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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 & 김문수 경기도지사

“인간적 매력으로 이어온 끈끈한 유대… ‘우회전’ 했기에 더 열심히 살아야”

  • 권주리애 전기작가, 크리에이티브 이브 대표 evejurie@hanmail.net

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 & 김문수 경기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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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에 떨어진 것 같은 고통’

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 & 김문수 경기도지사

대학시절의 김문수 지사(맨 오른쪽),

안병직 교수는 1987년, 2년여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왔다. 1981년부터 일본 도쿄대에서 강의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했는데, 1980년 가을 대학에서 쫓겨난 동료교수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미뤄오다 1984년에 해직교수 대부분이 복직되자 일본으로 떠났던 것.

안 교수는 1970년대 말, 한국의 자본주의가 머지않아 붕괴될 것이라 예측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경제지표가 점점 좋게 나타났다. 안 교수 자신을 비롯한 사회주의 학자들이 뭔가 잘못 인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일본으로 떠났다. 2년여 일본에서 머물며 러시아, 북한, 미국, 유럽의 여러 학자와 교류한 안 교수는 곧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대세일 거라고 생각을 바꾼다.

“현실을 원망할 게 아니라, 내 시각을 바꿔야 했어요. 특히 소련·중국·북한 연구자들을 만나면서 ‘사회주의는 전혀 전망이 없다’고 깨달았죠.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니 20세기 후반은 자본주의의 세기였어요. 한국의 힘은 대단해요. 세계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국가 중에 새로이 부상하는 나라가 한국이었어요. 한국과 함께 중국, 싱가포르, 대만 등 신흥공업국이 자본주의를 끌고 갈 국가인데, 이들은 선진국이 수세기에 걸쳐서 축적한 자본과 기술을 토대로 발전하기 때문에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죠.”

이것이 안 교수가 귀국해서 주창한 ‘중진 자본주의론’의 요체다. 안 교수는 우리나라 자본주의를 제대로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더 깊이 연구하는 한편, 그동안 잘못 인식한 사회주의에 대해 반성하며 제자들에게 바뀐 자신의 견해를 알렸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이른바 ‘사상 전환’을 한 것이다. 안 교수는 사회주의에 대한 잘못된 예측으로 많은 학생을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으로 이끈 것을 참회했다.



“지옥의 불길이 타는 연옥에 떨어진 것 같은 고통을 맛봤어요. 저 혼자만의 잘못이면 그냥 넘어가겠는데, 많은 사람을 잘못 지도했고 그를 바로잡아야 하니까요. 저는 죄인이에요. 좌파의 오류를 교정하고, 신자유주의사상을 수용하는 뉴라이트 운동에 동참한 것도 사상의 힘이 얼마나 큰 지 알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안 교수는 김문수를 불렀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는, 노동현장에 뛰어들어 노조위원장까지 한 그가 신화적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안 교수에게는 자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운 제자였다.

자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운 제자

“가장 먼저 김문수를 불렀어요. 저뿐만 아니라, 집사람도 김문수를 아껴요. 성신여고 교사이던 집사람이 김문수에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주기도 했죠. 막 교도소에서 나온 그에게 ‘한국 자본주의는 보통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창창하다. 우리는 1970년대 말에 자본주의가 망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봐라. 점점 더 성장하고 있지 않으냐. 이제 사회주의는 아니다. 사회주의는 망했다. 앞으로 노동자들은 우리 지식인이 노동과 자본을 공급하면서 자신들을 이끌어가길 원치 않고, 그들 스스로 지위향상을 해서 독립할 것이다. 그러니 노동운동을 그만두라’고 했어요. 성품이 온순한 김문수는 그저 듣기만 하더니 매우 실망한 기색으로 ‘알겠다’며 갔어요.”

김문수는 안 교수의 사상 전환을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께서 그동안의 우리 시각이 틀렸다면서 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대세라는 거예요. 도쿄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공부하셔서 심경에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세계관(觀)을 정립하신 것 같았어요. 저같이 현장에서 운동하는 사람과 학자가 인식하는 건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교수님 말씀은 새겨들었죠.”

사실 5·3 인천사태로 2년 넘게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휴머니즘도 상당히 냉정을 찾았다. 사기꾼, 조폭, 살인자 등 웬만한 ‘간 큰 남자’는 다 만나면서, 순진한 생각만으로 사회를 변혁시키기는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안 교수의 사상 전환이 그에게 점점 더 와 닿고, 세상이 변하고 있으니 노동운동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무렵, 학생운동 선배인 장기표와 함께 안 교수를 찾아갔다. 민중당 창당에 대해 자문하기 위해서였는데, 안 교수가 그에게 간곡하게 당부한 데 대한 나름의 대답이었다. 그는 노동운동이 투쟁 일변도로 치우치지 않고,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정당을 만들어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1992년 총선에 민중당 전국구 후보로 출마한다. 하지만 현실정치의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그해 권인숙(현 명지대 교수)씨가 미국 유학을 떠나며 그에게 노동인권회관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노동인권회관 소장을 하면서 그는 서울대 경영학과에 재입학, 마흔셋 늦깎이 대학생으로 바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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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주리애 전기작가, 크리에이티브 이브 대표 evejuri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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