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피살 이후 워싱턴의 최대 관심사는 전두환이었다. 권력실세로 떠오른 전두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백악관과 CIA는 전두환에게 퇴진압력을 가하기 위해 주한미군 감축방안까지 검토했다.
- 카터 대통령은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 보낸 축하메시지에서 “내년 초 새 헌법으로 선거를 치를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1988년 여름 국회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이하 광주특위)를 설립하면서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와 위컴 장군에게 광주특위에 출석해 증언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미 정부에 의해 거절당했다. 그러자 다시 48개항의 서면 질의서를 미 국무부에 전달했고, 이에 미 정부가 ‘성명서’라는 이름으로 미국 입장을 전달한 것이 바로 이 문서다.
이 문서를 ‘역사적’이라고 한 것은, 담고 있는 내용이 광주 5·18의 진상을 밝히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도 아니고, 미 정부가 발표한 공식 성명서이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우선 광주특위의 질의 내용과 형식이 ‘역사적’일 만큼 유치하기 짝이 없다. 전문가들이 작성한 질의서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도대체 어떤 답변을 기대하고 이런 식의 질문들을 던졌을까 싶을 정도다.
- 한국군 특전사가 연합사 작전통제권에 속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 폭동 진압 임무인 ‘충정 작전’ 수행을 북한에 대한 공격 수행을 주임무로 하는 특전사 부대에 맡긴 근거는 무엇인가?
- 당시 위컴 장군과 글라이스틴 대사는 독자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실권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 광주사태가 있은 후, 주한 미대사관은 공정한 선거를 통한 문민정부의 수립을 원했고, 한편 유엔군 사령부는 한국의 안보를 위해 군사정권 수립을 원했다는 설이 있다. 이것이 사실인가? 전두환씨가 권력을 강화하는 것을 위컴 장군이 도왔는가?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미 정부의 답변은 이런 것들이다. ‘결정을 내린 한국 당국에 물어봐야 할 것이다.’ ‘앞의 성명서와 논평을 참조하라.’ ‘그런 소문과 주장은 아무런 근거도 없고 사실이 아니다.’
특위는 신군부에 물어야 할 사항들을 미국에 물었고, 국가간 공식 질의서를 통해 술자리에서 입씨름하기에나 알맞은 질문을 던졌다. 결국 특위가 미 정부로부터 얻은 것이라고는 ‘제대로 알고나 물으라’는 식의 ‘훈계’ 정도였다.
“12·12 이후 미 국익 큰 변화 없다”
광주특위가 미국의 입을 통해 광주사태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정보나 자료를 얻고자 했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광주특위는 미국의 답변을 듣기보다는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추궁’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민주화를 원한다는 미국이 12·12와 광주사태를 지켜보기만한 속셈과 꿍꿍이가 무엇이었느냐는 게 정말 묻고 싶은 내용이었고, 결국 미국의 국익을 위한 잘 계산된 대응이었다는 것이 정작 듣고 싶은 대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광주특위는 질의를 할 적절한 주체가 아니었고, 질의 형식도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특위의 질문 가운데에는 이런 것이 들어 있다. ‘인권 옹호 정책을 펴던 카터 행정부였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미국의 국익이 한국 민주화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결과, 한국 군사당국의 폭력 사용(쿠데타)을 묵인했던 것이 아닌가?’
질문이라기보다는 추궁과 단죄에 더 가깝다. 특위가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짐으로써 만족했다면 미국을 상대로 하고 싶은 말을 했을지는 모르나, 정작 추궁과 단죄의 대상인 신군부에 광주의 참극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구체적인 정보나 광주사태 규명을 위한 객관적인 자료는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광주특위의 이 질의서를 받은 후 미국은 질의에 직답하는 형식을 취하는 대신 먼저 75개 항목으로 자신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밝힌 성명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특위의 질의에 대해서는 간단한 논평과 함께 성명서를 참고하라는 형식의 답변서를 첨부함으로써 특위의 질의서 자체를 평가 절하하는 노련미를 한껏 과시했다.
