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호

“감독이 굽실거리면 야구가 죽는다”

전격 해임된 김성근 전 LG트윈스 감독 심경 토로

  • 글: 안승호 굿데이 야구부 기자 winho@hot.co.kr

    입력2003-01-02 10: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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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에 빠진 사람을 건졌더니 가방을 찾아내라며 뺨을 때린다던가. 프로야구 2002 시즌 개막 전 하위권으로 평가받던 LG를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이끈 김성근 전 LG 감독(60)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광적인’ LG 팬들에게 월드컵 4강에 버금가는 감동을 안겨준 김감독에게 날아든 것은 썰렁한 ‘해임 통보서’. 야구계의 ‘이단아’ 김감독이 털어놓은 해임 이후의 심경과 ‘正道 야구’론.
    “감독이 굽실거리면 야구가 죽는다”
    ‘준우승 감독 해임’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불러온 갈등은 한국시리즈 이후 새 코칭스태프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불거졌다. 김감독이 추천한 인물을 구단에서 거부하며 잡음이 일었던 것.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해임사유는 LG스포츠 어윤태 사장이 장기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야구 스타일과 김감독의 스타일이 맞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2001년 12월 부임한 어사장은 90년대 초반 LG 단장 시절부터 ‘신바람 야구’를 주창한 당사자.

    어사장은 자신이 뽑지도 않았고 스타일도 맞지 않는 김감독을 사장 취임 이후 줄곧 교체대상으로 생각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시즌 내내 “김감독 해고는 시간문제”라는 말이 구단 주변에서 흘러나왔던 것. 김감독이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이틀 뒤 가진 어사장과의 면담에서 들은 첫 마디가 “올해는 ‘LG 야구’가 아니라 ‘김성근 야구’를 했다”는 것이고 보면 김감독과 어사장의 엇박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김감독 또한 시즌 내내 해고당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덕아웃으로 향했다고 말한다. 어사장이 현장 사령탑을 돕는 데 적극적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성적을 내고 나서 13일 만에 자리를 빼앗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김감독이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 1983년 OB에서 처음 사령탑을 맡은 뒤 다섯 차례나 유니폼을 입고 벗기를 반복한 그지만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성적을 낸 뒤 칭찬 한마디 없이 ‘봉변’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김감독은 LG가 9승25패로 바닥을 기던 2001년 5월 감독대행으로 사령탑을 맡았다. 2년도 지나지 않아 특별한 전력 보강 없이 하위권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는 것이 김감독의 자부심이다. 특히 모래알처럼 제각기 흩어져 있던 ‘서울 깍쟁이’ 선수들에게 근성을 심어주는 데 성공하면서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는 것. 지난 11월28일 기자와 만난 김감독은 그래서인지 아직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신바람’이 항상 통하는 게 아니다”



    -야구가 일상생활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현장을 떠난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요.

    김성근 감독은 11월10일 한국시리즈 대구 6차전에서 10-9로 역전패를 당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새벽 1시에 서울에 도착해 새벽 4시까지 다음 시즌을 위한 훈련계획을 세웠다. 한마디로 야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인 것. 해임된 이후 일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야구는 어디서나 할 수 있어요. 다만 그늘에서 하느냐, 무대 위에서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죠. 무대 밖에서 일한다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열심히 하면 그만입니다. 해임통보를 받은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성균관대 야구부원들이 훈련을 하고 있는 제주도에 다녀왔어요. 당분간은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줄 생각입니다.”

    -시즌 내내 감독 교체설이 돌아 불안하지 않은 날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팀 성적이 하위권을 맴돌던 5월에는 구단 측이 감독 교체를 준비하며 여론을 살피기도 했고, 구단 사장은 전 LG 코치 가운데 한 사람을 불러 새 코칭스태프를 조각하기도 했는데요.

    “시즌 중에 이런저런 소문은 많이 들었지요. ‘4강에 들지 못하면 해고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하면 해고될 것’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경기를 치렀습니다. 사실 구단이 요구하면 언제든지 유니폼을 벗을 생각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편하게 포스트시즌을 치렀는지도 모르겠고요.”

