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의 모든 눈과 귀가 박근혜 대표에게 쏠려 있다. 7월 전당대회에서 박 대표의 재선이 확실시되면서 쏠림현상은 더욱 심해지는 모습이다.
- 벌써부터 눈도장을 찍으려는 인사들이 줄을 잇고 있다는 후문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기각 결정 직후 당의 입장을 밝히는 발표문을 놓고 당직자들과 자구 수정을 논의하고 있다.
차기 대통령감에 대한 선호도를 묻는 질문에서도 박 대표는 당시 열린우리당 정동영(鄭東泳) 의장과 나란히 7.8%를 얻어 대통령감 선호도 1위를 기록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일으킨 ‘돌풍’을 언론에선 ‘박풍(朴風)’이라고 명명했다. 박풍이 탄핵 역풍에 휘청거린 한나라당을 수렁에서 건져 올린 일등공신이라는 데 정치권에선 누구도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다.
박풍은 총선 이후 두 달 만에 ‘미니총선’으로 치러진 6·5 재·보궐 지방선거에서도 재연됐다.
가냘픈 몸매에 항상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박 대표는 전국의 선거현장을 누비며 유권자들을 열광시켰다. 대선자금 ‘차떼기’ 파문으로 정치 냉소주의가 극에 달한 시점에서 ‘박근혜 효과’는 이례적 사건이다. 박 대표에 비판적인 당내 인사들도 “박근혜의 탁월한 대중 흡인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 때문에 총선 현장에서 박 대표의 지원사격을 바라는 요구가 쇄도했다. 총선 선대위 관계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쏟아진 지원 요청을 교통정리하느라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총선 막바지에 박 대표는 하루에 유세현장을 28곳이나 소화하는 강행군을 해야 했다. 17대 총선 최대 접전지였던 부산지역 한 의원의 회고.
“열린우리당의 집요한 공세로 승산이 없어 보였다.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상태에서 선거일 며칠을 앞두고 후보 사퇴를 심각히 고려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박 대표와 친분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표의 지원유세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박 대표가 유세장에 도착하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직 동원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온 것이다. 어떤 유권자는 내 손을 잡고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돼’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나의 승리에 박 대표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박 대표는 6월11일 현장 출입기자들과 오찬을 함께한 자리에서 7월 전당대회 때 당 대표 출마 의사를 피력했다. 현재 구도에선 어떤 주자가 출마하더라도 박 대표의 완승은 흔들릴 기미가 없다. ‘뉴 한나라호(號)’의 키를 쥘 박 대표의 행보가 향후 정국의 ‘태풍의 눈’이 될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근혜 리더십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누구와 견줘도 돋보이는 박 대표의 ‘무기’는 탁월한 대중성이다. 전국에서 고르게 나타나는 높은 인지도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지난 총선 기간 중 박 대표가 한나라당의 열세지역인 광주를 방문했을 때 광주시민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은 것이 단적인 사례다. 행인들은 “야, 박근혜다”라며 같이 휴대전화 사진을 찍자고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기도 했다.
당시 총선선대위 소속 한 당직자는 “솔직히 박 대표의 광주 방문에 신경이 몹시 쓰였는데 광주 현지 반응을 보고 놀랐다”며 “현지 시민들은 마치 연예인을 만난 듯한 표정으로 박 대표를 대했는데 그 자체가 변화의 단초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충청권에서도 박 대표의 개인적 지지도는 당 지지도를 훨씬 웃돈다. 2002년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한나라당발(發) 소식은 아예 수신 거부하던 호남과 충청권에서 한나라당이 ‘의사소통’의 싹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특유의 친화력은 실제 현장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한나라당 박진(朴振·서울 종로) 의원은 “총선 때 대학로 유세에 박 대표와 함께 나간 적이 있었는데 박 대표가 한 청년에게 손을 내밀자 그 청년이 ‘나는 박정희가 싫다’며 손을 뒤로 빼 잠시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런데 박 대표는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인간적으로 악수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무안해진 그 청년은 박 대표와 결국 악수를 하더라”고 회고했다.
박 의원은 “박 대표의 ‘내공’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한 방송사 여성 앵커 출신과의 인터뷰 일화도 비슷한 사례다. 이 방송인은 마주앉은 박 대표를 겨냥해 “당신은 유복하게 자랐고 (대통령이었던 아버지의) 후광도 있고, 아주 잘 자랐는데 서민의 어려움을 알겠느냐”며 거칠게 몰아붙였다. 인터뷰 내내 독설(毒舌)에 가까운 질문이 쏟아졌지만 박 대표는 흥분하지 않았다.
대신 박 대표는 “(당신도 여자인데) 당신 같으면 나 같은 삶을 선택하겠느냐”고 짧게 되받아쳐 상황을 정리했다고 한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부모가 비명(非命)에 가고난 뒤 홀로 정치의 외길을 걷는 고독함이 진하게 느껴졌다고 한 참석자가 전했다.
박 대표는 유세 현장 곳곳에서 수많은 인파와 만나 직접 눈을 마주치며 손을 잡는다. 짧은 순간이지만 사람들에게 ‘진실하다’는 인상을 남겨주기에 충분하다는 게 박 대표 측근의 설명.
박 대표가 구사하는 용어나 표현은 간결하다. 유세를 마칠 때 “여러분을 믿고 가겠습니다”라는 표현은 박 대표의 ‘단골메뉴’가 된 지 오래다. 이와 관련, 박 대표는 최근 기자들에게 “나는 가급적 쉬운 표현을 쓰려고 하는데 그런 것이 듣기에 더 좋은 것 아니냐”며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박 대표는 자극적인 표현을 싫어한다. 박 대표는 당내에서 호남과 충청권 등 열세지역을 공략하기 위한 노력을 ‘서진(西進) 정책’이라고 부르는 데 대해 불쾌함을 표시했다.