광주특위는 신군부의 일원인 노태우 정권하에서 가동되었기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입법부가 상식적으로 봐도 답변의 주체가 아닌 것이 분명한 미국 정부에 터무니없는 형식의 질의서를 작성해 보내고, 국가 공식문서로 훈계를 들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부끄러운 역사적 사건이다.
5·18은 광주에서 시작해 광주에서 끝난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미 정부도 위의 ‘성명서’ 서론에서 ‘미국의 견해와 행동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부터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과 이에 따른 일련의 사건 속에서 검토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12·12 쿠데타로 전면에 등장한 신군부를 미국은 못마땅해 했다. 그들이 사전 통보 없이 병력을 이동시킨 것은 미국을 직접 자극했다. 또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함으로써 한국 상황이 불투명해져 미국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신군부의 등장이 한국에서 자국의 국익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흠집을 낸 것은 아니라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었다.
다음은 글라이스틴 대사가 12·12 이후의 사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는 1980년 1월29일자 문서다. 12·12 사태 직후의 사태 분석이다.
『 한국에서 미국의 기본적인 이해관계는 변하지 않았음. 지난해 ‘목적과 목표’라는 제목으로 작성·보고한 문서에서 기술했던 대략적인 내용에서 큰 변동이 없음. 다만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기본 틀은 크게 변했다고 할 수 있음. 그러나 박정희 암살과 12월12일의 정권 장악이라는 새로운 정치 환경이 조성됨으로써 새로운 게임을 치르게 생겼음. 지난 수 년 동안과는 전혀 다르게 한국 국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직접 개입이 요구됨.』
‘한국 - 대사의 정책 평가’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 앞부분 요약문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국의 한국 국내 문제 개입 정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 사회 내 여러 요소가 우리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바 우리의 행동수준을 잘못 계산했다가는 그 대가가 클 것임. 충분히 움직이지 않으면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며, 반대로 너무 많이 움직였다가는 강력한 국수주의자들을 자극할 수도 있음.』
글라이스틴 대사의 이런 사태 인식은 결국 신군부의 등장이 ‘새로 발생한 불안정 요소’이긴 하지만 미 국익에 큰 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는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워싱턴에서 한국 상황을 분석하는 그룹간에 이견이 있긴 했으나 글라이스틴 대사로 대표되는 미국의 이런 상황 판단은 광주사태에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통고만으로 작전통제권 회수 가능
새롭게 등장한 정치 세력인 신군부에 대해 미국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처음부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이런 내부의 자체 판단이 미국의 개입 수준을 낮추었고, 신군부에 대한 대응책을 검토한 워싱턴의 논의 결과도 미국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너무 많이 움직였다’기보다는 글라이스틴 대사가 우려했던 대로 ‘충분히 움직이지 않은’ 결과 광주사태를 겪으면서 반미(反美)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12·12 직후 워싱턴은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를 주축으로 여러 대응책을 논의했다. 당시 주한 미대사관 무관이었던 제임스 영은 자신의 비망록 ‘한국 관찰(Eye on Korea)’에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군사 쿠데타 이후 워싱턴에서는 대(對) 한국 정책을 검토하기 위해 연이어 회의가 열렸고, 여러 가지 대응 방안이 논의됐다.
첫째, 대한 군사 지원을 축소 또는 중단하거나 재조정하는 방안이었다. 주한미군의 일부 철수에서부터 전면적인 철수에 이르는 다양한 세부 조건도 더불어 논의되었다. 카터 행정부의 일부 참모들이 진작부터 주한미군 철수를 지지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12·12사건은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재론하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둘째, 한미안보공약의 상징적 모임인 연례안보협의회(SCM)를 연기하거나 취소하는 방안도 거론되었다. 미 국방부는 안보협의회 연기나 취소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정치와 안보를 연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셋째, 경제 제재였다. 그러나 이 대안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데, 경제 제재까지 취할 경우 상황이 더 나빠져 사회 불안이 가중되고 시위가 더 늘어나게 되면 결과적으로 군부가 더 강경한 조치를 취할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군사 지원 축소와 주한미군 철수, 안보협의회 연기 또는 취소 등은 워싱턴에서도 논란거리였다. 실제 이런 조치가 취해질 경우 워싱턴으로서도 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중대 사안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 두 가지 대안은 가능성으로만 거론됐을 뿐이고, 카터 대통령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가능한 한 강력한 내용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선에서 결론이 내려졌다.