    -‘신바람 야구’의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이 해고 이유였습니다. ‘신바람 야구’에 대한 생각이 있을 것 같은데요.

    어윤태 사장이 말하는 ‘신바람 야구’란 ‘선수들의 기(氣)가 살아야 그라운드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김감독 해임 이후 어사장이 1994년 우승 감독이자 ‘신바람 야구’의 파트너였던 이광환 감독을 일찌감치 차기감독으로 내정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감독대행을 맡고 보니 선수들이 경기장 분위기에 이끌려 쉽게 들뜨더군요. 자연스레 자기 위주 플레이를 하면서 자기가 잘못하면 다른 선수가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어요. 한마디로 말하면 잘못된 스타의식을 갖고 있었던 거죠. 팀 전력이 엄청나게 강하면 이런 식의 야구가 통하겠지만 지금의 LG는 그렇지 못해요.

    그래서 선수들 모두 동료를 생각하는 ‘책임야구’를 하도록 애를 썼던 겁니다. 올해 포스트시즌에서 LG팀이 보여준 플레이가 그 전형이 아닌가 싶어요. 비로소 좋은 팀이 됐는데 완성을 못하고 물러난 것이 가장 아쉽죠. 그래도 지난 1년 동안 다져놓은 선수들의 정신은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감독은 포스트시즌에서 LG트윈스가 전력의 열세를 딛고 강팀을 꺾어나간 플레이를 ‘옳은 야구’ 또는 ‘바른 야구’라고 부른다. 선수들이 필요 이상의 스타의식을 버리고 자기에 대한 책임감과 동료의식을 갖고 뛰었기 때문에 팀 전력이 강해졌다는 설명이다.

    “처음 LG에 와보니 코치들이 오히려 간판선수들에게 끌려다니는 형국이었어요. 이것부터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001년 6월 무렵 SK전에서 근 10점차로 지고 있었는데 중견수 이병규가 좌중간으로 빠진 볼을 천천히 쫓아갑디다. 그래서 선수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 불러 세워놓고 큰소리로 혼을 냈습니다. 그날 밤 병규가 찾아와서 사과를 하더군요. 그 일이 병규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지요. 다른 구단에서는 간판선수가 호되게 혼나는 경우가 있지만 LG에서는 드물었던 모양이에요. 아마 스타급 선수들 중에서는 병규가 후배들 앞에서 제대로 혼이 난 첫 번째 경우였을 겁니다.”

    실제로 LG 선수들은 지난 2년 동안 많이 달라졌다. 인기팀 스타선수들이 휩싸이기 쉬운 ‘거품’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 그간 LG를 지켜본 많은 야구인들의 중론. 이는 김감독이 스타선수뿐만 아니라 무명선수에게도 충분히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2002시즌 LG의 주역인 최동수 권용관을 비롯해 주로 2군에 있던 선수들이 팀의 한 부분을 차지한 것도 ‘이름값’으로 선수들을 차별하지 않은 결과다.

    “현장 책임자는 구단이 아니라 감독”

    김감독이 구사하는 이 ‘적극적인 용병술’의 위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김감독은 1988년 OB를 떠난 뒤 1989년부터 2년 동안 현대의 전신인 태평양에서, 1996년부터 4년 동안은 SK 전신인 쌍방울에서 감독을 맡으며 약팀을 강팀으로 탈바꿈시키는 ‘마이더스의 손’으로 인정받았다.

    -스타선수가 별로 없던 태평양이나 쌍방울 감독 시절과 비교하면 어땠습니까.

