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었다. 외환위기 직전 4년 동안의 국제수지 적자는 430억달러로 1990년대 중반의 외환보유고보다 두 배가 많았다. 외환보유고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막대한 외채를 들여와 외환보유고를 메워야 했으니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결국 원화가치는 한꺼번에 하락했다. 1998년 1월의 평균 환율은 1707원, 불과 3년 전과 비교해 두 배 이상으로 폭등했다. 이 과정에서 환율을 억지로 방어하려다 외환보유고가 고갈된 것이다.
예를 들어 환율이 800원일 때 10억달러를 팔았다가 환율이 1000원으로 올랐을 때 다시 산다면 8억달러밖에 살 수 없다. 원화 규모는 같은데 외환보유고는 2억달러가 순식간에 준 것이다. 이런 거래가 반복되면 외환보유고가 남아나겠는가. 외환을 해외로 도피시킨 것이 아니라, 환율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보유 외환이 눈 녹듯 없어진 것이다.
아직 우리는 철저하게 반성하지 않은 것 같다. 과거에는 이처럼 ‘환율상승’을 방어하다가 외환보유고를 소진했다면, 이제는 ‘환율하락’을 방어하느라 원화 자산을 소진, 국가 부채를 누적시키고 있다.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외환위기가 닥쳐오는 것이다.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사용해야 할 외국환평형기금은 거의 바닥났다. 대규모 국채를 발행해 환율방어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했지만, 이것으로는 모자라 스와프 거래를 통해 국민연금까지 끌어다 썼다.
심지어 도박성이 매우 강해 한순간에 거래액의 수십배 내지 수백배의 손실을 불러올 수 있는 NDF 거래(차액선물환거래)까지 동원했다. 노무현 정부 정책 당국의 무모함이 김영삼 정부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이래도 ‘제2의 외환위기’가 오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나는 1999년부터 외환보유고 과다누적이 불러올 경제적 해악을 경고해왔고, 계속 이 점을 강조했다. 외환보유고는 400억달러면 충분한 수준이라고 봤다. 그러나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거나 ‘미친 놈’ 취급을 받았다. 도저히 정책당국을 설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00년 1월 중순에는 ‘외환보유의 종류라도 다양화하라’고 촉구했지만, 정책 당국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할 것이고, 그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언명한 바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과다 외환보유의 심각성
현재 우리 경제는 외환보유고의 과다누적이 불러온 여러 가지 심각한 어려움과 손실을 겪고 있다.
첫째,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을 발행해야 한다. 그러나 외평채가 엄청나게 증가하는 바람에 이자부담이 만만치 않다. 2004년말 현재 외평채 발행잔액은 약 22조2000억원. 1998년에 비해 57배나 증가했고, 이자부담은 매년 9000억원에 이른다.
둘째, 외환보유고가 크게 늘었다는 것은 정책 당국이 외환을 사들였음을 의미한다. 정부는 이를 위해 국고채를 발행했는데, 발행잔액이 2004년말 123조원으로 1998년에 비해 20배 가까이 증가했다. 이 때문에 부담해야 할 이자만 매년 6조원이다. 물론 국고채가 모두 외환매입을 위해 발행된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외환을 사들이기 위해 발행됐다.
셋째, 외환을 사들였다는 것은 그만큼 통화공급이 증가했음을 의미하고, 증가한 통화를 환수하기 위해 통화안정증권(이하 통안증권)을 발행해야 했다. 실제 그 잔액은 143조원으로 1998년과 비교하면 30배가 넘는다. 그 이자는 매년 6조원을 상회한다. 이것이 모두 환율방어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 부분 외환보유고 급증에 따른 통화증발을 환수하기 위해 발행한 것이다.
이 세 분야에서만 해마다 13조원의 재정 혹은 금융 손실이 발생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8조원은 외환보유고 과다에 따른 기회손실로 보인다. 2004년말 현재 외환보유고는 1991억달러이고 이것을 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206조원에 달하므로, 내 추정이 그렇게 무리한 것은 아닐 것이다. 외환보유고는 미국 연방채권 등으로 보유해 일정한 이자수입이 있지만 외평기금은 계속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물론 적정한 규모의 외환은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추정한 적정 외환보유고 400억달러를 뺀 1600억달러는 과다한 것으로, 우리 돈으로 160조원에 달한다. 이에 따른 통안증권과 국고채의 이자손실만 따져도 6조원이 넘는다. 외평채 이자손실을 여기에 합하면 매년 7조원이 넘는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앞으로 10년 동안에 지불할 이자가 80조원이 넘는다. 국민경제는 그만큼 심각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
과도한 외환보유는 또 다른 피해를 부른다. 환율을 방어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고, 이에 따른 비용도 적지 않게 투입해야 한다. 추산컨대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환율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12조원 이상의 거래 손실이 발생했다. 이 같은 거래 손실은 정책 당국이 환율방어를 치열하게 전개했던 2000년 하반기부터 2001년 상반기까지, 그리고 2004년 중반에 주로 발생했다.
2001년의 손실은 환율을 2000년 연평균 1131원에서 2001년 연평균 1291원까지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2004년의 손실은 환율이 2003년말 1198원에서 2004년말 1044원으로 떨어지는 과정에서 그것을 막으려다가 발생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NDF에서 입은 손실만 2조원이 넘는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