제임스 영도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과 관련해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는 제약이 아주 많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워싱턴은 한국에 민간인 지도자가 이끄는 민주정부가 들어설 수 있도록 현 상황을 유지시키며 북한의 공격을 저지하고 한국의 신군부가 국방이라는 본래 역할에만 충실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세 가지 기본 지침을 만들었다. 미 정부 성명서에도 언급되어 있는 이 세 가지 기본 지침을 제임스 영은 비망록에서 ‘행군 명령’이라고 표현했다.
이 세 가지 지침 가운데 결과적으로 민간 민주정부 수립과 신군부의 정치참여 저지라는 두 가지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12·12와 관련해 카터 대통령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미국의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긴 했으나, 신군부의 권력 장악 과정을 지켜보기만 하는 입장이었다.
미 비밀문서에 따르면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특전사와 20사단은 연합사 작전통제권에서 벗어난 부대였다.
『한국의 주영복 신임 국방장관은 위컴 장군에게 한국 군부가 12월12일에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음. 주 장관은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며, 군 지휘권이 확실하게 통제되고 있고, 한국 군부는 미국이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했음.
우리가 우려하는 사항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직접 재확인시킴으로써 최 대통령이 상황을 주도하게 만들고, 서울의 글라이스틴 대사와 위컴 장군의 입지를 지원해 주는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임.』
카터 친서에는 신군부의 병력 이동에 대한 미국의 불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터뜨리는 불만이 아니라 실제 권력을 쥐고 있는 신군부에 대한 불만이자 경고였다.
『본인은 12월12∼13일에 일어난 사건에 매우 상심했습니다(deeply distressed). 본인은 한국군의 지휘체계가 무너진 것에 특히 우려하고 있으며 양국 정부가 위임한 한미연합사의 권한에 균열이 생긴 것과 일부 한국군 장교들이 연합사의 틀을 벗어나 직접 행동한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에 대해서도 강조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양국간의 긴밀한 협조 관계에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것입니다.』
워싱턴과 신군부가 신경전을 벌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12·12사태 당시 신군부가 움직인 병력에 있다. 앞서 언급된 광주특위의 질의서와 미 정부 성명서의 핵심적인 주제 역시 이 병력 이동으로 발생한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OPCOM) 훼손 문제였다.
한미간 연합방위 체제를 유지하기 목적 위해 한미연합사(CFC)가 설립된 것은 12·12사태가 발생하기 1년여 전인 1978년 11월7일이다. 연합사의 작전통제권에 대해 미국은 광주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양국은 일정한 부대를 선정하여 한미연합사 사령관의 작전통제권 아래에 두지만, 통고만으로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으로부터 부대를 회수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여 국가별 통수권을 가진다. 연합사 사령관은 부대를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으로부터 회수하겠다는 통고가 있을 때 이에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없으며, 다만 그러한 결정이 연합사의 대외 방어력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지적할 수 있을 뿐이다. 일단 부대가 연합사 작전통제권에서 해제되면 연합사 사령관은 그 부대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가지지 않는다.’
이 해석에 따르면 한미연합사 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은 다분히 형식적이다. 옥스퍼드대학이 발행한 2001년판 미 군사 사전(Essential Dictionary of the U.S. Military)은 작전통제권(OPCOM)을 ‘병력의 구성에서부터 임무 하달, 목적 및 임무 수행을 위해 필요한 방향 설정 등 예하 병력을 지휘하는 데 따른 모든 수행 권리’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예하 부대 지휘관이 작전통제권자에게 통고한 후 특정 부대를 회수하거나 복귀시킬 수 있다면 작전통제권자가 실질적인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는 지휘체계로 보기 힘들다.