    “태평양이나 쌍방울도 처음 팀을 맡았을 때 갑갑하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선수들이 대체로 단체의식이 없었고 여기저기 틈이 많이 보였어요. 1989년 태평양 감독직을 수락한 뒤 인천구장에서 선수들을 처음 봤을 때는, 계약만 하지 않았다면 도로 물리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훈련하는 모습이 어찌나 한심한지 서울로 돌아오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대신 일단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뒤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죠. LG 때도 그랬듯이 선수들에게 ‘우리는 한팀이고,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려 노력했고 선수들을 강하게 이끌었습니다. 그때는 지난해 LG에서보다 훈련을 더 많이 했어요. 이후 최창호, 정명원, 박정현 등 좋은 투수들이 나오면서 팀이 강해졌습니다.

    1996년 쌍방울 간판선수는 김기태였죠. 11월 마무리훈련을 하고 소감을 적어내라고 했더니 김기태가 ‘지금 훈련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다음 시즌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일찍 무리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항의였죠. 그런데 정확하게 1년 뒤 같은 방식으로 적어낸 소감에는 ‘이 시기에 훈련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썼더군요. 하나씩 고비를 넘기다보니 팀이 바뀐 거죠.”

    -태평양과 쌍방울 시절에도 구단 고위층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굽실거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을 이끄는 것은 감독입니다. 감독에게 힘이 없으면 선수들이 따라오지 않고, 그만큼 팀 전력은 새기 마련이에요. 그렇게 되면 정작 그 팀이 구사해야 할 플레이 컬러가 바랩니다. 그래서 구단 사장에게 필요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던 거죠. 이번에도 위에서 어떻게 생각하든 내년 시즌을 위해 적임자라 생각한 코치를 구단에 요청했던 겁니다. 결국 구단에서 끝까지 거부해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는데, 그 다음날 바로 해임되고 말았습니다.”

    김감독의 좌우명은 일구이무(一球二無). 김감독의 팬클럽 이름 역시 ‘일구이무’다. ‘공 하나에 두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라는 이 말에는 자기가 선택한 행동에는 반드시 책임을 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김감독이 구단에 필요한 코치를 요구한 것도 ‘다음 시즌 성적을 책임지는 것은 다름 아닌 감독’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구단 책임자와 팀 감독은 역할이 분명히 다릅니다. 종합병원 경영진과 전문의의 관계를 예로 들어 생각해 봅시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데, 병원 경영진이 나서 ‘이런 약을 써라, 저런 약을 써라’ 하고 간섭하면 제대로 의술을 발휘할 수 없을 겁니다. 야구 감독도 마찬가지죠. 팀을 운영하고 선수를 관리하는 것은 감독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누가 뭐래도 현장 책임자는 감독이니까요.”

    -이번 시즌 동안 김감독 또한 많이 변했다고들 말합니다.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김응룡 감독이 초조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 달리 김감독은 여유가 넘쳤다고도 이야기하고요. 경기에 진 뒤에도 인터뷰실에서 차분히 패인을 설명할 만큼 담담해 보였는데요.

    “글쎄요, 프로 감독 20년 만의 깨달음이라고 할까요. 그동안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말을 알고도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새벽까지 상대팀 분석하고 우리팀 선수들 컨디션 파악하는 일을 반복했지만 경기장에 나가면 이기려는 마음이 앞서 둘 중에 하나는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제3자 입장’에서 덕아웃에 앉아 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우리팀과 상대팀 돌아가는 게 보이더군요. 경기를 즐기며 상황에 따라 필요한 작전을 쓸 수 있게 됐고요.”

    삼성 김응룡 감독은 6차전에서 9회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은 뒤 “‘야구의 신(神)’과 싸우는 것 같았다. 김성근 감독의 투수 교체와 대타 기용이 기가 막혔다”고 털어놓았다. 김감독의 용병술을 ‘적장’인 김응룡 감독이 인정한 것이다.

    “감독이 굽실거리면 야구가 죽는다”

    11월1일 기아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승리해 2002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은 LG 선수들이 환호하며 기쁨을 나누고 있다.

