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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화 원류 탐험기 ⑤

마녀사냥의 진원지 매사추세츠 세일럼

종교적 결벽, 정치적 갈등이 빚은 역사의 오욕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마녀사냥의 진원지 매사추세츠 세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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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의 진원지  매사추세츠 세일럼

세일럼의 첫 이주자 로저 코낸트의 동상.

2년 뒤인 1633년 세일럼 교회의 초빙을 받아들여 세일럼 교회 목사가 된 윌리엄스는 영국 국교회와 완전한 절연할 것과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를 요구하면서 매사추세츠 식민지 지도층을 비판했다. 윌리엄스는 또한 영국 왕이 인디언의 땅을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공여할 권리가 없음을 지적하고, 땅이 필요하면 인디언으로부터 직접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1635년 보스턴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윌리엄스의 이런 과격한 주장을 문제 삼아 세일럼 교회에 그의 추방을 요구했다. 때마침 보스턴 식민지와 인근의 마블헤드 지역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있던 세일럼 주민들은 분쟁 수습을 조건으로 윌리엄스의 추방 요구를 수용했다. 보스턴 지도층이 그를 체포해 런던으로 압송할 작정임을 알게 된 윌리엄스는 세일럼에서 도망쳐 인근의 인디언 부족에게 잠시 의탁해 지내다가 남쪽으로 더 내려가 프로비던스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것이 오늘날 로드아일랜드의 시작이다.

댄버스의 광풍(狂風)

1658년 영국에서 일단의 퀘이커교도들이 이주해오면서 세일럼은 다시 한 번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조지 폭스(George Fox·1624∼91)가 창설한 퀘이커교는 형식화한 종교의식의 폐지를 요구하고, 율법보다는 ‘내면의 빛’으로 임재하는 성령 체험을 강조했다. 종교적 태도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뉴잉글랜드 청교도 사회는 퀘이커교를 이단이라며 탄압했는데, 무엇보다도 위계적인 교회 조직을 부정하는 그들의 과격한 평등주의가 청교도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청교도 지도층은 이들을 식민지 밖으로 추방함으로써 침투를 막고자 애썼다. 그러나 내부에서 동참하는 신도가 늘어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보스턴 지도층은 추방된 퀘이커교도가 다시 식민지로 돌아오면 사형에 처한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런 박해에도 세일럼의 퀘이커 교도들은 굳건한 신앙으로 뉴햄프셔와 메인 주(州)까지 교세를 확장해 뉴잉글랜드 퀘이커교 운동의 중심이 됐다. 이런 반역의 역사적 체험이 철없는 몇몇 소녀의 일탈적 행동을 마녀사냥이라는 집단적 히스테리로 비화시킨 원인이 됐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첫 목적지로 삼은 세일럼의 마녀박물관은 세일럼 콤몬의 맞은편, 호손의 이름을 딴 호손 가로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박물관 앞에 얼굴이 길쭉한 형상의 고색창연한 청동상이 눈길을 끈다. 마녀사냥에 연루된 인물일 것이라는 짐작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뜻밖에 세일럼의 창설자 로저 코낸트의 동상이다. 1913년에 그를 기리는 협회가 헨리 킷선 (Henry A. Kitson)에게 제작을 의뢰해 봉헌한 것이다. 마녀사냥의 진앙지라는 세일럼에 대한 고정관념이 조각가 킷선의 상상력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아무튼 코낸트의 동상은 세일럼의 마녀소동이 미국인의 문화적 기억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표를 산 후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곧장 기념품 가게다. 가게는 온갖 종류의 마녀 형상과 마술 도구로 가득 차 있다. 그 치욕의 역사가 이제 세일럼의 가장 큰 관광자원으로 탈바꿈해 돈주머니 노릇을 하고 있었다. 돈벌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활용하는 탐욕스러운 자본의 논리가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가게를 지나 전시실로 들어서니 마녀와 마녀사냥의 역사적 변천사가 벽면을 채웠다. 이어지는 중앙의 큰 홀에서는 마녀사냥의 촉발에서 재판에 이른 과정을 입체화해 설명해주는 프로그램이 상설 운영되고 있었다.

세일럼 마녀사냥의 발원지는 엄밀히 말해 현재의 세일럼이 아니고 서쪽으로 5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댄버스다. 1692년에 댄버스는 ‘세일럼 빌리지’라고 불렸는데, 1637년경에 세일럼 사람들이 더 넓은 땅을 찾아 이주해 세운 곳이다.

도시 주변에 새로이 형성된 정착지는 자치권을 얻어 독자적인 체제로 발전해가는 것이 당시의 통례였다. 하지만 세일럼은 오랫동안 세일럼 빌리지에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무역으로 번성하던 세일럼과 농업을 주로 하는 세일럼 빌리지 사이에서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1689년 세일럼 빌리지의 요청이 마침내 받아들여져, 숙원이던 독자적 교회를 세우고 교구 목사를 새로 초빙할 수 있게 되면서 갈등이 완화되는 듯했으나, 초빙돼온 담임목사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의 고압적인 태도와 그의 처우 문제로 의견이 갈리면서 세일럼 빌리지는 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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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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