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이 즐기는 음식 중 하나가 비빔밥이다. 한여름, 찬밥에 남은 반찬과 야채를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 비벼 먹으면 꿀맛이 따로 없다. 영양도 가득하고, 당뇨와 비만 방지에 더없이 좋다.
“비만은 만병의 근원입니다. 특히 복부비만은 조심해야 해요. 뚱뚱하지 않은 사람도 복부비만일 경우 당뇨 등 성인병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허 원장이 의술을 펼친 지 올해로 만 40년. 그가 의사가 된 이유는 지극히 평범하다. 서울대 법대에 응시했으나 떨어져 재수를 하다가 ‘그냥 한번 해볼까’ 해서 들어간 곳이 다름아닌 연세대 의대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전문의 과정에서 내분비대사학을 선택해 갑상선과 뇌하수체질환에 대해 연구했다. 그러던 1975년 프랑스 몽펠리에 당뇨센터에 연수를 다녀오면서 당뇨질환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 당뇨병 환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허 원장이 당뇨질환 분야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980년 중반부터. “당뇨질환은 복잡한 분야예요. 모르는 것도 많았고. 하지만 앞으로 식사문화가 변하면서 환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의 첫 연구결과물인 ‘한국형 당뇨병에 관한 연구’는 세계 의학계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86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내분비학회에서 그는 “한국인의 6.6%가 ‘영양실조형 당뇨병’ 환자이며, 서양의 경우 당뇨병 환자의 70% 이상이 비만이지만 한국인은 75%가 마른 체구”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뇨병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한 것이었다. 당시 학계에는 인슐린의 양이 적은 ‘1형’과 인슐린의 기능이 떨어지는 ‘2형’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허 원장이 그 중간단계인 ‘1.5형(한국형 당뇨병)’을 처음으로 구명(究明)해낸 것이다. 이 연구성과는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에서의 당뇨병 예방에 크게 기여했으며 1997년 미국 당뇨병학 교과서에 실렸다.
‘거미형 인간’도 허 원장이 만들어낸 새로운 용어다. 1995년 일본 우베(宇部)에서 열린 한일당뇨병심포지엄에서 그는 “팔다리에 근육이 적은 반면 내장에 지방이 많은 복부비만형이 당뇨병과 고혈압 등 각종 성인병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뇨병이 단순비만과 관련이 깊다는 기존의 통념을 깬 것이다.
손녀들 앞에서 비빔밥 재료로 쓰일 야채를 다듬고 있는 허 원장과 부인 이선희씨. 산부인과 의사인 부인 이씨는 허 교수가 지난해 ‘허내과’를 개원하기 전까지 그 자리에서 산부인과 병원을 운영했었다.
당뇨병 치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식단. 허 원장은 당뇨병 환자들에게 권장하는 음식으로 주저없이 비빔밥을 꼽는다. 곡류와 어육류, 유지류, 야채류, 과일류 등 5대 영양원이 모두 들어가는 가장 균형적인 음식이기 때문이다.
우리 음식 가운데 비빔밥만큼 흔한 것도 없다. 허 원장이 추천하는 비빔밥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의사의 처방’이라는 게 좀 다를까.
먼저 호박과 깻잎, 오이, 당근,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상추, 쑥갓, 양파, 피망, 도라지 등 갖가지 야채를 잘 씻어서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이 중 호박과 깻잎, 느타리버섯, 표고버섯, 도라지 등은 살짝 익혀야 먹기 좋다. 쇠고기는 얇게 저며서 기름에 적당히 볶는다.
비빔밥의 맛을 결정짓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양념고추장이다. 고추장에 참깨와 참기름, 배 간 것, 물엿 등을 적당한 배합으로 섞으면 매운맛과 고소한 맛, 단맛이 조화를 이루어 비빔밥을 더욱 맛나게 해준다.
밥은 뜨거운 것보다 약간 식은 것이 좋다. 각종 야채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료가 다 준비되었으면 커다란 양푼에 밥을 퍼 담은 후 갖은 야채와 양념고추장, 참기름을 넣어 재료가 고루 섞이도록 비비면 된다. 이때 손으로 비비면 나름의 손맛이 더해진다.
허 원장은 요즘 당뇨병만큼이나 국내 의학교육의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는 1997년 대선 직후 김대중 대통령 주치의로 선임되어 2002년 임기를 마칠 때까지 국내 의학교육의 발전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왔고, 일정한 성과도 일궈낸 바 있다.
허 원장은 김 전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해 의대생 군 특례를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가능하도록 했고, 내년부터 시행되는 ‘의치학전문대학원’ 제도를 도입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학이 교육중심, 연구중심으로 전문화·다양화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때문에 최근 정치권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서울대 폐지론’에 대해 반대한다. 오히려 연구중심 대학으로 전문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허 원장은 “의학은 생명공학 쪽으로 전문화시키고, 의료시스템은 보다 효율적으로 산업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미래가 곧 희망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야만 10년 혹은 20년 후에라도 국내에서 학문적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허 원장은 그 미래를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칠 생각이다.
▶ 2002년 8월, 30년간의 교수생활을 마감하고 정년퇴임한 허갑범 원장은 지난해 10월 신촌에 ‘허내과’를 개원했다. 그는 배가 나온 환자를 볼 때마다 이 말을 잊지 않는다.(환자의 배를 만지며) “이거 위험합니다. 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