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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한국의 명장

악기와 함께한 60년 나라의 음악을 완성하다

편종·편경 복원한 악기장 김현곤

  • 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악기와 함께한 60년 나라의 음악을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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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근무 시절 저는 ‘전라도 하와이’니 ‘개똥쇠’니 이런 소리 듣지 않으려고, 또 악기 일이 좋아서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만큼 자존심과 자신감이 셌던 거지요. 그런데 망하니 자존심이 상해 그만 낙향하고 말았습니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능력과 기회가 있었건만, 그는 자존심 하나 때문에 고향에 돌아와 동네의 한 집에서 하숙을 했다.

“고시 공부를 하기로 하고 방에 처박혀 책만 봤지요. 1년 반 동안 그 여자의 일기 같은 편지를 받으며, 불면증에 시달리며…….”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하숙집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난다. 사랑을 피해 은거한 그 하숙집 딸이 바로 아내 임춘자다. 윤갑숙 씨를 소개해준 친구가 이번에는 돈을 크게 벌어 종로에 큰 악기점을 차려놓고 서울로 그를 불렀다. 종로로 돌아온 그는 ‘유한악기’라는 이름으로 다시 악기점을 운영하게 된다.

악기점을 하다 결혼한 그는 이번에는 악기 제작에 나섰다. 새로운 악기를 만들거나 악기를 개량하는 일은 늘 그의 열정을 자극했다. 1960년대 중반 교재용 악기로 실로폰이나 탬버린, 리코더, 드럼, 비브라폰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전문가용은 아니지만 그는 우리나라 악기 제작의 제 1세대다. 돈을 번 적도 있지만 수출용 악기를 개발하느라 수십 명이 일하는 공장을 무리하게 운영하다 망하고, 멜로디언을 제작한다고 집 한 채 값을 날리기도 했다. 악기 제작 역시 다른 제조업처럼 모형을 개발한 다음 설비가 필요한 사업이라 돈이 많이 든다.



“제가 기독교에 몸담기 전에는 좀 괴팍한 데가 있었습니다. 사업을 하다 사기당한 적도 있지만 조금만 비위에 거슬려도 못 견뎠죠. 가정이나 돈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감정이나 흥미에 따라 일하고 사업을 정리하곤 했습니다.”

기독교와 국악기를 만나다

악기와 함께한 60년 나라의 음악을 완성하다

옥돌은 잡티 없이 깨끗해야 소리도 맑다. 그래서 좋은 옥돌을 찾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그에겐 타고난 방랑벽과 꿈을 좇는 열정, 그 꿈을 위해 돈과 정력을 퍼붓는 낭비벽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열정을 낭비한 사람들의 작품이라 했던가. 돈 대신 꿈을 향해 달려온 그 시절의 시행착오는 훗날 국악기를 복원하고 개량하는 데 밑받침이 되었으니 세상에 진짜 낭비란 없는 것 같다.

질풍노도로 살아온 그는 40대 말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는다. 바로 기독교를 만난 일이다. 악기점 하라고 자본을 댔던 그 친구가 이번에는 그를 기독교로 이끌었다.

“그 친구가 사업에 실패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더니 새벽부터 저를 찾아와 교회에 끌고 갔어요. 몇 번 끌려 다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저의 자아가 깨져버렸습니다.”

악기에 대한 집착과 자기 고집으로 주변 사람은 돌아보지 않고 살아왔던 그의 자아가 깨지는 순간, 그는 새로 태어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푸근한 성격으로 변해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됐다. 교회는 또 다른 선물도 가져다주었다. 바로 한만영 교수(서울대 국악과)와 국악원 이승렬 악기장 등 국악인들을 만난 것이다.

“교회에서 인사하고 보니 한 교수는 미원악기 시절 저를 봤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국악원 원장이 되면서 저를 국악원으로 불러 옛 악기를 보여주어 그때 처음 편종 편경을 봤네요.”

이런 인연으로 국악기에 입문하게 된 그가 처음 만든 국악기는 금속악기 방향이다.

“방향도 유율 타악기인데 국악원에서 제게 만들 수 있겠느냐고 해요. 당시 제가 실로폰이나 마림바, 차임 같은 서양 타악기를 하루 수십 개씩 조율하던 시절이었어요. 보니 원리가 똑같아요. 그래서 당장 만들 수 있다고 했지요.”

1984년 방향을 복원할 때 그는 정말로 쉽게 만들어냈다. 국악기를 만든 것은 이때가 처음이지만 그는 이미 신향사 시절 국악인 이병우 선생에게 아들처럼 사랑받으며 이 선생의 연줄로 거문고 명인 신쾌동과 뉴욕 출신 국악학자 헤이먼을 만나 연주할 때 자주 따라다닌 적이 있다.

“미국인이 갓 쓰고 우리 음악에 심취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고, 또 신쾌동 부자의 가야금과 해금 연주에 가슴이 울렸지만 양악기에 빠져 있던 때라 국악과 곧장 인연이 닿지는 못했지요.”

방향 복원에 성공한 그는 1985년 국악원의 국악기 개량사업에도 참가했다. 색소폰처럼 키(key)를 붙여 음역을 넓힌 태평소를 선보였지만 큰 각광은 받지 못했다.

“우리 악기는 음정이 정확히 정해져 있지 않고 악기도 표준화가 안 돼 있어 악기나 주법에 따라 음정이 조금씩 다릅니다. 연주자에 따라 색다른 맛이 나서 명인의 이름을 붙인 누구의 제(制·바디), 누구 류(流)가 발달할 정도로 가변성이 많다고 할까요? 그게 국악의 매력이지만 개량하기가 쉽지 않죠.”

음정이 조금씩 다른데도 멋진 병창과 합주를 이루어내는 것은 관악기일 경우 부는 힘이나 흔들어주는 농음으로, 현악기는 누르는 위치를 옮겨주거나 농현으로 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악기가 동시에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시간차를 두고 흩어지듯 음을 맞춰가는 것도 우리 음악 특유의 기법으로 현대 음악가들이 감탄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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