다만 한미연합사라는 연합방위 체제 에서 미군 장성이 연합사 사령관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작전통제권이 연합사 사령관에게 위임되어 있을 뿐이지 한미연합사 사령관의 실질적인 작전통제권의 내용을 적시해놓은 규정은 없다. 실제로 12·12사태 이전까지는 한미연합사 사령관의 작전통제권이 시비의 대상이 된 적이 없고 시험의 대상이 될 만한 계기도 없었다. 그러나 위컴 사령관으로서는 실체 없는 신군부가 정식 지휘계통을 무시한 채 임의로 병력을 이동시킨 것에 대해 분개할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12·12에서 광주사태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한국군 병력 이동 상황에 대해 ‘사전에 통보받은 바 없고, 병력 이동에 대해 아는 바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특전사 병력을 포함해 한국군 이동 상황에 대한 사전 정보마저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해병1사단 이동 요청시 승인하게 될 것”
다음 문건은 광주사태 발생 11일 전인 1980년 5월7일, 주한 미대사관이 한국군의 병력 이동 상황을 국무부에 보고한 2급 비밀 전문이다.
『한국군이 우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아래의 병력 이동을 미 사령부에 통고했음. 한미 야전군 산하 제13특전여단을 임시 임무 수행을 위해 5월8일 서울 남동쪽 특전사령부로 이동시켜 제1특전여단과 함께 주둔시킬 것임. 이 2개 여단의 총병력은 2500명이며 학생 시위에 대처하기 위해 서울로 이동중임.
미 사령부는 또한 포항에 있는 한국군 해병대 1사단이 대전 부산 지역에 투입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음. 해병 1사단은 한미연합사령부의 작전통제하에 있으며, 이동시에는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함. 현재까지 병력 이동에 대한 승인 요청은 없으나, 요청이 있을 시 유엔군사령부는 병력 이동에 동의하게 될 것임.』
같은 날 미 국방부에 보고된 전문에는 병력 이동 상황이 더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특전사 전체 여단 병력에 비상이 걸렸음. 13특전여단은 5월6일 서울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11특전여단 62대대가 5월7일 서울로 이동했음. 11여단 62대대가 서울로 이동한 마지막 대대 병력이며, 원주 지역에 주둔했던 11특전여단 61대대와 62대대는 서울로 이동하기 전에 광부들의 소요사태에 대비해 대기 상태에 있었던 부대임.
인천 주둔 5특전여단 병력을 수도권 지역 병력으로 간주할 경우, 7특전여단만이 유일하게 수도권 지역 외곽에 남은 병력임. 7특전여단 병력은 유사시 전주 및 광주 지역 대학들을 목표(targeted against)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며, 11특전여단은 5월4일 일요일 참모·지휘관 모임을 가진 바 있음.』
병력의 이동 현황뿐 아니라 내부 상황, 부대 이동 경로 및 이동 목표에 이르기까지 특전사 내부 상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 이 문서에서는 사실상 문서 내용의 기술 주체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누가’ 혹은 ‘어느 부대(또는 기관)’가 보고했다는, 모든 문단의 앞이나 뒤 주어 부분을 알아볼 수 없도록 까만색 먹띠로 가려놓았기 때문이다. 문서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내용을 전달한 보고자는 특전사 내부 인물이거나 최소한 특전사 상황을 상세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특전사에 대해 아무런 권한 없어
통칭 공수부대라 불리기도 하는 특수전사령부는 사령부 밑에 1·3·5·7·9·11·13의 7개 여단과 707 특전임무 대대, 특전교육단 등으로 구성된 부대다. 위 문서에 따르면 7개 여단 가운데 4개 여단이 이동중이거나 이동을 마쳤으며, 7여단을 제외한 나머지 6개 여단이 수도권에 집결해 있는 셈이 된다.
