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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의 중국 진짜부자 이야기(하)

장사의 至尊 닝보방, 중국의 유대인 원저우상인

손님을 부모처럼 모시는 상술 낯 두꺼운 배짱이 최대 무기

  • 글: 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교수·법학 khb@khu.ac.kr

장사의 至尊 닝보방, 중국의 유대인 원저우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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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업자금뿐 아니라 영국으로 돌아갈 차비조차 잃어버린 영국상인은 황푸강에 몸을 던지고 싶을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가 힘없이 터덜터덜 나루터로 돌아왔을 때 뱃사공 소년이 자신의 돈가방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방 속의 돈과 물건도 그대로였다. 영국상인은 감격한 나머지 소년의 손을 꼭 잡고 사례금으로 1000달러를 건네주려 했으나 소년은 한사코 받기를 거부했다.

나중에 그 영국상인은 예청중을 상하이 최대의 철물점을 경영할 파트너로 초빙했다. 그 후에도 예청중은 변함없이 고상한 상덕(商德)과 상도(商道)를 발휘해 사람들의 환영과 존경을 받았으며 나아가 ‘철물점 대왕’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중국상인들은 손님을 끌 때 “화진가실(貨眞價實)”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이 말에는 “물건도 진짜고 값도 진짜니 믿고 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닝보상인은 말뿐만 아니라 이를 실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여간해서 사기나 협잡을 부리지 않는다. 그래서 외지인들이 닝보상인과 거래하거나 동업할 경우 비교적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낀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상하이는 닝보상인의 본부

넷째, 닝보상인은 외향적이다. 손발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활동영역을 부단히 넓히고 새로운 시장 개척에 능하다. 중국 제일의 경제도시 상하이는 닝보상인의 본부다. 어디 상하이뿐이겠는가. 베이징과 톈진, 선양, 쑤저우, 항저우에도 거대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깊은 산골과 농촌이라고 해서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건 물론 아니다. 바다 건너 일본이나 동남아 유럽 북미 등 세계 곳곳에도 이미 그들의 발자취가 묻어 있다.



닝보상인은 항저우상인과 정반대로 고향에 죽치고 있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외지로 나가 창업을 하고 사해(四海)를 집 삼아 모험을 즐긴다. 19세기 말에서 1940년대에 걸쳐 120만명의 닝보상인이 해외로 떠났다고 한다.

홍콩 거주민의 원적지를 살펴보면 광둥 다음으로 저장이 많고 저장에서도 닝보가 으뜸이다. 적지 않은 닝보상인이 홍콩에 자리를 잡고 기업을 창업했고 세계 각지에 지사를 설립하여 다국적기업으로 성장시켰다.

1949년 공산화 이후에도 닝보방들은 홍콩, 일본, 타이완, 동남아, 유럽, 북미, 호주, 심지어 중동과 아프리카에까지 퍼져나갔다. 해외의 닝보방은 화상(華商)이라 불리며 만방에 그 힘을 떨치고 있다.

세계 선박왕 바오위강(包玉剛)과 퉁하오윈(董浩雲), 상하이 대형 위락장 다스졔(大世界)의 창설자 황추쥬(黃楚九), 홍콩 극장계의 대부 샤오이푸(邵逸夫), 20세기 전반 기업대왕 류훙성(劉鴻生), 중국 최대의 비누공장을 차린 항쑹마오(項松茂) 등등 유명한 닝보방의 이름은 일일이 말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2002년 현재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닝보출신 화상은 3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돈 버는 일이라면 전천후, 전방위

다섯째, 닝보상인이 취급하는 업종은 무척 다양하다. 돈이 벌리는 일이라면 무엇에라도 손을 대기 때문이다. 닝보상인은 의류업 금은방 해산물 한약재 등 전통 업종에서도 명성을 떨쳤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속하게 업종전환을 해왔다.

아편전쟁 후 서구의 문물이 도입되는 등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자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흐름에 적응해 신흥산업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해운업, 대외무역, 시계와 안경업, 일용품, 양약업, 보험업, 금융업뿐만 아니라 호텔과 사진관, 오락장, 택시사업 같은 서비스업 등 이 시기에 닝보상인이 손대지 않은 업종이 없었을 정도였다.

21세기인 지금도 닝보상인은 거의 모든 생활필수품과 생산재료를 취급하고 있다. 소비재는 농수산물에서 화섬원단, 복장, 실크, 신발과 가죽 등 소상품과 가전제품, 자전거, 가구, 장식재, 통신, 컴퓨터 등 공업품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가히 전방위 전천후라 할 만하다.

여섯째, 닝보상인은 하찮은 이익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파리머리처럼 작은 이익(蠅頭小利)이라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자고 이래로 상인은 이익을 추구한다. ‘관자(管子)’에서 말하길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달려가는 상인이 돈을 잘 번다”고 했다. ‘사기(史記)’에도 누구나 이로운 일을 보면 좋아서 모여들고 이익이 없으면 저절로 떠나간다고 했다.

무릇 상인이라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일상용품은 가격이 싸지만 그 수요는 거대하고 이윤은 박하지만 하나둘 쌓이면 거액이 된다. 닝보상인은 작고도 세세한 이윤까지 따지기로 유명하다. 지금 중국에서 몇 전, 몇 푼 하며 소수점 이하의 이익까지 따지는 상인은 닝보상인뿐이라고 한다. 일례로 장화(張華)라는 이름의 닝보 출신 청년이 거둔 성공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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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교수·법학 khb@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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