    재일교포 출신인 김감독은 일본 시조중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실력이 떨어진 데다 집안 형편마저 어려웠기 때문에 먼 훗날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는 것이 그의 후일담. 할 수 있는 것은 야구뿐이었고, 때문에 유일한 희망인 야구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도 갈수록 굳건해졌다고 김감독은 회고한다.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누나들과 형들은 돈벌러 외지로 나갔기 때문에 거의 집에 없었습니다. 카레라이스가 우리집에서 먹을 수 있었던 최고의 요리였고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야 새 옷을 처음 입어봤어요. 그러다 보니 야구가 유일한 친구였죠. 그때는 가장 실력 없는 선수가 우익수나 2루수를 맡았는데, 주전으로 나가더라도 우익수로 나갈 만큼 실력이 형편없었어요. 무엇보다 발이 너무 느렸거든요. 더구나 집안이 어려워 돈이 많이 드는 야구를 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야구를 계속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중학교 3학년 때 열심히 해 특기생으로 갈 실력은 됐는데, 문제는 그런 학교들은 학비가 비싸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나마 공립학교라 학비가 쌌던 가츠라 고등학교에 들어갔지요. 특기생도 입학시험을 치러야 하고 상위 50%에 들지 못하면 낙제할 만큼 공부를 많이 시키는 학교였는데, 3년 동안 낙제한 것은 영문법 한 과목뿐이었어요. 남들보다 야구에 소질이 없으니 공부도 열심히 해야 했고, 야구에도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습니다.”

    김감독은 이때부터 모든 생활을 야구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습관을 들였다. 체육교사가 감독이었던 학교 야구부에서는 크게 배울 것이 없었던 까닭에 김감독은 홀로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야 했다. 새벽 5시에 나가던 우유배달도, 공사판 막노동도 야구를 위한 훈련의 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김감독은 지금도 그 시절을 돌이키며 2군 선수들을 가르친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소질이 없는 선수들을 키워가고 있는 셈이다. 그가 LG에서뿐 아니라 쌍방울, 태평양 시절에 무명 선수들을 키운 것도 이 같은 생각으로 혹독하게 훈련시킨 효과가 나타난 것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우유배달을 할 때는 엉덩이를 안장에 붙이지 않고 페달을 돌렸고, 학교를 마친 뒤에는 경사진 길에 가서 뒤꿈치를 떼고 내리막길을 달렸습니다. 모두 느린 발을 보완하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었습니다. 막노동을 할 때도 벽돌을 던지며 무릎을 쓰는 법을 익히려 애썼죠.”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야구를 연마하던 소년 김성근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58년 재일교포 학생 대표로 한국을 방문할 기회를 얻는다. 김감독은 대표선수로는 뽑혔지만 유능한 선수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막상 재일교포를 대표해 나갔지만 내세울 만한 실력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한국에 와서 여러 고등학교팀과 친선경기를 했는데 그때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막 시작한 투수로서도 눈을 떴고요. 당시 한국선수들은 변화구에 상당히 약했거든요. 경동고 백인천이 최고였는데 그와 맞붙은 기억도 납니다. 16차례 경기를 해서 14승1무1패의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야구에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김감독이 다니던 가츠라 고등학교 야구부는 주중에는 경기를 하지 않았다. 때문에 경기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김감독에게 한국에서 계속된 친선경기는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재일교포 신분을 포기하고 동아대에 입학한 것도 이때의 일 덕분이었다.

    재팬시리즈의 꿈을 접고

    “졸업을 하고 나서 무작정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뛰던 김영덕씨(OB 초대 감독)를 찾아갔어요. 나보다 여섯 살이 많았지만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훈련에서 진로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지요. 이후 영덕이 형 소개로 대화증권이라는 사회인 야구팀에서 훈련을 했는데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입사를 못했어요. 동아대에서 야구팀을 창단한다며 와달라고 연락해 온 것이 그 무렵이었습니다. 한국 방문 친선경기 때 뛰는 것을 봤다는 거죠. 재일교포 6명이 함께 동아대에 들어갔습니다. 그 해 동아대는 3개 대회에서 우승하며 전성기를 열었죠.”