특전사 7개 여단이 동원된 것은 학생 및 민간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이동 목적지와 주둔지를 볼 때 이 사실은 더욱 명확해지며, 위의 문서에서도 특전사 부대 이동 목적이 시위 진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같은 문서의 다음 내용을 보면 특전사의 이런 목표가 아예 명시돼 있다.
『‘특전사의 모든 단위 부대는 소요 사태 진압을 위해 집중적인 훈련을 받아왔음. 특히 최루가스(CS Gas) 사용 훈련을 중점적으로 받았으며, 소요 진압을 위한 기타 특수 장비로 정규전 헬멧 위에 착용하는 스크린 마스크가 포함되어 있음.’』
특전사에 대해 일반인은 물론 특전사 부대원조차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특전사의 시위 진압 임무다. 특전사는 1958년 제1 공수특전여단이 창설된 이후 1972년에 3·5특전여단, 1974년 7·9특전여단, 1977년에 11·13특전여단이 추가로 창설되면서 현재의 7개 여단 체제가 구축되었다. 명칭 그대로 특전사는 적군을 상대로 특수전을 수행하는 부대이다.
그러나 한국군 사정에 정통한 한국과 미국의 군 관련 인사들은 국내 쿠데타 방지를 위한 진압 임무도 특전사에 부여된 고유한 임무의 하나라는 점을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있다. 국내 반대파의 정권 전복 기도를 늘 우려했던 박정희가 정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특전사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결국 시위 진압에 특전사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쿠데타 방지의 일환이며, 1980년 봄 특전사 병력이 전국적으로 대규모 이동을 했다고 해서 특별한 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글라이스틴 대사의 비밀 전문에서도 밝혀져 있듯 특전사는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를 받지 않는 부대였다. 앞에서 언급된 미 정부의 ‘성명서’도 ‘미국은 특전사 부대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었으며, 한국군 특전사는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유사시 특수전 수행의 임무를 띤 부대가 연합방위 체제하의 작전통제권 대상이 아니라는 점은 특전사가 평시 한국 국내용 병력이라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국 관찰’을 쓴 제임스 영도 특전사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한국 문제에 정통한 사람들은 이 특전사 병력이 쿠데타 방지처럼 정치적 목적을 띤 활동에 동원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위 문서에서 정보 보고자는 ‘특전사 병력의 서울 이동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밝히고 있다. 만약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면 수도권에 집중 배치되어 있던 특전사 병력이 서울로 진입했으리라는 것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특전사 병력의 이동 목적도, 수도권 지역 주둔 목적도 서울 진입이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일어났던 유혈사태가 서울에서 먼저 발생했을 수도 있다.
‘훈련의 봄’
시위 진압 경찰이 아니라 특전사 병력에 의한 시위 진압이 언제든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시위의 규모나 강도 면에서 일촉즉발의 발화점은 서울이었다. 그러나 특전사 부대가 투입된 곳은 시위대의 조직력이나 규모가 서울 지역보다 훨씬 덜했던 광주였고, 계엄령 전국 확대 실시에 때 맞추어 5월18일에 전격적으로 유혈 진압이 수행되었다. 서울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작 일은 광주에서 터진 것이다. 광주가 선택된 배경과 진압이 실시된 시점 등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이 문서의 오른쪽 여백에는 특전사 병력이 ‘봄에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음(heavy training in the spring)’이라는 수기 메모가 적혀 있다. 1980년 ‘서울의 봄’ 한편에서는 ‘훈련의 봄’이라는 또 하나의 면밀히 계산된 시나리오가 작동되고 있었던 셈이다. 광주 시위 진압에 투입되었던 특전사 부대원들도 ‘봄부터 고된 시위 진압훈련을 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 밝혀진 또 하나의 사실은 특전사 소속 606대대가 별도의 특수훈련을 받았고, 이것을 미 국방정보국(DIA)이 낱낱이 관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중에 606대대로 밝혀진 1개 대대가 모종의 특수한 훈련을 받고 있었음. 이 부대의 특이점은 소속 병력 전원이 머리를 기르고 있어 군복을 입고 있으면 의심스러워 보인다는 것임. 606 부대원들이 대학 구내에서 활용된 병력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했음.』
606부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의 문서 여백에는 ‘미국(국방정보국)이 이 특전사 부대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음’이라는 수기 메모가 기재되어 있다.