박 대표는 최근 사석에서 “‘서진’이란 표현은 문제가 있다. 우리가 무슨 점령군이냐”며 “우리는 앞으로 보여주는 이벤트는 하지 않을 것이며 호남이나 충청인들이 ‘정말 한나라당이 잘하는구나’라며 한나라당을 찍고 싶은 상황을 만드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의 이 같은 스타일은 특유의 ‘진지함’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손바닥만한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메모를 한다.
한 측근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박 대표는 며칠간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말도 거의 하지 않는다”며 “그러나 고민이 끝나고 최종 결정을 내리면 뒤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라고 전했다.
박 대표의 성장 동력은 보수적 원칙 위에 서면서도 개혁과 변화의 화두를 계속 쥐고 있었던 데 있다. 그러나 그 원칙의 접점을 찾기가 어려워질 땐 그는 과감히 자기 길을 걸었다. 고집스러울 정도의 ‘강단’이 뒤따랐다.
실제 2002년 초 이회창(李會昌) 당시 총재가 자신이 요구해온 당권-대권 분리 등 정치개혁 방안을 거부하자 끝내 탈당(脫黨)을 결행했다. “설마 탈당이야 하겠느냐”는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당이 불법대선자금 사건으로 파탄지경에 내몰리자 비주류의 외길을 고집스럽게 걸어온 행보는 그를 당의 전면에 올려놓은 정치적 자양분이 됐다.
‘양날의 칼’ 박정희의 그림자
박 대표에게 부친인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거대한 바위’나 다름없다. 박근혜 리더십의 발원지가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박 대표의 ‘국가주의’ 신념도 여기서 비롯됐다. 박 대표는 사석에서 “과거 청와대에 있을 때 식탁에선 나라와 국가, 국민에 대한 얘기가 대부분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에게 박정희 리더십은 후광(後光)이면서 그림자다. ‘양날의 칼’인 셈이다. 박정희 정권이 나라를 가난에서 건져낸 산업화세력의 본류이지만 인권 유린과 민주화세력 탄압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까지 걷어낼 순 없다.
박 대표는 “그 시대마다 시대의 역할이 있었다”며 ‘계승과 발전론’을 펴고 있다. 공과(功過)는 따질 수 있겠지만 일방적 매도는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정치권에선 그가 1974년 8월 육영수(陸英修) 여사의 피격 사건 이후 청와대에서 5년 남짓 ‘퍼스트 레이디 대행(代行)’직을 수행했던 특출한 경험에 주목하고 있다. 권력의 정점에서 권력의 생리를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박 대표가 평소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 대목에선 함구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대통령이란 자리가 얼마나 고독한 지는 경험한 사람만이 안다”는 게 이유다.
작고한 ‘킹메이커’ 김윤환(金潤煥) 전 민국당 대표는 한때 이회창의 대항마로 박 대표를 꼽을 때 박 대표의 이 같은 ‘청와대 경험’에 주목했다. 권력의 운용 메커니즘을 꿰뚫는 경험은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정치적 자산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박 대표가 이미 가동중인 시스템의 운용, 즉 수성(守成)엔 능하겠지만 창업(創業)이나 다름없는 집권 과정을 헤쳐나갈 수 있느냐는 회의론이 바로 그것이다.
한나라당이 천막당사로 옮기는 ‘치욕’을 겪으면서도 과연 “바뀌어야 한다”는 뼈저린 반성을 체득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박 대표가 유력한 대권주자로 부상하자 벌써부터 그 주위에 눈도장을 찍으려는 인사들이 줄을 잇고 있다는 후문이다. 상호 ‘피드백’이 가능한 커뮤니케이션 통로가 막히는 조짐이 보이는 것도 우려스런 대목이다.
한 여성 의원은 “총선 후 당 소속 여성 당선자들이 대표와 함께하는 일정을 만들어달라고 당 대표실에 수차례 얘기했다”며 “그런데도 아무런 언질이 없다가 한달이 지나 겨우 일정이 잡혔다”고 지적했다.
당내에서 자칫 ‘박근혜 띄우기’가 가열될 경우 한나라당은 이회창 전 총재 시절의 도그마적 폐단에 사로잡힐 공산이 크다. 이 전 총재는 1997년 대통령선거 패배 후 ‘여과기’를 거치지 않고 1998년 당권 장악에 나섰다. 당권 장악 후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 붐이 조성됐지만 1인 지배체제가 공고화되면서 당의 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전 총재 주변의 기득권층은 다른 후보군의 존재를 지우기 바빴고 결국 여권의 집중 포화에 직면한 이 전 총재는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다양한 후보군을 포진시켜 여권의 공세의 초점을 흐리는 전략적 마인드가 절실하다”며 “당의 중심이 한쪽 방향에 쏠릴 경우 다른 대선주자들의 반발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 6월 중에 단행해야 할 당 사무처 구조조정 방안을 둘러싸고 ‘밥그릇 챙기기’ 양상을 띠는 것도 박 대표가 풀어야할 숙제다. 외부 정책전문가들이 주축이 될 ‘싱크탱크’로 거듭나려는 여의도연구소에 “당 사무처를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한다”는 압력이 거세다.
보수(補修)하는 보수로서 한나라당의 변화를 이끌어낼 것인지, 난마처럼 얽힌 실타래를 풀지 못하고 좌절할 것인지, 박 대표가 내디딜 행보를 정치권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