    이후 재일교포 신분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던 김감독은 1960년 ‘상호차량’이라는 일본 사회인 야구팀에 입단했다. 일본 프로야구팀 입단이 최종목표였던 그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사회인 야구팀에서 자꾸 야간작업을 강요하더라고요. 그 시간에 훈련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다른 일을 시키니 분통이 터졌지요. 야구만 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한국의 교통부 야구팀에 들어가게 됐어요. 교통부에서 야구를 하던 1961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습니다.”

    1961년 1월 김감독은 제4회 대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백인천, 김응룡 등과 함께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일본에 이어 준우승을 거두었다. 대화가 끝나고 김감독은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환영식 참석을 위해 한국에 잠시 들렀던 것이 결국 재일교포 자격을 포기하고 가족과 떨어져 한국에서 계속 야구를 하는 계기가 된다.

    “감독이 굽실거리면 야구가 죽는다”

    11월30일 김성근 감독의 해임에 반발해 잠실구장에서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는 LG팬들.

    “대만에 있는 동안 심판이었던 야마모토씨로부터 1년 동안만 일본 사회인야구팀에서 뛰면 프로야구팀으로 들어가도록 돕겠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야마모토씨는 나중에 일본 야구협회 회장이 된, 믿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일본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주위에서 환영회에 가야 한다고 해 한국에 잠깐 들르기로 했습니다. 그게 결정적이었죠. 한국에 들어가자마자 기업은행이 야구팀을 창단한다며 입단해달라고 하더라고요. 둘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기업은행에서 뛰기로 했어요.”

    김감독은 기업은행 선수로 리그에 참가하고 있던 1964년 체류기간 문제로 재일교포 자격에 문제가 생긴다. 더 이상 야구를 못할 위기에 처한 김감독은 그 해 11월 재일교포 자격을 포기하러 일본으로 갔다.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반대가 엄청났지요. 큰 형 가족이 북한으로 가려고 했을 때 가족회의가 열린 이후 두 번째로 회의가 열렸어요. 첫 회의 때는 내가 나서서 형의 월북을 막았는데, 이번에는 내가 골칫덩어리가 된 셈이었죠. 어머니는 내 여권을 감추면서까지 나의 한국행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야구를 계속해야된다는 생각으로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트랩을 오르면서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납니다.”

    김감독이 재일교포 자격을 포기한 지 2개월 뒤인 1965년 1월 한일국교가 수립됐다. 2개월만 기다렸으면 김감독은 재일교포로서 한국과 일본을 마음껏 들락거리며 야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감독은 재일교포 자격을 포기하면서 가족과 이별해야 했던 것이 가장 마음 아팠다고 한다.

    ‘산이 높을수록 바람이 세다’

    -프로야구 감독 중에서 가장 많은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실업야구 시절에도 그랬나요.

    김감독은 현역에서 은퇴한 뒤 1970년 기업은행에서 코치생활을 하며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2년 기업은행 사령탑에 오른 김감독은 이때부터 약팀을 근성 있는 팀으로 키우는 재주를 보였다.

    “당시 최강팀은 강병철(전 SK 감독), 백기성(한화 스카우터)이 뛰는 한일은행이었어요. 취임하자마자 한일은행과 붙었는데 대패했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삭발을 해버렸어요. 슬그머니 숙소에 들어갔더니 팀 분위기가 확 잡히더군요. 저녁식사를 하러 식당에 가보니 박상열(두산 코치) 등 선수들이 모두 삭발을 하고 나타났더라고요. 한참 침묵이 흐른 뒤 서로를 쳐다보고 웃으면서 하나가 됐죠. 그 일이 돌파구가 되어 얼마 뒤 열린 한일은행과의 경기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방법으로 선수들을 따라오게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얘기해 볼까요. 저는 자고로 남자들의 믿음은 ‘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달콤한 말이나 얼굴 표정을 보고 따라가면 얼마 못 가서 어긋나버리고 마는 법입니다. 아무 말 없는 듬직한 ‘등’을 믿고 따를 때 비로소 힘이 생기는 거라고 봅니다. 나를 믿고 따른 코치들도 마찬가지고 선수들도 그랬습니다.”

