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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봄의 꽃사태와 개심사의 연못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번뇌 단박에 끊는 ‘참된 지혜’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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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開心)과 심검(尋劍)

예전에는 ‘세심동 개심사(洗心洞 開心寺)’라고 해서체로 소박하고 조촐하게 쓰인 자연석만으로 충분했다. 이제는 큼직한 일주문이 들어섰다. 계곡을 따라 오솔길이 이어지고 그 길 끝에 개심사가 있었다.

이런 길을, 보행 편의를 위해 함부로 넓히거나 고쳐서는 곤란하다. 봄의 개심사! 왕벚꽃나무의 장관이다. 백색, 연분홍, 진분홍, 옥색, 적색 등 5가지 색의 왕벚꽃나무가 꽃을 피운다. 다른 지역보다 개화 시기가 다소 늦기에 대개는 4월 하순이 절정이고 5월 초라 해도 그 잔영을 볼 수 있다. 여느 벚꽃이 홑잎 하나씩 나뭇가지에 따로따로 붙어있다면 개심사 왕벚꽃은 겹으로 된 꽃잎이어서 여러 송이가 묶여 소담스러운 꽃다발처럼 느껴진다. 이런 운치가 훼손되지 않는 개발이어야 하는 것이다. 개심사의 연못에는 ‘경지(鏡池)’라고 새겨진 자연석이 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맑은 거울과 같은 연못이라는 뜻이다. 그런 마음이 가볍게 일렁거리는 개심사여야 한다.

몇몇 건축가는 개심사에 대한 지나친 찬사에 대해 경계한다. 이를테면 ‘소박한 곡선의 미’ 같은 표현은 건축 문외한의 말이라는 얘기다. 깊은 산속에 사찰을 짓다보면 가까운 곳에서 목재와 석재를 구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굽은 나무와 돌을 정교하게 다듬고 이어서 지을 수밖에 없으니, 우선 그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소박한 미를 추구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건축적 한계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얻어진 결실이라는 점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앞뒤의 우선순위가 바뀌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리해 귀결된 곡선이 개심사의 대표적인 인상임은 틀림없다.

서현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는 ‘동아일보’ 1999년 2월 9일자 기고문에서, 서울시의 무분별한 발전과 끔찍할 정도로 무질서한 간판들을 비판한 후, 약간은 풍자적으로 이렇게 썼다. “자동차의 소음, 간판의 소음이 가득한 도시를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다. 날이 풀리고 꽃이 피면 이 도시를 떠나 교외로 나가자. 때로는 문화유산도 답사하러 가자. 그 무섭다는 사람 떼가 하나가 돼 충남 서산의 개심사에 가보기도 할 일이다. 개심사의 안양루 현판을 보는 건축가의 심정은 착잡하다. 쩌렁쩌렁한 현판은 건물을 내리누르고 건축가의 마음도 내리누른다. 참을 수 없는 무거움에 건축가의 가슴은 무너져 내린다.”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관점에 동의하지만, 그러나 개심사 현판이 대도시의 조잡하고 키치적이며 남을 압도하는 간판과 같은 맥락에서 비판할만한 것인지는 의아하다. 해강 김규진이 대자 전서로 쓴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 현판은, 단순히 안양루 이마에 큼직하게 매달려 있는 상태만으로 말할 수 없는 흐름이 있다. 산 아래에서부터 천, 천, 히 걸어 올라가는 흐름 말이다.

봄의 꽃과 여름의 숲과 가을의 낙엽과 겨울의 눈이 상왕산 기슭을 가득 채운다. 절집에 급한 용무가 있지 않은 한,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어떤 이유로든 천, 천, 히 걷게 돼 있다. 꽃과 나무들, 그 숲 사이로 걷고 또 걷다보면 흡사 새들의 집처럼 상왕산 품 안에 단아하게 깃든 개심사에 이르게 된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연못을 거쳐 안양루로 오른다. 그러다 현판을 보게 되면, 압도적인 크기 때문에 위압감을 느끼기보다는 단호하고 단단한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됐음을 알게 된다.

황소를 닮은 시인 문태준이 개심사에 와서 시 하나를 얻었다. ‘빈집의 약속’이다. 그 앞 구절을 읽어본다.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했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오호라 ‘심검(尋劒)’이라! 온갖 망상과 잡념과 번뇌를 단번에 끊어버리는 참된 지혜와 진리, 곧 반야의 검을 심검이라 한다. 문태준의 시를 한번 완상하고, 개심사 경내 심검당(尋劒堂) 현판을 올려다보고, 해강 김규진의 장쾌한 글씨까지 한 번 더 둘러본 후, 개심사 마당에 서서 배롱나무와 그 아래 연못까지 거슬러서 다 복기해 살펴보고 나면 이 깊은 산속의 심검을 잠시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개심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봄꽃 구경하고 산책하기 딱 좋은 곳이지만 구도의 길을 가는 분에게는 세속과 절연해 심검하는 곳이니, 해강의 현판이 그토록 장대하고 강렬한 까닭을 그제야 알게 된다. 연못 속의 연꽃은 아직 철이 아니지만 말이다.

신동아 2014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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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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