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세종의 실명 원인으로 지목된 질환은 과로로 인한 소갈증, 즉 당뇨병이었다. 당뇨병이 심해지면 합병증으로 망막병증이 생기고 결국 실명에 이르기 때문에 이 같은 유추가 가능하다. 하지만 ‘세종실록’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세종의 눈을 멀게 한 정확한 병명은 강직성 척추염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강직성 척추염은 척추관절뼈의 인대와 건(힘줄)이 유연성을 잃고 딱딱하게 굳으면서 운동성이 제한된다고 해서 붙여진 병명. 류머티즘과 유사하며 보통 청년기 남성에게 발병하는 자가면역성 질병이자 인체의 조직과 기관, 조직과 조직 사이를 이어주는 결합조직에 잘 생기는 전신성 염증 질환이다. 대부분 척추관절을 중심으로 질환이 나타나지만 다른 결합조직에 침범하기도 한다. 눈에 공막염, 포도막염, 홍채염을 유발하며 이외에 근막통증증후군, 천장관절염(고관절염과 유사)도 생긴다. 강직성 척추염의 말기에는 드물지만 마미증후군(요통과 감각이상, 운동마비, 대소변 구별 못함)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의 저림, 무력증, 발기불능, 요실금 등을 호소하기도 한다.
‘세종실록’의 증거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앓았던 질병명이 기록되어 있다. 풍질, 풍습, 안질, 소갈, 임질, 종기가 대표적인 병명이다. 그중 풍질 풍습은 그가 가장 고통스러워한 질환이다. 풍질은 언뜻 중풍과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세종 24년의 기록에 따르면 건습(蹇濕)으로 표현했다. 건은 절름발이를 뜻하고 습은 관절염의 증후를 가리킨다. 일종의 고관절염에 가깝다. 동의보감에서 풍습은 “뼈마디가 안타깝게 아프거나 오그라들면서 어루만지면 몹시 아프다” 라고 정의했는데 양방으로 말하면 류머티스 관절염과 유사하다.
세종 13년 8월18일 왕은 김종서를 불러들여 자신의 풍질에 대해 설명한다.
“내가 풍질을 앓은 까닭을 경은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저번에 경복궁에 있을 적에 이층 창문 앞에서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두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 아팠다. 이튿날 회복되었다가 4,5일을 지나서 또 찌르는 듯이 아프고 지금까지 끊이지 아니하여 드디어 묵은 병이 되었다. 그 아픔으로 30세 전에 매던 띠가 모두 헐거워졌다.”
이 증상은 반복해 나타나므로 일시적인 신경통과 구별되며 강직성 척추염의 근막증후군에 해당한다. 세종 17년, 그는 전형적인 강직성 척추염의 증상을 호소하는데 이 때문에 중국에서 온 사신의 전별연에 불참한다.
“내가 궁중에 있을 때는 조금 불편하기는 하나 예(禮)는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등이 굳고 꼿꼿해 굽혔다 폈다 하기가 어렵다.”
세종 21년에 이르러서는 “내가 비록 앓는 병은 없으나 젊을 때부터 근력이 미약하고 또 풍질(蹇濕)로 인한 질환으로 서무를 보기 힘들다”라고 토로하는데 건(蹇)이 절름발이인 점을 감안하면 강직성 척추염의 후유증으로 천장 관절염(고관절염과 유사)이 발병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은 그해 7월 들어 강직성 척추염의 후유증으로 드디어 눈병이 나게 되고, 그 후부터는 오래 문서를 보는 것을 힘겨워한다. 세종 24년에는 “온정(溫井)에서 목욕을 한 이후 눈병이 더욱 심해졌다”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후 이천과 온양 등지의 온천에서 병을 치료했지만 안질은 더욱 심해지고 눈은 점점 어두워져간다.
세종이 앓은 질병 중에서 안질을 유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질환은 소갈증이다. 세종 21년 “소갈병을 앓아서 하루에 마시는 물이 어찌 한 동이만 되겠는가” 라고 말한다. 소갈증은 현대적 병명으로 당뇨병이다. 당뇨병으로 유발되는 안질은 신생혈관 망막증. 이 질환은 통증 없이 눈이 머는 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안질과는 다르다. 강직성 척추염으로 생기는 안질 중에는 공막염과 포도막염, 홍채염이 있는데 이들 질병은 통증을 동반한다.