    김감독과 깊이 사귀지 않은 사람들은 그래서 그가 무뚝뚝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가깝게 지낸 사람들은 김감독이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LG의 이상훈은 김감독 해임 뒤 자신의 홈페이지에 “겉으로 보기에는 막혀 있는 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며 가까이서 본 김감독의 성품을 전하기도 했다.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은 반면 싫어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재일교포 출신인 까닭에 학연이나 지연이 없는 데다 술자리마저 좋아하지 않는 탓에 야구인 외엔 별로 아는 사람이 없는 김감독이지만, 묘하게도 ‘김성근 사단’이라는 것이 있다. 흔히 말하는 인간관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김감독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다. 그러나 야구계에는 김감독을 험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김감독은 이 질문에 ‘산이 높을수록 바람이 세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굳이 바람을 막으려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해명은 또 다른 해명을 낳을 뿐이지요. 그럴 시간이 있으면 선수 한 명을 더 키우는 게 낫겠죠.”

    김감독은 1997년 쌍방울에서 김현욱을 20승 투수로 키웠고, 2000년에는 신윤호를 투수 3관왕으로 만드는 등 여러 무명선수를 최고의 선수로 만들어왔다. 감독과 선수의 이상적인 관계에 대해 묻자 소탈한 대답이 돌아왔다.

    “감독은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선수는 자식 같은 마음이면 되죠. 그러면 서로에 대한 믿음은 자연스레 생깁니다. 중요한 것은 감독이 아버지의 마음처럼 자기 것을 주는 데 인색하지 말고 받는 것은 바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감독의 아내 오효순씨(56)는 1967년 이화여대 졸업을 1년 남겨두고 김감독과 결혼했다. 결혼하면 퇴학당하는 학칙도 장애물이 될 수는 없었다. 오씨 본인이 열렬한 야구팬이기도 했지만 김감독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깊었다. 그러나 딸 둘과 야구선수 출신으로 LG트윈스에서 근무하는 김정준 대리(32)를 낳은 이후에는 야구장 출입을 딱 끊었다. 김감독이 야구에 모든 것을 바치자 아내는 오히려 야구를 멀리하게 된 셈이다.

    야구와 결혼한 것처럼 휴일에도 훈련장만 다니던 김감독은 LG에서 해임된 뒤 가족에게 가장 미안했다고 한다. 가족과 함께하지 못했던 지난 세월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러 매체에서 해임 사유를 캐묻는 전화가 걸려와 가족들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팬들의 성원도 대단했다. LG팬들은 김감독이 해임되자 조직적으로 구단의 부당한 결정에 항의했다. 프로야구 출범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팬들은 김감독이 회갑을 맞은 12월13일 선물을 전했다. 시즌 초만 해도 “김성근 야구는 재미가 없다”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던 일부 팬들은 “포스트시즌 들어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고 입을 모았다.

    “너무나 고마운 일이지요. 그렇지만 나 때문에 괜히 고생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어요. LG팬들이 포스트시즌에 찬바람을 맞으며 응원해준 일은 언제 어디서 야구를 하더라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왜 감독들이 한번쯤 LG를 맡아보고 싶어하는지도 알 것 같았습니다. 팬이 늘면 선수도 힘이 나고, 경기 내용이 좋아지면 팬이 더욱 늘어나 야구는 발전하게 마련입니다. 더욱이 이번 포스트시즌이 팬들이 좀더 재미있게 야구를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 기뻤습니다. 투수교체, 대타기용 같은 다양한 방법을 원 없이 구사했으니까요. 관객 입장에서도 하나 더 이해하고 경기를 보면 야구가 더욱 재미있거든요.”

    -언젠가 또 한번 그라운드에서 팬들의 사랑을 받는 날이 오겠죠.

    “…….”

    할 말이 없는 것일까. 할 말이 있으되 아직 못다 이룬 꿈을 위해 아끼는 것일까. 김감독은 빙그레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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