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의 한양진경 최완수 지음. 동아일보사 / 360쪽 /양장본 3만8000원, 보급판 1만8000원
그럼에도 오랫동안 그 아름다움은 우리 눈에 띄지 않았다. 자연을 순수하게 바라보지 않고 어떤 문화적 창을 통해서 보는 관습 때문이었다. 긴 세월 우리는 중국이 천하제일이라 여기며 중국의 문화와 자연을 통해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 서구의 영향 아래 자라난 현대인들은 부지불식간에 서구를 통해 우리를 보려 한다.
그러나 조선후기 숙종대(1675∼1720)를 전후한 18세기 무렵, 우리것이 제일이라는 자존의식이 자라났고 이 땅의 산천도 천하제일이라는 자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의 땅 대신 중국의 산천을 그리고, 우리 것을 그리더라도 중국 산수화의 틀 속에서 그리던 전통에서 벗어나 우리 땅을 한국의 방식과 미감으로 그리는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발달했다.
한국 산수화의 ‘개벽’
겸재(謙齋) 정선(鄭?, 1676∼1759)은 이런 변화를 선도하고 이를 최고의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린 핵심적인 문인화가였다. 그는 율곡(栗谷) 이래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 전통을 철저히 체득하고 외래문화까지 폭넓게 소화한 뒤, 평생에 걸쳐 전국의 명산대천을 수없이 사생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독자적인 진경산수화의 신경지를 개척했다. 그것은 동시대 조영석(趙榮?)의 증언처럼, 진정한 “우리나라 산수화의 개벽(開闢)”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이를 서구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시민사회론적 시각에 맞추어, 조선성리학의 관념적인 공리공론을 극복하고 나타난 ‘실학(實學)’의 결과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대세였다. 그래서 웬만한 대학교수와 제법 교양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식자 중에도 ‘진경산수화’를 ‘실학’의 결과물로 알고 우리도 서구식 근대와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거나 흐뭇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인류사에는 서구의 틀에 넣을 수 없는 다른 방식의 근대도 존재했다. 조선후기가 그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다.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는 그 핵심적인 징표 가운데 하나다. 조선후기의 역사와 문화는 결코 서구 근대의 열등한 아류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전개된 독자적인 세계였다.
가헌(嘉軒) 최완수(崔完秀) 선생은 그동안 조선후기의 역사와 문화를 구명(究明)해서 세상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는 데 앞장서왔다. 그리하여 지난 30여년 동안 ‘겸재명품첩’ ‘겸재정선 진경산수화’ ‘우리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같은 책을 펴내 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한편, 간송미술관의 수많은 전시와 강연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알리는 데 주력해왔다.
이번에 출간된 ‘겸재의 한양진경’은 지난 2002년 동아일보 지면에 연재되었던 내용을 대폭 확대·보완하고, 겸재가 그린 한양진경의 천연색 도판을 곁들여 새롭게 펴낸 것이다. 저자의 학문적 온축과 대중 교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느껴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연과 역사, 문화와 예술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사랑이 책장마다 배어 있다.
그래서 겸재의 한양진경을 감상하며 책을 읽노라면 우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며 뛰어난 예술 문화를 꽃피웠던 250년 전 서울의 모습이 아스라한 꿈처럼 되살아나, 마치 별천지를 유람하는 것만 같다. 흔히 산수화를 방안에 누워서 유람하는 것이라고 하여 ‘와유(臥遊)’라고 부르는데, 이 책은 250년 전 서울을 와유하게 해준다.
‘백악산’, 영조16년(1740년)경. 현재 경복고등학교 자리에서 살았던 겸재가 뒷동산이나 마찬가지인 북악산(백악산)을 그렸다.
조선후기의 역사와 문화, 지리와 언어, 가계(家系)와 보학(譜學)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춘 저자는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고 현장을 일일이 답사하여 250년 전 서울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찾아냈다.
그래서 겸재가 그린 한양진경의 위치는 물론 지명의 유래와 지형의 풍수, 가옥의 구조, 정원의 조경, 수목의 배치, 화훼의 품종, 주인과 나그네의 마음,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이 일구어갔던 심오한 학문과 아름다운 시서화(詩書畵)까지 마치 눈앞에 실제로 펼쳐져 있는 것처럼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부록으로 현재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어서 누구든지 이 책을 들고 현장을 답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친절을 잊지 않았다. 소실되었던 세검정(洗劍亭)이 복원되고 양천향교(陽川鄕校)가 다시 세워질 수 있었던 것도 겸재가 남긴 한양진경과 저자의 이와 같은 학문적 연구가 거둔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이 책을 손에 들면, 서울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혔던 북악산(北嶽山, 白岳山)과 인왕산(仁王山) 일대의 명승들은 물론, 혜화문과 동대문을 나가 양수리에서 미사리와 광진을 거치고 송파와 압구정을 지나 다시 양화와 행주에 이르는 한강변의 명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곡유거(仁谷幽居)’, 영조31년(1755년)경. 겸재가 말년을 보낸 인왕산 골짜기 자신의 집을 그린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과 조화할 줄 아는 겸허한 마음으로 서울의 풍광을 아름답게 가꾸었던 선인들의 지혜를 배우고, 나아가 그 속에서 우리를 진정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자존의식 아래 독자적인 문화와 예술을 창조한 선인들의 전통을 되돌아볼 수 있다.
땅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땅은 사람 때문에 소중하다. 그래서 아름다운 땅은 아름다운 사람에 의해서 더욱 아름다워진다. 진경산수화도 마찬가지다. 진경산수화의 핵심은 땅이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사람과 그 사람의 실존적인 삶에 있다. 진경산수화도 아름다운 사람들에 의해서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겸재의 한양진경’이란 책 한 권으로 250년 만에 다시 이 땅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서울 토박이였던 겸재만큼 서울을 잘 알고 서울을 사랑하며 서울을 잘 그린 사람도 없었지만, 저자만큼 겸재를 사랑하고 겸재의 마음을 잘 알며 겸재 당시 서울의 아름다움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겸재의 한양진경과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한양진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