최근 종영된 드라마 ‘대왕 세종’.
공막은 전체 안구의 외부를 구성하며 각막이 1/6, 공막이 5/6를 차지한다. 포도막은 각막과 공막의 하층인 혈관층. 온천의 물은 대개 유황성분이 짙으며 맵고 더운 기운이 강하다. 특히 온양의 초수(椒水)는 천초 맛이 난다는 기록이 있다. 천초는 추어탕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넣는 향신료로 그 맛이 맵다. 매운맛은 각막과 공막을 자극하며 말초신경을 흥분하게 한다. 세종이 온천욕 후 안질이 더욱 심해졌다고 호소하는 것은 혈관층을 차지하고 있는 포도막이나 홍채가 아니라 외부층인 공막염일 가능성이 크다.
강직성 척추염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유전성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의 선대 왕이나 아들이 이 병을 앓은 기록은 없다.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확실한 병리기전은 자가면역성 질환이라는 것. 면역은 자기를 지키는 힘이다. 크게 분류하면 외부를 지키는 국방부 파트와 내부를 감시하는 경찰 파트로 나눠진다. 외부의 공격세력은 나와 다른 남이기 때문에 피아(彼我)가 쉽게 구별된다. 하지만 내부의 면역은 다르다. 고정간첩처럼 원래 자기였지만 나를 배신한 세포이기 때문에 평정심이 있을 때만 명확한 구별이 가능하다. 경찰 파트의 면역은 자기의 내부가 혼란스럽고 약해지면 자기를 배반한 세포를 발견하기 힘들어진다.
이런 혼란을 틈타 생기는 질환이 암이나 자가면역성 질환이다. 자기를 보호해야 할 면역이 오히려 자기를 공격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셈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 대표가 요즘말로 스트레스다. 세종실록(세종 7년)에도 이와 관련된 언급이 있다. 중국 의원 하양은 세종의 병을 진찰한 후 “전하의 병환은 상부는 성하고 하부는 허한 것으로 이는 정신적으로 과로한 탓입니다” 라고 말했다.
한방에선 고래로 화(火)를 없애는 처방으로 향사칠기탕과 양격도담탕을 쓰는데 잘 알다시피 세종은 태종의 삼남으로 태어나 왕위를 계승했다. 외부적으로는 평온한 양위과정이었지만 내부적인 압박감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았다. 두 형을 제치고 왕이 된 만큼 능력을 보이고자 엄청난 격무를 이겨내야만 했다. 하루 3~4시간만 자고 윤대, 경연, 서무를 계속한 기록이 실록 곳곳에 보인다. 피로는 면역을 약화시켰고 스트레스는 면역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자가면역성 질환을 유발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시력을 잃었다.
직접 사인(死因)은 중풍
일반인은 종기와 임질이 세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추측한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의 종기는 매년 발병한다. 특히 세상을 떠나는 세종 32년 세종이 아닌 세자의 종기가 심해 임금 부자가 모두 중국 사신을 맞지 못하는 결례를 범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아마 세종의 종기, 임질 사인설은 이런 기록들이 만든 오해로 보인다. 실록에서 말하는 임질은 현대적 질환인 감염성 성병과는 다르다. 동의보감에서 임병은 “심신의 기운이 하초에 몰려 오줌길이 꽉 막혀 까무러치거나, 찔끔찔끔 그치지 않고 나온다”고 풀이한다. 이들 증상은 신장과 방광이 허약해서 오는 질환으로 오히려 강직성 척추염에서 나타나는 마미증후군에 가깝다.
세종 32년의 기록은 그의 직접적 사인을 짐작케 한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도 조금 가벼워졌다. 그러나 기거할 때면 부축해야 하고,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있어도 말이 떠오르지 않고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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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증상은 언어건삽증(혀가 굳어 말을 못하는 증상)과 ‘심허(心虛)’ 증상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심혈관계 질환에 의한 중풍 전조증에 가깝다. 이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점으로 미뤄보면 세종의 직접적인 사인은 중풍일 가능성이 크다.
“한 사람의 눈먼 자가 만인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은 너무나 정확한 표현인지 모른다. 촛불처럼 자기 내부의 분노와 불안을 모두 태워 세상을 밝힌 세종대왕. 육신은 사그라졌지만 우리 민족 만인의 문맹을 깨쳐 밝히게 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