등 주변국에 대한 외교력 강화, 한국군의 전투수행 능력 강화를 통한 자주국방 달성 등이 있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한미군사협력의 유지와 효율화 병행, 국내 정치·군 지도층의 의식전환, 환원시기의 명확한 설정을 통한 단계적 추진, 한국군 작전통제능력의 보강 등의 조건 실현이 선결과제다. 한미동맹이 지역안보동맹으로 전환될 때 한미군사관계는 미국 주도의 연합지휘체제에서 병렬지휘체제나 개별지휘에 바탕을 둔 지역사령부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양국은 연합기획사령부와 같은 기구에 의해 공동의 방위계획을 만들고 방위업무를 협의·조정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를 해소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문제를 극복할 능력을 키우거나 문제 자체를 없애는 일이다. 군사적인 위협에서도 마찬가지다. 전력증강을 통해 위협에 대처할 능력을 키우는 것이 한 방법이라면, 위협 자체가 줄어들도록 하는 일 또한 하나의 방법이다.
협력적 자주국방은 주한미군의 변화뿐 아니라 남북관계 변화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북한의 위협에 대처할 능력을 구비하면서 동시에 위협 자체를 감소시키는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남북 분단은 한민족의 평화를 위협하는 구조적 요인이다. 이 구조적 위협을 해소한다면 안보환경이 개선되고 자주국방력의 부담도 줄어들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주한미군 재편·감축을 남북한 신뢰구축과 군비통제의 계기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최근 열린 남북 장성급회담에서는 서해상에서의 군사충돌 방지를 위한 합의를 이뤄냈다. 이렇듯 합의와 이행이 용이한 사안부터 협상을 추진하는 것이 순서다.
한반도에 평화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면 다음 단계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시도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평화체제 구축에는 남북간 거래비용이 소요된다. 또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이해와 지지도 구해야 한다. 이는 정치쟁점화될 수 있는 사안이므로 국민적 합의와 국회의 사전협의 및 정치권의 초당(超黨)적 협력이 필수적이다.
협력적 자주국방은 다자안보협력체제의 유무에도 영향을 받는다. 동북아에서도 유럽형의 다자안보대화와 다자안보협력체제를 만들 필요가 있다. 이는 위협을 줄여 부담을 경감하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동맹의 미래 청사진에 동북아 협력체제문제를 포함시켜야 한다. 한국이 다자안보협력체 아이디어를 먼저 발의한다면 강대국이 발의하는 것보다 더 큰 호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정학적·이데올로기적 요인이 상존하지만, 테러·마약 등 초국가적 위협과 평화유지군 형성 등에 대해서는 역내(域內) 다수국가가 호응할 것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전환기다. 전환기일수록 정부는 국민에게 나라의 안보상황에 대한 믿음을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국가이익을 냉철하게 계산하고 전략적 사고로 향후 협력적 자주국방에 기초한 안보행위를 펼쳐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국민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자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