이 정도의 정보력을 가지고 있는 주한 미대사관과 주한미군이 12·12와 광주사태 때 한국군의 병력 이동을 포착 못했을 리가 없다. 연합사 내 한국군 지휘 계통을 통해 12·12 당시의 병력 이동을 통보받지 못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맞을 수 있지만, ‘병력 이동’ 사실 자체를 몰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쉽지 않은 대목이다.
광주사태 때의 병력 이동도 마찬가지이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한국군이 특전사 병력 이동 계획을 통보했다는 사실을 이미 5월 초에 워싱턴으로 보고했을 만큼 한국군 내 병력 이동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광주사태 때 미국이 신군부의 진압 병력 이동을 ‘승인’한 부대는 특전사가 아닌 20사단이다. 이 20보병사단의 포병대와 예하 3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은 이미 1979년 10월27일 한미연합사에서 한국 육군으로 넘어가 있었다. 한국군이 박정희 시해 사건 후 수습책의 일환으로 20보병사단을 서울로 파견하겠다고 위컴에게 통보했고, 위컴은 이에 동의했다.
(이 20사단의 병력 이동을 봐도 연합사 사령관이 가지고 있다는 작전통제권이라는 것이 형식적임을 알 수 있다. 연합사 사령관 입장에서 보면 ‘한국 육군이 20사단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겠다고 적절한 절차를 밟아 연합사 사령관에게 통보해온 것’이 되지만, 실제 20사단을 움직인 신군부 입장에서는 ‘20사단을 빼서 서울로 배치하되, 위컴에게는 통보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미 정부 성명서에 따르면 ‘한국군은 이 20사단의 포병대와 3개 연대 가운데 1개 연대를 나중에 각각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에 귀속시켰으나, 20사단의 나머지 2개 연대가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에 귀속되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되어 있다.
20사단 투입 승인요청은 위컴 끌어들이기
신군부가 광주 재진입 때 사용하겠다고 위컴에게 상의한 부대가 바로 이 20사단의 일부 병력이다. 20사단은 정규 부대로는 드물게 폭동진압 훈련을 받은 부대였다. 한국 당국은 “광주 시민들이 광주에 투입된 특전사 부대에 비해 20사단이 공격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협상이 실패할 경우 특별히 훈련된 20사단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특전사 부대를 계속 동원하는 것보다 낫다는 데 동의했다는 것이 미국측 입장이다.
이때 동원된 20사단은 이미 위컴의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20사단 예하 부대의 광주 이동을 위컴에게 통고할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가능한 한 광주사태에 미국을 깊숙이 끌어들이려 했던 신군부는 위컴에게 부대 이동을 통고했고 ‘승인’을 받아냈다.
위컴 입장에서는 이 20사단 병력의 광주 투입 결정이야말로 곤혹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미 12·12 사태 때부터 위컴에게 전두환은 불신의 상징적인 인물이었고 개인적으로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하급자였다. 위컴이 처음 전두환을 만난 것은 12·12가 일어난 지 3개월이 지난 1980년 2월이었다. 이 첫 만남에서도 위컴은 얻은 것이 없다. 전두환에게 정치적인 승리를 안겨주었을 뿐이다. 5월8일의 두 번째 만남 후에도 전두환과 위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을 뿐이다.
