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賊 화형식
‘부총리 위 부대표’ ‘왕수석’으로 통하던 그는 “수석부대표는 원내대표와 당 소속 의원들의 명령에 움직이는 ‘하수인’에 불과하다. 당의 처지를 생각해 진흙탕 속으로 기어들어가야 하는 나쁜 직분이기도 했다. 때때로 늑대처럼 사납고 여우처럼 교활해야 했다”며 이날 조용히 자리를 떴다.
2월 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다시 만난 김 의원은 “1월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당뇨 전 단계에다 최고혈압이 1년 만에 20mmHg 높아져 고혈압 약을 먹게 됐다. 워낙 일이 많다보니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 ‘협상의 첨병’ 자리를 29개월 만에 내놓았는데.
“박근혜 정부 1년차 때 정부 조직, 인사와 관련해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정권 1년차니까 일종의 ‘허니문 기간’이었다. 하지만 2년차가 되니 야당은 정권 탈환을 위해 여러 주장을 했고, 우리도 본격적으로 이에 맞서야 했다. 정책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국정원 댓글 사건,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출 논란, 지방선거, 세월호 참사가 이어지며 정국은 거센 격랑 속으로 휩쓸려갔다.”
▼ 국정원 댓글 사건이 불거졌을 때 김 의원은 국정원개혁 특별위원회 여당 간사였다.
“본격적으로 ‘협상의 첨병’이 된 게 그때다. 무척 힘들었다. 보수세력은 ‘야권이 실체 없는 사건으로 국정원을 무력화하려 한다’고, 야당은 ‘개입이 드러났으니 국정원 전체를 개혁해야 한다’고 나왔다. 간극은 컸고 협상은 지난했다. 보수세력은 (당 지도부인) 황우여, 최경환, 나를 ‘3적(賊)’이라며 화형식도 했다. 현실적으로 보수단체를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긴 어려웠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독일 연방헌법수호청(BfV), 이스라엘 모사드 등 선진 정보기관을 방문해 살펴보고 합리적인 안을 만들었다. ‘수사 기능을 없애자’는 주장은 막아내면서 동시에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고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방첩수사 기능은 유지하도록 했다. 결국 국정원법을 개정했고, 국정원 개혁을 통해 이 문제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때 수사 기능을 없애자는 논리에 밀렸다면 ‘이석기 사건’은 못 밝혀냈을 거다.”
김 의원을 만난 지 이틀 뒤인 2월 11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국정원 댓글 사건 관련 항소심에서 공직선거법위반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았다. 김 의원은 댓글 사건에 대해 “1심 무죄, 2심 유죄가 나온 것처럼 댓글 사건은 보는 시각에 따라 오해받을 만한 사안이었다”며 “원 전 원장의 행위는 법적 판단을 받으면 된다. 국정원 개혁을 통해 앞으로 이러한 정치 개입 소지를 없앤 데 의의가 있다”고 자평했다.
“지난해 2월 초 국정원법 협상을 마무리하고, 6·4지방선거 공천 작업에 들어갔다. 그때 우리 당은 전면적 상향식 공천을 위해 체계를 잡고 있었는데, 전국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수천 명의 후보가 하루 평균 100여 건의 이의신청을 냈다. 신청자들은 4년을 기다려 공천을 받으려 했는데 당이 이들을 내친 셈이니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이의 심사를 했다. 5월 초 공천 작업이 끝났고, 5월 3일 원내수석부대표에 임명됐다.”
“세월호 ‘청와대 지침’ 없었다”
▼ 공천 작업이 한창일 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그때 지방선거 전략을 맡고 있어서 이 사건이 일으킬 파장과 대책 등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당장 국정조사와 세월호특별법 제정 요구가 봇물을 이뤘다. 야당과 일부 유가족은 한 편이 돼 정부·여당을 몰아붙이고, 세월호 참사를 정치투쟁화해 대통령을 공격했다.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대통령의 7시간’을 물고 늘어졌다. 10여 년 정치판에 있었지만 그땐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 착하고 어린 학생들이 수장된 사고, 국민의 공분을 일으킬 사건이라 더욱 그랬다. 야당과 시민사회의 이러한 전략은 오늘날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데 주효했다.”
▼ 해양경찰의 구조 소홀,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 직원들의 직무유기 등 공직자들이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선장과 선원의 무책임한 근무, 유병언 씨 일가족을 비롯한 선사(船社)의 부도덕, 공동체에 대한 인식 부재, 안전 무시, 공직자 근무태만 등 온갖 사회 병리현상이 합쳐져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었다. 야당은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이 문제에 접근해 압박했다. 여당은 내놓을 카드도 없었다. 물러서면서 들어줄 상황이었다.”