박정희 피살 이후 시시각각 정세가 급변하는 한국 상황에서 워싱턴의 최대 관심사는 물론 전두환이었다. 권력 실세로 자리를 굳혀가는 전두환을 인정할 것이냐의 문제를 놓고 워싱턴은 갈라졌다.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를 정치 파트너로 인정해야 하느냐를 두고 주한 미대사관과 주한 미군사령부의 의견도 일치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광주사태가 마무리된 다음에도 계속된다.
다음에 소개하는 두 건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비망록(2급 비밀)은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앉기 불과 한 달여 전인 7월 초에 작성된 것들이다. 전두환에 대한 워싱턴의 의견이 얼마나 극명하게 갈려 있었는지를 알게 하는 문서다.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와 국가안보회의 한국 담당 참모였던 도널드 그레그(전 주한 미대사) 사이에 오간 메모 형식의 비망록이다.
『백악관2급 비밀1980년 7월3일비망록 수신 : 도널드 그레그발신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주제 : 대한국 정책 선택 여부 검토중앙정보국(CIA)의 스탠 터너(Stan Turner)가 선택 가능한 목록을 적어 첨부한 아래 문서를 보내왔음. 중앙정보국이 더 확실하게 준비를 할 수 있다고 한 정책 대안들임. 이 제안들이 검토해 볼 만한 것인지 판단해주기 바람.
첨부제목 : 가능한 대한국 정책 대안들1. 전두환이 민간인에게 주권을 넘기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공개적인 압력을 가할 준비를 한다.2. 전두환에 대한 불만 표시의 방법 또는 위 1항의 조건 수용 압력의 방법으로 주한미군을 감축시킨다.3. 1항의 조건을 수용하도록 전두환 개인에게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한다.아래 항목을 기준으로 위의 조건들을 검토해야 함1. 한국의 장기적인 안정2. 보다 민주화된 제도로의 이행3. 외교 경제 군사적 측면의 한미 관계4. 북한의 반응5. 대중국 관계6. 미일 관계7. 미소 관계8. 아세안 반응』
이 문서를 보면 미국은 광주사태 이후에도 사적인 경로를 통해 전두환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압력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나, CIA를 비롯한 워싱턴의 일부 그룹이 전두환이 이끄는 군사정권 탄생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에 대해 도널드 그레그는 브레진스키에게 다음의 검토 답변서를 보낸다.
『국가안보회의1980년 7월7일비망록 수신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발신 : 도널드 그레그주제 : 대한국 정책 선택 검토본인은 이번에 CIA가 정책 대안 설정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함. 이유는 다음과 같음:- 정책 검토위원회(PRC)를 포함해 지금까지 열렸던 일련의 한국 관련 회의에서도 이런 정책 및 다른 대안들이 이미 검토된 바 있음.- 우리는 현재 취하고 있는 정책을 이제 막 수행하기 시작했으며, 정책 수행의 초기 결과가 아주 고무적인 것은 아니지만, 정책의 주요 부분을 재검토하기에는 때가 이른 것 같음.- 만약 우리의 정책이 재검토되더라도 CIA는 이 과정에 깊숙이 관여하는 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봄.- 본인 견해로는 터너의 목록은 철저하게 준비된 것도 아니며 특별히 생산적인 것도 아님.터너는 CIA 고객의 관심사에 부응하기 위해 CIA가 더 많은 분석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함. 이는 바람직한 현상임. 하지만 본인의 판단으로는 CIA가 전두환의 등장에 대한 북한의 반응을 분석하는 것이 더 유용할 것으로 봄. 그런 분석은 앞으로 또 열릴 수밖에 없는 한국 관련 회의에서도 유익하게 쓰일 수 있을 것임.』
도널드 그레그의 이 답변 가운데, CIA가 깊숙이 관여하지 말아야 하며 철저하게 준비된 문서가 아니라는 세 번째와 네 번째 항목 옆에 브레진스키는 ‘동의’한다는 메모를 적어놓았다.
그레그는 8월14일 ‘한국 상황에 대한 미 정부의 대응’이라는 제목의 또 하나의 비망록을 역시 브레진스키 앞으로 보낸다. 다음은 3급 비밀로 분류된 이 비망록에서 주요 부분만을 발췌한 것이다.
『8월14일 마이크 아마코스트가 한국 사태를 토의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장시간의 회의를 주재했음. 워싱턴에서 휴가중인 글라이스틴 주한대사도 참석했으며, 이 회의에서는 다음의 두 가지 내용이 주로 토의되었음.- 최규하 대통령이 곧 사임할 것이며, 전두환 장군이 수일 내에 대통령에 선출될 것임.- 한국인들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샘 제미슨의 위컴 장군 인터뷰 기사를 미 정부가 전두환 장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쪽으로 곡해하고 있음.장시간 토의 끝에 다음의 조치들을 상부에 건의하기로 의견을 모았음.1. 위컴 장군을, 최소한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할 때까지 하와이에 며칠 더 머물게 한다(위컴 장군을 지금 한국에 돌려보내면 한국인들이 이를 한국 정부에 대한 미 정부의 지지로 받아들여 써먹게 될 것이며, 위컴이 언론과의 관계에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될 것임).2. 전두환은 궁극적으로 정권의 적법성을 워싱턴이 아닌 한국 국민에게서 얻어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임을 재천명하는 공개 성명서가 워싱턴에서 발표될 수 있도록 준비함.3. 글라이스틴 대사는 2주 후 한국으로 귀임할 때 카터 대통령의 친서를 가져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음.』
“내년 초 새 헌법으로 선거 치르기를”
1980년 8월27일, 전두환은 간접선거를 통해 한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박정희 피살 이후 10개월 만이고, 12·12 군사 쿠데타 이후 8개월15일 만이며, 광주 5·18 이후 102일째 되던 날이었다.
육군 소장이었던 전두환이 한국의 대통령에 선출된 이틀 후인 8월29일 오전 2시14분, 주한 미대사관은 워싱턴의 미 국무부 장관실에서 타전한 두 장의 비밀 전문을 접수한다. 전두환 대통령선출자에게 보낼 카터 대통령의 메시지였다. 공식 대통령 서한(letter)이 아닌 일곱 문단짜리의 메시지(message)였다.
새로 탄생한 대통령선출자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긴 하지만, 카터의 이 메시지 어느 구석에도 축하의 문구나 의례적인 외교 수사는 단 한마디도 들어 있지 않다. 메시지 전체의 분위기는 분가해 나가는 말썽꾸러기 자식에게 마지못해 한마디 입을 여는 아버지의 훈계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이었고, 모든 문구는 ‘해야 할 일의 목록’ 같은 것이었다. 지시나 다름없는 형식이었다. 어쨌든 박정희 피살 이후 10개월 동안 워싱턴과 신군부 사이에 빚어졌던 분노와 갈등, 기(氣) 싸움과 감정 대립의 팽팽했던 긴장 관계가 매듭을 짓는 순간이었다.
카터의 이 메시지는 ‘한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책임을 맡게 된 귀하에게 본인은 개인적으로 ~’라는 말로 시작된다.
『- 한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책임을 맡게 된 귀하에게 본인은 개인적으로 양국간 이해에 아주 중요한 경제 및 안보 관계가 유지되기를 원한다는 우리의 열망을 확고히 하는 바입니다.- 이번에 본인은 최근 한국에서의 사태가 우리에게 근심거리를 안겨주었다는 점을 귀하께서 인지하셨으면 합니다. 귀하께서 새 헌법안을 곧 제출해 국민투표에 부치고 내년 초 새 헌법하에서 선거를 치를 것임을 최규하 전 대통령께 약속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본인은 귀하가 직면한 어려운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치 단체를 발전시키고 한국 국민에게 보다 더 큰 개인의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귀 정부가 확실하게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빠른 시일 안에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대통령 각하, 끝으로 본인은 앞으로 우리의 공동 관심사를 지지하면서 양국간 협조 관계가 강화되기를 진정 원한다는 점을 재차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미 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